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24:9-18
요절: 출애굽기 24: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꿈에도 그리는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을 직접 한 번
보는 것일 것입니다. 저는 성도가 되었을 때 정말 하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꿈에서라도 한 번 보고 싶어서 “주님 한
번 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특히 욥기에 나오는 욥의 고백은 제 마음 속을 휘저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이는 빌립의 간절한
소원이기도 했습니다. 빌립은 주님께 이것을 간구했습니다.
[빌립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하니](요14:8). 빌립은
하나님 아버지를 한 번 보여 주면 족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것이 가장 크고, 급하고,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모세 역시 그러했습니다. [모세가 이르되, 간청하오니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소서, 하니](출33:18). 모세는
주님을 뵙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싶은 것은 당연한 감정이며, 소원입니다. 그러다
성경을 한 참 읽어보니 주님을 보는 자는 죽는다는 말씀을
보고서 “아, 큰 일 날 기도를 했구나!”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곳곳에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을 보았다는 기록도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진실 게임이
아닙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사야, 다니엘, 에스겔, 마노아, 기드온,요한
등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스데반, 바울 사도 역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볼 수 없다! 보았다!는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오직
그분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그분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니 그분께 존귀와 영존하는 권능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딤전 6:16)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주님 역시 동일하게 증거하셨습니다. [/이
말은/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이라.](요6:46).
주님 자신 외에 아무도 하나님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신, 구약의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어느 때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되 ...](요일4:12a). 그렇다면 모세가 본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모세에게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이는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을
것임이니라.](출33:20)고 말씀하시면서 모세를 바위 틈에
숨기시고, 그 얼굴이 아닌 등만 보게 하셨습니다. [내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뒷부분을 볼 것이나 내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출33:23).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본
이스라엘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상에서, 우리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9-10절입니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장로 칠십 명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분의 발 밑은 마치
사파이어 보석으로 포장(鋪裝)한 듯하고 그 청명함은 하늘의
실체(實體) 같더라.](9-10). 이스라엘의 장로 칠십명이 산에
강림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발 밑을 보았을
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정면에서 직접 목격할 수
없었습니다. 새 역본들에서는 장로들이 하나님을 본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 “이스라엘의 장로 칠십 명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계신 곳을 보니”라고
변개해 버렸습니다. 70인 역에서 시작된 이 번역은 기록된
말씀을 인간의 이성과 자신이 이해하는 신학적 사조와
자신들이 믿고 싶은 대로 성경에 손을 대는 못된 버릇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았더라”는 전혀 이상할 것도 모순되는 구절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3:2-4을 보십시오. [[주]의 천사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니라. 그가 보니, 보라,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떨기나무가 소멸되지 아니하므로 모세가 이르되, 이제 내가
옆으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가, 하였더라. 그가 보려고 옆으로 가는 것을 [주]께서
보시고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거늘](출3:2-4). 여기서 우리는 “[주]의 천사,
[주], 하나님”이 완벽히 같이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본 것은 주의 천사였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40일
동안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을 본 것 역시 주의
천사였습니다. [[주]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 대하여 말씀하시니라.
모세는 다시 진영으로 돌아왔으나 그를 섬기는 자 곧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성막 밖으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33:11).
우리는 이 사실을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에 있던 교회에 있으면서 살아 있는 말씀들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바로 이 사람이라.](행7:38). 그렇다면
모세가 본 하나님은 주의 천사였습니다. 사도 요한이나 사도
바울이 아무도 어느 때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은
주의 천사로서 현현하신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 그대로의
모습을 본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주의 천사와
씨름을 했는데, 그는 고백하기를 [야곱이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내가
얼굴을 마주 대하여 하나님을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 하였음이라.](창32:30). 그가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본 것은 주의 천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 역시
그러했습니다. [자기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나](삿13:22). 마노아가 본
것은 주의 천사였습니다. 기드온은 주의 천사를 본 것을
주님을 본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에 기드온이 그가
주의 천사임을 깨닫고는 이르되, 슬프나이다. 오 주
하나님이여, 이는 내가 얼굴을 마주 대하여 주의
천사를 보았음이니이다, 하매](삿6:22). 이를 통해 본문의
이스라엘 장로들이 본 이스라엘의 하나님 역시 시내 산에
주의 천사로 강림하신 주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이 땅에서 육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첫째, 천사로 현현한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주님을 본 사람은 대부분 이 방법으로 주님을 보았습니다.
