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롬1:17
성령의 열매로서 믿음은 다른 모든 열매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맺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히11:1). 주님은 믿음이 큰 자들을 칭찬하시고, 믿음이 적은 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를 일컬어 [음란하고 악한 세대](마12:39)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돈이 없다, 재산이 없다, 가족이 없다, 직업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건강이 없다, 친구가 없다’는 말보다 훨씬 더 심각한 말입니다. 우리는 신체에 무엇이 부족할 때 금방 몸에 여러 가지 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물이 부족하면 탈수 현상이 일어나고, 비타민, 철분, 칼슘 등 어떤 성분이 부족하면 즉시 몸에 자각 증세가 나타나곤 합니다. 그래서 부족한 것들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몸에 물이 부족하고 피가 부족하다는 것보다 성도들에게 더 위기 의식이 드는 것 중에 하나는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부족하다, 성령이 부족하다, 말씀이 부족하다는 등의 말은 영적 생명의 위기 상황입니다. 영적 생활의 파산을 일컫는 말입니다.
때로 우리는 [은혜가 부족하다, 사랑이 부족하다, 정이 없다]는 등등의 말을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믿음의 결핍에서 기인한 것들입니다. 인내심이 부족하다, 친절하지 못하다, 부드럽지 못하다, 오래 참지 못한다, 신실하지 못하다는 등등 우리는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지만 그 역시 그 안에 성령이 충만하지 못한 결과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사랑, 기쁨, 평강, 오래 참음은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 기쁨이 없고, 평강이 없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이 가득차지 않았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들이 없고, 서로 권면하고 위로하는 영적 교제와 세워주는 일이 없다는 것 역시 다른데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말씀이 가득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지혜가 없다, 권능이 없다, 거룩함이 없다, 경건이 없다는 등의 진단을 우리는 스스로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본능적으로 지혜를 키워야지, 힘을 길러야지, 거룩함에 이르는 길을 찾아야지 하는 식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이는 진단을 했지만 바른 처방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혜, 권능, 거룩함, 경건, 절제 등이 부족하면 이는 내 안에 계신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골1:27)께서 일하시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주요,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자신을 내어드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저런 부족 현상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비타민이 부족하면 비타민제를 먹어서 보충하고, 철분이 부족하면 철분을 보충하고, 칼슘이 부족하면 칼슘제를 먹어서 보충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은 사랑이 부족하다고 사랑을 보충하고 인내가 부족하다고 인내를 보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나 기쁨이나 평강이나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 믿음 등의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서 맺으심으로 부족이 채워지는 것이지 우리 속에 투여해 주심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란 것입니다. 때로 어떤 성도들은 주님 제게 사랑을 가득 채워 주옵소서! 제게 온유를 채워 주시옵소서! 이런 식으로 기도합니다. 다른 것은 문제가 없는데 절제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절제”를 주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이들은 실상 자신을 잘 모를 뿐 아니라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비타민제나 칼슘제를 투여하시듯이 사랑을 투여하시고, 절제를 투여하시고, 평안을 투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성령 충만을 받으면 우리가 부족한 것들이 모두 해결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 부족이란 말은 사랑을 채움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채움 받지 못한 결과입니다. 오래 참지 못하는 것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으로 채움 받지 못한 상태란 뜻입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으로 다스리시는데 내가 다스림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충만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충만하고 싶습니까? 말씀으로 충만하면 됩니다. 믿음이 크고 강해지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내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시면 됩니다(골3:16).
