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성령의 열매(19) -절제
말씀. 빌4:5


성령의 열매 중 마지막은 절제입니다. 절제는 마지막 시대에 더욱 절실히 필요한 덕목입니다. [너희의 절제를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것이 바로 절제해야 할 이유요, 근거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재림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절제의 열매를 맺고 절제를 모든 사람이 알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절제를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고 하십니다. 왜 너는 남들처럼 옷을 입지 않고 그렇게 고풍스럽게 옷을 입고 다니느냐? 고 하면 그들에게 절제된 옷차림의 이유를 알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옷은 본래 수치를 가리라고 주님이 만들어 주신 것이란 것부터 죽 설명을 해 주고, 왜 우리는 이 시대의 유행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되는가를 알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왜 주말에 여행이나 영화나 연극이나 파티를 즐기지 않고 매주 조용히 그렇게 보냅니까? 물으면 주의 첫날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성경적이고, 왜 시간을 사서 아껴야 하는지를 알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쓰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돈을 벌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절제]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절제를 알게 하는 가장 쉬운 것은 옷 차림과 식습관 같은 것에서 알려 줄 수 있습니다. 남들이 하는 옷차림을 따르지 않고, 남들이 마시는 술을 마시지 않고, 남들이 들락거리는 일들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당연히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겠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절제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하는 기회가 되게 하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은 옷 입는 일에서부터 절제를 배워야 합니다. 요즘 일반 교회에 가보면 자매들 옷차림이 장난이 아닙니다. 옷의 기본 목적은 가리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옷차림은 보여 주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속이 드려다 보이는 옷은 물론이고 허리선이나 가슴 선이나 허벅지, 다리의 모든 선이 훤하게 드러나는 옷을 입고 오는데 이는 이 시대의 문화가 성경적 사고를 갖지 못한 청년들의 가치를 점령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육신을 노출하고 보여 줌으로써 자신의 아름다움이나 누군가를 끌려는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예전과 달라서 절약보다는 능력껏 벌어서 많이 쓰는 것이 잘하는 것인 줄 압니다. 가치관이 많이 바뀐 것입니다. 활발히 소비를 해야 생산이 촉진되고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경제 논리입니다. 이곳 미국은 SALES TAX, 소비 지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 하는 정책이 주된 경제 정책입니다. “버는 대로 쓰라, 벌지 못하면 빌려서라도 쓰고 벌어서 갚아라”고 독려하는 그런 사회 제도입니다. 차나 집이나 학교나 모두 미리 갖다 쓰고 살면서 갚으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세상에 살다 보니 “절제”란 말은 거의 가르쳐 질 수 없습니다. 이전에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어도 할 능력도 없고, 자원도 없고, 돈도 없고, 환경이 되지 못해서 아예 절제할 필요도 없이 할 수 없었던 것들이 많았습니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의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심야에 유흥을 즐기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마음대로 놀러 다니는 것도 어려웠기에 여행을 한번 다니려면 작정을 하고 집을 나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해외여행도 매우 수월하게 다녀오는 세상입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 같은 그런 세상이 되다 보니 돈을 벌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려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절제가 덕목이 아니라 절제 할 수밖에 없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세대가 바로 지금 이 세대인 듯합니다.

절제는 감정의 억누름이 아닙니다. 절제는 자유의 제한이 아닙니다. 현대 역본들에는 절제를 모두 Self control(자제)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잘못된 번역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자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자제야말로 자기 억누름이요, 금욕입니다. 모든 종교의 핵심은 금욕주의입니다. 이들은 먹지 말라, 마시지 말라, 만지지 말라, 하지 말라는 등의 금지 사항을 규정해서 지키는 것을 자랑으로 삼습니다. [(곧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손을 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사용하는 대로 없어지는 것이요,) 사람들의 명령과 교리들에 따른 것이라.] (골2:21~22). 그러나 성경은 이런 가르침을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제란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절제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통제해서 할 것과 말 것을 정하여 그 규칙대로 자신의 의지를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절제는 육신이 주는 기쁨 대신 영적인 기쁨을 더 풍성하게 줌으로써 육신으로부터 기쁨을 취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약물을 복용하지 않아도 주의 법인 말씀을 취하면 놀라운 희락과 평강이 마음속에 찾아오기 때문에 약물이나 마약이나 알코올에서 무엇인가를 취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로서의 절제입니다.

