말씀: 출애굽기 24:1-8
요절: 출애굽기 24:8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지상의 유일한 민족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믿고, 순종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19장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참으로 내 목소리에
순종하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내게 모든 백성들보다
뛰어난 특별한 보배가 되리니 이는 온 땅이 내 것이기
때문이라. 또 너희는 내게 제사장 왕국이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너는 이 말들을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19:5-6).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흥분하고 감격해 했는지 우리는 생생하게 보았습니다. [온
백성이 함께 응답하여 이르되,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다
우리가 행하리이다, 하니 모세가 백성의 말을 [주]께 전하매](출19:8).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는
국가간의 조약이나 회사 간의 협약, 계약보다 훨씬 더
강력한 그런 상호 언약이었습니다.
오늘 24장 말씀은 구약의
변화산상의 사건이라 할만한 독특한 장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가셨듯이,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 나답,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장로 70명을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이 산에서
성육신하시기 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입니다. [또 그분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장로 칠십 명과 함께 [주]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1).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주님께서 “이리로 올라 오라”는
명령이 없다면 아무도 주님께로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주님께서 성도들을 부르시는 이 음성을 세
번이나 들을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통치자의 눈앞에서
네가 낮아지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잠25:7). 이는
구약 성도들의 부르심입니다. 첫 열매들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바라보니, 보라, 하늘에 문이 열려 있더라. 전에
내가 들은 첫번째 음성 곧 나팔 소리와 같이 내게
이야기하던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반드시
일어날 것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더라.](계4:1).
이것은 신약 성도들을 부르시는 수확입니다. [이 두
대언자가 하늘로부터 자기들에게 큰 음성이 나서, 이리로
올라오라,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구름 속에서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이 그들을 바라보더라.](계11:12).
이것은 환란 성도들을 부르시는 이삭 줍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리로 올라 오라”는 음성이 있을 때 우리는
하던 일을 모두 놓고 저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 가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비행기나 우주선을
타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올라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도 저 하늘의 시온
산에 올라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모세와 그
일행을 시온 산으로 부르셨지만 우리는 저 하늘의 시온
산으로 부르실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시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과
무수한 천사들의 무리와](히12:22).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시며 문이십니다. 출애굽기는
신약의 성도들에게 넘치는 예표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행위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 알아야
합니다. 부르심의 상을 추구해야합니다. 부르신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의 지각(知覺)의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하며](엡1:18)라고
기도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빌3:14)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2절입니다. [모세 혼자만
[주]에게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 하시니라.](2).
하나님이 모세 한 명만 주에게 가까이 나오게 하신 것은
모세가 다른 사람들보다 탁월한 능력이나 업적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택하심에 따른 하나님의 목적은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서게 됩니다(롬9:11).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세상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장차 오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제시 해
주신 것입니다. 모세 혼자만 하나님께 가까이 오도록 부르신
것은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모든 사람을 가까이 나아오도록
부르시기 위한 첫 조치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리심을 받으사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3:18). 이는 우리
구주께서 우리를 대신하셔서 죽으심으로 결국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 하신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모세에
대해 시기와 질투를 느낄 필요가 없으며, 모세만 부르신
하나님에 대해 섭섭해 하거나 입이 삐쭉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3절입니다. [이에 모세가
와서 [주]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법도를 백성에게 고하매 온
백성이 한 목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주]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행하리이다, 하더라.](3).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때까지 율법으로 의롭게 될 육체가 없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며, 진토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능히 지킬 수 있을 줄로 생각했고, 한번
정한 결심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만 같이 소리쳤습니다.
이미 19:8에서 크게 한번 외쳤고, 또 한번 외칩니다. 신명기
5:27에서도 이들은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 [주] 우리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주]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말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신5:27)라고 큰 소리를 칩니다.
