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성령의 열매(17)
말씀.. 마11:29


성령의 열매로서 언급된 여덟 번째는 온유(meekness)입니다. 온유란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말입니다. 온유란 말이 한국말에서 그렇게 자주 사용되는 어휘는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부드럽다,. 온화하다, 친절하다, 따스하다, 상냥하다 는 등의 대체 어휘들을 쓰기 때문에 [온유함]이란 말은 거의 교회 내에서 교인들끼리만 사용하는 ‘성경 용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말은 사고와 가치관, 삶에 밀접한 연관을 맺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께서 가르치신 어휘들(고전2:13)을 자주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영어권 사람들은 성경 용어와 일상용어의 차이가 거의 없이 쓰입니다. 이들에게 로마서 10:8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그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10:8). 그러나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성경말씀은 일상 언어와 매우 유리되어 있습니다. 유교 용어와 불교 용어가 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반면 성경의 어휘들이 생활과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의식적으로 성경의 어휘들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그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란 말씀이 체험되어야 할 것입니다.

온유란 무엇인가? 온유는 연약함은 아닙니다. 온유함은 냉철함이나 강퍅함과 대조되는 성품입니다. 가죽은 부드럽지만 질기고 강합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질기고, 사람의 피부에 감촉이 좋습니다. 사용하기에 매우 편합니다. 비단을 보십시오. 질감이 매우 좋으면서도 강하고 부드럽습니다. 베옷은 부드럽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단과 가죽을 좋아 합니다. 쇠는 강함을 대표하는 물질입니다. 그러나 스프링은 어떻습니까? 강하지만 탄성과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성품은 남자답게 강건하고, 대장부답게 강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온유해야 합니다. 온유는 친화성입니다. 온유하면 누구에게나 접근할 수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습니다.

온유함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주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지만 한없이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다가오셔서 함께하실 수 있으십니다. 온유함이란 윤활유와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마11:29)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성품은 온유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의 성품이 내 안에서 열매로 드러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천성적으로 결코 온유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의 육신은 완악하고 뻣뻣합니다. 흔히 온유함을 애완용 강아지나 고양이나 초식 동물들의 순한 성품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어느 정도 이해를 돕기는 하지만 이런 것이 온유함은 아닙니다. 때로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없이 부드럽고, 순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이나 신앙적인 면에서는 그렇게 완악할 수 없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든지 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양 같고, 연한 풀 같고, 인자해 보이는 사람이 복음이나 진리를 접할 때는 결사코 반대하는 어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온유는 무기력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온유함이란 게으름과 부주의, 실수, 안일 등에서 나타나는 친절과 비굴이 아닙니다. 타협이나 자기 의견을 무조건 포기함으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의 양보를 말하지도 않습니다. 온유함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진리에 대해서는 사자같이 담대하고 박해를 받을 때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비폭력 무저항으로 모두 받아들입니다.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모세나 다윗은 온유한 사람들로 나오지만 타협이나 무기력이나 비굴한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고전4:21). 온유함이란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이 아닙니다. “분노할 만한 때에 노하고, 분노하지 않아야 할 때 노하지 않으며 자기의 본능과 충동과 정욕을 하나님의 다스림에 따라 억제하며 자기의 무지와 연약함을 아는 겸손을 가진 자”를 온유한 자라고 합니다. 온유한 자란 하나님의 영과 말씀을 접할 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그 틀에 따라 자신이 맞추어지는 사람을 말합니다. 말씀은 지식과 진리의 틀입니다(롬2:20). 성경은 교리의 틀입니다(롬6:17). 성경은 건전한 말씀의 틀(딤후1:13)이라고 합니다. 강한 쇠라도 녹여서 틀에 부어 넣으면 원하는 형태의 틀이 나옵니다. 시멘트를 적당히 비율로 섞어서 짜놓은 틀에 부어 넣으면 어떤 모습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주님이 주신 틀 속으로 들어가 그에 알맞은 사람으로 빚어져야 합니다. 온유함이란 틀 속에 부드럽게 들어가 제대로 빚어지는 성품을 말합니다. 바로 잡아 주면 바로 잡히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힘이 없어서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사람들이요, 지혜가 없어서 속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손해를 당하고, 말을 못해서 조용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침묵하는 사람들이요, 무엇이든 덕을 세우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은 죽고 없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온유하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전능하시지만 자신의 전능하신 능력을 다 드러내 보이면서 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무능력한 분처럼 보일 정도로 오래 참고 인내하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마음의 생각과 상상까지 다 아시는 분이시지만 죄인들의 사정을 물어 보시고, 필요한 것들을 말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진지하게 대화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온유함입니다. 돈이 없어서 못쓰면 비참하지만 있으면서도 쓰지 않으면 절약이 되고, 검소한 사람이 됩니다. 힘이 없어서 굴복하면 비애를 느끼지만 힘이 있으면서 참으면 양보가 되고 겸손이 되고 배려가 됩니다. 권세가 없어서 내는 지혜로운 의견은 견해가 되고, 참고 사항이 됩니다만 권세를 가지고 하는 의견은 정책이 되고, 결론이 됩니다. 주님은 늘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지만 은혜로운 말씀이었습니다. 온유함/유순함이란 하나님께 배운 사람들의 성품이요, 본성이 되어야 합니다.

