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23:14-19
요절: 출애굽기 23:17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남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명절들을 지정해
주셨습니다. 일년에 세 번은 반드시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 예배를 드리는 명절을
지정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유대인들과 같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날이나 달에 매인
명절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매주 첫날 모이기를 힘쓰고,
자원함으로 예배를 드리고, 헌물을 드리고, 기도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는 엄청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친
육신과 바쁜 일과로 인해 이 모임조차도 힘겨워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지만 모임 가운데 주님의 은혜가 있고,
임재(臨齋)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떤 일들도 이 일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생업은 자신과 가정을 위한 개인적인
일이지만 주일 예배, 기도 모임은 우리가 주의 종으로서
드리는 공무(公務)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일을 하다
시간이 나면 예배를 드리는 사람과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신앙은 결코 같지 않으며, 영적
은혜와 헌신의 순수성은 전적으로 다른 것임을 단언할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예배는 기본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희생’(sacrifice)을
드리는 것임을 인식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평소에 주를
위해 자신의 작은 것들을 희생하는 법을 배운 사람이 자신의
재산이나 사랑하는 가족이나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법입니다. 평안한 때에 작은
유익하나도 포기하지 못하고 헌신하지 못하는 사람이
핍박이나 환란이 있을 때 주를 증거하고, 주님을 위해
죽기까지 순종한다는 것은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입니다.
14절입니다. [너는 한
해에 세 번 나를 위하여 명절을 지킬지니라.](14). 세 번의
명절이 무엇인지는 15-17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무교절(유월절),
수확절(칠칠절/오순절), 수장절(장막절)입니다. 하나님은
횟수를 정해 주셨는데 한 해에 세 번입니다. 세 번이란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세 번은 완전수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발람의 미친 짓을 막기 위해 주의 천사를 보내
나귀를 세 번이나 돌이키게 하셨습니다(민22:23). 세 번은
완전한 경고의 수입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발락의 부탁을 받았지만 세 번이나 축복했습니다(민24:10).
들릴라는 삼손을 유혹할 때 “당신이 이같이 세 번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말하지
아니하였도다”(삿16:15)며 시험했습니다. 세 번은 인내의
한계입니다. 다윗은 형제보다 친한 친구 요나단과 헤어질 때
남쪽을 향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세 번 절한 뒤에
떠났습니다(삼상20:41). 세 번은 완전한 단절입니다. 솔로몬은
해마다 세 번씩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드리고
분향했습니다(왕상9:25). 세 번은 완전한 헌신입니다.
엘리야는 죽은 아이 위에 자기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주께 부르짖었습니다(왕상17:21). 다니엘은 기도하면 죽을 줄
알면서도 창문을 열어두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단6:10).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있는 가시로 인해 세 번 주께
간청했습니다(고후12:8). 세 번은 완전한 간구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칼로 세 번 거듭 쓰이게 하라”고
하셨는데 세 번은 주님의 완전한 심판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마26:34). 완전한 배신입니다.
베드로는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 환상을 세 번
보았습니다(행10:16,11:10). 세 번은 완전한 계시입니다. 바울은
세 번 몽둥이에 맞았고, 세 번 파선을 당하여 하루 밤낮을
깊음 속에 있었습니다(고후11:25). 완전한 고난입니다. 삼은
완전수입니다. 한해에 세 번의 명절을 지키는 것은 한 해의
전부를 지키는 것입니다. 명절은 자신을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명절을 지키러 모든
남자들이 모였을 때 도둑이 들거나 외적이 침입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 걱정을 하느라 경비 부대를 배치하고
나머지만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내가 민족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경계를 넓힐 것임이니 네가 한 해에 세
번 [주] 네 하나님 앞에 보이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출34:24).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믿음으로 순종할 때 주님은 나머지 사람들이 걱정하는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십니다. 주일에 오전, 저녁 예배에 다
참석하는 것이 힘든 성도들이 많습니다. 지금 자 두지
않으면 한 주 동안 쌓인 피로를 풀지 못할까봐 잠자는
분들도 있습니다.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이번 시험에
망할까봐 못 나오는 분도 있습니다. 지금 일하지 않으면
이번 달 월세를 못 낼까봐 못 나오시는 분도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믿음에 아무
보답도 없는 죽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농경지에 짓던 농사를 중단하고, 들판에 있던
양떼와 소 떼를 그냥 두고, 한 해에 세 번 주 하나님 앞에
보이려고 나아와야 했습니다. 지금처럼 교통편이 편하지도
않습니다. 한번 모이면 일주일 연속입니다. 오고 가는 길이
먼 사람들은 보름, 20일도 걸립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여러분은 매주 2번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이들이 일년에 세 번 주님
앞에 나올 때에 민족들은 쫓겨 나고, 경계는 넓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것을 어겼을 때에 도리어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법칙입니다.
