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마 21:1-22:46
요절: 마 21:
마태 복음 21장은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 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죽음의
발을 띠는 장면입니다. 21장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육일
전부터의 일정을 차례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21장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세 가지 표적과 세 가지 비유를
주신 것입니다.
1-11절은 왕의 출현입니다.
주님은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흰말과 군대가
아니라 나귀새끼 즉 어린 수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1-3).
이는 스가랴 대언자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4).
주님은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에 관해
기록된 말씀을 철저히 성취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로써
주님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이란 사실을
입증하셨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란 사실을 확증했습니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말씀(WORD)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words)이신 성경의 속성은 완전히
일치합니다. 주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이 땅에 오실 때
말구유에서 나신 것에 비견되는 주님의 겸손한 모습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필요를 이
땅에서 구하십니다. 주님은 나귀를 필요로 하셨습니다(3).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먹을 다락방을 필요로 하셨습니다(막14:13-15).
주님은 추수할 일꾼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필요로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몸을
필요로 하십니다.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 내어 드리는
사람은 진정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시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받아야 할
분이 아니십니다. [또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의 손을 통해 경배를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기
때문이라.](행17: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은혜의
사역에 우리를 초청하시고, 동참하도록 하심으로 후한
상급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스가랴 9:9을 보십시오.
본문과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오 예루살렘의 딸아, 큰 소리로 외칠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느니라. 그분은 의로우시고(just)
구원을 소유하시며 겸손하사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 새끼
곧 어린 수나귀니라.](슥9:9). 마태는 의도적으로 이
부분을 빼고 인용했는데 이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스라엘은 구원과 의로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8,9절은
이스라엘 무리들의 열렬한 환영 장면입니다. [매우 큰
무리가 자기들의 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무에서
가지를 베어 길에 흩어 깔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들이 외치며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8-9). 주님을 찬양하는 이
무리에 대제사장, 장로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헤롯
당원들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호산나’란 "당신께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 군중들의
이런 외침은 확실한 믿음의 고백이 아닙니다. 군중들의 이런
찬양은 말씀을 통해 얻은 영적 지식에 기인한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왕으로서의 예수님을 고백하고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시민들은 주님의 입성으로 인해
소동이 벌어졌습니다(10). 주님의 탄생 때에 벌어졌던 소동이
지금 다시 재현된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이 우리의 마음과
가정과 교회와 이 사회에 던질 충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깨어있지 않는 성도들은 주님의 오심에 대해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도시가 소동하여 이르되, 이분이 누구시냐? 하거늘](10).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무리들은 호산나를
외치면서도 주님을 몰랐습니다. 11절의 무리들의 대답은 그
사실을 정확히 보여 줍니다. [그 무리가 이르되, 이분은 갈릴리
나사렛의 대언자 예수님이라, 하니라.](11).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요,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다’가 아니었습니다. 9절의 찬송과 11절의
고백이 다릅니다. 9절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란 찬송은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요, 왕국을 세우실 왕이란 찬양인데, 11절의
대답은 ‘갈릴리 나사렛의 대언자 예수님’입니다. 말씀과
성령의 조명없이 세워진 믿음의 고백이 바로 이런 군중
신앙이며, 육신적 신앙입니다. 이들의 이런 고백의 허망함은
몇 날이 지나지 않아,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로 돌변하는
것을 통해 입증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으로서의 주님,
메시야 통치자로서의 주님을 알아보는 눈이 전혀 없는 영적
소경의 상태였습니다.
12-26은 성전을 정결케 하신
주님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13). 이는
하나님이 성전의 기능에 대해서 친히 정의해 주신
말씀입니다. [곧 그들을 내가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니 곧
그들이 내 제단 위에 드리는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내가/
받을 것이라. 이는 내 집이 모든 백성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사56:7). 그러나 성전 안에는
돈바꾸는 자들과 비둘기 파는 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었고, 성전의 고유 기능과
목적은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12살 때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성전을 방문해서 박사들과 성경 토론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성전이 장사하는 집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사역 첫 해에 성전을 방문했을
때(요2:13-17), 성전은 장사하는 집이었습니다. 주님의 생애
마지막 성전 방문이 된 지금 여전히 성전의 모습은 타락한
모습 그대로였을 뿐만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었습니다.
회개와 심판, 부흥이 없으면 죄악은 종창처럼 번져나갑니다.