온유함이란 오래 참음과 절제와 연관되어 있고, 한 편으로는 부드러움이나 겸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간에 자신의 힘, 지혜, 능력을 조화롭게 조절하는 능력이 바로 온유함이란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시오, 이 땅에 유대인의 왕으로서 태어나셨고, 왕으로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왕권을 주장하시면서 물리적인 힘, 정치적인 힘, 군사적인 힘, 민중의 힘을 집결시키거나 추종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을 타셔야 할 상황에서도 나귀를 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너희는 시온의 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느니라. /그분은/ 온유하사 나귀 위에 앉으시나니 나귀 새끼 곧 어린 수나귀니라, 하라, 하였느니라.](마21:5). 자신이 받아야 할 정당한 존경과 영광조차도 주님은 사양하셨습니다. 나귀를 탈만한 존재여서 나귀를 탄다면 온유함도 겸손함도 아닙니다. 그러나 마땅히 말을 타고 승리의 입성을 해야 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야수들을 잡아서도 길을 들여서 유순하게 만들어 냅니다. 들소가 일하는 소가 됩니다. 늑대가 길들여지면 개처럼 될 수 있습니다. 돌고래나 상어가 길들여질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강력한 징계와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서 야성이 점점 둘어 들고, 사람의 말을 듣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돈벌이를 위해서 이런 짓을 합니다만 이것이 이들의 본성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사람이 짐승처럼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나 정신 교육에 의해서 철저히 세뇌되어서 변한 것이라면 그것은 온유함이 아닙니다. 훈련과 징계를 통해서 강제적으로 만들어지고, 공포로 조성되고, 인위적으로 조작된 성품은 정당한 대상을 향해 정당한 순간에 정상적인 판단을 통해 정당한 반응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 주님은 온유하신 분이시지만 화를 낼 때는 내셨습니다. 누구나 정당한 대상을 향해서 정당한 때에 정당한 방법으로 정당한 정도로 화를 낼 줄 안다면 그는 온유한 사람입니다. 분노를 내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분노를 언제 어떻게 어느 정도로 내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① 온유함과 하나님. 온유한 자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삽니다. 온유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손길이 선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따지거나 불평하거나 거역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온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항하여 싸우지 않고 하나님과 더불어 갈등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대하여 만족하는 마음이 바로 온유한 마음입니다.

② 온유함과 사람.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너그러운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의 온유함이란 내게 해를 입히는 사람, 모욕을 주고 상해를 주는 악한 사람들까지도 용납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성경에는 모세를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자신을 대항하고 대적하고 모욕하고 비난하고 반역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늘 참고 견뎠을 뿐 아니라 용서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다윗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을 저주하는 시므이를 향해 같이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온유한 사람이란 자아가 상하는 것에 대해서 개의치 않는 사람입니다. 자아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온유란 다른 사람이 나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며, 나를 저주하고 미워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에 대해서 복수하지 않고, 대항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내에서도 형제들이 자신을 평하는 것이나 욕하는 것이나 비방한다는 소문만 돌아도 절망하고 낙담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소문에 민감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에서 자신의 양심을 건드리는 소리가 나오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왜 저러나. 목사 너나 잘해라.”하며 욕을 퍼부으며 듣습니다. 평소에는 목사님, 목사님 하면 서갖은 좋은 소리를 하던 사람도 두세 번만 설교에서 자기에게 해로운 소리가 나오면 견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욕을 하고 비방하고 여러분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 사람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다윗처럼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깁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억울함을 살펴 주시고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시리라고 믿습니까? 다윗이나 모세처럼 그들과 싸우지 않고 복수하지 않고 온유한 심령으로 그들을 대할 수 있습니까? 악을 행한 그 사람이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그를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령의 열매인 온유가 여러분 안에 이미 맺혀 있는 것입니다.