성도들은 자신들이 배우는 어떤 교리에 대한 깨달음, 지적인 이해로 말미암아 자신이 현재 느끼는 여러 가지 결핍, 부족한 것들을 채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아예 작정하고 철야 기도나 금식 기도를 함으로써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결단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뜻은 훌륭하지만 잘못된 처방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사랑이 부족하다고 여러분이 사랑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인내가 부족하다고해서 어디 가서 인내를 빌려 올 수도 없습니다. 만약 틈을 내서 금식을 하고, 기도를 좀 더 규칙적으로 하고, 성경 공부를 진지하게 함으로써 모르던 것들을 분명하게 배우면 어느 정도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믿음은 율법의 행위나 금욕주의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경험했듯이 교회를 다닌 지 수 십년이 지났고, 어느 정도 성장과 향상을 보인 것 같지만 급한 성격은 여전히 급하고, 못된 성질은 여전히 못돼 먹었으며, 본성과 본질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그렇다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방법론을 통해 스스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중단하고 모든 것 되시는 주님께서 내 안에 충만히 거하게 하시는 것이 전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해결책이요, 유일무이한 해결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교리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지 않는 어떤 말씀도 율법의 조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요14:6).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것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쳐두고 믿음을 크게 할 수 있는 방법만 찾고 구한다면 그는 결국 실망하고 말 것입니다. 산을 움직이는 믿음은 고사하고 지푸라기 하나도 옮기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다 후회와 깊은 한 숨만을 안고 육신의 생을 마감하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문제가 크면 클수록 그에 상응하는 믿음 역시 커야 한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믿음을 어떻게 강하게 합니까? 성령의 열매가 믿음인 고로 우리는 성령으로 가득 채움(충만) 받는 한 가지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해서 모든 성도들이 갑자기 변화되어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롬5:5). 믿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믿음이 크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모두 크고 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신 주님과 믿음의 근거가 되는 말씀과 믿음을 열매로 맺으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 우리 안에 자라나는 것입니다.
사실 영적 생활을 믿음의 생활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믿음]이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거의 모든 것이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믿음으로 구별되고, 믿음으로 거룩해지고, 믿음으로 정결해지고, 믿음으로 권능을 얻고, 믿음으로 걷고, 믿음으로 싸우며, 믿음으로 달리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을 때 구원을 얻고, 믿을 때 영생을 얻고, 믿을 때 어둠에 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믿음의 책입니다. 성령은 믿음의 영입니다. 주님은 믿음의 주로 불리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크게 할 수 있습니까?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주님을 우리 안에 모셔 드리고, 주님께 모든 것을 넘겨 드리면 됩니다. 주님이 나를 다스려 주시도록 완전히 맡길 때 주님이 우리 안에 믿음의 말씀, 믿음의 영을 통해 크고 강한 믿음을 만들어 나가십니다.
[믿음]에 대해서는 여러 번 증거 했지만 아무리 여러 차례 다시 증거하고 반복한다 해도 결코 질리지 않는 진리이며, 많이 설교했다고 할 수 없는 주제입니다. 우리는 기초를 다시 놓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해야 하지만 기초를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때로 설교자들이 했던 설교를 다시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는 주님께서 진리를 가르치시는 방법이셨고, 사도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너희가 이것들을 알고 현재의 진리에 굳게 서 있을지라도 너희로 하여금 항상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는 일에 내가 게으르지 아니하겠노라. 참으로 내가 이 장막(帳幕)에 있는 동안에 너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여 일깨우는 것이 합당한 줄로 생각하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보여 주신 바와 같이 내가 머지않아 반드시 이 장막(帳幕)을 벗어야 할 줄을 알기 때문이라. 또한 내가 죽은 뒤에도 너희가 항상 이것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애쓰리니] (벧후1:12~15). 이 말씀에 따르면 사도 베드로는 같은 주제를 반복적으로 설교하고 가르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뒤에도 항상 기억할 수 있도록 애쓰겠다고 말하는데 이는 자신이 친히 남길 서신서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저희 교회는 설교를 하고 나서 테잎과 문서로 설교를 남겨서 여러분들이 항상 듣고 다시 읽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주 동안 말씀을 묵상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기억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들은 말씀들을 흘려보내지 말고 다시 한 번 붙들고 기억하는 습관을 기르시기 바랍니다. 매주 첫날에 들은 말씀을 일주일 내내 묵상의 자료로 삼고, 아침이나 저녁에도 그 말씀의 빛과 인도함을 받도록 기도하십시오.
성경은 믿음으로 읽고 공부해야 하는 책입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책들과 달리 [믿음]이 없다면 아무리 읽고 공부해도 전혀 유익이 없는 책이 성경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과 히브리서 4:12을 찾아보겠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또한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를 드림은 너희가 우리에게서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들 안에서 효력 있게 일하느니라.](살전2:13). 말씀은 믿는 자들 안에서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믿을 때 그 말씀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이든 이루어냅니다. 말씀의 조명과 인도를 받고, 말씀이 나를 이끄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기차가 철로 위를 달리고, 씨앗은 땅 속에서 자라나듯이 말씀은 믿음과 결합되어야만 자라날 수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으나 그 선포된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한 것은 그 말씀이 그것을 들은 자들 속에서 믿음과 결합되지 아니하였음이라.](히4:2). 믿음은 모든 것의 기초(foundation)입니다. 믿음 위에 덕, 지식, 절제, 인내, 형제 우애, 사랑이 쌓이는 것입니다. 믿음 위에서만 자신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너희 자신을 세우며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고](유1:20). 어디에다 세우라고 말씀합니까? 믿음 위에 세우라고 합니다. 믿음의 기초 위에 모든 것이 섭니다.