사람들이 왜 음행에 빠지고 간음과 호색과 악한 색욕에 빠집니까? 그들 안에 절제의 영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탐욕에 빠집니까? 절제의 영이 없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법이나 학교 교육이 마음속에 있는 죄의 법을 이길 수 있습니까? 절대 없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제 한 해 후배가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는 공부를 꽤 잘해서 입학 성적이 매우 우수했고, 고등학교 때도 처음에 반짝 두각을 드러내다 금방 곤두박질치기 시작해서 대학도 못 갔습니다. 그 친구가 어느 날 제게 찾아와서 “미치도록 공부를 하고 싶은데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를 할 수가 없다”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누가 자신을 강하게 매질하거나 전기 충격이라도 가해서 자신을 바로 잡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까지도 했습니다. 제가 복음을 전했더니 또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정말 믿고 싶은데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절제의 영이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 안에는 죄의 법이 너무나 강해서 그 사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술 때문에 자신은 물론이고 가정을 날려 버리고, 회사에서 쫓겨나도 여전히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내 지체 안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기 때문이라.](롬7:23). 마음의 법으로는 죄의 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외부적 환경으로도 죄의 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생명의 성령의 법만이 죄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롬8:2).

절제란 주님께서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도록 주신 더 강한 법입니다. 신법이 구법을 우선하고 상위법이 하위 법을 우선하고 특별법이 일반법을 우선하듯이 [생명의 성령의 법은 죄와 사망의 법]을 우선하며, 이깁니다. 하나님의 법에 지배를 받는 것을 일컬어 우리는 [절제]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도 주님이 주시는 절제의 영이 없으면 결코 자신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흔히 성인의 경지에 올랐다, 부처의 경지에 올랐다, 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칭송을 듣는 사람들도 스스로 자신을 이긴 경우는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예외 없이 모두 사망의 법에 따라 죽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법에 졌기 때문에 사망의 법에 따라 죽은 것입니다(롬6:23). 절제란 하나님의 법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법, 사망의 법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대의 표적 가운데 하나는 절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타고난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멸시하며](딤후3:3). 심리학이나 교육학에서는 절제를 아름다운 덕목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요즘 학생들이나 젊은 세대의 사람들이 오래 참음이나 견딤을 거의 모르는 것은 이 사회가 성령의 가르침이 아닌 마귀의 가르침에 따라 문화가 형성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약, 알코올 중독, 약물 복용, 스트레스, 우울증 등 이런 모든 일들은 절제를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절제를 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부작용입니다.