15절입니다. [너는
무교절(無酵節)을 지키라.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너는
아빕월의 정한 때에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이집트에서 나왔음이라. 아무도 빈손으로
내게 나오지 말지니라.)](15). 무교절은 유월절과 연결되어
있는 명절로서 유월절 다음날부터 7일간 누룩 없는 빵을
먹었습니다. 현재 달력으로는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
사이입니다. 유월절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는 명절이라면 무교절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 관한 명절입니다. 성도의 일생은
누룩을 제거한 삶이어야 합니다. 작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뜨게 합니다(갈5:9). 주님은 우리가 조심해야 할 누룩에 대해
세 가지를 말씀해 주셨는데 바리새인들의 누룩,
사두개인들의 누룩, 헤롯의 누룩이 그것입니다. 위선과
형식주의, 율법주의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이요(눅12:1),
진리와 생명이 없는 종교성은 사두개인들의 누룩입니다.
탐욕과 육신의 정욕은 헤롯의 누룩입니다(미16:6, 11-12, 막8:15).
우리는 구약 성도들처럼 무교절을 지키지 않지만 성도의
일생은 날마다 무교절의 연속입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뜨게
함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의와 악독의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고전5:6-8).
사도 바울은 분명히 “우리가 이 명절을 지키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명절이란 구약의 무교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얻게 된 성도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교절에 “아무도
빈 손으로 내게 나오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열매를
가져오란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무엇인가를 드릴
것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영적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벧전2:5).
우리는 희생물을 받는 자들이 아니라 드리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빈손이 아니라 찬양의 희생물, 감사의 희생물을 들고
나와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어 주는 것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계속해서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이것은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어 주는 것을 잊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이
같은 희생을 매우 기뻐하시기 때문이니라.](히13:15-16).
어떤 성도들은 영적 희생물은 고사하고 탐욕을 가지고
교회에 나옵니다. 교회에서 희생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득을 취하려 합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탐욕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교회를 욕합니다.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처럼 꼭 헌물이나 헌금을 가져오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먼저 자원하는 마음만
있으면 사람이 가진 대로 /주께서/ 받으실 것이요, 그가 갖지
아니한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8:12)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감사, 찬양을 마음 속에 가득 채워
모인다면 가장 좋은 일입니다. 무교절의 교훈이란 내 마음
가운데 있는 탐욕, 악의, 악독의 누룩을 제거한 정결한
성도의 삶을 말합니다.
16절입니다. [수확절(收穫節)을
지키라. 이 /수확/은 네가 밭에 뿌린바 네 수고의 첫
열매니라. 한 해의 끝에 있는 수장절(收藏節)을 지키라.
이는 이때에 네가 밭에서부터 네가 수고하여 얻은 것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니라.](16). 수확절은 칠칠절이라고
불리는데, 신약에서는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이 날은 땅에서
유월절 후 7주 후 즉 49일 후에 행해진데서 칠칠절이라고
불렀고,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오순절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오순절이란 말은 50번째 날이란 헬라어에서
파생한 말이므로 구약 성경에는 나오지 않고, 신약 성경에만
나옵니다. 맥추절이라고 불렸는데,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날입니다.1) 우리는 이날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성령 강림사건이 있었던 날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행2:1,20:6, 고전16:8). 주님은 첫 열매가 익은 첫
수확물을 주님 앞으로 가지고 나오라고 하십니다. 모든 땅의
첫 열매는 다 주님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첫 열매를
주님께 드림으로써 모든 소유가 다 주님의 것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받은 것이란 사실을 고백하는 그런
절기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누리는 자연의 혜택, 땅의
열매 등이 우리 땀의 수고인 줄 알지만 하나님이 주신
것이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해와 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는 그분께서 자신의
해를 악한 자와 선한 자 위에 떠오르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내려 주시기 때문이라.](마5:45).
주님이 주신 것으로 얻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님께 돌려
드리는 절기가 바로 수확절의 핵심입니다.