믿음은 약해지거나 잃어버릴 수 있는가?
물론입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율법으로 돌아가 버린 교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딤전4:1). 돈을 탐내다가 믿음에서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기 때문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잘못하고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딤전6:10). 거짓되이 과학이라 불리는 것들의 반론으로 인해 믿음에 관해서 잘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 디모데야, 속되고 헛된 말장난과 거짓되이 과학이라 불리는 것의 반론들을 피하며 네게 맡긴 것들을 지키라. 이것을 내세우던 어떤 자들이 믿음에 관하여는 잘못하였느니라.](딤전6:20-21a). 얀네와 얌브레와 같이 주님이 세우신 목자를 대적함으로 진리를 거역하고, 믿음에 관해서 버림받은 자들도 있습니다(딤후3:8). [이제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이들도 진리를 거역하니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니라.](딤후3:8). 우리는 이런 자들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성경적 믿음이 우리 안에 어떻게 주어지며, 어떻게 열매를 맺으시는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을 주시는 믿음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며(히12:2), 믿음의 말씀이며(롬10:8, 딤전4:6), 믿음의 은사를 주시고 열매로 맺게 하시는 성령이란 점에 더욱 주목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법(롬3:27), 믿음의 의(롬4:11,13), 믿음의 발자취, 믿음의 영, 믿음의 방패, 믿음의 진보, 믿음의 활동, 믿음의 희생, 믿음의 신비, 믿음의 선한 싸움, 믿음의 고백, 믿음의 시련, 믿음의 기도, 믿음의 결말 등 믿음에 관련된 모든 말들을 보면서 우리는 믿음이 이루는 일들이나 믿음 자체에 관심이 쏠리기 쉽지만 믿음이란 것은 성령의 열매요, 성령의 은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주시는 분에게 관심을 가지고, 믿음의 출처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그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믿음이란 열매를 맺으시는 데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말씀을 통한 계시입니다. 믿음의 신비란 초자연적인 계시 즉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에 전달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히1:1,2). 말씀이 없는 곳에 믿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나옵니다. [그런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느니라.](롬10:17). 믿음을 가졌던 모든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이 전해 주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는 꿈으로든지 환상으로든지 천사를 통해서든지 대언자를 통해서든지 간에 하나님은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전해 받지 않고는 믿음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전 시대에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셨지만(히1:1,2)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는 성령을 통해서 66권의 완전한 성경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이란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계시가 있습니다.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믿음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꼭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말씀의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그 글자와 단어와 문장에만 전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상속/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율법 조문(letter)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이는 율법 조문은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기 때문이라.](고후3:6). *Who also hath made us able ministers of the new testament; not of the letter, but of the spirit : for the letter killeth, but the spirit giveth life. (고후3:6). 만약 문자에만 매인 성경 공부를 한다면 여러분은 생명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경험할 것입니다. 주님이 이른 말씀(words)은 영이요 생명입니다(요6:63). 영이요, 생명이신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믿음을 형성하고 생명을 주고 권능을 주고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을 열매로 맺으시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믿음은 자동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형성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의 출처라고 한다면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더욱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누구와 대화를 할 때 단지 말만 받아 적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는 이와의 관계성이 중요합니다. 친구의 말인가? 부모의 말인가? 선생님의 말인가? 등 말하는 이에 따라 동일한 말이라도 그 가치와 권위가 달라집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목적(히11:6)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믿음이란 것이 마치 하나님을 이용하는 방법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실패한 삶을 성공으로 마무리 짓고, 위대한 일을 성취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때로 사람들이 병이 나음 받고, 더 나은 직업, 더 많은 수입, 더 좋은 집, 더 많은 돈, 성취감, 보람 등을 얻기 위해서 ‘믿음을 발휘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들은 믿음의 진정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크고 강하게 하려는 근본적인 이유는 산을 들어 바다로 옮기는데 있지 않습니다, 난치병이나 불치병을 고치는데도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11:6a).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 생존하는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고 삶의 모든 방향과 초점을 여기에 맞춘다면 그는 바른 길에 들어 서 있는 것이요, 바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으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을 찾고 바라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삶에 필수적입니다.