힘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배운 것이 없어서, 내 편이 별로 없어서 참는 것은 절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고자 하는 원함을 뒷받침할 어떤 힘이 없기 때문에 포기하거나 후일을 기약하며 유예해 놓은 것이지만 절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떤 일본인이 쓴 “운명을 만드는 절제의 성공학”이란 책을 보았습니다. 저자는 쓰기를, ‘성공적 운명’ 만들기 제1원칙은 ‘절제’이며,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절제’를 실천한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저자는 절제의 습관이 그 사람의 운명을 만든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성공한 사람이 적은 이유는 절제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며 절제의 결심을 이끌어 주기 위해 책을 내었다고 했습니다. 저자는 성경적 진리를 통해 ‘성령의 열매로서의 절제’에 대해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진단은 어느 정도 맞았지만 처방이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도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성품인 절제에 대해서 증거 하고자 합니다. 인내, 오래 참음, 모든 견딤 등과 거의 비슷한 말로 사용되는 것이 절제이지만 그 의미는 상당히 다릅니다. 오래 참는 것(longsuffering)은 순간순간 절제의 연속입니다. 인내는 때가 이를 때까지 참는 것입니다. 절제는 순간순간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모든 견딤 역시 절제의 바탕 위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절제의 열매를 통해서 참는 것이 아니라면 기독교인들은 모두 울화병이나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되어야 정상일 것입니다. 성경대로 사는 길은 스트레스로 정신병자가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 절제를 맺게 하심으로써 자연스럽게 우리는 기쁨으로 참고, 큰 평강 가운데 노래하며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성령의 열매가 다 마찬가지지만 절제는 성령이 맺으시는 것이며, 우리 안에 영이요 생명이신 말씀을 통해서 맺으시는 열매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신성한 성품을 우리 안에 인격으로 맺어지게 하십니다. 절제란 어떤 상황이나 사건이나 사람에 대해서 자신의 성질, 자신의 본성, 자신의 판단과 감정에 따라 반응하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반응하는 것입니다. 타고난 자신의 성품을 이미 십자가의 죽음에 넘겨주었기 때문에 자신 안에 살아 계신 주님의 반응으로 반응하는 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여러분의 자아가 십자가에서 아직 죽음의 처리를 체험하지 못했다면 절제해야 할 때 절제하지 못하는 일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저 역시 짜증을 내거나 말을 쏟아 내고 나서보면 절제하지 못한 것을 깨닫고 후회하는 일이 매우 많습니다. 순간적으로 성령을 억누르고 자신의 본성대로 행동함으로써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단순히 실수라고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마다 그런 육신적인 일들이 성령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대적한 영적인 죄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절제는 사랑의 표현이며, 사랑의 속성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7)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참는 것이 오래 참음입니다.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오래 참음, 인내, 절제는 사랑의 핵심 요소입니다. 사랑하면 오래 참고, 사랑하면 절제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한 가지는 오래 참음과 절제를 스스로 인격을 갈고 닦아서 하는 것인 줄 아는 것입니다. 인내심을 기르고 절제를 배우기 위해서 극기 훈련이나 영성 훈련이나 신앙 인격과 품성을 개발하는 그런 프로그램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훈련으로 인내, 오래 참음, 절제가 개발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풍성히 거하면 자연스럽게 절제가 나오게 됩니다. 절제를 키우고 싶으면 사랑을 키우시면 됩니다.

열매를 많이 맺게 하고 싶은 나무가 있다면 우리는 가지보다 땅과 뿌리에 더 신경을 씁니다. 뿌리에 물을 대고, 뿌리 주변에 땅을 파서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내고, 다른 나무들이 자라지 못하도록 합니다. 열매는 가지에 맺히는 것이라고 해서 가지만 돌보는 농부는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절제란 성령의 열매를 바라보면서 그 뿌리가 되는 사랑에 집중을 해야 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아홉 가지 종류로 나열된 것일 뿐 실은 모두 사랑이란 한 가지 열매의 다른 속성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 주목해서 보십시오. 지금까지 몇 시간에 걸쳐서 성령의 열매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모두 따로 따로 정리하고 공부했지만 사실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갈5:22-23). ‘성령의 열매들’이 아니라 열매(fruit)임에 주목하십시오. 사랑이 있으면 기쁨이 옵니다. 사랑에 빠져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 때에 누렸던 기쁨을 알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평강이 넘칩니다. 사랑이 있으면 오래 참게 됩니다. 사랑이 있으면 사랑하는 대상에게 거칠게, 무례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저절로 부드럽게 됩니다. 사랑이 있으면 선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믿음이 생기고, 사랑하게 되면 온유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절제하게 됩니다. 모든 것은 사랑의 또 다른 속성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내 안에 내적으로 미치는 활동이 ‘기쁨과 평강’이요, 형제들과 이웃들을 향해 드러나는 활동이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이요, 하나님을 향해 드러나는 사랑의 활동이 ‘믿음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무엇 하나 사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은 무엇인가?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은 무엇인가? 믿음은 무엇인가? 절제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식으로 질문하고 답을 얻는 사고 방식에 매우 익숙해서 항상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무엇(what, something)이 아니라 누구(who, someone)의 문제입니다. 진리가 무엇이 아니라 누구의 문제였듯이 사랑 역시 누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십니다(요일4:8,16).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고로 우리는 절제의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더욱 주목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난 갈보리 십자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부어 주셨다고 했습니다(롬5:5). 그렇다면 절제는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절제란 내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왕이시오, 주님(Lord)으로 온전히 인정하고 섬기는데서 출발합니다. 자신이 스스로 주체가 되지 않고, 주님의 통제 아래 있게 될 때 우리는 절제된 생각과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의 권위 아래 있는 아이들은 부모로 인해 많은 일에 절제를 하지 않을 수 없고, 선생님의 권위 아래 있는 학생들은 선생님으로 인해 절제를 배우며, 상관이 있는 회사원은 상사로 인해 절제를 하게 됩니다.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주인으로 인해 절제를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삶의 모든 부분에서 절제를 자연스럽게 배우고, 실천하게 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사람이라면 주님의 말씀에 두려워 떨고, 주님의 권위에 굴복하게 되고,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절제의 출발입니다.