이들이 주님의 말씀을 행하기 위해서는 “우리가”란
주어를 강조하는 대신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간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해 놓고
못하는 것보다 아예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지 늘
입을 꽉 다물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도 “아멘!”으로
화답하지 않습니다. 아멘은 “그렇게 될지어다.”란
뜻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마지막에 “아멘”이라고
합니다. 기도한 내용이 “그대로 그렇게 될지어다.”란
말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아멘 하는 것은 “말씀하신 대로
될지어다”란 말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매우
자주 사용하신 표현입니다. '진실로'(verily) 또는 '진실로
진실로'(Verily, verily)란 말이 바로 아멘이란 뜻입니다. 아멘은
단언할 때 씁니다. “진실로”라고 시작하신 주님의
말씀은 다른 말씀들보다 훨씬 더 강도가 강하며,
단정적입니다. 아멘은 동의할 때 씁니다. 성경을 읽을 때,
기도할 때, 찬송할 때, 설교를 들을 때 여러분은 “아멘”하는
것은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설교시간 내내 단 한마디도
아멘! 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 설교에 전혀 동의할 수 없소!”란
무언의 표시이며, 항의입니다. 반면에 뜻도 없이 아무 때나
“아멘!”을 연발하며 구호처럼 외치는 것은 망령된
행실입니다. 아멘은 청원할 때 씁니다. 기도를 다하고 마칠
때 우리는 “아멘” 함으로써 하나나님께 이렇게 되도록
청원합니다!란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아멘”이십니다.
주님은 모든 설교를 단순하고도 확실하게 단정적으로
하셨습니다. 주님의 설교 가운데, “내 생각에는...”, “아마”,
“...일지도 모른다.”는 표현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혹시,
만약에, 아마...”와 같은 표현대신에 주님이 즐겨 하신
말씀은 “진실로...진실로”입니다. ....기록되었으되,
성경이 말하기를, 읽어보지 못하였느냐?입니다.
이스라엘은 “[주]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행하리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선한 고백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가장 위대한
본은 노아입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창6:22). [노아가
[주]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더라.](창7:5).
노아는 어떻게 주께서 명령하신대로 다 행할 수 있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그 해답을 말해 줍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께로 경고를
받으매 두려움으로 움직여...](히11:7). 믿음으로 말씀을
받고, 말씀에 두려워 떨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우리
역시 주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으로 받고, 그 말씀에 두려워
떨 때 주님의 은혜를 받습니다(사66:2, 66:5). 순종은 말씀에
대한 믿음과 말씀을 두려워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4절입니다. [모세가 [주]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산 밑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4).
모세는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모세 오경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모세가 기록한 것입니다. 흔히 문서 이론이나
본문 비평이나 고등 비평이니 하면서 모세의 저작설을
의심하거나 부인하는 신학 조류는 의심할 바 없이
마귀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모세 오경은 모세가 주의 모든
말씀을 받아 기록한 것이지 신화나 전설이나 당시 예언
문학을 집대성하여 편집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주의 모든 말씀을
기록했다고 말했는데, 이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증하신 공인된 저자입니다. 주님은 출애굽기를
모세의 책(막12:26)이라 하셨으며, 모세의 율법(눅2:2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아침 일어나 산 밑에 제단을 쌓은
일은 20:24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너는
내게 흙으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과 양과 소를 희생물로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록한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출20:24). 모세는
친히 자신이 앞장서서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모세는 신실한
종이었습니다.
5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 헌물을 드리게 하고 소들을
화평 헌물로 삼아 [주]께 희생물로 드리게 하니라.](5).
아직은 레위 지파를 따로 제사장직으로 성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에게 그 직무를
맡겼습니다. 모세는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드리게 했는데,
번제 헌물은 태워서 드리는 것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진노의 불, 지옥 불의 심판을 받으시는 주님을 예표하며,
화평 헌물은 우리의 화평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헌물입니다. 번제 헌물이 없이 화평 헌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십자가 없이 하나님과의 화평이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원수된 죄인들을 대신해서 번제 헌물이 되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화평을 전해 주셨는데 이로써 주님은 화해 헌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사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려 하심이요,](롬5:25).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화해
헌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화해의 술을 마시지만 우리는 화해의 피를
믿습니다. 주님이 화해 헌물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 우리의 죄들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라/.](요일2:2).
하나님이 주신 화해 헌물을 거부하고 스스로 화해 헌물을
만들겠다고 한다면 그는 하나님과 더욱 원수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신 것이라.](요일4:10).
우리가 마음 속에 화평(평화, 평안, 평강)을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보다 강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성 회복이
필수적입니다. 하나님과 친구가 되고, 부모 자식의 관계가
되었다면 우리는 마음 속에 저절로 평안이 깃들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도 마음에 근심과 불안이 있다면
여러분은 불신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평강(평안)의 근거는
우리 자신의 감정이나 주위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화해
헌물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 있기
때문입니다. 느낌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영적 사실, 진리를
추구하십시오. 평안은 저절로 깃들게 됩니다.