주님은 관계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성은 성경에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친구 관계, 형제 관계, 부자 관계, 목양 관계, 주종 관계, 신랑과 신부의 관계 등 상황에 따라 그 관계성은 말로 다할 수 없이 많습니다만 가장 친밀한 관계는 생명의 연합 관계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이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이는 나 없이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요15:4-5). 생명의 유기체적 관계란 우리가 의식하든지 하지 못하든지 간에 지속적으로 주님의 모든 것이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고 순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순종입니다. 순종이란 말씀에 대한 합당한 반응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면 당연히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불렀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거나 응답이 없다면 바른 관계성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말씀에 대한 올바른 반응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믿음으로란 말 뒤에는 반드시 동사가 따라 붙습니다. 믿음으로 드렸든지, 준비했든지, 떠났든지, 바쳤든지, 버렸든지 간에 반드시 무엇을 했습니다.
믿음에는 기쁨이나 평강과 같은 감정이 뒤 따르지만 감정이 선행하는 법은 없습니다. 감정은 믿음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출발은 언제나 형통해 보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길을 떠났으나 기근을 만났고, 모세는 아론과 더불어 파라오를 만났으나 내어 쫓겼으며, 환영해 줄 줄 알았던 동족들은 그들에게 불평과 분노를 쏟아 내었을 뿐입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은 믿음으로 유월절을 지키며 이집트를 떠났지만 곧 바로 홍해를 만나서 죽음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 출발이 꼭 잘못되어 보이는 그런 삶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의 삶을 산다 해도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꼭 출발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일 수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믿음을 살아가려고 하면 시작부터 무엇인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일들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때에 뭔가 잘못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믿음의 삶이 단 번에 무너지고 맙니다. 이런 때에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하신 주님을 신뢰할 때 주님이 내 안에 말씀하신 것들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믿음의 결과/보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믿음에 보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히11:6). 여러분이 믿었다면 그 믿음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믿음을 지녔던 사람들이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모두 응답을 받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응답받지 못한다 해도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저 하늘에서 그에 대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이 안에 강한 확신과 넘치는 기쁨과 평강을 주심으로써 믿음의 증거와 보상을 허락하십니다. 이 땅에서 이미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믿음의 보상이라면 마음의 확신, 평강, 기쁨 등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저 하늘에서 맺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현재 우리에게 맺히는 열매입니다. 이 열매를 더 많이 맺으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는 기쁨을 누립니다.
다섯째, 믿음의 본을 보인 사람들을 보십시오. 성경은 우리가 믿음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환경에서 믿음의 시험을 받은 기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족의 반대에 부딪혀 본 적이 있습니까? 가족이 믿음의 원수였던 사람은 아벨을 생각해 보십시오. 같은 가족이요, 형에게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형제들이 원수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자면 요셉을 보십시오. 형제들이 그를 팔아 버렸습니다. 부인이 믿음의 방해가 됩니까? 욥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부인은 욥을 쓰러뜨리기 위해 마귀가 준비해둔 비장의 카드였습니다. 애매한 고난을 당한다는 생각이 들면 역시 욥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도 알 수 없는 낯선 환경에 직면합니까? 아브라함을 생각하십시오. 모든 이민자들은 아브라함을 생각하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기득권이나 좋은 특권을 포기해야 할 일이 있다면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파라오의 공주의 아들을 포기했습니다. 이집트의 보화를 포기했습니다. 지위, 부, 권세를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이 다양한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이외에도 주님은 사람들이 겪은 각종 실패를 보여 주심으로 믿음의 위인들 역시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었음을 입증해 줍니다. 노아는 술에 취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두 번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일만큼 겁이 많고 거짓말에 능했습니다. 이삭도 아버지를 닮아 그런 죄를 범했습니다. 야곱은 아예 전문 사기꾼이었는데 남을 상대로 하는 사기가 아니라 아예 가족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파렴치한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불신에 가득 찬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사라는 죄를 지적받자 그것을 즉각 부인했습니다. 모세는 화를 내었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고 임의로 결정했다가 속았습니다. 