둘째, 육신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이라고
말씀하셨고,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니라.](요12:45)며 현재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부활 승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육신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셋째, 환상이나 꿈을
통해서입니다. 이사야, 에스겔, 요한이 영안에서 주를
뵈었던 방법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끌림을 받아 셋째
하늘에 갔는데 그는 그에 대한 언급을 일체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때가 되면
주님을 천사나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가 아닌 직접적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볼 것이요,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같이 나도 알게 될 것임이라.](고전13:12).
10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분의 발밑은 마치 사파이어 보석으로 포장(鋪裝)한
듯하고 그 청명함은 하늘의 실체(實體) 같더라.](10).
장로들은 하나님의 발밑의 모습을 보았는데, 사파이어
보석으로 포장한 듯 하고, 그 청명함은 하늘의 실체
같더라고 합니다. 사파이어 보석은 푸르고, 깨끗한
보석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영적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보석을 머리에 이고, 숭배하며
삽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곧 배금주의(拜金主義) 사회입니다.
황금을 숭배하는 시대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상인들의 가치
품목에서 단연 1위는 금입니다. 마지막은 사람들의 혼입니다.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요, 고운 아마포와
자주색 옷감과 비단과 주홍색 옷감이요, 각종 향목(香木)과
온갖 상아 그릇이요, 매우 값진 나무와 놋과 쇠와
대리석으로 만든 온갖 그릇이요, 육계(肉桂)와 향료와
향유와 유향과 포도즙과 기름과 고운 가루와 밀이요, 짐승과
양과 말과 병거와 노예들과 사람들의 혼(魂)이라.](계18:12-13).
이것이 마귀의 영으로 충만한 세상의 시대 정신이요,
가치관입니다. 돈을 위해 몸을 파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요즘은 인터넷 경매 싸이트에 “자기 자신”을
상품으로 올려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서 금은
문잡이로도 사용되지 못합니다.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그 도시의 거리는
순금인데 투명한 유리 같더라.](계21:21). 사람들이
숭배하던 금이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길거리의 도로용 포장
공사에 쓰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재물은 우리의 가슴 속이
아닌, 우리의 발 아래에 두어야 합니다.
11절입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의 귀족들에게 자신의 손을 대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도 하나님을 보며 먹고 마셨더라.](11). 손을 대지
아니하셨다는 말씀은 해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3-8). 모세는 백성들
앞에서 언약의 피를 뿌렸습니다(8). 언약의 피 아래에 있는
백성은 결코 주님으로부터 해를 입지 않습니다. 언약의 피는
죄로부터, 죄의 형벌로부터, 주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줍니다. 언약의 피가 없었다면 이들은 주님
앞으로 나아오지도 못했을 것이며, 나아왔더라도 죽음을
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피를 통하여 담대하게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주]께서 이 모든 말씀에 관하여
너희와 맺은 언약의 피를 보라, 하니라.](출24:8). 이
말씀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초이며, 화해의
근거이며(골1:20), 용서와 대속의 원천이며(엡1:7,골1:14), 우리
안에 일하시는 원칙이십니다(히13:20-21).
이들은 하나님을 보며
먹고 마셨습니다. 즐거움, 기쁨의 잔치가 열렸습니다. 이는
언약이 있는 뒤에 잔치를 여는 습관에 따른 것인데,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은 아비멜레과
언약을 체결한 후에 잔치를 열어 먹고 마셨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가 이제 우리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를 맺고 우리가 너와 언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네게
손을 대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였으며 너를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라. 이제 너는 [주]께 복을 받은 자니라.
이삭이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창26:28-30).