마지막으로 지켜야 할
절기는 수장절입니다. 수장절은 일명 장막절, 초막절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현재의 9월-10월에 해당하는 티쉬리월 15일부터
일주일 동안 지켰는데, 추수 감사제인 동시에 광야에서 초막
생활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첫 날과 마지막 날에
집회를 열었습니다(출34:22, 레23:34-43, 민29:12-40). [너희가
곡식과 포도즙을 거두어들인 뒤에 이레 동안 장막절을 지킬
것이요.](신16:13). 장막절은 기쁨의 축제입니다. 이는 천년
왕국을 예표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기간동안 종려나무 가지나 시냇가의 버드나무로 초막을
지어서 거했습니다.
레위기 23장을 잠깐
보겠습니다. [첫째 날에는 너희가 좋은 나무 가지와 종려
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의 버들을 취한 주
너희 하나님 앞에서 이레 동안 기뻐할지니라.](40).
장막절은 기쁨의 명절입니다. 주님이 주신 풍성한 수확을
감사하며 즐기는 그런 명절이며, 한 해를 정리하는 그런
명절이었습니다. 42절, [너희는 이레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유는 43,44절에 있습니다.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草幕)에
거하되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것은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그들로 하여금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레23:42~43).
변형산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변화되는 것을 보고, 장막
셋을 짓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마태복음 17:24, [이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응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여기에
장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하더니.] 그러나
진정한 장막절은 천년 왕국이 시작되어 저 하늘의 성도들과
이 땅의 성도들이 모두 같이 거하는 그 때가 되어야 성취될
것입니다.
17절입니다. [네 모든
남자는 한 해에 세 번 {주} [하나님] 앞에 나올지니라.](17).
하나님은 이 세 번의 명절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고,
반복해서 이 명절을 지킬 것을 강력히 촉구하셨습니다. 이
세 번의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올라오면 사실은 7가지
명절을 지키게 됩니다. 무교절을 지키려고 오면 유월절과
같이 붙어 있기 때문에 함께 지키게 됩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분리된 명절이 아닙니다. 초실절은 유월절이 지난
삼일째 되는 날에 드려집니다. 무교절의 명절을 지키러 오면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을 지키게 되는데 이 명절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성도의 삶, 첫 번째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를 봅니다. 일곱 번의 안식일을 지난
후 오순절(칠칠절)을 맞습니다. 오순절은 성령 강림과
교회의 몸을 구성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빵
두덩이를 만들되 누룩있는 빵을 만들게 하셨는데, 이는
성도들의 육신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죄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후 약 4개월 뒤 7월1일(현재는
9월)에 나팔절이 있습니다. 나팔절은 교회의 휴거를
예표하는 명절이며, 흩어졌던 이스라엘 민족이 함께 모이는
것을 예표합니다. 이달 10일에 속죄일이 있으며, 죄를
회개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15일에 장막절로 모여 집회를
합니다. 세 번 주 앞에 모이는 일을 통해 주님은
십자가에서부터 재림까지의 영적 모형들을 모두 보여
주셨으며, 소망 가운데 그 실체를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니 이 세
번의 모임이 잘 지켜질 때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안정되고 부강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임이
지켜지지 않을 때 이스라엘은 타락했고, 약해졌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강해진다는
단순한 진리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18절입니다. 헌물을 드릴
때 지켜야 할 주님께서 주신 주의 사항입니다. [너는 내
희생물의 피를 누룩 있는 빵과 함께 드리지 말며 내
희생물의 기름을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지니라.](18).
