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는 죄인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죄인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려는 대신 자신을 감옥에 집어 넣은 경찰이나 검찰, 이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들보다 더 악한 죄인들이 수두룩한데 자신들만 억울하게 잡혀서 형벌을 받고 있다는 불만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 비슷한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죄를 비교하고, 그에 대한 보응을 비교하기 때문에 늘 억울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3:11에는 타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후에 불만이 터져 나옵니다. [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타락한 이스라엘은 반역한 유다보다 자기를 더 의롭다 하였느니라.](11). 이 말씀은 죄인들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낸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비교하는 상대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보다 먼저 멸망했는데, 그들은 회개하거나 반성하는 대신 하나님께 할 말이 있었습니다.
죄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항상 누구와 비교하는 것입니다. 비교의식, 상대주의, 열등감, 교만은 모두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과 사람들을 비교한 결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다보다 더 의롭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억울하고, 피해자란 생각을 할 것입니다. 지금 지옥에 있는 많은 혼들은 자기가 아는 사람이 그곳에 없다는 이유로 매우 억울해하고, 자신이 복음의 피해자요, 십자가의 희생자라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이사야에도 이런 비슷한 말이 나옵니다. [이르기를, 너는 너 스스로 서 있고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 이는 내가 너보다 거룩하기 때문이니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하루 종일 타오르는 불이로다.](사65:5). '--보다'란 말에 주의해 보십시오. --무엇 보다, 누구 보다...비교 의식은 자신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잘 나면 교만해서 죄의 상태에 있게 되고, 못나면 열등감으로 죄의 상태에 거하게 됩니다.
저는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성도들이 좀처럼 이런 비교의식과 상대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처음에 자신이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고후11:5, 12:11). 특히 사역에서나 지식에서는 어떤 사도와 비교해도 결코 부족할 것이 없으며 마땅히 칭찬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옥중 서신에서 쓴 자신의 편지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도 가운데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富饒)함을 이방인들 가운데 선포하게 하시고](엡3:8). 그는 지극히 큰 사도들이 아니라 모든 성도 가운데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가 죽기 직전에 쓴 디모데전서에는 [신실하도다 이 말이여,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하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 함이로다.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딤전1:15). 그는 이제 사람들과 비교해도 자신의 모습은 죄인들 중에 우두머리란 사실을 고백하고 인정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런 변화를 통해 무엇을 배웁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았고, 그 모습은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욥기에서도 동일한 진리를 배웁니다. 욥은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욥은 친구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 나의 순전함을 아시기를 원하노라.](욥31:6)고 탄식할 정도였습니다. 욥은 세상 어떤 사람과 비교해도 자신은 의롭고 잘못이 없었습니다. 앞에서 설교하는 친구들과 비교해도 조금도 나쁠 것이 없었습니다. [너희가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내가 너희보다 못하지 아니하니라.](욥13:2) 욥은 비교를 거부할 정도였지만 여전히 비교 우위에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나도 너희만큼이나 명철(明哲)하며 너희보다 못하지 아니하니 참으로 그와 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리요?](욥12:3). 욥의 이런 자세는 친구들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너만큼이나, 너희보다"란 말에 기분 좋을 사람없고, 전적으로 수긍할 육신은 거의 없습니다. 친구 중 하나는 즉각 [너는 아는데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너는 깨달았는데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에게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으며 네 아버지보다 훨씬 더 늙은 사람도 있느니라.](욥15:9-10)고 반박했습니다. 이들은 끝없이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며 논쟁하고, 반박하고, 싸웠습니다. 사람 앞에서 의로운 것, 사람들보다 거룩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욥이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는 더 이상 누구와 비교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본 모습을 바로 보았는데, 그때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더라.](욥42:6). 우리는 모두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보아야만 합니다.
신앙의 성장을 이루는 첫 걸음은 사람들과의 상대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서 주님을 대면하고,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다른 교회, 동료 목사들과 비교하고 시기하는 육신의 본성을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를 통해 자아를 처리받지 못했다면 이 시간 모두 나의 죄를 처리하시고, 나의 육신을 함께 못박은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이 문제를 해결합시다.
-말씀 침례 교회, 구약 성경 개론, 예레미야(LIV)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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