믿음, 온유, 절제는 주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서 왕좌를 차지하고 계심으로 맺히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특별히 절제는 성령께서 해야 할 일과 말아야 할 일들, 옳은 일과 잘못된 일 등을 말씀해 주시는 일들에 대해서 우리가 순종함으로 맺는 열매입니다. 절제는 주님의 통제권, 통치권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행하시는 일들에 대해 불신과 불순종으로 응답해 버리면 절제가 아니라 무절제가 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일이나 성경을 읽는 일이나 식사 시간에 밥을 먹는 일이나 운전을 할 때 핸들을 잡고 브레이크나 액셀레이터를 밟는 일이나 모든 일에서 다 절제의 영을 주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기분이 좋아서 오늘 하루 아무 일도 하지 않고 5-6시간을 기도에 전념했다고 합시다. 와...대단한 일입니다. 오늘은 하루 10시간을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다 아예 기도원으로 가서 3박 4일 그렇게 했다고 합시다. 정말 영적인 사람이구나. 정말 신앙에 열정이 있는 사람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매일 이렇게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가정생활이나 직장 생활이나 사회생활이 전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절제가 없는 사람은 균형이 없고, 질서가 없고, 과도함만이 있게 됩니다. 절제의 열매는 사고와 행동과 삶의 균형을 잡아 줍니다.

기적을 행하고, 이적이 일어나고 표적들이 보이는 것이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 마음이 이전과는 달리 우리를 다스리시는 주님의 뜻대로 움직여지고 주님의 뜻을 마음으로 행하고자 하는 소원으로 충만하며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는 것 등이 우리의 소원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성령의 열매를 맺으심으로 우리는 성령으로 걷고, 성령으로 행하고, 성령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품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요, 하나님의 신성한 권능과 능력이 우리 안에 자리 잡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이미 여러 번 언급했듯이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 매 순간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기도할 때나 찬양할 때나 전도할 때나 예배드릴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장사를 할 때나 일을 할 때나 아이를 돌볼 때나 설거지를 할 때나 동일하게 필요한 것임을 잘 알 것입니다. 절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절제는 우리가 운전할 때나 대화할 때나 생각할 때나 길을 걸을 때나 언제 어디서나 늘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운전할 때 절제하지 못하면 과속을 하게 되거나 부주의함으로 사고를 내게 됩니다. 대화할 때 절제하지 못하면 우리는 덕을 끼치지 못합니다. 말도 잘하고 늘 재미있게 좌중을 주도하는 그런 대화라도 절제하지 못하면 그 대화는 엉망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너희 말을 소금으로 간 맞추어 항상 은혜가 있게 하라.](골4:6a)고 하시는 것입니다. 소금이 바로 절제(節制)하게 하는 것입니다. 절제의 삶은 우리가 매 순간 언제나 어디에서나 필요한 것입니다.