희생물의 피는 제단 위에 드리는 것입니다. 번제 헌물일
경우에는 고기와 피가 함께 타 버립니다. 그리고 고기는
먹습니다. 육체의 피는 육체의 생명입니다. 피는 속죄를
위한 것입니다. 불에 굽게 하신 것은 주님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채 영원한 지옥의 불꽃으로 고통을 당하셨고,
지옥으로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죄에 대한 주님의 심판이 불이란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룩 없는 빵은 세상과의 분리를 나타냅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좋은 의미로 사용된 예가 없습니다. 여기서
아침까지란 말을 세대적으로 적용하자면 천년 왕국의
아침이 될 것입니다. 현 교회 시대는 밤입니다. 어린 양을
잡고, 피를 뿌리고, 고기를 먹고, 태우는 모든 일은 밤에
이루어지고, 아침까지 어린양의 어떤 것도 남겨 두어서는
안됩니다. 이 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은 천년 왕국에서 현재 교회 시대처럼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요,
받아들일만한 해요, 구원의 때이지만 대환란 때는 주님의
원수갚으시는 해요, 보복의 때입니다. 천년 왕국은 의로
통치하는 때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대속에 근거한 어떤
은혜도 천년 왕국에서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19절입니다. [너는 네
땅의 첫 열매의 처음 것을 가져다가 [주] 네 하나님의 집에
드릴지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19). 이 부분은 출애굽기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반복된다는 말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대범해 보이는 사람도 막상 돈 문제에서만큼은 너무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주님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땅에서 난 수확물이든 무엇인든 처음 난 것은 다
거룩하며 구별하여 주님께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처음 난 것 곧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를
여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그것은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출13:2). [그 까닭은 처음
난 모든 것이 내 것이기 때문이라. 이는 내가 이집트
땅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을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 안에서
처음 난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이니라. 나는 [주]니라.](민3:13).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지만 주님은 특별히 처음 난
것들을 자기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첫 소산물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의미가 있고, 귀합니다. 주님은 첫
열매의 처음 난 것을 가져다가 “주 네 하나님의 집‘(성전)에
드리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헌물을 드리는 첫 번째 목적은 주 하나님 두려워하기를 항상
배우는데 있습니다. [[주] 네 하나님 앞 곧 그분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즙과
기름의 십일조를 먹고 또 네 소떼와 양과 염소떼의 처음 난
것을 먹으며 [주] 네 하나님 두려워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신14:23). 십일조와 헌금에 인색한 사람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주님의 소유와 자신의 소유에 대한
주인과 청지기의 관계성이 전혀 성립되어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처음 난 것을 더디
드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는 네 익은 과일과 네 즙의
처음 것 드리기를 더디 하지 말며 네 아들들 가운데 맏/아들/을
내게 줄지니라. 네 소와 양도 그와 같이 하되 이레 동안은 그
어미와 함께 있게 하고 여덟째 날에 내게 줄지니라.](출22:29).
우리는 주님께 국세청에 세금을 내듯이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힘없는 속국의 왕이 지배 국가에서
공물을 바치듯이 내는 것도 아닙니다. 소작농이 주인에게
바치는 것처럼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드려야 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할 수 없이 드리는
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향유하게 하셨습니다. 건강한 교회의 성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생활에도 충실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두
가지에 매우 충실합니다. 그것은 바로 집회에 모이는 것과
헌금을 드리는 일입니다. 이 둘이 안 되는 교회는 병든
교회이며, 병든 성도들입니다.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네
재물과 네 모든 소출의 첫 열매로 [주]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이 새 /포도즙/으로
넘치리라.](잠3:9-10). 저는 이 약속이 주님이 신실한
만큼이나 오늘날 믿는 성도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고
확신합니다.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단지 더 벌겠다는
욕심으로 주님께 투자하듯이, 고리의 이자 수익을 노리듯이
헌금하는 성도들은 자신이 기대한 수익은 전혀 올리지 못할
때, 헌금한 후에 심한 손해 의식에 시달립니다. [네 재물과
네 모든 소출의 첫 열매로 주를 공경하라]고 했음에도
그는 도리어 맘몬을 공경한 까닭입니다.
칠칠절을 지킬 때 원칙이
있습니다. [[주] 네 하나님께 칠칠절을 지키되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주] 네 하나님께 바치는 네
손의 자원 헌물을 공물(貢物)로 드려서 지키고](신16:10).
이는 신약의 원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바울 사도가 권면한
대로 [저마다 자기 마음 속에 정한 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주님이 복을 주신대로, 자원 헌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빌론 포로로 잡혀간 큰 이유 중의 하나는
탐욕으로 이 명령을 전혀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포로기
이후에 느헤미야는 이 일을 매우 강력하게 집행했는데, 이
일로 인해 주님께 복을 구했습니다. [또 정한 때에 나무
헌물과 첫 열매를 드리게 하였사오니, 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느13:31). 여러분이 꾸준히
주님이 복을 주신대로 자원 헌물을 드린다면 느헤미야처럼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하고 기도하는데 양심의
가책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 담대하게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확의 첫 열매, 소출의 십일조를 주님께 드리는
사람들은 결코 탐욕과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돈걱정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왜 헌금을 내는가? 영적인
직무를 맡은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온갖 것의 모든 첫 열매의 처음 것과 너희의 온갖
봉헌물의 모든 봉헌물이 제사장의 소유가 되리라. 또
너희는 너희 반죽의 처음 것을 제사장에게 주어 그로
말미암아 복이 네 집에 머물게 할지니라.](겔44:30).