이삭은 언약을 맺은 후에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삭이 맺은
언약은 상호 평화 조약이었는데 화해의 언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추격하였다가 언약을 맺었는데, 둘 간에 서로 해하지 말자는
화해 언약을 맺었습니다. [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너와 나 사이에 쌓아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치지 아니할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와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치지 아니할 것이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우리 사이에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야곱이 자기 아버지 이삭이 두려워하는 분을
두고 맹세하고 야곱이 또 산에서 희생물을
드리고 자기 형제들을 불러 빵을 먹게 하니 그들이 빵을
먹고 산에서 온 밤을 지내니라.](창31:51-54).
이 장면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새 상속 언약을 선포하시며
만찬을 드신 장면의 예표이기도 합니다(고전11:25-26). 주님은
광야에서 오랫동안 설교를 하신 후에 무리들을 그냥
보내시지 않으시고, 먹을 것을 풍성히 주셨습니다. 주님을
만나러 와서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일은 매우 즐거운
일입니다. 교회에 와서 설교만 듣고 마치 자신의 용무를
마친 듯이 헤어지는 것보다 함께 식사하며 교제하는 일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앞으로 예배가 끝난 후에 먹고 마시며
함께 교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게습니다.
12절입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와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내가 기록한 돌판들과 율법과 명령들을 네게 주리니
이것은 너로 하여금 그들을 가르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12).
주님은 십계명을 기록한 돌판 두 개를 주셨는데,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모세나 백성들이 돌판에 새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자신의 손가락으로 직접 쓰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와 대화하는
것을 마치고 증거판 두 개를 모세에게 주시니 /이것들은/ 돌
판이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것이더라.](신31:18).
하나님은 돌 판에 율법을 기록해 주셨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갔을 때 주님께서 쓰신 것이 아니라 이미 기록 해 두신
것을 모세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실 때
상황을 한 번 보십시오. [[주]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에서
불 가운데서, 구름 가운데서,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너희의 온 집회에게 말씀하신 뒤에 더 이상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들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신5:22).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서, 흑암 가운데서. 공포 분위기라 할
수 있을 만큼 두렵고 떨리는 상황입니다. 이는 율법이 죄에
대한 저주와 심판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불, 구름, 흑암은
모두 심판과 연관된 말씀입니다. 주님은 불 가운데서
말씀하셨고, 그 말씀은 돌판들에 써 주셨습니다. [[주]께서
내게 두 돌판을 주셨느니라. 그 돌판들의 글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것이요, 너희 집회의 날에 [주]께서 산에서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신9:10).
잠깐 하나님의 손가락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능력이요, 창조 행위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손가락이
없으면 여자는 바느질을 할 수 없습니다. 요리를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어렵습니다.
때로 구화(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 족화(발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를 하는 장애인들을 볼 수 있는데, 오히려
손가락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는 더욱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하늘들 곧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작품과 주께서 규정하신 달과 별들을 내가 깊이 생각하오니](시8:3).
주의 손가락은 주님의
능력입니다. 일하시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처음 고백한 예는 출애굽기 8:19입니다.
[마술사들이 파라오에게 이르되, 이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니이다, 하나 파라오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더라.](출8:19). 마술사들은 모세를 대적하여 마술을
펼치다 ‘이’ 재앙이 닥치자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니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손으로 행하시는 일이란
뜻입니다.
다니엘서 5:5에는 주님께서
손가락으로 벽에다 글을 쓰셨습니다. [바로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와서 왕궁의 등잔대 맞은편 회칠한
벽에 글을 쓰는데 왕이 글을 쓰는 손의 일부를 보니라.](5).
벨사살과 연회객들이 주의 기명으로 신들을 찬양할 때, 바로
그 순간에 주님의 심판이 선포되었습니다. 섬광 같은 빛이나
사람의 귀를 멀게 할 만한 소리도 없이 연회에 참석한
취객들의 술을 확 달아나도록 할만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었습니다. 밤의 장막을 걷어 내듯이 하나님의 손가락이
조용히 신비한 글씨를 써 내려갔습니다. 촛불에 비친 벽면의
글씨는 참석한 모든 하객들에게 보여 졌으며, 바빌론의
운명이었습니다. 벽면 위에 쓰여진 글씨는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으며, 사람의 상상을 홀리는 마법이 아니었기에
왕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주님의 손가락으로 새긴 율법은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정죄와 저주를
선포하듯이 벨사살의 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가락 역시
심판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으로
오면 주의 손가락은 저주와 심판의 선포가 아닙니다. 돌판에
궁중 벽에 심판을 기록하셨던 주의 손가락은 마귀들을 내
쫓으심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내쫓는 것이면 분명히
하나님의 왕국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눅11:20).
