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태동]읽어야 산다
동아일보가 지난해 창간기념호부터 오피니언면 특별 지면을 통해 ‘책 읽는 대한민국’을 연재하는 등 무너져 가는 활자 문화의 재건을 위해 힘쓰고 있다. 이처럼 ‘책 읽기’와 ‘글쓰기’에 각별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영상매체 연구의 고전이 된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저자 마셜 매클루언이 “미디어가 메시지”라고 말한 이래, 영상매체가 활자매체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물론 영상매체가 활자매체에 비해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생동감 있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스쳐 가기 때문에 시청자들을 수동적인 인간으로 퇴화시키는 위험이 없지 않다. 그에 반해 활자매체는 그 자체는 정적이지만, 독자의 능동적인 지적 참여를 요구하며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이성적인 판단과 상상력의 날개를 펼 수 있게 하는 시간을 허용한다.
월터 옹이 지적한 바와 같이 활자매체는 영상매체와 달리 말을 시각적인 장(場) 안에 영구히 고정시킨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 쓰는 동안 언어의 잠재적 가능성을 무한대로 확대하고, 자신의 사고를 끊임없이 고쳐 짜고 엮는 일을 하며 지적인 능력을 내면적으로 키운다.
또 글을 읽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논리적인 의견에 충분한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므로 글쓰기와 글 읽기의 변증법은 인간의 정신교육과 민주적 의사교환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글을 읽고 쓰는 작업은 개인의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고 사회적인 공간으로 확대된다. 글쓰기는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다른 사람에게 조리 있게 표현하는 근간이 되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을 민주적으로 조정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활자매체는 선진 민주사회 건설을 위해서 일방적인 통로만을 강요하는 영상매체의 기능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자신의 주장에 대한 목소리만 클 뿐 합리적인 토론문화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휴대전화와 영상문화의 발달로 잘 쓴 글이 점차 사라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은 슬픈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학입시 논술시험 때문인지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커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서점가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문장을 제대로 다루는 방법’에 대한 책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 것도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인간 교육을 위해 영상매체에 이미 그 자리를 내주었다고 말하는 기계만능주의자들이 있다. 그러나 존 스타인벡의 말처럼 현대에 이르러서도 책은 영상매체와 겨루면서 그래도 그 귀중한 특성을 경탄할 정도로 유지해 왔고 또 유지할 것이다.
이렇게 글쓰기와 책 읽기는 각각 자신의 주장과 논리를 설득력 있게 개진하고 깊은 생각과 함께 조용히 받아들이는 지적 훈련의 바탕이 된다. 오늘날 서구사회가 훌륭한 민주주의를 성취하게 된 것은 많은 국민이 글쓰기와 책 읽기에 나타난 침묵 속의 의견 교환과 토론문화 정착으로 국민의 의식수준을 성숙한 단계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글과 책은 그 속에 담겨진 지식과 경험을 통해 인간을 성숙한 문명인으로 만들어, 지혜와 경험을 평화롭게 나눌 수 있는 이상적인 민주체제를 가능하게 한다.
책이 없는 공허는 영혼이 없는 것과 같고, 이 때문에 책을 읽지 않는 국민은 정신적으로 타락해서 혼란 속으로 쉽게 무너진다. 문자와의 대화를 통해 의견을 교환할 수 없으면 성숙한 민주주의도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 일고 있는 ‘책 읽기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확대되어야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태동 문학평론가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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