③ 온유함과 세상. 온유한 사람은 환경에 감사하며 참고 견디며 삽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아무리 불합리한 일이 전개된다 할지라도, 아무리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 전개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요셉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인간 같지도 않는 형제들로 인해 받은 육체적 고생도 고생이지만 심적 고통과 상처는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형제들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창45:5). [그런즉 이제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거나 당신들 스스로에게 노하지 마소서. 이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앞서 보내셨음이요,](창45:5). 지금 처한 환경이나 시련이나 곤란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며 감사하는 것이야 말로 온유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처한 모든 환경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일치시키기 위해 그 속에 두시는 것이라 믿는 것이 온유입니다. 산과 같이 나를 짓누르는 환경의 변화, 사건 사고의 발생 등에서 우리는 오히려 감사와 찬양을 부르는 것이 온유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모든 일 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능력과 주권 아래 있음을 믿습니까? 그 믿음이 여러분은 온유하고 선하고 오래 참고 부드럽고 절제하게 한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그 믿음이 바로 승리를 줍니다.

온유함은 우리 주님의 성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마11:29). 온유함은 스승의 성품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아니면 쉽게 나아가 접근할 수 없고, 배울 수 없을 것입니다. 가르침을 주려는 사람은 반드시 온유해야 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지혜와 놀라운 기술을 지녔다 해도 온유함으로 가르쳐야 온유함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너무 잘해주고, 친절하고 상냥합니다. 아이들이 어느 날 아버지가 공부도 잘하셨던 분이란 사실을 알고 모르는 것을 가지고 가서 질문도 하고 배우기도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본격적으로 아버지에게 배우려고 했다가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다시는 아버지에게 배우지 않겠다고 말하는 아이들의 가정이 많습니다. 또 아버지는 자식을 못 가르친다는 말을 합니다. 자식을 가르쳐 보면 20-30분도 안되어서 성질이 터져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자신이 차분히 잘 가르칠 줄 알았는데 막상 해 보니까 자신 안에 온유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늘 자신에게 친절한 줄 알았는데 운전을 배우면서 본성이 다 드러내 버렸다는 사람들을 봅니다. 경우의 수는 다르지만 모두 이런 저런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온유함이란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형편없는 줄을 잘 아실 것입니다.

온유함은 배우는 자의 성품입니다. 누구도 온유하지 않으면 제대로 전수받을 수 없습니다. 특히 성경 공부나 설교나 말씀은 믿음과 더불어 온유함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접붙여진 말씀 곧 능히 너희 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1:21). 사람들은 자신들이 반드시 배워야할 것들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배우고자 합니다. 원하는 것이 곧 필요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는 엄밀히 말하면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제빵 기술을 배워서 빵집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좋은 맛을 내는 제빵 기술을 절실히 원하고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겠지만 제빵의 맛과 사업 경영 기법보다 더 필요한 것은 주님을 두려워하고, 정직하고 선한 마음,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는 마음 등입니다. 빵 집 주인이 빵 가게를 운영하는데 제빵 기술보다 온유함, 겸손함이 더 필요하다는 말에 선뜻 동의하지 못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빵 맛을 내라고 하지 않으시고, ‘온유함과 겸손함, 오래 참음과 선함, 부드러움을 가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모든 직업, 모든 상황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하는 이유는 온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배워도 진리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온유함은 사역자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역자들입니다. 목회자나 선교사나 부흥사 등을 흔히 사역자로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고, 세움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역자요,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은 청지기로 여길지어다.](고전4:1),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상속/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율법 조문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이는 율법 조문은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기 때문이라.](고후3:6).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자신을 입증해야 합니다(고후6:4). 사역자들에게 주님은 온유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말씀의 사역자요, 복음의 사역자요, 기도의 사역자란 사실을 아십니까?