돌판에 기록된 율법의 저주대로라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여인을 향해 주님은 땅에 용서를 쓰셨습니다. 요한복음 8:6,8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고소할 구실을 얻고자 하여
그분을 시험한 것이었더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듣지 못하신 듯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다시 몸을 굽히사 땅에 쓰시니](요8:6,8). 율법을 직접
쓰셨던 주님의 손가락이 땅에 무엇을 쓰셨는지 우리는 그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여자에게 죄 사함과 용서가
선포되었습니다.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 하시니라.](요8:11). 주의 손가락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이 우리 안에 임하고, 죄사함과 용서가
임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손가락을 귀중히 여기지 않고,
무시하고 거부하면 나사로의 손가락도 임하지 않습니다.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이는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기
때문이니이다, 하거늘](눅16:24).
13-14절입니다. [모세가
자기를 섬기는 자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우리가 너희에게
돌아오기까지 여기에서 우리를 기다리라. 보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하나니 누구든지 할 일이 있으면 그들에게로
나아갈지니라, 하고](13-14). 함께 동행했던 장로들은
여기서 아론과 훌과 함께 캠프로 돌아가고 모세는
여호수아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서 40일 동안 주야로
금식하며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신9:9). 이 장면은 후에
호렙산을 찾은 엘리야(왕상19:8)와 높은 산에 오르시는 주님(눅4:1-8)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는 것과 같습니다. 아론은 모세에게
받은 직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모세가 없는 동안에
반역하는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 주어 금송아지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너희는 우리가 너희에게 돌아오기까지
여기에서 우리를 기다리라”는 모세의 명령은 오늘날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세계 선교 사명을
주시고, 위대한 대업을 주셨지만 가장 중요한 명령은 “기다리라”였습니다.
[또 사도들과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명령하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너희가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 하셨으니 곧 이르시되,](행1:4).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기다림이었습니다. 성질이 급한 사람은 기다릴 줄 모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인생의 어느 한 순간에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 지금 삶이 바뀌었을 분이 많을 겁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면서 즐겁게 먹고 마셨던 아론과 훌, 70명의 장로들은
모세를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산 위로 율법을 받아 오기
위해 하나님을 만나러 간 40일을 기다리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14절을 보십시오.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우리가 너희에게 돌아오기까지 여기에서
우리를 기다리라. 보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 하나니
누구든지 할 일이 있으면 그들에게로 나아갈지니라, 하고](출24:14).
하지만 이스라엘은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조급함으로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늦어지매 백성이 이것을 보고 함께 모여
아론에게 가서 이르되, 일어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앞에
갈 신들을 만들라. 이는 이 모세 곧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에 관하여는 그가 어찌 되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니](출32:1).
기다리지 못해 인생을
완전히 망쳐 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민선 왕이었던 사울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다 못해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다급하고 초조해 하다가 결국
사무엘을 대신하여 자신이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상 13:8, [그가 사무엘이 정해 준 때를
따라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을 떠나 흩어지므로 사울이 이르되,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이리로 내게로 가져오라, 하여
그가 번제 헌물을 드렸더니 그가 번제 헌물 드리기를
끝마치매 사무엘이 오므로 사울이 나아가 그를 맞으며
문안하니라.](삼상13:9~10). 그는 사무엘을 기다렸지만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대신 번제 헌물을 드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전에 이미 이런 기다림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또한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보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 번제 헌물을 드리고
화평 헌물의 희생물을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일을 보여 줄 때까지 너는 이레 동안 기다리라, 하니라.](삼상10:8).
그 때는 잘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다급하고 위기의
상황에서는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기다림은 믿는 성도들의
성격이요, 특징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기다림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로
삼으리니 곧 단련한 돌이요, 보배로운 모퉁이돌이며 견고한
기초로다. /그것을/ 믿는 자는 다급하지 아니하리로다.](사28:16).