유월절을 앞두고 성전은 천하 각지에서 백성들이 나아와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 하는 장소입니다. 성전은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피의 속죄를
깊이 생각하는 곳입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초로
죄를 사해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시도록 기도하는 기도의
집입니다. 성전은 희생을 배우는 곳인데, 백성들은 이익을
추구하는 장사하는 집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백성들의 죄악에 대해 묵과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곳이 짓밟히는 것을 보시고 눈을 감고,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만 불의를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목전에 두신 주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이들을 향해 분노하셨고,
행동하셨습니다. 믿음과 사랑은 Action입니다. 성경의 믿음은
명사형이지만 동사입니다.
성전은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은 주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성전은 주님께 희생을
드리고, 죄를 용서받는 곳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구하는
곳이며, 말씀을 듣는 곳입니다. 장사하는 집은 매매와
불법과 이윤 추구와 탐욕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장사하는
집은 사고 파는 사람들간에만 대화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집이 장사하는 집이 되었고, 이제 불법과 넘치는 도둑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강도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심지어 내가 그것을
보았느니라. [주]가 말하노라.](렘7:11).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완전히 무너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기도와 찬송과 경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말씀대신
장사하는 자들의 외치는 소리가 울려날 때, 이미 이스라엘은
치유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교회의 본래의
목적과 기능을 상실한 채 community로 변하거나 이익 집단이나
삶의 편리를 도모하는 기구로 전락한다면 주님의 무서운
책망 외에 들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17-22절은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여러 나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특권을 상징하는 올리브 나무,
이스라엘의 영적 특권을 상징하는 포도나무, 이스라엘의
민족적 특권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 고난받지만 결코
소멸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상징하는 ‘떨기나무’
등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나무임에 틀림없습니다(마24:32-33, 눅13:6-10). 주님은 3년 동안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눅13:7).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를 통해 믿음에 대한 교훈을 주시는 동시에(19-21),
이스라엘의 불신이 초래할 심판이 무엇인지 함께
가르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형식과 경건의
모양을 갖추기는 쉽지만 성령의 열매는 결코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씨가 없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뿌리가 없이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고(요12:24), 좋은 땅에
뿌려져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마13:23). 말씀안에 꾸준히
거하고, 그리스도 안에 꾸준히 거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요15:5).
성경을 읽는 독자들 중에
이곳 본문과 마가복음 11:12-14의 차이를 통해 몇 가지 질문을
합니다. 주님께서 왜 무화과의 때가 아닌 때에 열매를
찾으시고, 없자 저주하셨는가?란 것입니다.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님께서 시장하시더니
멀리 떨어진 곳에 잎사귀가 달린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으나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는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아직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
때문이더라. 예수님께서 그 나무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그것을 듣더라.](막11:12-24).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잎사귀 보다 먼저 열립니다. 고로 잎사귀가 있으면 자연히
열매를 기대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 가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잎이
나기 전에 그 전해에 자라난 가지에서 열리기 시작하여 6월
전에 완전히 여물게 됩니다. 반면 올해 새로 난 가지에서
열매를 맺는 것들은 8월이 넘어야 열매가 여물게 됩니다.
만약 가을까지 여물지 못한 열매들은 겨울이 지난 후 초목이
소생하는 봄이 오면 다시 여물게 됩니다.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태양 아래 사는 이곳 사람들은 이렇게 과실을 맺는
것을 자주 보았을 것입니다. 저희 마당에 있는 감귤은
일년내내 열립니다. 겨울이면 주춤하지만 이제 다시 봄이
되면서 가을에 열렸던 것들이 본격적으로 성숙하고 익어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무화과로
간 시기는 4월 경입니다. 이는 그 전해의 여문 열매를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는 작년에 아무 열매도 맺지 않은 나무란 뜻입니다.
그리고, 익지는 않았지만 올해 맺을 무화과는 이미
열려있어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없었습니다. 이는 무화과를
쳐다보는 사람들을 모두 속이는 위선이요, 거짓인 것입니다.
누구나 잎이 무성한 무화과를 볼 때 열매를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런데, 조사해 보니 작년, 올해 두 해에
걸쳐 열매가 하나도 없다면 이는 '무화과 나무 사기 사건'이라
할만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주님은 무화과 나무의 저주 사건을 통해 열매없는 종교적
위선과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이 없는(딤후3:5)
이스라엘을 보여 주셨습니다.
22절 말씀은 믿음과 기도의
함수 관계를 나타내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기도의 가장 큰
장애는 불신입니다. 기도 응답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
역시 불신입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생기므로, 성경 읽기와 말씀을 듣는데 게으를 때 규칙적이고,
영안에서 뜨거운 기도를 할 수 없게 됩니다.
