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성령의 열매(18) -온유
말씀. 갈5:23


성령의 열매 중 여덟 번째인 온유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평소 어머니가 자녀를 기르는 부드럽고 따스한 마음에서 온유함을 봅니다.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그런 마음이 온유한 마음입니다. 아이들을 돌보는 유모의 마음이 부드러움과 온유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오직 너희 가운데서 부드러운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아이들을 돌보듯 하였으니](살전2:7)라고 합니다. 목자가 양을 돌보는 마음이 온유함입니다. 범죄하는 아이를 향한 사회적 시선과 어머니의 시선은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엄격한 법 집행을 요구하는 것이 사회적 요구이지만 부모 된 심정, 목자 된 심정은 그를 감싸 안고자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온유함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부드러움과 온유함은 흔히 모성애, 여성 성향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 안에 심어 주시고, 열매로 맺게 하시려는 성령의 열매란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이미 [부드러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비슷한 말로 온유함이 있는데 이 둘의 구분이 우리 말로 그리 쉽지 않습니다. 부드러움(gentleness)이나 온유함 둘 다 주님의 성품입니다. 사무엘하 22:36과 고린도후서 10:1을 보겠습니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또 주께서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부드러움·thy gentleness>이 나를 크게 만들었사오며](삼하22:36)라고 말합니다. [주의 부드러움]이란 말은 말 그대로 주님의 부드러움입니다. 부드러움이 주님의 성품이요, 우리를 향해 대하는 태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원수들이 많고 정치와 사회, 국제 관계가 극도로 혼란했던 당시 사회에서 다윗은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 것 같지만 주님은 리더십이나 엄함, 냉정함이 아닌 부드러움을 보이셨습니다. 다윗을 백성들 가운데 가장 큰 자로 만드는 것은 권력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주님의 부드러움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사람을 크게 만드는 것이 바로 주님의 부드러움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부드러움을 보이실 때 우리는 무럭무럭 자라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영적 성장을 위해서, 크게 되기 위해서 주님의 부드러움, 친절, 선함, 인애(lovingkindness)등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힘입어 직접 너희에게 간청하노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면 비천(卑賤)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를 향해 담대하지만](고후10:1).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의 온유함이나 부드러움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힘입어서 간청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생활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다 그리스도의 무엇 무엇을 힘입어 행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온유함, 그리스도의 부드러움, 그리스도의 친절 등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우리 안에 맺으심으로 우리의 영이 사랑과 온유의 영으로 가득 차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육신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으면 분노, 원망, 조급한 영으로 가득 찹니다. 그러나 성령은 환경과 상관없이 오래참음과 부드러움과 온유의 영을 가지고 일하시고, 행하십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주의 친질로 대하고, 잘못한 사람 특히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대할 때 부드러움과 온유의 영으로 대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를 맺은 상태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성경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란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그대로 열매로 맺어내어야 합니다. 이는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한 것처럼 우리가 맺는 열매가 성령의 열매일 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사실이 입증됩니다.

혹시 시골에서 자란 분들은 몇 가지 농작물은 겉모습이 매우 비슷한 것을 압니다. 고염 나무와 감나무는 겉모습이 같습니다. 그러나 가을에 고염이 열리면 고염 나무이고, 감이 열리면 감나무입니다. 사과나무 역시 수종(樹種)이 수십 가지입니다. 가을에 맺히는 열매로 그 사과나무의 수종을 다 알 수 있습니다. 겨울철에 들(밭)에 나가면 잎이 하나도 없고, 농부들은 가지치기를 합니다. 그 때는 정말 어느 나무가 사과나무이고, 어느 나무가 복숭아나무이고, 어느 것이 자두나무인지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늘 농사를 짓는 분들은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나무에 대한 식견이 없는 사람들은 오직 열매로 구분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자녀이고 우리 안에는 성령이 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진리가 사실일지라도 열매를 맺지 않는 상태일 때는 누구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란 사실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친절이나 선함이나 부드러움, 온유함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친절, 주님의 선함, 주의 부드러움, 주의 온유함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어떠함을 보이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를 목걸이로 만들어 걸고 다니거나 십자가 문양의 반지를 하고 다니거나 손에 성경을 들고 다니거나 수도사들이나 캐톨릭 사제들처럼 옷을 아예 따로 제작해서 입고 다니는 식으로 겉모습으로 드러내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런 것을 열매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은 저희들에게 외모를 꾸미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구원,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활동하시는 성령을 우리의 말과 행동과 삶으로 드러나 보이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빛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부를 수도 있고, 열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런 것들을 온유함으로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부드러움, 온유함, 선함, 친절 등은 주님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믿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넓게 부어짐으로 변화되고 성장할 때 자연스럽게 맺혀지는 성품입니다. 