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입다는 딸을 번제 헌물로 드렸습니까?
답변. 예, 그렇습니다.
입다의 맹세로 드린 번제 헌물은 성경 신자들 가운데서 논쟁이 심한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떠나 평안히 돌아올 때에 무엇이든 내 집 문에서 나와 나를 맞이하는 것은 확실히 {주}의 것이 되리니 내가 그것을 번제 헌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삿 11:31).
"그것"은 앞에 나오는 '나를 맞이하는 것', '주의 것'을 받습니다.
입다는 주께 번제 헌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했는데 '번제 헌물'은 누구나 아는대로 희생물을 태워서 드리는 헌물입니다. 문제는 그 대상이 사람 그것도 다름 아닌 자기 딸이었다는 점입니다.
[¶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작은북을 잡고 춤추며 나아와 그를 맞이하였는데 그녀는 그의 유일한 아이로 그녀 외에는 그에게 아들딸이 없었더라. 그가 그녀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네가 나를 심히 참담하게 하였으며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도다. 내가 {주}를 향해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매] (삿 11:34,35).
입다는 자기를 맞으러 나오는 딸을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슬퍼했고 참담해 했습니다.
번제 헌물로 드려야 할 것이 자기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많은 설교자들, 주석가들이 여기서 번제 헌물은 번제 헌물이 아니라 영적 희생물로서 평생 독신으로 살며 주께 헌신하는 것이란 주장을 합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사람을 태워서 바치는 헌물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란 점입니다.
둘째, 인신공양은 이교도의 관습이며 주께서 금하신 법입니다.
셋째, 번제 헌물로 사람을 바치는 규정은 없습니다.
위의 셋은 모두 성경적으로 사실입니다.
그럼 입다가 맹세한 번제 헌물은 어떻게 됩니까?
입다는 사람이 아닌 동물이면 태워서 드리고, 사람이면 독신으로 바치겠다고 서원한 것이 아닙니다.
번제 헌물은 독신으로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 태워서 드리는 것입니다.
1. 번제 헌물이 사람에게 사용될 때는 영적 희생물, 헌신이란 뜻이 아닙니다.
이는 창세기 22:2에서 이미 확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2:2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 헌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제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일러 줄 산들 중의 하나에서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 하시니라.](창 22:2).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이삭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하라는 뜻으로 알아 듣고 순종한 것이 아니라 나무와 불과 칼을 준비해서 문자 그대로 번제 헌물로 드리라는 뜻으로 알아 들었습니다. 번제 헌물은 희생물을 태워서 드리는 것 외에 다른 뜻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오늘날 성경을 왜곡하는 "현대의 배교한 목회자들처럼"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볼 때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하나님은 사람을 번제 헌물로 받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번제 헌물은 번제 헌물이 아니라 헌신을 말하는 것이며, 아들 이삭을 평생 독신으로 바치면 그것이 영적 희생물(롬12:2)이라고 멋대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생자 이삭을 문자 그대로 번제 헌물로 바치라는 명령으로 정확히 알아 들었습니다. 입다나 입다의 딸이 번제 헌물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바보가 아닙니다.
참고로 성경에 번제 헌물로 드려지는 희생물은 어린양(창22:7), 숫양(창22:13), 비둘기(출29:25), 송아지(레9:3), 수소(레23:18)입니다.
2. 애곡하다는 성경적 뜻과 용례를 통해 정확히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입다는 자기 딸을 '번제 헌물'로 드리기로 맹세했고 딸은 아버지가 맹세한 대로 행하도록 자신을 준비했습니다.입다의 딸은 번제 헌물로 드려지기 전에 두 달동안 산에 올라가 자기 동무들과 애곡했는데 "나의 처녀됨(virginity)으로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삿11:37,38-KJV).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애곡하지 않고 "처녀됨"으로 애곡했다는 말로 인해 번제 헌물로 드려진 것이 아니라 독신 생활을 했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이는 앞으로 처녀로 평생 살 것에 대한 애곡이 아니라 "처녀됨으로 죽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애곡입니다.