결국 주께 바친 것이 제사장의 소유가 됩니다. 이것이
주님이 정하신 원칙입니다. 성전에서 full time으로 사역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지파는 따로 수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께 바치는 것들을 다시 모두 그들에게 주어 먹게
하셨습니다. [레위 사람 제사장들과 온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과 함께 /나누는/ 몫도 없고 상속도 없을 것이니
그들은 불로 예비하는 [주]의 헌물과 그분의 상속물을
먹을 것이니라.](신18:1). 이는 오늘날 교회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 가운데 하나입니다. 백성들이 주께
헌물을 드리지 않으면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는 다른 지파의
지주들의 소작농으로, 일군으로 전락하게 되거나 빚을
지거나 종으로 팔리게 됩니다. 레위 지파는 먹을 때
형제들의 헌물을 먹는 것이 아니라 “주의 헌물과 그분의
상속물”을 먹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역자들의
경제 생활에 대해 구약을 인용해서 가르쳤습니다. [거룩한
것들에 관하여 섬기는 자들이 /성/전에서 나오는 것으로
살며 제단에서 섬기는 자들이 제단과 더불어 /희생물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구약과 마찬가지로) {주}께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9:13~14).
성도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하게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마음 가운데 불평과 시험이 찾아 듭니다. 목회자
역시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의 일을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고, 마귀의 참소를 받아
허약해집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보낼 때 돈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행을
위하여 짐보따리나 덧옷 두 벌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준비하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라.](마10:10). 이것이 사역자들의
급여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목회서신이라고 일컫는
디모데전서에도 이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두 배나 존경할 자로 여기되 특별히 말씀과
교리에 수고하는 이들에게 그리할 것이니라. 이는 성경이
이르기를, 너는 곡식을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자기 품삯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음이니라.](딤전5:18). 우리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믿고 순종하면 됩니다.
왜 헌물을 내는가? 주의
은혜를 맛보기 위해서입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가져다가 창고에 들여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쏟아 붓되 받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소위 지성적인 신앙인들에게 매우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말씀입니다. 오랫동안 오용되고,
악용되어 온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피하거나 거리껴
해서는 안됩니다. 바른 이해와 적용을 통해 신실한 믿음을
가져야지, “또 저 말씀...” 하는 식으로 냉소적으로
비꼬아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성경에서 유일하게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라고 제안하신 것이 바로
십일조와 헌물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것을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말하지 않고, “향기로운 희생물”이라고
말합니다(빌4:18). 주님은 이런 희생물을 드린 성도들에게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빌4:19).
다시 19절을 보십시오. [너는
네 땅의 첫 열매의 처음 것을 가져다가 [주] 네 하나님의
집에 드릴지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출23:19). “염소 새끼를 그의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는 말씀은 이런 조리 방법이
이집트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졌던 방법이었기 때문이란
학설이 있고, 어미의 젖으로 새끼를 삶는 몰인정한 성품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미 젖으로 새끼를 삶으면
독소가 생기거나 몸에 좋지 않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그런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합니다.
어미의 젖으로 염소 새끼를 삶는 것은 마치 초식 동물인
소에게 소의 내장을 갈아서 사료로 먹이는 일만큼이나
몰인정한 일이란 점에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많은
식도락가들(미식가들)의 말에 따르면 염소 새끼를 어미의
젖으로 삶으면 그 육질이나 맛이 더 좋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런 탐식을 금하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이상의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여러
가지 영적 해석이나 교훈을 뽑아내는 일은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성경적 지식이 아니라 막연한 추측성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족을 다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도
유대인들은 철저히 그릇을 분리해서 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식생활에 미친 율법의 영향 때문입니다.
It is wrong to do right thing at
the wrong time.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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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실절과는 차이가 있다.-
초실절에는 곡식단을 드렸고, 오순절에는 낟알갱이로
누룩을 넣은 빵을 두 덩이 만들었다. 이는 이 두덩이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각각 예표하는 것이며, 누룩은 우리 안에
여전히 육신의 성품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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