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우리 가운데는 몸이 아파서, 약해서 주님을 섬기는데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주님을 섬기는데 뒤로 물러난 사람들도 있습니다.일반적으로 우리는 육신의 연약함이 영적 성장과 사역에 큰 방해요,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연약함은 결코 주님을 섬기는 장애물이 아닙니다. 그런 연약함은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흔히 영적 생활은 돈 많고, 지혜가 많고, 가정이 안정되고, 직장이 탄탄하고, 몸이 건강해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연약한 이들이 오히려 훨씬 더 영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 쉽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롬8:26). 경건한 성도들은 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담당합니다(롬15:1). 하나님은 '나의 강한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해진다'고 하십니다(고후12:9).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했고(고후11:30, 고후12:5), 연약함 가운데 세계 선교의 대업을 감당했습니다(갈4:13).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육신의 힘을 꺾어 놓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인간적인 지혜를 폐하고, 어리석게 만듭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자랑거리 대신 모욕과 수치를 당하게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진리를 믿고 실천한다는 것은 약하고 어리석고 수치스런 삶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전달자였던 바울이 자신에 대해 자랑하고 기뻐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자신의 열성이나 흠잡힐 것없는 인격이나 높은 학문적 성취나 많은 열매를 맺은 것들에 대해서 자랑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 같으면 자서전을 쓰고, 강연회나 다닐만한 때에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했고, 자신이 날마다 죽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첫째, 연약함을 자랑하고 기뻐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나의 강한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해지기 때문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연약한 것들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 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하기 때문이라.](고후12:9-10). 나를 통해 하나님의 강한 능력을 체험해 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약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십시오.

둘째, 죽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부활의 능력을 맛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먼저 죽어야만 합니다. 날마다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는 사람만이 날마다 부활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두 가지를 자랑했고, 기뻐했습니다. 바울의 영적 생활의 비결은 십자가에 있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신 안에 두는데 있었습니다. 날마다 죽는 것이 기쁨이었던 것은 그로인해 날마다 부활을 경험하고, 날마다 속 사람이 새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지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4:16).

여러분은 자신에게서 자랑할 것이 있고,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것으로 인해 기뻐할 것이 있습니까? 오늘날 성도들이 자랑하고 기뻐할 만한 것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손실로 여겼고, 잃어버렸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비록 내가 육체를 신뢰할 만도 하지만 /그리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어떤 사람이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 자기에게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줄기에 속한 자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관하여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에 있는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이득이 되던 것들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손실로 여길뿐더러 참으로 모든 것을 확실히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4-8).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목타게 갈구하며, 주님께 부르짖어 구하는 것들이 실상은 버린바되고, 손실로 여겨지고, 잃어버린 바되며, 배설물로 여겨져야한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교회 내에서 설교나 성경 공부나 상담을 통해 절대 사도 바울이 배설물로 여겼던 것들을 추구하도록 기도하고, 영적 생활을 통해 그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암시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이는 거짓 대언자들의 행위입니다. 


1. 내게 이득이 되던 것--확실히 손실로 여긴다.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2. 내가 모든 것을 잃어 버린다. 이유는?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입니다.

3. 나는 그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왜? "그분을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불행하게도 교회 내의 많은 성도들은 이런 십자가의 진리와는 정반대로 연약함이 없이 곧 바로 강해지고, 죽음이 없이 곧 바로 부활과 새로워짐을 경험하고 싶어합니다. 이런 일은 결코 없습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통하지 않은 채 아무리 열심히 성경을 읽든, 기도를 하든, 찬송을 하든 무슨 열심을 내든 여러분의 마음 한 구석에 채워지지 않는 텅빈 공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종교적 열성은 나의 육신을 기쁘게 해 주지만 속 사람을 새롭게 하고,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기도도 많이 해 보았습니다.' '솔직히 안 해 본 것이 없습니다.'란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선교사는 20년간 몸이 부서지도록 열심히 선교 사업을 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탄식을 했습니다. 물론 건물도 남아 있고, 본국에서 훌륭한 선교사로 알려져 매년 간증도 했고, 선교지에서는 나름대로 지위도 가지고 있었지만 뭔가 허전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십자가의 진리를 놓쳐 버린 데 있었습니다.