다윗은 간음에다 살인을 한 후에는 그 죄를 숨겼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바나바와 격렬하게 다투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죽음을 구했으며 자기만이 홀로 하나님의 사람이란 독단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실패와 허물, 죄와 불법에 대해서 주님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모두 믿음의 본으로 기록해 두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많은 약점이 있고, 죄가 있지만 그 자체가 믿음의 삶을 사는데 방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과거에 내가 무엇을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과거에 내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믿음을 주심으로 우리의 변화를 주도하십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목동이나 어부, 창기나 세리는 물론이요,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겁 많은 농부였으나 믿음으로 위대한 장군이 되었고, 아모스는 누에를 치는 사람이었으나 위대한 대언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갈릴리의 어부였으나 변화되어 초대 교회의 기둥이 되었고, 에스라와 같은 제사장 가문의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느헤미야 같은 정치인도 있었고, 다윗과 솔로몬 같은 왕이 있었는가 하면 마태라 불리는 세관원 레위도 있었습니다. 시위와 데모에 능한 열혈당원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과거 직업, 신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출신 배경은 믿음 생활에 아무런 장애 요인도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타고난 성품이나 신분이나 힘이나 재능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때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저는 이제 처음에 언급했던 믿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믿음은 모든 문제를 극복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문제로부터 우리를 건져내 주는 것만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했다는 간증도 많지만 성경을 보면 믿음으로 인해 문제를 자초하고 문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많습니다. 에녹이나 노아가 당대에 믿음으로 살았을 때 그 시대는 믿음이 전혀 없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음으로 세상을 심판하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당시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던 이집트와 맞서야 했습니다. 다니엘은 이민자로서 당대 귀족들의 미움과 질투를 받으며 영적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경건의 시간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이런 삶을 살았다고 해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늘 어려움 속에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려움을 만나고, 어려움 속에 놓이는 가운데서 승리하는 삶의 원동력이 믿음이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야고보는 헤롯에게 목 베임을 당했지만 베드로는 감옥에서 구출을 받았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건짐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믿음의 사람들은 사자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루에 삼천 명을 구령할 때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동일한 믿음, 동일한 성령 충만이 있었지만 결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통해 기적적으로 병이 나음 받는 체험을 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 병으로 고통을 당하며 죽습니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우리의 뜻대로 되는 삶이 아니란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외적인 성공을 원하고, 외적인 승리를 원하며, 외적인 간증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로서 맺어진 믿음은 내적인 것, 영적인 승리를 원하며 이 땅에서 받을 상급이 아니라 저 하늘에서 받을 상급을 원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현재 [믿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마음대로 쓰시도록 주권을 주님께 완전히 양도하셨습니까? 주님이 나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뜻대로 사용하실 수 있도록 나의 주인 됨(Lordship)을 넘겨 드렸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은 믿음의 삶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나 자신이 여전히 나의 주인이고, 주님은 내가 필요할 때 필요한 충고나 조언이나 해 주고 힘과 능력을 대어 주고, 어려운 일이 터졌을 때 사건 사고나 깔끔하게 처리해 주는 조력자로 두기를 원한다면 믿음의 삶을 흉내낸 육신적인 성도에 불과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믿음]의 열매를 맺으시는 것은 내가 아닌 주님이 살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믿음]의 열매를 맺으시는 것은 내가 아닌 주님이 우리 안에 살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죽음에서 삶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졌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 주님을 나의 주로 영접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듯이 이제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겠다고 결심한다면 주님께서 나를 위해 살아 주시고, 나를 대신해 살아 주시도록 주님께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주님께서는 자신의 몸,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의 몸과 영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속의 죽음이 진리이듯이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사시는 것 역시 진리입니다. 대속의 죽음을 믿는 성도라면 대신해 사시는 주님 역시 받아 들임으로써 믿음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 같이 한 구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갈2:20) /*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이것이 우리가 현재 육체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주제별(글) > 성령을 알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의 열매(18) -온유 (0) | 2006.04.20 |
---|---|
성령의 열매(17) -온유 (0) | 2006.04.13 |
성령의 열매(15) -믿음 (1) | 2006.04.11 |
성령의 열매(14) -믿음 (0) | 2006.04.10 |
성령의 열매(13) -선함 (0) | 2006.04.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