6-7절입니다. 헌물을 드린
후에 모세는 피를 뿌리고, 성경을 가져다가 백성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또 모세가 피의 절반을 취하여 여러 대야에
담고 절반은 제단 위에 뿌리고 언약의 책을 가져다가 백성이
듣는 데서 읽으매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고 순종하리이다, 하니](6-7). 백성들은
모세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한번 “[주]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고 순종하리이다”(7)
맹세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은
피로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대로 [이러므로
첫 /상속/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히9:18)란
말씀대로입니다. 무릇 하나님과의 맺은 언약은 모두 피를
통해 확증됩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면(赦免)이 없느니라.](히9:22).
우리는 피를 통하여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골1:14).
구약에서 흐른 모든 피는 하나님의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모형입니다. 예수의 피는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며(엡1:7, 요일1:7), 피의 능력만이
우리를 구속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대속(代贖) 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썩을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8절입니다. 모세는 피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주]께서 이 모든 말씀에 관하여 너희와 맺은
언약의 피를 보라, 하니라.](8). 하나님은 끊임없이
피에 대해 말씀을 주시고, 반복적으로 가르쳐 주셨는데,
이는 피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레17:14). 주님은 피의 생물학적, 영적 의미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 /뿌려/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기 때문이니라.](레17:11). 피는 육체의
생명입니다. 이 사실은 14절에 한번 더 정확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는 피가 모든 육체의 생명이기 때문이니
육체의 피는 육체의 생명을 위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피가 그 육체의 생명인즉
누구든지 피를 먹는 자는 끊어지리라.](레17:14). 이는
자연인들도 거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피와 혼의
관계는 성경 외에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이는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기 때문이니라.”(레17:11).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피를 흘리셨습니다(행20:28). 언약의
피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주신 말씀입니다. [그
까닭은 이것이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이기 때문이라.](마26:28).
주님이 흘리신 피는 새 언약의 피입니다. 이 피는 지극히
보배로운 피입니다. 주님은 레위 지파의 대제사장들처럼
염소나 송아지의 피를 들고 성소로 들어 가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자신의 피를 들고 들어가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오직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대속(代贖)을
얻으셨느니라.](히9:12). “오직 자기 피를 힘입어”란
말씀에서 이 피가 바로 하나님 자신의 피란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자신과 모든 양떼에게 주의를
기울이라. 성령님께서 너희를 그들의 감독자로 삼으사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먹이게 하셨나니](행20:28).
우리는 이 피의 출처를 알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이 피는 언약의 피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흘린 피를 통해 맺으신 언약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피의 언약에 담겨진 언약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언약의
피로 맺은 내용은
첫째,
피는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주님이 친히 밝히신 대로 피의 효력은 죄를 깨끗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주님은 피를 믿는 자들의 죄를 결코 기억하지
않으시며, 그 죄를 깨끗하게 지워 버리십니다. 주님이
기억하지 못하시는 죄란 주님의 피로 지워진 죄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분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분의 피를 통하여 대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엡1:7). [이 아들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하여 대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1:14).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죄의 용서를
줍니다(엡1:7,골1:14). 죄의 용서, 대속(代贖)은 우리의 행위에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습니다.
“내가 무엇을 했느냐? 어떤 일을 했느냐?”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분의 피를 통하여 대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습니다.
사면의 기준은 나의 어떠함에 있지 않고,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있습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면이
없느니라.](히9:22)는 영원불변의 법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죄가 사해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증거를 찾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증거입니다. 그 피가 능력입니다.
둘째,
언약의 피는 재앙을 제거해 주시겠다는 언약입니다. 주님은
피를 믿는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니 그 재앙이 너희 위에
임하여 너희를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주님께서 온
이집트에 재앙을 내리실 때에 피를 보고 넘어가셨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은 혼들 위에 조금의 저주, 재앙,
심판도 내리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용서는 우리를
보시고 하는 것이 아니라, 피를 보시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근거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셋째,
피는 지속적인 정결함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일시적이고 단회적인 용서와 깨끗함이 아니라 피를 통해
지속적인 깨끗함이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십자가의 보혈은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만일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cleanseth)](요일1:7). 구원받은 이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계속 유효하며, 그 죄 사함의 능력은
변함이 없습니다. 마음은 행위로 정결해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깨끗해지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물과,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입니다.