누구도 연약함을 자랑하지 않고, 누구도 날마다 죽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간단한 예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자매들은 자신들이 못생긴 것을 자랑하거나 기뻐하지 않습니다. 더 예뻐지기 위해서 성형 수술을 하고, 몸매 관리를 하느라 온갖 정성과 시간을 다 쏟아 버립니다. 못 생긴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고, 자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육신이 예쁜 것보다 못 생긴 사람이 훨씬 위험에 덜 노출되며, 죄의 유혹에 덜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불평과 불만이 가득합니다. 얼굴 가꾸는데 돈 안 쓰고, 신경 안 쓴다는 것이 얼마나 큰복입니까? 거기다 얼굴이 못생기면 겉모습에 반해서 정신없이 덤벼드는 사람이 아니라 속을 보고 찾는 남편을 만날 가능성이 훨씬 더 큽니다. 영적인 삶을 사는데는 못생긴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전도를 해도 얼굴보고 따라 오는 사람이 없고, 온전히 복음의 능력으로 구령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찬 형제들은 능력과 지식이 부족한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잘생기고 학벌 좋고, 돈 많은 형제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런 형제들이 교회에서 인기를 독차지하기 때문입니다. 무능력과 어리석음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임에도 오히려 그들은 교회 와서 기가 죽고, 자신들을 부끄러워합니다. 세상 가치관이 그대로 교회에 유입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교회가 오히려 세상에 의해서 자신들이 변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세상에서 강한 것이 교회에서도 강하고, 세상 지혜가 영적으로도 지혜가 되고, 세상의 지위가 교회에서도 그대로 지위가 되며, 세상의 부(副)가 교회 내에서도 영적인 부(副)가 되어 버린 자들을 향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이기 때문이라.](빌3:18). 교회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데 어느 정도의 세상 학벌이 필요하고, 재력이 필요하고, 지위가 필요하다면 그 교회는 십자가를 세워 두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또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가 없어 이득을 경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언쟁이 생기나니 너는 그러한 자들로부터 떠나라.](딤전6:5). 십자가를 버린 영적 생활은 영적 생활이 아니라 마귀적인 생활이요, 육신적인 생활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분과 함께 장사되고, 그분과 함께 일으킴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었으며, 장사지낸 바 되었고, 일으킴 받았음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헬렌 켈러나 화니 크로스비, 안요한 목사(낮은데로 임하소서)처럼 신체적으로 눈이 멀거나 어느 한 곳이 부러지고, 없어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상적인 눈을 가지고, 정상적인 귀를 가지고 있지만 오히려 이들보다 더 철저하게 죄에 눈이 멀고 귀가 멀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롬6:2, 611).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세상을 볼 수 없고, 우리의 귀는 더 이상 세상을 들을 수 없고, 우리의 혀는 더러운 것을 말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살아 있는 한 영적인 눈은 결코 시력을 받지 못합니다. 세상에 정과 욕심을 느끼는 마음이 살아 있는 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결코 그 안에서 성장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건강의 눈과 입이 죽음에 처해지지 않고 살아서 육신의 온갖 정욕을 채워 주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면 물리적으로 눈이 죽은 맹인, 물리적인 입이 죽는 벙어리가 되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철저히 세상과 죄에 대해 죽음에 처해져야만 합니다.

신앙 생활이란 구원받은 우리가 우리 몸을 주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린 채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 몸을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눈과 입과 귀와 손과 발과 머리, 생각을 모두 죽음에 처했습니다. [또한 너희 지체(肢體)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며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자로서 하나님께 드리고 너희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여기서부터 영적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to be continued-



-말씀 침례 교회, 십자가 사경회(십자가와 영적 생활)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