21:23에서 주님은 성전에
들어가셨고, 24:1에서 주님은 성전을 떠나셨습니다. 23-26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서 시비를 건
장면입니다. ‘권위’(authority)의 문제는 언제나 사람들의
가장 큰 논쟁거리입니다. 주님은 가르칠 때, 설교를 하실 때,
표적을 보이실 때 권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권위를 주셨습니다(요5:27). 주님은 수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질문에 침례인 요한에 대해 역으로
질문하셨습니다(25). 주님의 질문에 이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답을 몰라서 답을 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답변에 따라 다가올 반대급부가 두려워서 답하지
못했습니다. 위선자들에게는 진실과 진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답변이 자신에게 돌아올 대가가
중요합니다. 위선자들은 사실 여부와 진실 규명보다 자신의
유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주님은 그들의 이런 악한
마음을 아시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나도...너희에게
말하지 아니하리라.](27).
여기서 우리가 배울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고
주신 계시가 있다면 그것을 믿고 순종할 때까지 새로운
계시와 조명을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수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요한의 증거를 받아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의 증거를 믿어야만 예수님의 증거를
믿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처음 주신 것에 불순종하는
성도들에게 그것을 무시하고 새로운 조명과 계시를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은 한 걸음씩 인도하시며,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다음 계시와 조명을 주십니다.
둘째, 우리는 누구에게
권위를 위임받는가? 에 따라 권위의 척도가 달라집니다.
마귀는 용에게 큰 권위(great authority)를 받습니다(계13:2).
사울은 대제사장에게 권위를 위임받아 다마스커스로 달려
갔습니다(9:14).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권위를 주님이
주신 목적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권위를
파괴가 아니라 덕을 세우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위는 너희를 무너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요, 세워 주라고 주신 것인즉 이 권위에 대하여 내가
조금 더 자랑해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니](고후10:8).
주님은 세 가지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21:28-32절은 어떤 농부의 두 아들에 관한 비유입니다. 율법을
잘 준수하고,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지닌 유대인들은 침례인
요한의 증거를 받아 들이지 아니하고, 불순종한 반면 세리와
창기들은 죄인들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전혀 지키지
못했지만 침례인 요한의 증거를 믿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두 아들의 비유를
이스라엘의 상태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21:33-46절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너무나 간결하고 적나라하여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누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전혀
오해없이 다 알아 들었습니다(45). 주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열매를 맺기를 바랐지만 열매는 고사하고 주님이 보내신
대언자들을 핍박하고 죽여 버렸습니다. 아벨 이후로 구약의
전 세대의 거의 모든 대언자들은 백성들로부터 죽임을
당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종이 아닌 아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그 아들마저도 죽여 버렸습니다(39). 그 결과
심판이 임했고, 하나님의 왕국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41,43).
42절 말씀은 신약
성경에서도 여러 차례 반복되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놀라운 일이로다.](시118:22-23).
여기서 건축자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입니다. [이분은 너희
건축자들(바리새인들, 관원들, 제사장들, 장로들)이
업신여긴 돌로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느니라.](행4:11,롬9:33).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렸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에게는 버림받고, 멸시받고, 걸림돌이 되었지만
교회에게는 기초(foundation)이 되었고,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44절은 구원과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이 돌 위에
떨어지면 그 자신만 부서집니다. 그러나 돌이 사람위에
떨어지면 가루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는 심판받습니다. 초림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유대인들은 돌 위에 떨어진
모습이라면 재림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사람들은
돌이 자신들 위에 떨어진 경우입니다. 이는 심판의 강도에서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첫 번째 비유를
통해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는 불순종하는 아들을 통해 성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스라엘을 보이셨다면 두 번째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22장입니다. 22:-14절은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왕’의 비유입니다. 왕은 여러
번에 걸쳐서 불렀습니다. 3절은 복음서에 등장하는 제자들을
통한 부름이라면 4-6절은 사도행전 초기의 사도들을 통한
부름입니다. 왕국은 복음서에서 한번, 사도행전 7장에서
다시 한번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매질하고, 감옥에 가두고, 죽여
버렸습니다. 7절은 주후 70년 경의 예루살렘 파괴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제 왕은 눈을 돌려 이방인들을 부르셨습니다.
