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에 대한 바른 자세
아래 [바른 판단을 위한 기준]이란 후속 글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어떤 관(觀)을 정립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세속 학자들이나 학문을 연구하는 자세는 기본적으로 자료들을 수집하고 사실 관계를 파악하여 귀납적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연구는 전혀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반면 성도들은 먼저 진리를 선포한 후에 그 선포된 말씀을 붙들고 후에 자신의 믿음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들을 모으고, 사실 관계를 파악하는 연역적 방법을 사용합니다.
세속 학자들이나 학문을 연구하는 자세는 기본적으로 자료들을 수집하고 사실 관계를 파악하여 귀납적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연구는 전혀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반면 성도들은 먼저 진리를 선포한 후에 그 선포된 말씀을 붙들고 후에 자신의 믿음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들을 모으고, 사실 관계를 파악하는 연역적 방법을 사용합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창세기 1:1을 연구하기 위해 세속적인 학자들은 지질학, 고고학, 세계의 신화나 전설, 천문학 등 모든 필요한 자료들을 모으고 점검하고, 실험한 후에 결론을 내립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맞다 또는 아니다’로 결론이 납니다.
반면 성도들은 창세기 1:1의 선포를 일단 믿습니다. 다음에 지질학, 고고학, 세계의 신화나 전설, 천문학 등 모든 필요한 자료들이 어떻게 진화가 아닌 창조인지를 연구합니다. 그리고 세속 학자들로부터 성도들의 믿음을 보호합니다. 세속학자들의 자료나 연구 결과가 성도들이 믿는 선포된 진리를 입증하거나 옹호하는 쪽이라면 곧 바로 수용하고 설교하지만 그렇지 않는 자료들은 아무리 정확한 과학적 자료라고 입증해도 쓰레기처럼 내다 버립니다.
성경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세속의 연구가들과 동일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보존과 영감에 대해 연구합니다. 본문 비평, 사본학은 귀납적인 연구 방법을 교회 내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자신도 모르게 그런 방향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행히 바른 결론에 도달하면 다행이겠지만 십중 팔구는 엇길로 빠집니다. 현재 킹제임스 성경의 보존과 영감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고대 사본들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역본들을 모으고 자료를 연구함으로 얻는 결론은 둘 중 하나입니다. 그의 결론이 맞든가? 틀리든가?
이런 자들은 연역적인 방법을 취하는 자들을 매우 경멸합니다. 자신들의 연구 결과가 ‘킹제임스 성경은 영감받은 보존된 말씀이다!’라고 결론을 내리면, 신실한 신자들은 ‘그걸 연구해서 알았느냐? 나는 처음부터 믿고 알고 있었네!’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며, ‘킹제임스 성경은 훌륭한 번역본이지만 오류가 많다’고 결론을 내리면 신실한 성도들은 ‘말같지 않는 소리하지 말게, 기껏 돈 들여서 오랫동안 이것 저것 공부하더니 머리가 돌았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반면 신실한 성도들의 성경 연구는 매우 단순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보존된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이다! 이미 결론이 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결론이 둘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옳습니다. 이제 킹제임스 성경이 왜 옳은가를 알기 위해서 역본들, 사본들을 수집하고 공부합니다. 그러다 보니 두 가지 결론이 나는 법이 없습니다. 진리는 항상 연역적인 연구 방법을 택합니다. 진리에 대한 바른 자세는 귀납적인 방법이 아니라 연역적인 방법입니다. 신자의 믿음은 귀납적 연구 결과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단번에 주신 말씀, 성령의 능력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꾸며낸 이야기와 끝없는 족보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런 것들은 믿음 안에서 경건하게 세워 주기보다 도리어 논쟁을 일으키는 것이라. 그런즉 그렇게 행할지니라.](딤전1:4). 여기서 “꾸며낸 이야기와 끝없는 족보”란 말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는 70인역의 신화로부터 시작하여 끝없는 성경 족보에 대한 직격탄입니다. 최초의 자필 원본, 원문, 시리아 역, 구라틴역,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 킹제임스 성경과 현대 역본들에 이르기까지 성경 족보를 논하는 일은 한심한 일입니다. 일반 성도들에게는 용어조차 생소한 것들이며, 현재 신앙 생활에 아무런 덕스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세워주기 보다는 도리어 논쟁만 불러 일으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와 논쟁과 율법에 관한 다툼들은 피하라. 그 까닭은 이것들이 무익하고 헛되기 때문이니라.](딛3:9).
왜 자꾸 역본 논쟁이나 끝없는 성경 족보 논쟁이 일어나는 것은 귀납적인 성경 연구 방법 때문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은 학자들의 과학적인 연구 결과나 비평적 학문적 성취에 대해서 아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만약 믿음이 귀납적 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라면 연구 결과가 바뀔 때마다 계속 수정해야 합니다. 학자들이 귀납적 연구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해를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계시와 조명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신자들이 귀납적 연구 방법을 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과 이성을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연역적인 성경 공부 방법이 비과학적, 비이성적이라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성경 문제에 관한 한 훨씬 이성적이며, 과학적입니다. 이는 인간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주를 신뢰하는 까닭입니다(잠3:5).
1. 귀납적 연구 방법을 사용하는 자들은 인간의 이성과 연구의 결과를 신뢰합니다. 반면 연역적 연구 방법을 사용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섭리, 말씀을 신뢰합니다.
2. 귀납적 사본 연구 결과를 토대로 번역했다는 현대 역본들은 감히 누구도, 어떤 역본도 ‘완전하다. 무오류하다. 영감받았다’고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스스로도 불완전함을 인정하며, 업데이트, 수정의 필요성을 인정합니다. 반면 연역적 사고를 하는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신자들은 사본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완전성, 무오류성, 업데이트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수정의 필요성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3.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믿음은 연구와 사유의 귀납적 결과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계시와 조명의 연역적 결과입니다.
4. 원문과 사본의 연구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의 정확도를 판단하기 위해서, 측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성경을 공격하는 자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입니다.
5. 킹제임스 성경의 완전성을 기준으로 연구하는 사본, 역본 공부는 믿음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2. 귀납적 사본 연구 결과를 토대로 번역했다는 현대 역본들은 감히 누구도, 어떤 역본도 ‘완전하다. 무오류하다. 영감받았다’고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스스로도 불완전함을 인정하며, 업데이트, 수정의 필요성을 인정합니다. 반면 연역적 사고를 하는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신자들은 사본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완전성, 무오류성, 업데이트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수정의 필요성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3.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믿음은 연구와 사유의 귀납적 결과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계시와 조명의 연역적 결과입니다.
4. 원문과 사본의 연구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의 정확도를 판단하기 위해서, 측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성경을 공격하는 자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입니다.
5. 킹제임스 성경의 완전성을 기준으로 연구하는 사본, 역본 공부는 믿음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이미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선포된 계시의 말씀에 따른 연역적 사고를 버리고 세속 학자들의 귀납적 사고를 따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Written by Pasto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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