본래 거친 성품을 타고 태어났고, 거친 환경에서 자라났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사랑, 주님의 부드러움, 온유하신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주님이 그 안에서 살아갈 때 그는 위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주의 부드러움, 주님의 긍휼, 주의 선하심, 주의 친절을 맛보았기에 자신이 받은 것을 그대로 행했습니다.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까지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친절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이르되, 요나단에게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를 저나이다, 하매](삼하9:3). 다윗은 승자로서 자신의 친절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주의 친절을 베풀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자신이 은혜를 베풀고, 친절을 베풀고, 선을 베풀 때는 상대로부터 기대하는 것이 많아집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무엇을 베풀었다. 내가 무엇을 했다...”고 생각하고 말하기 쉽습니다. 주의 무엇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로 맺은 선함과 부드러움, 온유함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행한 선함이나 친절은 자기 자랑이나 뽐내는 것으로 드러나 버리고 맙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거칠게 자란 사람들은 특히 온유함, 부드러움을 사모합니다. 제 자신을 보아도 늘 온유하고 부드럽기를 원합니다. 가족들 간에나 동료들 간에도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들이 인기가 좋고 신뢰감이 더 생깁니다. 그러나 내가 기분이 좋고, 일이 잘 풀리고, 태평할 때는 상냥하고 친절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엉망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육신의 한계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함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들여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참으로 다혈질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40년이란 세월의 연단을 거친 후에 그는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때에 이 사람 모세는 매우 온유하여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였더라.)](민12:3). 모세의 온유함은 모세의 선천적 기질도 후천적 습관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온유함은 오직 하나님을 만난 후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가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었던 것은 그가 지상의 모든 사람보다 주님의 온유하심을 많이 체험했고, 온유함의 열매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사람을 때려죽이고, 동족들의 반대를 이겨내지 못했고, 파라오를 두려워해서 도망을 갔지만 이제는 반대자를 감싸 안고, 대적하고 비방하고 모함하는 사람들을 주님께 맡기며, 파라오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온유함의 의미입니다. 성령님께서 모세 안에 온유함의 열매를 맺으심으로써 모세는 목자가 양을 돌보는 것같이 백성들을 자신이 낳은 자식들인 것처럼 주님의 뜻대로 인도하였습니다.

이미 출애굽기를 읽고 공부한 사람들은 모세가 어떤 경우에도 온유함을 잃지 않았다는 점을 잘 알 것입니다. 친(親) 형제자매인 아론과 미리암의 반역, 고라의 반역 등 여러 가지 반역이 있었지만 모세는 온유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끝없는 불평 속에서도 모세는 하나님의 온유함을 그대로 마음 속에 지니고있었고 그 온유함이 모든 사람들을 향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온유했던 모세가 온유함을 잃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가 온유함으로 반석 앞에 서지 않고 온유함으로 백성들 앞에 서지 않았을 때 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죽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상속하며 넘치는 화평 속에서 즐거워하리로다.](시37:11). 온유한 자가 땅을 상속합니다. 성질을 내고, 혈기를 부리고, 쓴 뿌리를 품고, 분노를 폭발했을 때 그는 꿈에도 바라던 땅을 한 줌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땅은 온유한 자들의 것입니다.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임이요,](마5:5). 지금은 어떻습니까? 힘 있는 자들이 산과 임야, 논과 밭 등의 모든 부동산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는 그 때에는 땅은 온유한 자들의 것입니다. 심지어 짐승들의 세계에서도 포악한 짐승들은 다시 초식동물로 유순하게 바뀐 다음에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피를 흘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며 그렇게 사는 동물들조차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이 땅은 온유한 자들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특별이 팔레스타인 땅을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주님의 온유함을 잃어 버렸을 때 전혀 그 땅에서 나는 소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온유란 주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온유의 반대말은 완악함, 완고함, 목이 곧음 등입니다. 주의 음성을 거역하는 자들은 온유한 자들이 아닙니다. 온유해야 주님의 음성을 듣고 교훈을 받아서 자신의 생각과 삶이 바뀝니다. 주님은 온유한 자를 가르치십니다. 사람들은 똑똑한 자를 가르치지만 주님은 온유한 자를 가르치십니다. [그분께서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시리니 온유한 자에게 자신의 길을 가르치시리로다.](시25:9). 이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온유한 자를 지도하시고 온유한 자에게 자신의 길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신다고 할 때 공의란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사람들의 의와 하나님의 의는 기준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의에서 난 그런 의를 넘어섭니다. 