9-10절은 인종, 성별, 연령, 남녀 노소의 구분없이 아무나
모두 부르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리적 적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부가 아니라
손님으로 초대받았습니다. 하늘의 왕국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다 있습니다. 하늘의 왕국은 저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
세워질 왕국이기 때문입니다. 왕은 초대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예복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제공해준
예복을 입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복은 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이 하나이며, 성도의 의로운 행위를 나타내는 옷이
다음입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교리적으로
정확히 적용하면 ‘환란 때의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신랑의 친구로 불립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신부라 불립니다. 손님은 손님일 뿐인데, 이들은 환란
성도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성령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성부, 성자, 성령을 모두 배척했습니다.
22:15-22절은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납부하는 문제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헤롯
당원들은 정치 집단이었는데, 카이사르에게 공세를 바치는
문제와 유대의 율법의 문제를 연관시켜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에 따라 예수님을 고소할 생각이었는데, 만약
예수님이 세금을 내는 것이 가하다고 하면 유대인들의
민심을 잃고, 반감을 사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자기들을 통치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반면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로마에 고소를 해서 처형할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보십시오. [그런즉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21). 주님은 하나님과 국가의 의무를 다
감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롬13, 벧전2:11).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국가와 가정, 교회에 대한 의무를 다 감당해야
합니다. 카이사르가 돈에 자신의 형상을 새겼듯이, 하나님은
사람 위에 자신의 형상을 새기셨습니다. 죄는 사람위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지워 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다시 한번 하나님의 형상을 새기셨습니다.
22:23-33절은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관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들은
부활도 영도 천사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모세 오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는데, 모세 오경마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믿지도 못했습니다. 29절은 그들의 무지를
지적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하므로 잘못하고 있느니라.](29). 30-32절은
그들이 어떤 면에서 성경과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서
무지한지 명확히 보여 주신 예입니다. 부활 때에 성도들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같이 됩니다. 32절은
출애굽기에서 모세에게 하신 너무나 유명한 말씀(출3:6,15-16)이었지만
사두개인들은 그것이 부활에 관련된 말씀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34-46절은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시비입니다. 주님은 언제, 어디서,
누가 무슨 질문을 해도 막힘이나 거침이 없었습니다. 율법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에 있는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고, 이웃
사랑이 둘째 계명입니다(37-40). 모든 계명은 이 두 가지에
걸려 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로마서13:8-10에서 이 점을
강조했습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와 사회 단체는 사랑을 인류
보편의 최고 가치로 인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첫째 계명을 무시한 둘째 계명만을 성경의 핵심이요,
기독교의 본질인 줄로 압니다. 첫째 계명이 없는 둘째
계명은 우상 숭배요, 인본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많은
오해 가운데 하나는 주님이 말씀하신 이웃 사랑이 ‘세상을
사랑하라’는 것인 줄로 아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고,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지만
결코 세상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웃
사랑은 사랑이신 하나님을 바탕으로 진리 안에서 해야
합니다. 진리가 배제된 사랑, 진리가 배제된 화평은 모두
거짓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누구를
사랑한다면 그를 기쁘게 하려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누구를 사랑한다면 그를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누구를 사랑한다면 그에 대해 이야기하려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누구를 사랑한다면 그의 친구를 아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누구를 사랑한다면 그의 원수를
미워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누구를 사랑한다면 그가
높임받도록 하려 애쓸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누구를
사랑한다면 그가 모욕받고, 무시되는 것을 참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누구를 사랑한다면 그가 한 말을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이런 것들로 여러분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41-46절은 역으로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모든 질문을 답변하신
주님께서 반대로 그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셨는데,
아무도 답변하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란 사실은 알았지만 그 다윗의 자손이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은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다윗의 아들이었지만 다윗의 주님이셨습니다(시편110:1).
44, 45절은 성경에 대해 박사라고 자부했던 바리새인들을
바보로 만든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주님을 거부했기에 주님은 왕이 아닌 이방인들의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원수들은
주님의 발아래 짓밟히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원수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주님의 모습을 통해 영적 전투를 수행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자신의 의견이 아닌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차분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해답을 가지고
있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이미 답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너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들의 확실함을 알게 하며 또 너에게 /사람을/
보내는 자들에게 진리의 말씀들로 답변하게 하려 함이
아니겠느냐?](잠22:21).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세상 철학과 자기 생각이 아닌 진리의
말씀들로부터 답을 얻어, 해답을 주는 인생이 되기
위함입니다. [오직 너희 마음 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며](벧전3:15). [의로운 자의 마음은
대답을 얻으려고 연구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입은 악한
것들을 쏟아내느니라.](잠언15:28).
22장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성경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구약 전체의 율법을 두 가지 계명으로
요약해 주셨는데,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란
한 줄로 요약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