-처녀됨으로 인해 애곡한다?
이스라엘 처녀들은 자신들이 결혼하기 전 처녀된 자신에게 메시야가 나올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있었습니다(사7:14). 여자의 씨를 낳을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주}가 새 일을 땅에 창조하였으니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둘러싸리라.](렘 31:22).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한 여자에게서 메시야가 탄생한다는 예언의 말씀으로 모든 이스라엘 처녀들의 소망이요 꿈이었습니다. 입다의 딸은 이 부분에 대한 믿음이나 소망이 매우 컸기에 처녀됨으로 죽는 것에 대해 애곡한 것입니다.
[두 달이 지난 뒤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오니라. 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더라.(KJV) 그것이 이스라엘 안에서 풍습이 되어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일 년에 나흘씩 애곡하였더라.] (삿 11:39,40).-KJV
입다가 딸에게 서원한 대로 행했는데 한글 흠정역 성경에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더라."(40-KJV)입니다. 현재형이 아니라 과거형입니다. 한글 성경은 마치 처녀로 살게 했다는 뜻으로 이해하도록 시제를 살짝 고쳐 놓았는데 이렇게 시제를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입다가 맹세한 대로 딸을 번제 헌물로 드릴 때에 입다의 딸이 처녀였다는 말입니다.
입다의 딸과 그녀의 친구들이 애곡했던 것은 그녀가 처녀 상태로 주께 번제 헌물로 드려졌던 것에 대한 애곡입니다. 죽지 않고 처녀로 드려진 것에 대한 애곡이란 것은 아예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3. 독신으로 사는 것이 주께 자신을 드리는 영적 희생물?
이런 해석은 상당히 인기있는 해석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어린 사무엘이 젖을 떼자마자 어머니 한나에 의해 주께 드려진 후로 사무엘은 독신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를 포함해서 아무도 사무엘이 주께 드려진 사실로 애곡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주께 드려진다는 의미가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누군가 나실인으로 또는 다른 방식으로 주께 드려지는 일은 전혀 애곡할 일이 아닙니다.
입다의 딸이 처녀된 상태로 번제 헌물로 드려졌기에 그녀의 친구들은 죽기 전 두달, 죽은 후 매년 나흘씩 그녀를 위해 애곡했습니다. 아버지의 잘못된 맹세로 인해 처녀된 딸이 번제 헌물로 드려져 죽었기 때문입니다.
4. 애곡은 누가 언제 하는가?
애곡이란 표현은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게 될 때, 민족의 멸망과 같은 고난에 대해 쓰는 것이지 처녀됨에 쓰는 표현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애곡이란 표현이 언제 사용되는지 보면 이 문제는 너무나 간단하게 풀립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었을 때 애곡했고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죽었을 때 애곡했습니다. 구약에서 100번 이상 애곡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누가 언제 누구를 위해 애곡하는지, 무엇 떄문에 애곡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죽지도 않고 살아서 주의 집에서 주님을 섬기는 여자를 위해 온 이스라엘의 길르앗 지역 여자들이 일년에 나흘씩 애곡한다는 것은 성경적 용례도 없거니와 상식 이하의 발상입니다.
5. 번제 헌물은 문자 그대로 태워서 드리는 헌물입니다.
기록된 대로 믿기 어렵다는 이유로 이런 저런 해석을 가미해서 진리를 왜곡하는 일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입다가 맹세로 드린 헌물이 성경적으로 옳다, 그르다 따위의 평가나 해석의 문제는 본문과 관련이 없습니다.
한국의 흠정역 성경 번역자는 킹제임스 성경을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자기 생각, 신학, 주장을 가미해서 본문을 오역하고 변개 시켜 놓고는 자신과 달리 믿는 자를 공격합니다. 이는 전형적인 NIV 번역자들의 성경 번역 자세와 일치합니다.
믿기 어려우나 쉽고 단순한 진리!!
글.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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