하나님의 의는 믿음에서 납니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롬10:4).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를 믿음, 복음, 예수 그리스도로 지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길(예수 그리스도)을 가르치십니다. 온유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딱딱하고 완악하게 되면 주님은 가르치실 수 없게 됩니다. 마음을 온유하게 하십시오. 이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온유함은 열매이기도 하지만 배워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마11:29). 온유하신 주님을 알고 주님이 주신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께서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생각하면서 살 때 우리는 온유한 성품을 소유하게 됩니다. 꾸밈과 가식이 아니라 진실로 우리는 온유함으로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인성 교육이란 말이 있듯이 하나님의 성품 역시 타고나는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어 나가시는데는 기본적인 말씀의 지식이 필수적입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을 배우지 않고 열매를 맺어내는 법은 없습니다. 온유함이나 부드러움, 상냥함과 친절함 등은 사랑의 표현 방법이며 동시에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온유는 지혜를 구하듯이 구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듯이(약1:5) 온유 역시 구하고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는 은을 찾듯이 보화를 찾듯이 지혜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를 찾고 의를 구하고 온유를 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주의 공의를 행한 땅의 모든 온유한 자들아, 너희는 [주]를 찾으며 의를 구하고 온유를 구하라. 너희가 혹시 [주]의 분노의 날에 숨겨지리라.](습2:3). 말씀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누구에게 말하고 있습니까? “땅의 모든 온유한 자들아.”라고 부르시면서 명령하고 있습니다.구원 받은 자들은 이미 의로운 자들이고, 온유한 자들이라고 불러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든지 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면 그는 거룩한 자이고, 의로운 자이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는 마치 이곳 미국에서 시민권을 따면 영어를 잘 하던지 못하던지 미국식 사고방식을 갖고 있든지 없든지 간에 미국인입니다. 해외여행을 해도 미국인입니다.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미국 정부는 미국 시민에게 미국의 법을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미국 시민으로서 세금을 낼 것을 요구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자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삶의 지침과 방향을 제시하시고 명령을 내리시며 의무를 부과하십니다. 행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법규를 주십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이 온유함과 거룩함과 부드러움, 선함과 거리가 멀다 할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온유한 자들아...온유를 구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의로운 자들아,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찾는 것이 맨 먼저입니다. 주님은 죄악 되고 사악한 자들을 향해 의를 구하고 온유를 구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 하나님의 사람아, 너는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라.](딤전6:11). 온유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는 이미 구원받은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온유해야 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온유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온유하다고 불러 주십니다. 온유한 자들이기 때문에 온유를 구하고 온유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과 나무에서 복숭아가 열리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과 나무에서는 사과를 많이 열리기를 기대하고 “올해는 많이 열려라.” 말합니다. 굵고 맛좋은 사과를 많이 수확하기 위해서 농부는 수고를 합니다. 공을 던지는 투수에게 오늘은 홈런을 치라고 하지 않습니다. 관중도 감독도 동료 선수들도 아예 주문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악인들을 향해서 선을 행하라, 의를 행하라, 온유를 구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구원받은 자라면 주님은 바로 저와 여러분이 현재 완악하고 거치더라도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시며, 열매를 맺는 방법을 말씀하시며,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향해 주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또 이 비유를 말씀하시되,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게 하고 와서 그 열매를 얻고자 하였으나 하나도 찾지 못하니라. 이에 그가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보라,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고자 하되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니 그것을 베어 버리라. 그것이 어찌 땅을 버리게 하겠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그 주위를 파고 거름을 주리니 만일 열매를 맺으면 좋으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그 뒤에 베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눅13:6~9). 자, 보십시오. 주님은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 한 그루를 심으셨습니다. 왜 심으셨습니까? “그 열매를 얻고자 하되”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화과나 나무를 심은 목적입니다. 열매를 얻고 더 많이 얻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삼 년을 와서 보았지만 열매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 모습은 당신 이스라엘을 향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만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지 삼년이 지나도록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오늘도 우리를 보시면서 “열매를 얻고자 하되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니”라고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땅만 버리는 나무를 향해서 베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기이한 현상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는데 저희 집에는 몇 그루의 대추나무와 감나무가 있었습니다. 