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왜 만드셨습니까?
사실 이 질문은 모순되는 질문이 아니라 궁금한 사항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인간이 미리 죄를 지을 것을 알았을 것이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을 것을 알았을 터인데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어서 인간으로 죄를 짓게 만들었느냐?는 원망과 책임 전가의 본능이 작용하여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는 은행을 털다 잡힌 강도가 재판관을 향해 무엇 때문에 은행에는 돈이 많아서 나로 하여금 강도짓을 하게 했느냐?는 항변과 같습니다.
아마 초신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하는 질문 가운데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중앙에 왜 만드셨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갖가지 추측과 억측, 구구한 해석이 난무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선하며,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었다고 만 말씀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만드시든지 전혀 간섭할 수 없습니다.
[왕의 눈앞에서 벗어나려고 서두르지 말며 악한 것 가운데 서 있지 말지니 이는 왕이 무엇이든지 자기가 기뻐하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니라. 왕의 말씀이 있는 곳에 권능이 있나니 누가 왕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전8:3,4).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께 창조하신 창조 세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모두 보시기에 좋았으며, 악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31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았더라. 그 저녁과 아침이 되니 여섯째 날이니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좀 자유 방임형으로 무질서하게 생겼더라도 그것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생물들과 무생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 없었으면 좋았을 것을 싶은 피조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파리는 왜 있는가? 모기는 왜 있는가? 아니면 병균들은 왜 있는가? 이런 질문에 우리는 현명하게 답해야 합니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인간은 그런 병균들과 파리나 모기, 독충들에게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 저주를 받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연 생태계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서로 간에도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땅의 모든 거주민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 안에서든지 땅의 거주민들 가운데서든지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분의 손을 멈추게 하거나 그분께 이르기를, 당신은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4:35).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왜?”라고 따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대신 “왜 인간은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았는가?”와 같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계명조차도 순종하지 않았는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그렇게 하찮게 여겼는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 나무를 동산의 중앙에 두신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일입니다. 이 중에 금지된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지 생명 나무는 아니었습니다. 생명 나무를 통해 인간은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나무는 계시록에서 다시 등장합니다(계2:7,22:2,22:14).
에덴의 동산을 조성하신 하나님을 통해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선하심, 축복은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기는가?에 대해서는 알아 볼 길이 없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했다거나 말씀을 믿었다거나 사랑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실과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를 가늠해 주는 잣대였습니다.
이 시험은 오늘날도 동일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갈보리 언덕에 높이 세워진 나무가 있으니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이 나무를 통해 인간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인간이 응답할 차례입니다.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이요, 믿지 않으면 지옥입니다. 이는 아담에게 주어진 약속과 동일한 약속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를 가늠해 주는 잣대입니다.
9. 아담은 언제 죽었는가?
창세기 2:17에 따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이는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분명히 먹는 날(in the day that thou eastest)에 죽는다고 죽는 날짜를 명시해 주셨습니다. 반면 창세기 5:5에는 [아담의 전 생애는 구백삼십 년이었으며 그가 죽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둘은 모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순간에 죽은 것은 영이었습니다. 930년을 살다가 죽은 것은 몸이었습니다. 혼은 불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아닌 영이 죽었음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또한 그분께서 범법(犯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5). 반면 몸의 죽음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영의 죽음과 몸의 죽음에 대해서 안다면 이 둘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말씀이지 모순이 아니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윌슨의 잠언이란 책에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수 십년간 영구차를 몬 운전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목사님들이 인도하는 장례 예배를 거의 매일 보았지만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워들은 성경 구절만으로도 삶과 죽음, 구원과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장례 예배를 마치고 오다가 윌슨 목사님과 운전사가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8:22)고 말씀하셨는데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하고 윌슨 목사님이 운전사에게 물었습니다. 운전사는 이 말에 너무나 당황해서 “그런 말은 성경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사람은 20년 넘게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일을 했는데 자신이 죽은 자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가 이 구절을 통해 자신이 죽은 자란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 죽은 자는 영이 죽은 자이며, 자기의 죽은 자들이란 몸이 죽은 자들입니다.
10.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했는데 어떻게 거인이 나올 수 있습니까?(창6:2,4).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지 알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이들은 홍수 이전에도 있었고, 홍수 이후에도 있었습니다(이들은 다윗에 의해 모조리 죽는다-삼하21:22).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입니다(요1:12). 그러나, 이 아들들은 현재까지 아들로 입양되었지만 실제로 아들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롬8:19). [피조물이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리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8:19).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년 왕국 동안 그리고 그 이후로 나타날 것입니다. 반면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지상에 나타나 있었습니다. 이들은 욥기 38:7에 언급된 천사들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피조물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예는 아담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3:38에는 아담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린 적이 없습니다. 흔히 인용하는 구절 가운데 이사야43:6은 이스라엘 민족을 자녀라고 표현한데서 유래한 것일 뿐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과는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가장 흔한 주석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경건한 셋의 후손들이라고 말하고, 사람의 딸들은 불경건한 카인의 후손들이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셋의 후예들과 카인의 딸들이 결혼하여 거인을 낳았더라”라고 기록할 일이지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이 결혼해서 거인이 태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천사는 성이 없고,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주장은 성경적 주장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2:30에서 [이는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장가가지도, 시집가지도 아니하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기 때문이니라.]하신 말씀 가운데 “하늘에 있는”이란 말을 빼면 안됩니다. 창세기 6장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땅에 내려온 천사들(유6)이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천사는 다 남자이며, 날개가 없습니다. 이들은 생식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앞으로 마지막 때에 다시 사람의 딸들을 취할 것입니다.
