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블로그에 북이 성경적인 악기가 아니다라는 글을 올린 이후로 많은 의견들이 올라오고 첨예하게 다른 시각과 반론들이 나타났다. 단지 북이란 악기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북을 마귀의 악기로 말할 수 있는가? 북이 성경에 없다는 이유가 북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뜻인가? 라는 작은 반론에서부터 그럼 '타악기는 모두 비성경적 악기인가?' 등으로 확산되었다.
찬양에 대해서 짧은 한 마디
교회의 목사로서 설교만큼이나 신경쓰는 부분은 찬양이다.
이는 단지 목사이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라면 음악의 중요성은 언어의 중요성 만큼이나 크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성도들에게 찬양은 기도, 말씀 선포만큼이나 중요하다. 우리는 할례받지 않는 부정한 입술로 기도하고 찬양할 수 없다. 우리는 할례받지 않는 마음으로 주님께 예배 드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할례받지 않는 귀에 듣기 좋은 음악을 찬양이라 할 수 없다.
한국에 있을 때 '경배와 찬양'이란 주제로 매주 청년들이 모여서 몇 시간씩 열광적으로 찬양을 하는 그런 시간이 있었다. 보컬, 기타리스트, 드럼, 북 등이 모두 동원된 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그 속은 흥분과 열기로 완전히 광란의 도가니였는데 전담 찬양 사역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열기를 북돋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현란한 조명 역시 기본이었다. 사이 사이에 짧고도 감미로운 코멘트가 나오고 다시 노래하고, 그러기를 몇 시간씩이나 했다. 음악에 대한 이해가 없던 당시에 이런 행사는 젊음의 열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기독교 청년들에게 발산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그런 모임으로 알았다.
1. 찬양이란 무엇인가? 주님을 높여 드리는 것이다. 주님께 합당한 영광을 드리는 것이 찬양이다.
2. 찬양은 누구에게 드려져야 하는가? 이 세상에서 찬양을 받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오직 하늘의 하나님 한 분만이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3. 찬양은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영으로 드려져야 한다.
어떤 형제가 이번 주에 특송을 하겠다고 한다. 이유인즉 교회 내의 어떤 형제가 무슨 일로 낙담을 했는데 자신이 부르는 찬양을 통해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게 해 주겠다고 한다. 그 때 무엇이라고 했겠는가? "참 마음 씀씀이도 고우셔라." 했을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이다. 찬양은 어떤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누구에게 헌사하는 노래가 아니라 나의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 찬양을 받으신 주님께서 집회에 모인 형제, 자매들의 마음 속에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그 때에 어떤 형제나 자매가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 자신이 부르는 특송으로 누구를 위로하고, 누구에게 무엇을 주겠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이다. 찬양의 목적은 예배 분위기를 고양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찬양은 오직 한 분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곡 선정이나 악기 선정에도 주의해야 한다.
찬양은 일단 가사가 성경적이어야 한다. 주님의 성품, 주님이 하신 일, 주님의 약속 등 주님이 중심이다.
가사가 애매모호하거 전달하려는 메세지가 불분명한 것은 찬양이 아니다. 찬양은 주님께 드리는 것이기에 주님이 주제요 모든 것이다.
찬양의 곡조는 멜로디가 중심이다. 가사를 충분히 음미할 수 있고, 묵상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찬양은 노래로 부르는 곡조 있는 기도이다. 시편은 모두 찬양(송)의 가사이다. 세상 노래는 곡에 가사가 얹히는 식이어서 가사는 몰라도 곡조는 알게 된다. 찬양은 곡조는 몰라도 가사는 알아야 한다. 곡조는 가사를 드러나게 하는 보조 수단이어야 한다.
찬양의 도구는 현악기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타악기는 혼을 제압하는데 사용된다. 데모꾼들 뒤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이는 없다. 거기에는 징과 꾕과리와 큰 북이 필수적이다. 나는 대학마다 동아리에서 농악대가 왜 그리 중요한지 시위 현장을 보면서 절감했다. 큰 북과 작은 북, 징과 꾕과리 같은 타악기들이야 말로 이성을 잠재우고 육신의 본성대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할 때, 시위를 할 때, 이교도들이 인신 공양을 드릴 때, 무당들이 칼 춤을 출 때, 혼을 빼 놓아야 할 어떤 일을 할 때 북이 없으면 결코 원활하게 그 일을 할 수 없다. 지역 교회 내에서 영과 진리로 기도와 찬양과 예배 드리는 일과 북이 어울릴 수 있는가? 이는 해적들의 해골 바가지 문양과 성경의 십자가 만큼이나 부자연스럽고 부조화를 이룬다.
북이 왜 나쁜가? 무엇이 나쁜가? 를 논하기 전에 그것으로 어떻게 성경적 말씀과 메세지를 우리 속에 분명하게 각인해 주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말씀이 우리 마음 판에 새겨지는데 도움이 되는가? 방해가 되는가?를 생각해 보라. 음악에 대한 이해를 가지라고 하면 '내가 너 보다 음악에 대해 더 전문가다!'란 식으로 접근하지 말라. 북이 주체가 되는 놀이, 음악에서 그 가사는 고함 소리와 동반한 짧은 외마디 외에는 있을 수 없다. 북 소리가 울릴 때마다 들은 말씀도 다 떨어질 것이고, 다 지워져 버릴 것이다. 육신은 흥분되겠지만 마음판에는 단 한 마디의 말씀도 간직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교회에 북, 드럼, 강한 비트를 사용하게 하는 마귀의 목적이다.
글. Pastor. Peter Yoon
'목자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명은 모두 설계도를 가지고 있다 (0) | 2006.05.31 |
---|---|
헛된 철학, 거짓된 과학 (0) | 2006.05.26 |
음악에 대한 성경적 가이드라인 (0) | 2006.05.23 |
철도 노선과 성경 (0) | 2006.05.22 |
영어는 미국의 국어가 아니었다. (2) | 2006.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