집집마다 이런 나무가 없는 집이 없었지만 저희 집 대추나무는 언젠가부터 힘이 다했는지 대추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저와 형에게 베어 버리라고 말했습니다. 열매를 맺어야 할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서 땔감으로 밖에 쓰이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새롭게 창조한 피조물입니다. 새롭게 된 사람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무화과를 맺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듯이 온유한 자들이 온유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은 이상한 일입니다. 의로운 자가 의롭지 못하고, 거룩한 자가 거룩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성품을 전혀 발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유한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향해 “땅에 있는 모든 온유한 자들아” 이렇게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온유의 영을 지니고 온유함으로 옷 입고 온유함을 드러내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온유의 영을 지녀야 합니다. 온유함은 언제 드러나는가? 잘못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도 별로 의로울 것이 없으면서 누가 잘못한 자로 드러날 때면 날카롭게 비판하고 정죄하고 욕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신문을 보거나 뉴스를 들으면서 자신은 그런 죄인들과는 완전히 딴 부류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유력한 형제들이나 지위가 있고 부자들이 오면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하지만 별 볼일 없는 인간들이 와서 사고라도 치는 날이면 시끄러워집니다. 온유함은 죄인을 대하는 태도, 꾸짖는 태도, 책망하고 바로잡는 태도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성품입니다.

여러분은 자녀가 잘못했을 때, 아니면 배우자가 잘못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특히 자신에게 악을 행했을 때 여러분이 느끼는 감정이나 태도 등을 통해 여러분 안에 온유함이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금방 드러납니다. 절친한 친구나 교회의 형제가 나에 대해서 악을 행했을 때 여러분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를 향한 태도가 무엇입니까? 온유함이란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가 터졌을 때 매우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온유입니다. 모세는 자신을 대적하는 형제들을 향해서는 참으로 온유했습니다. 그 누구라도 용서해 주었고, 주님께 용서 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죄를 범할 때마다 정죄하거나 욕하거나 비난하기보다 주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물론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죄를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온유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세가 지면에서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몇 년은 교회, 몇 년은 선교 단체 또 몇 년을 교회 생활을 해 보았습니다. 20년 정도 교회 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은 형제들이 형제들을 매우 쉽게 정죄하고 판단하고 비난한다는 것입니다. 온유의 열매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 안에도 온유가 없기에 어떤 형제들은 함께 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특히 성경관이나 교회관이 맞지 않으면 솔직히 신자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그런 사람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형제들이 죄와 연루될 때는 여지없이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사도 바울은 범죄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아니면 사랑과 온유의 영으로 나아가랴?](고전4:21). 고린도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육신적인 죄에 많이 연루된 교회였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문제 삼았던 교회였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이지만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온유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바울의 설교를 문제 삼았습니다. 글은 힘이 있지만 말은 서투르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함께할 때는 약하고 그의 말도 형편없다, 하기 때문이라.] (고후10:10). 이런 소리를 듣고 이런 말을 한 사람과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놀랄 일입니다.

저는 몇 년 전에 한국에서 어떤 목사가 와서 우리 교회 형제들에게 윤 목사는 지식은 있는데 인품이 형편없어서 형제들이 윤 목사를 잘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을 듣고 뒤집어졌습니다. 저녁에 따로 식사하면서 윤 형제는 이런 저런 약점이 있고, 목사로서는 자질이 부족하지만 단지 성경 지식은 있으니 배울 것은 많을 것이니 잘 참고 잘 배우라고 했다는데 후에 이 말을 전해들은 제가 그 목사님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졌을 것 같습니까? 인간처럼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왜 미국까지 건너와서 헛소리를 하고 다니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분은 저에 대해서도 큰 결례를 했지만 이 교회를 허물어뜨리는 말을 하고 간 것입니다. 그 때 그 목사의 그 말을 들었던 사람은 지금 이 곳에 한 명도 없습니다. 이것이 소위 형제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들입니다. [온유]란 열매는 이런 자들을 향해서 내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에 대한 문제입니다. 저는 이 말을 몇 년이 지난 오늘 ‘온유’에 대해 설교를 준비하다 생각이 나 처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그분을 비난하거나 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해악을 끼치는 자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온유]의 문제란 것입니다. 이는 어느 집단, 어느 단체, 어느 조직, 어느 사회에서나 늘 접하는 문제입니다. 모세나 바울에게도 늘 따라 다녔던 문제들입니다.