절제란 분출되는 육신의 정과 욕심, 욕구와 바라는 것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절제는 과도함을 막는 브레이크 역할을 합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봅시다. 좋은 차가 있습니다. 힘도 좋고 속도도 잘 나는 좋은 차라면 거기에는 가장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요소는 브레이크의 성능입니다. 달리는 것보다 어떠한 환경에서나 운전자의 뜻대로 잘 조절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코너링 때는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다, 평탄한 길에서는 좋은데 내리막길에는 브레이크가 말썽을 일으킨다는 등의 어떤 상태에서는 조절이 잘 되지 않는 차라고 하면 그 차를 좋은 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차는 누구도 운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생활을 잘 하는데 어떤 특정한 경우에는 도무지 조절이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면, 어떤 일을 닥치면 평소의 냉철함이나 판단력이 모두 마비되어 버린 듯이 제어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을 조절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리 지혜가 출중하고 능력이 탁월하다 해도 그는 별로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절제하지 못함으로써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 스스로를 망쳐 버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한 잔 더 마신 술로 인해 음주 운전이 되고, 약간 속도를 더 낸다는 것이 과속이 되고, 한 게임만 더 하고 일어난다면서 못 일어나는 상습 도박은 이미 환자로 따로 분류해야 할 정도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과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적당히 먹는 것을 넘어서면 과식이라고 합니다. 더 먹고 싶은데 못 먹는 것도 아쉽지만 그만 먹어야 하는데 멈추지 못하면 과식이 됩니다. 이때가 바로 과식입니다. 용량을 초과해서 마시면 과음이라고 합니다. 적절한 선 이상을 넘긴 것입니다. 규정 속도를 넘어서 달리는 것을 과속이라고 합니다. 약이 좋다고 해서 과용하지 말라는 광고를 봅니다. 잘 못 쓰는 오용도 무섭지만 좋다고 해서 무턱대고 많이 쓰는 과용 역시 그 부작용이 적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절제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오용은 잘못된 지식과 판단의 결과이지만 “과용, 남용, 만용, 과도함, 무절제”는 모두 절제가 되지 않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절제란 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무절제'란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肢體)들을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골3:5). 무절제가 무엇입니까? 킹제임스 성경에서 말하는 무절제란 ‘좌표에서 어긋나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무절제한 애정이란 정한 좌표에서 벗어난 애정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자를 대고 선을 그리는데 손에 힘이 들어갔던지 어떤 일로 선이 잣대에서 벗어나서 이상하게 비뚤게 그려지는 것이 무절제입니다.

절제란 힘을 한 곳에 집중케 하는 것입니다. 절제는 힘을 바른 방향으로, 올바른 대상을 향해 집중하게 합니다. 사람은 여러 가지 일을 모두 잘하고 싶어 하지만 한꺼번에 모든 일을 잘 할 수는 없습니다. 한 번에 두 방향으로 달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서 밭을 잘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경험하듯이 우리는 언제나 한꺼번에 다방면에 능통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때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신문이나 방송에 나올 때면 대단하다고 칭찬하고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보면 모든 일에 최고의 능률을 발휘하기 위해 모든 일에 절제했던 사람들이란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 혼, 몸을 충만케 하시고 최고도로 능력과 지혜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언제든지 절제할 수 있는 힘을 허락하십니다. 반면 술 취함은 무엇이나 절제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술 취함은 우리 몸의 제어 장치를 파괴시키는 혼의 마취제와 같습니다. 우리 영이 성령으로 충만한 것과 우리 몸에 술이 가득 찬 것의 차이는 그 혼에 미치는 영향이 정 반대로 드러나는데 그 결정적인 차이가 ‘절제’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過度)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 술 취함에는 과도함이 있습니다. 술 취함에는 과도함이 있고, 성령 충만은 절제가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를 주목하십시오.