믿음의 사람 가운데 기다림이 없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다림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우리는 일상 생활의
체험에서도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아버지는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리십니다. 기다림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으며, 깊은 믿음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얻는데 25년을
기다렸습니다. 젊은 때에 25년의 세월과 75세에 시작한
말년의 25년은 그 강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더 애간장이 타는 법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약속을 받은 후 그런 25년을 기다렸습니다. 이삭은 20년을
기다려서 쌍둥이를 얻었습니다(창25:26).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20년이 더 걸렸습니다. 두 딸을 부인으로 얻는데
14년, 가축을 위하여 6년간 일했습니다(창31:41). 요셉은 팔려
간지 수십 년이 지나서야 총리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자처한 후 40년이 더 지난 후에야
진정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결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은 기름부음
받은 후 금방 왕이 된 것이 아니라 기약없는 세월을 기다린
후에야 헤브론에서 왕위 등극을 하고 통일 왕국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대언자 하바국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 환상의 정한 때를 위한
것임이라. 그러나 그 끝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말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리라. 비록 이것이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이것이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7것이 반드시 오겠음이라.](합2:3). 주님은
때를 따라서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비록 이것이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을 인내라고 합니다. 영적
성장, 자녀 문제, 교회의 부흥, 실타래처럼 엉긴 문제들을
담담히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
안에서 안식하고 끈기 있게 그분을 기다리라. 자기 길에서
형통한 자나 사악한 꾀를 이루는 자로 인하여 초조해 하지
말지어다.](시37:7). 기도한 후에 기다리십시오. 기다리면
기대한 것이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언제까지? 아론은 모세가
돌아올 때까지, 사울은 사무엘이 올 때까지, 제자들은
성령이 올 때까지, 우리는 주님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한 후에는 기도한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입니다.
[내 혼아, 너는 오직 하나님만 기다리라. 이는 내가
기대하는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로다.](시62:5).
15-16절입니다.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덮으며 [주]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덮더니 일곱째 날에
그분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15-16).
모세가 주님을 만난 것은 산에 오른지 6일 뒤였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일곱으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구름은 주의
임재를 나타내는데 성경 전체에 주의 영광의 구름(세키나)이
일곱 번 출현합니다. 주님은 일곱째 날에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일곱째 날 즉 7000년째에 구름
가운데서 성도들을 부르실 것입니다. “이리로 올라오라”는
음성이 들리면 우리는 모두 들림 받습니다.
17-18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는 [주]의 영광을 보는 것이 마치 산꼭대기의
맹렬한 불을 보는 것 같았고 모세는 구름 가운데로 들어가서
산 위로 올랐으며 밤낮 사십 일을 산에 있었더라.](17~18).
주님께서 불 가운데 임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분께서 네게 교훈을
주시려고 너로 하여금 하늘에서 오는 자신의 음성을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자신의 큰 불을 네게 보여 주시매 네가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분의 말씀들을 들었느니라.](신4:36).
두렵고도 무서우신 하나님을 목격함으로써 이들은 주님
두려워하기를 배우고, 주신 명령들을 순종해야 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32장에서 이 내용은 한 번 더 다루게 됨으로
그때에 다시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 언약의 피 없이는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실 수 없다. 하나님과의 친교는 피를
통해서만 가능하다(7,11).
● 하나님의 말씀(4,8)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10).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모세가 받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은 후에야 하나님을
보았다(10).
●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신 자는 반드시 말씀을 배워서 지켜야 한다(11,12).
● 모세가 율법을 받아
주었지만 그를 수행한 것은 여호수아(예수)였다(13).
●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은 하나님께서 먹이신다(11).
● 이스라엘은 산 밑에
있었고(called), 아론과 훌, 장로들은 반 정도 더 갔으며(chosen),
모세와 여호수아는 산 위로 갔다(faithful to death). 이 셋은 뜰,
성소, 지성소의 장막 구조와 같으며, 크리스찬들의 부류와
일치한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리니 이는 부름받은 자는 많으나 선택받은 자는
적기 때문이니라.](마20:16). 죽기까지 신실한 자는 더욱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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