온유함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바르게 해 주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도 살펴보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갈6:1). 온유함이 없으면 충고는 해 줄 수 있습니다만 바로 잡기는 힘들 것입니다. 물론 온유함으로 말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잘 듣고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꺼이 받아 들일만한 사람들에게 온유의 영이 없이 말하면 비난과 험담 밖에 되지 않습니다. 험담과 비난으로 회복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책망과 꾸중은 진리를 사랑과 온유의 영으로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책망이 욕이 되고, 꾸중이 잔소리가 되고 맙니다. 대인 관계의 핵심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행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안에서 서로 참아 주며](엡4:2). 이것은 특히 교회 내의 형제들에게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겸손, 온유로 행해야 하며, 특히 오래 참음은 그 뒤에 설명이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서로 참아 주며’. 단지 참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서 서로 참아 주는 것입니다.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골로새서 3:12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마음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골3:12). 친절,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은 대부분이 성령의 열매에 속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온유함을 지니고 있습니까? 누구와 다투고 싸우는 것은 온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대인 관계가 좋지 않은 것 역시 온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인상이 좋고, 말투가 부드럽고, 언제나 신사적인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런 행동은 하루에 한두 번 만나는 사람들, 일주일에 몇 번 만나는 사람들에게나 통할 뿐 매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나 가족들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일이 터져 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저는 외모나 인격을 아주 더러운 쓰레기 취급하게 된 몇 번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처음 교회에 갔을 때 집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은 경이로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만 만나는 타인이었기 때문에 늘 웃는 얼굴, 친절한 어투, 상냥하고 부드러운 태도만 보았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그들이 신앙을 가졌다, 교회에 온다는 것 빼고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데는 몇 달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다 선교 단체에 처음 갔을 때 그 곳에 목자들은 모두 보통 사람들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섬김과 헌신이 몸에 배여 있었던 데다 열정이 흘러 넘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직 주님만을 추구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6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제가 본 것이 모두 허상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이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닐 것이란 생각을 했지만 오히려 선교단체 형제들이나 장로교인들 보다 더 형편없었습니다. 이제 세월이 지나 제 자신도 20년이 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 자신이 그들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온유함은 저의 속옷도 겉옷도 되지 못하고 단지 손수건 마냥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다니다 어쩌다 한 번씩 내다보는 정도로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어디에 놓고 다니는지 찾아도 안 보일 때도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말다툼하는 자가 되지 말며 오직 부드러우며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온유함을 보이게 하라.](딛3:2).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을 보이게 하라.” 기독교는 외식과 가식의 종교가 아닙니다. 선행도 기도도 금식도 남들이 보지 않게 은밀히 하라고 하셨습니다만 온유함은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보이게 하라고 하십니다.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열매는 드러나 보여야 합니다. 온유함이 있으면 누구도 비방하지 않고, 누구와 말다툼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문제로 같은 형제들은 물론이요, 목회자들과도 격렬하게 말다툼한 적이 많이 있습니다. 제 안에 온유함이 없었기 때문에 바로 잡아 주는 것도 아니고, 책망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치고 받고 싸우고 다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서로 비방으로 끝나고 맙니다. 저는 여러 차례 자신을 변명하고 스스로 위안했지만 성령의 찔림과 책망을 받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대적하여 행동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그리하면/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진리를 인정하게 하시리니](딤후2:25). 사람들이 종교 문제로 싸우고 다투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돈 문제로 아니면 다른 문제로 싸우고 다투는 것과 주제만 다를 뿐이지 똑 같은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온유함을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주님의 성품인 성령의 열매는 우리의 선한 행위로 드러나 보여야 합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지식을 갖춘 자가 누구냐? 그는 지혜의 온유함으로 선한 생활에서 나오는 행위들을 보일지니라.](약3:13). 이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신 일들이 선한 행위로 드러나 보여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해 줍니다. 아무 것도 나타내 보여 줄 수 없는 사람들은 꾸며야 하고, 위장해야 합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가장하면서 사는 삶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삶입니다.