11. 하나님은 후회하실 수 있습니까? (창6:6) 제가 듣기로는 하나님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분이라고 들었는데 모순이 되지 않습니까(민23:19, 삼상15:29).
모순이 되지 않습니다. [[주]께서 땅에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고 또 이로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며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멸하되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날짐승까지 다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을 후회하기 때문이라, 하시니라.](창6:6,7). 사무엘상 15:11을 보십시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이는 그가 나를 따르는 것에서 돌이켜 내 명령을 수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이에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주]께 부르짖으니라.] 그러나, 곧 이어 아래서 사무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강력하신 이는 거짓말을 하거나 후회하지 아니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후회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니이다.](삼상15:29).
이런 구절들을 읽고서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말로 회개 또는 후회라고 번역된 repent에는 일반적으로 잘못, 죄, 오류로 인해 빚어진 결과나 행위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단순히 마음을 돌이키다는 뜻이 포함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하다(re/pent)". 하나님은 죄를 짓거나 악을 행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회개하거나 후회하시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반면 인간들이 행한 악과 죄를 보실 때 하나님은 이들에 대해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데, 거기에 대해서 후회를 하십니다. 사람에게 사용된 repent는 악을 근절하고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하나님에게 사용된 repent는 “오래 참으심의 끝”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의 의미를 안다면 이 구절들은 모순이 아니라 보충적인 의미를 지닌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2. 창세기 9:14은 과학적 사실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모순이 아닙니다. [내가 구름을 가져다가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서 보이면](창9:14). 성경에 따르면 모든 구름 사이에 무지개가 존재한다는 점을 암시해 줍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상에서 하늘의 구름들을 볼 때 무지개를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가끔 비가 오고 난 후거나 일몰 전후에만 잠시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무지개는 사람이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기 위한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로 비행할 때 아래 구름을 내려다 보면 쉽게 무지개를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낮에 정원에 물을 뿌릴 때 흩날리는 spray들 사이로도 무지개는 보입니다. 빛이 비추이기만 하면 모든 구름은 그 사이에 무지개를 보여 줍니다. 달빛 속에서도 무지개가 보이며, 밝은 별빛 속에서도 무지개는 관찰됩니다. 지구를 덮고 있는 모든 구름은 항상 무지개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보실 때는 24시간 내내 무지개를 보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찍부터 그 사실을 말해 주었고, 과학은 최근에 그런 현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3. 왜 죄는 함이 지었는데 저주는 가나안이 받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성품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보고 밖에 있는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올려놓고 뒷걸음쳐 들어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덮더니 그들의 얼굴이 뒤를 향하였으므로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포도주에서 깨어나 자기의 작은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요, 그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이 될 것이니라, 하고](창9:22-25).
여기서 성도들이 자주 제기하는 의문은 두 가지입니다. 어떻게 함이 행한 사소한 실수를 가지고 노아가 무서운 저주를 할 수가 있는가?와 왜 함이 아닌 함의 자식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는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을 매우 주의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아버지 노아가 술에 취해 옷을 다 벗은채 자는 것을 보고 다른 형제들에게 일러 주었을 뿐인데 노아가 일어나서 불같이 화를내며 저주를 했다면 노아의 인격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준행한 노아가 자신의 벌거벗은 몸이 들킨 사실로 인해 그렇게 화를 낸 것은 아닙니다. 22절에서 함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고”라고 말했지만 24에서 노아는 깨고 나서 그 사실을 안 것이 아닙니다. 함이 눈으로만 아버지를 보고 나갔다면 술에 취한 채 자고 있는 노아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노아는 술에서 깨고 나서 “자기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라고 말합니다. 눈으로 보고 간 일은 자기에게(unto him) 아무 것도 안 한 것이지 한 것이 아닙니다. 노아가 말하는 것은 자기 몸에 함이 무슨 짓을 하고 간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동성연애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하지 않더라도 성경을 읽으면서 구절과 구절을 비교하면 함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저절로 알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레위기 18:6,7을 펴 보십시오. [너희 가운데 아무도 가까운 친족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라. 나는 [주]니라. 너는 네 아버지의 벌거벗음이나 네 어머니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라. 그녀는 네 어머니인즉 너는 네 어머니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지니라.] 이는 근친 상간, 동성연애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노아의 증언과 레위기의 말씀을 통해 창세기 7:22에서 함이 아버지 노아의 벌거벗음을 보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왜 범죄한 함이 저주를 받지 않았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은 이미 창세기 9:1에서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서 동일한 죄를 보았거나, 미리 앞을 내다 보았음에 틀림없습니다. 함이 아버지 노아에게 하는 짓으로 보아 함의 아들 가나안도 함과 동일한 죄를 범하였거나 깊이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이후로 성경에서 가난안 족속들이 하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과 역사는 동일하게 가나안 족속들의 성적 문란, 동성애, 근친상간, 짐승들과의 교접 등에 대해서 언급하며, 이는 노아의 저주가 매우 정당했음을 입증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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