마음 가운데 미움, 원망, 쓴 뿌리, 질투, 시기, 부러움 등
온갖 육신의 일들이 넘쳐나고 있습니까? 기도를 해도,
설교를 들어도 마음에 전혀 와 닿지를 않습니까? 피의
능력을 의지하여 주님께 죄를 시인하고 고백해 보십시오.
마음은 씻은 듯이 깨끗해집니다. 성도 안에 주님의 피가
쉼없이 순환함으로서 성령 충만해지고,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순환하지 않는 영혼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예수의 피를
가지고 씻는 것이 아닙니다. 주목해서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할 일은 죄를 시인하고 자백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성도들은 예수의 피로 자신이 자기를
씻는 줄로 압니다. 죄를 고백하고 시인하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이요, 깨끗하게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는
일입니다. [또 신실한 증인이시오, 죽은 자들 중에서 처음
나신 분이시며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씻으시고](계1:5).
우리는 스스로 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우리를 씻겨 주십니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들을 목욕시키는 어머니나 아버지를 연상케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지고 스스로 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씻기십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자백, 회개, 심판은 주의 피를 내 안에 돌게 하는 on- line button과도
같은 것입니다.
넷째,
피는 우리를 의롭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무궁하며, 폐기되거나 취소되거나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은즉 더욱더 그분을 통하여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으리니](롬5:9) 죄인들의 죄가
사면되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롭게
된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죄 사함 이상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용서받은 죄인일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들이 된
것입니다.
다섯째,
피는 양심을 깨끗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자신을 점없이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위로부터 너희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9:14). 양심은 결코 선악의 절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악한 양심의 소유자들이 많고, 더럽혀진
양심을 가진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환경과 시대에
따라 바뀝니다. 더러운 거울이나 굽은 거울, 깨진 거울은
결코 사물을 제대로 반사할 수 없듯이 더럽혀지고, 악한
양심의 소유자들은 바른 생각과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여섯째,
피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주님의 피 아래 있는 성도는
필연적으로 세상과 분리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친한 친구,
친척, 가족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는 한 분리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자기 자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히
구별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느니라.](히13:12).
이집트 땅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별된 것은 그들의
언어, 민족, 피부색, 문화, 전통과 같은 외적인 요소가
아니라 그들의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발린 어린 양의
피였습니다.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구별해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 동화되거나
세상과 일치하거나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세상과 확연히 구분이 되고, 세상을 못박고, 세상에 못박힌
삶을 살기를 원하시며, 피의 능력을 그 일을 이루십니다.
일곱째,
피는 화평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사 모든 것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음이니라.](골1:20).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세상과는 분리를 하나님과는 화평을 줍니다. 피 아래 있는
자들은 누구나 세상이 알 수 없는, 빼앗을 수 없는 하나님의
화평이 그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이것이 피를 통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여덟째, 피는 하나님께
나아 갈 담대함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히10:19).
지성소는 가장 거룩하고 거룩한 곳(holy of holies)입니다.
일년에 단 한번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린
후에 들어갈 수 있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 땅위의 성전에
만들어진 지성소가 아니라 저 하늘의 지성소에 단번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두려우신
하나님을 만나는 데에 조금도 두려움이 들지 않게 합니다.
내가 주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찬양하고 교회 예배 생활을 잘
했기 때문에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피가 있기 때문에 담대함을 얻습니다. 예배로 모인
이 시각에도 우리는 주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passport와 같은
것입니다.
아홉째,
피는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거의 말로 그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죄는 나를 패배하게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승리하게
합니다. 주님의 피가 있는 한 그 무엇도 나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승리의 생활은 바로 피를 믿고
적용하는 생활입니다.
마지막으로
언약의 피의 목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피의 언약의
목적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제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이끌어 내신 화평의
하나님께서 영존하는 언약의 피를 통하여 모든 선한 일에서
너희를 완전하게 하사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자신의
눈앞에서 매우 기쁜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너희
안에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분께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히13:20-21).
하나님은 언약의 피 없이는 아무 것도 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언약의
피를 통해서만 유효하며, 역사하십니다. 언약의 피가 없는
곳에는 말씀의 능력도, 성령의 인도하심도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우쳐야 합니다. 십자가의 피를 통하지 않으시고는
죄의 용서도, 깨끗함도, 승리도 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약의 피를 통해서 모든 선한 일에서 우리를 완전하게
하시며, 우리 안에 주님이 매우 기뻐하시는 일들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영존하는
언약의 피를 통하여”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피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이 시간 언약의 피에 대한
깊은 조명을 얻고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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