믿음, 사랑, 오래 참음, 온유는 모두 성령의 열매입니다만 우리는 이런 것들을 강렬히 열망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 하나님의 사람아, 너는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라.](딤전6:11). 때로 이런 것들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해 버리면 우리는 정말 영적 식물인간이 되고 맙니다. 최고의 은사인 사랑을 추구해야 하듯이 믿음, 사랑, 인내, 온유를 추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실 일이지만 우리 역시 추구하고 사모하고 열망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과 더불어 /너희는/ 열심을 다하여 너희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1:5~7).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맺으시는 열매이지만 우리는 추구하고 더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으시고, 자라나게 해 주시기를 소원하고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충만 하라”(Be filled with the Spirit)고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우리를 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열매를 많이 맺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구하고 그런 것들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바르게 구해야 할 것들, 우리가 소원해야 할 것들까지도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그런 것들을 배우게 되면 그런 것들을 열렬히 소망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자신의 명예를 구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한 수치와 모욕을 구하고, 예전에는 부와 명성을 구했지만 이제는 주님과 복음을 위해 가난과 궁핍을 기꺼이 소원해야 합니다. 생각과 추구하는 소망이 주님의 뜻과 일치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온유함을 추구하라고 하신 것은 온유함이 어떤 강함보다 더 강한 것이요, 권능보다 더 큰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누리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를 위해 마련 해 놓으신 복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는 온유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첫째, 온유한 자는 먹고 만족합니다. [온유한 자는 먹고 만족할 것이며 [주]를 찾는 자들은 그분을 찬양할 것이요,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리로다.](시22:26). 여러분은 초식동물인 소가 많이 먹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사자나 표범, 호랑이 같이 용맹하고 강한 짐승들이 많이 먹을 것 같습니까? 소나 양이 굶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사자와 표범이나 호랑이는 굶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참새가 많이 먹을 것 같습니까? 독수리가 많이 먹을 것 같습니까? 참새가 먹을 것이 많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온유한 자는 사납고 흉포한 사람보다 먹을 것이 많고, 만족을 누립니다. 주님은 온유한 자를 먹이십니다.

둘째, 온유하는 자는 주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분께서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시리니 온유한 자에게 자신의 길을 가르치시리로다.](시25:9). 온유한 자는 진리를 듣고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은 온유한 자를 가르치십니다. 온유한 자는 말씀을 배우고, 구원을 얻습니다. [이는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즐거워하시기 때문이니 그분께서 온유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시리로다.](시149:4). 마음이 교만하고 거만한 자는 배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아무 가르침을 줄 수 없습니다.

셋째, 온유한 자들은 땅을 상속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상속하며 넘치는 화평 속에서 즐거워하리로다.](시37:11). 주님은 이 구절을 산상수훈에서 그대로 인용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임이요,](마5:5). 천년 왕국 때에 주님이 땅을 나누어 주실 때 그 땅을 차지할 사람을 온유한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땅을 상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일컬어 온유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 왕이요, 제사장으로서(*계1:5, 5:10) 통치하게 됩니다.

넷째, 온유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일어나셨도다. 셀라.](시76:9). [[주]께서 온유한 자들은 들어올리시며 사악한 자들은 땅에 던지시는도다.](시147:6). 이 구절들은 모두 재림에 해당하는 문맥입니다만 우리 역시 마음이 온유할 때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어려움에서 건지시는 체험을 합니다. 어려움과 곤란에 빠질 때마다 우리는 마음을 더욱 낮추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데 이런 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다섯째, 환란 날에도 숨겨집니다. [지금까지 주의 공의를 행한 땅의 모든 온유한 자들아, 너희는 [주]를 찾으며 의를 구하고 온유를 구하라. 너희가 혹시 [주]의 분노의 날에 숨겨지리라.](습2:3). 주님은 공의를 행하고 온유한 자들을 ‘주의 분노의 날’에 숨겨 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대 환란 날에 남게 될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가운데 적그리스도의 통치 하에서도 숨겨짐으로 환란을 통과합니다. ‘혹시’라고 말씀하신 것은 전원 모두 예외 없이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목 베임을 당하고 어떤 이는 고난을 당하고 온 몸으로 환란을 경험합니다.

성령의 열매로 맺히는 성품들은 하나같이 선천적인 기질이 아니며 육신의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이 아니며, 환경이나 학교 교육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을 가진 후에 서서히 점진적으로 변화를 받아가는 것입니다. 온유는 주님의 성품입니다. 온유하신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온유하신 주님께서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화나게 하면 우리 힘으로는 감정을 억누를 수는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기에는 힘이 듭니다. 그 때는 내가 그 일을 다루지 말고 주님께서 그 일을 다루시도록 맡기십시오. 나의 온유함이나 갈고 닦은 인격을 의지하지 말고 내 안에 계신 주님과 성령께서 그 일을 상대 해 주시도록 하십시오. 누가 자꾸만 고통과 아픔과 실망만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또 지금 당신은 아주 굴욕적이고 분이 터지는 환경 가운데 놓여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 사람이나 그 환경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 나가고 있습니까? 그 사람과 똑같이 맞서서 싸우고, 그 환경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분노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우리는 분명히 멍에가 있습니다. 고난이나 환난이나 고통은 우리들로 하여금 인내를 배우게 하고, 또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맺으실 온유의 열매를 통해서 우리는 늘 온유한 성도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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