온유가 있을 때에는 맞서 비난하지 않고, 다투지 않고, 싸우지 않고, 자신의 정당함을 변론하고 그를 욕하지 않습니다. 반면 온유함이 없을 때는 더 열렬히 비난하고 일전을 불사하며 억울함이 풀리는 그 날까지 욕을 합니다. 여러분은 현재 온유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온유의 영이 있다면 이렇게 하십시오.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도 살펴보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갈6:1). 온유의 영은 내 자신의 무너진 체면을 세우거나 망가진 내 모습을 세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에 빠진 형제의 회복을 위해 힘쓰는 영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진정으로 온유함이 있다면 형제들을 바로 잡고 세우는 일에만 관심을 갖게 됩니다. 자신의 상함이나 모욕이나 수치는 오히려 기쁨으로 여기고 죄 가운데 빠진 형제들, 마귀의 올무에 걸린 형제들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온유함으로 회복시키고, 온유함으로 일깨우는 것이 바로 성도들 안에 맺히는 온유의 열매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대적하여 행동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딤후2:25a). 누구를 대적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까? “자기 자신을 대적하여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나를 원수로 여기는 자들, 심지어 나를 죽여 버리겠다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들을 향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나와 한 편이거나 뜻이 통하고 서로 호의적인 관계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온유함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가 아닌 내 본성에서 나오는 선함이나 온유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철저히 자아의 의지, 자아의 감정, 자아의 상함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은 형제 관계의 필수 요소입니다. 이 셋은 함께 묶여 다닙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행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안에서 서로 참아 주며](엡4:2). 한 구절 더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마음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골3:12). 나도 남에게 잘못할 수 있고 남도 나에게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 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비난하고 욕하고 조롱하고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을 박아 버리는 자들을 향해 어떻게 하셨는가를 보십시오. 그 마음, 그 태도를 온유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라고 하는 온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온유함을 보여야 합니다.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말다툼하는 자가 되지 말며 오직 부드러우며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온유함을 보이게 하라.](딛3:2). 누구에게 온유함을 보여야 합니까? “모든 사람에게” 우리는 보여 주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고, 판사는 판결로 말하고, 기자는 기사로 말을 하듯이 성도는 행위로 보여 주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한 행위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로 하여금 너희의 선한 행위를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열매는 보여야 합니다. [모든 일에 네 자신을 선한 행위의 본으로 보이며 교리에서 부패하지 아니함과 신중함과 성실함을 보이고](딛2:7). 보여 주십시오. 보여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보여야 합니다. [참으로 어떤 사람은 이르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위가 있으니 행위가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내 행위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느니라.] (약2:18). 믿음 역시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열매는 보여야 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여 주어야 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우리는 주님을 보지 않고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보여 주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안에 맺힌 열매들이 있다면 그것은 빛으로 보여지고, 향기로 드러나고, 행위로 알려지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보이라고 하십니다. [너희의 절제를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절제는 성령의 마지막 열매인데 역시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고 하십니다.

온유함 역시 온전히 보여야 합니다.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말다툼하는 자가 되지 말며 오직 부드러우며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온유함을 보이게 하라.](딛3:2).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지식을 갖춘 자가 누구냐? 그는 지혜의 온유함으로 선한 생활에서 나오는 행위들을 보일지니라.](약3:13). 온유함을 보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까? 보이기 위해서는 있어야 합니다. 없는 열매를 보여 줄 수는 없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열매를 맺어 주셔야 합니다. 성령은 언제나 열매를 맺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모든 죄인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는 주님께서 모든 성도들 안에 언제나 풍성한 열매를 맺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지금 이 순간에 받을 수 있습니다. 온유를 구하고, 추구하고,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으면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접붙여진 말씀 곧 능히 너희 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1:21).

이 시간 모두 말씀대로 온유를 구하고,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아 온유의 열매를 맺으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합시다. 우리 모두 주님의 온유하심과 같이 온유할 수 있기를 소원하며 진심으로 주님께 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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