육신의 일은 무엇이나 절제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9-21을 보십시오.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色慾)과 우상 숭배와 마법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미리 말하노니,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갈5:19~21). 간음, 음행, 부정함, 색욕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주신 정상적인 성적 욕구의 절제가 전혀 되지 않을 때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절제는 정도를 제한할 뿐 아니라 그 방향을 조절할 수 있는 힘입니다. 잘못된 방향, 잘못된 대상으로 향하는 욕구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절제이기 때문입니다. 간음이 무엇입니까? 잘못된 애정의 대상에게로 육신의 욕구가 애정이란 형태로 흐르는 것입니다. 음행, 부정함, 색욕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상 숭배와 마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는 영적 욕구입니다. 마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마술, 마법 등에 자연히 관심이 쏠립니다. 여기에 언급된 17가지의 육신의 일들은 절제되지 않는 육신, 절제되지 않는 생각과 감정에서 표출되는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절제는 승리하는 삶의 첩경입니다. 원함만 있고 절제가 없는 사람은 결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왕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왕관을 얻고자 하느니라.](고전9:25). 승리를 애쓰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승리를 원하기는 하지만 애를 쓰지 않는 사람은 절제를 해야 하는데 바라기만 할 뿐 절제하지 않습니다. 운동선수들은 먹는 것, 쉬는 것 하나 하나까지 모두 스케줄에 따라서 감독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어떤 일에 일가를 이룬 사람들은 어떤 분야에 부단히 노력하는 것 뿐 아니라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부단히 절제한 사람들입니다. 절제는 모든 힘과 지혜를 한 곳에 집중하는 힘입니다. 집중을 방해하는 것들은 모두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절제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절제는 마지막 시대에 성도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너희의 절제를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우리는 이 시대가 주님이 오시기 직전이란 것을 잘 압니다. 이런 때에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때가 악한 이 시대에 우리는 절제를 해야 할 필요성을 더욱 많이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절제는 자유의 제한이 아닙니다. 절제는 자유를 더욱 자유답게 하는 것이며,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온유와 같은 모든 열매들이 맺힐 수 있는 영적 환경을 조성합니다. 열매 맺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제어하고 막아줍니다. 영적인 힘을 낭비하게 하는 것들을 모두 막아 줍니다.

사람들은 이런 세상이 천년만년 더 지속 될 줄로 믿는 듯합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삶에 절제가 없습니다. 심판의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재림 신앙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절제하도록 해 주는 핵심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육체의 정욕을 절제하게 합니다. 육체의 정욕에는 지나친 식욕과 무절제한 애정과 성욕 등이 있습니다. 자신의 몸과 관련한 이런 정욕은 불건전하며 또한 건강에 해로움을 끼칩니다. [그러나 그들이 억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게 하라. 이는 불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라.] 고 가르칩니다. 성적 욕구는 혼인관계를 통해 정상적으로 성립됩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 몸은 성령님의 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거하시는데 합당하지 못한 것들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의 주인으로 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절제케 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생각(마음)과 말을 절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열심을 다하여 네 마음을 지키라. 이는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니라.](잠4:23)고 말씀합니다. 무엇을 지키려면 지키는 파수꾼이 필요하고 열쇠가 필요합니다. 절제란 마음을 지키고 입의 문을 열고 닫는 열쇠 역할을 합니다. 마음의 생각이 곧 그 사람의 어떠함입니다. 생각은 말을 지배하고 말은 행동을 유발시킵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과 생각을 주장해 주시고, 지키시면 말과 행동이 저절로 절제되어 나옵니다. 절제된 행동, 절제된 언어가 나옵니다. 사람이 가장 절제할 수 없는 취약점 가운데 하나는 탐심입니다. 탐심은 전적으로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탐심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성경에 나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육신과 함께 그 애착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육신과 함께 애착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첫 번째요, 두 번째는 [위에 있는 것들에 애착(愛着)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지니](골3:2)란 말씀대로 우리의 눈이 오직 하늘에 있는 것들에 가 있게 되면 땅에 있는 것들에 욕심이 생기지 않게 됩니다. 마음이 위에 있으면 땅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절제된 행실을 보여 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절제를 보여 줄 수 있을 만큼 절제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도록 주님의 손아래 더욱 겸손히 엎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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