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디모데후서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지난 시간에는 성경을 어떻게 나누는가?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세대별로, 대상별로, 주제별로 성경을 나누는 것과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따라서 바르게 나누고, 성경의 어휘와 어휘를 비교해서 공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39을 보십시오. ( afar off →다니엘 9:7).

다 같이 디모데후서 2:15을 통해 몇 가지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1) 누가 공부해야 하는가? [너는] 하나님은 분명히 “너는”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아담에게 명령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개개인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은”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너는”이라고 하심으로 성경 공부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남이 나를 위해 대신 해 줄 수 없습니다.

2)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 [진리의 말씀을]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경이 진리의 말씀이란 사실을 믿는 믿음입니다. 성경은 진리의 성경이며, 주의 모든 말씀은 진리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판단하고, 토론하고,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이 우리를 판단합니다.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3) 특별한 방법이 있는가? [바르게 나누어] 성경을 공부하는 핵심적인 방법은 “바르게 나누는 일”입니다. 이것은 세대주의라는 신학적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성경 공부 방법입니다. 말씀을 대할 때 항상 미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누가 하는 말인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4)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우리는 사람에게 인정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께 인정받을 필요는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어떤 청년이 피아노 연주회를 마치고 일어서자 청중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청년의 시선은 그 청중이 아니라 청중 가운데 앉아 있는 당대의 최고의 음악가였던 멘델스존에게 가 있었습니다. 멘델스존이 자신의 연주에 뭐라고 평하는가?에 신경이 쓰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 것인가에 온 신경이 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종교 행위에 불과할 뿐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5)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이 말씀은 우리가 어느 정도 공부해야 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장사꾼이 물건을 사는 사람보다 물건에 대해서 더 알지 못한다면 부끄러울 것입니다. 장사꾼은 물건을 팔 때 재질과 가격, 용도, 물건의 특성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하며, 소비자가 묻는 질문과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마음에 들도록 설득력까지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 정도가 되지 못하면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교사가 학생보다 더 모르거나,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없을 때 부끄럽게 됩니다. 기술자가 일을 해결하지 못하고 쩔쩔 맨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는 누구와 논쟁을 해서 지지 않을 만큼 입심을 키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너무나 동떨어진 형제, 자매들을 보았을 때 그들을 부끄럽게 해 줄 수 있을 만큼 공부해야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형제는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교회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교제하다 “안상홍 증인회”로 갔습니다. 어떤 자매는 구원파로 갔습니다. 어떤 분은 형제 교회로 갔습니다. 저는 지금 다른 교회로 간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이들이 그동안 무엇을 배웠기에 개역 성경을 사용하는 교회, 머리에 두건을 두르는 교회에 가서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형제, 자매들은 왜 성경을 펴서 그들을 책망하고 바로잡아 주지 못하는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6) [일꾼] - 예수님은 제자들을 각 고을로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하실 때 그들을 [일꾼](마10:10)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10에서 [이는 우리가 그분의 작품(workmanship)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들을 위하여 창조된 자들이기 때문이니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복음을 전하고, 사역을 하는 것만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을 학생이라고 말씀하시는 대신 “일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신학자나 목사가 되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한 일들을 행하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기 때문입니다. 일꾼들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능숙하게 일하기 위해서 연장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합니다. 일에 필요한 기술을 다 익히고 있어야 합니다. 공부가 필요하지 않는 일꾼은 없습니다. 빵을 만드는 것은 쉬울지 몰라도 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누군가로부터, 무엇인가로부터 배워서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를 하지 않는 일꾼은 항상 서툰 일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7) [연구하라] - 공부를 하려면 책이 필요하고 교사가 필요합니다. 학생에게 학교가 필요하듯이 성도에게는 성경을 공부할 지역 교회가 필요합니다. 공부할 시간과 열정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참고서도 필요합니다. 공부(study-工夫)란 말의 정확한 의미는 “몸으로 익힌다”입니다. 어떤 것을 공부했다는 말은 그 사실이 내 몸으로 익혀져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가 되었을 때 공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typist들은 자판을 보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자판을 칩니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들은 피아노 건반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운전을 합니다. 이런 상태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익혀져 있는 상태입니다. 공부한 사실이 몸으로 표출되는데 부자연스럽고, 힘이 든다면 아직 공부가 덜 된 상태입니다.

성도들이 성경의 기록된 말씀들, 가르침들, 교훈들이 자연스럽게 내 몸으로 표출되어야 공부가 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섬기고,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 힘들고, 어색하다면 아직 공부가 덜 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면 아직 공부가 안 된 것입니다. 예배를 참석하는 것이 귀찮다면 한참은 공부를 더 해야 할 사람입니다. 틈만나면 T.V 리모콘이나 컴퓨터 자판, 신문에 손과 눈길이 가는 대신 성경에 손길이 가는 사람들이 공부가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몇 가지 원칙을 공부해 보겠습니다. 이는 성경 해석학의 기초이며, 이론이 아닌 실제적인 연구에 필요한 기초 원리들입니다.

1. 성경 적용의 법칙→ 성경의 내용을 내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정확한 교리적 의미를 파악한 후에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2:8은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떠나기 전에 자주 애용하는 구절입니다.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이교도들을 네게 상속으로 주고 땅의 맨 끝 지역들을 네게 소유로 주리라.](시2:8). 선교사들에게 이 말씀은 정말 위로와 용기와 힘을 주는 구절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교리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말씀이며, 이 땅에 재림하실 때 성취될 말씀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것은 교훈입니다. “너는 내게 구하라.”(Ask of me). 주님이실지라도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기도 생활에 매진하고 필요를 구해야 한다는 교훈과 기도 생활의 실행적인 면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 구절은 다 나에게 적용한다면 우리는 큰 혼란과 모순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의 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모든 법이 다 나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군법은 분명히 대한민국 법이지만 나에게 실제적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몇몇 특별법은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법의 취지와 목적을 이해하고 다른 법과 일치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적용할 수 있습니다.

2. 문자적 해석의 법칙→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구절들에서 다른 의미를 구하지 마십시오. 비유가 아닌 것들을 비유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비유라 할지라도 비유에 쓰인 단어를 성경과 성경으로 비교하면 답은 저절로 해석이 됩니다. 누가복음 16:23에는 지옥에 간 부자의 이야기 나옵니다. 성경은 분명히 지옥(hell)이라고 기록했기 때문에 달리 해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옥에 간 부자는 의식이 있었고, 고통스러워했고, 다른 가족들이 지옥에 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소원을 말했습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그의 정신은 매우 온전했습니다. 그의 소원은 단호히 배척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주석가들은 이것을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사실을 믿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나서 2:2을 펴 보십시오. 요나서 1:17부터 보면 요나는 바다에 던지워져 큰 물고기 뱃 속에서 삼일 밤 삼일 낮 동안 있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의 육신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2:1을 보면 요나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 때에 요나가 물고기 뱃 속에서 주 자기 하나님께 기도하며, 이르되, 내가 내 고난으로 인하여 주께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말을 들으셨고 지옥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목소리를 들으셨나이다.](욘2:1,2). 요나의 몸은 큰 물고기의 뱃 속에 있지만 요나의 혼은 지금 지옥에서 주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는 비유도 상징도 아닙니다. 지옥은 문자 그대로 지옥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고래 뱃속에서 기도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옥에서 기도한다는 생각은 차마 할 수 없기 때문이요, 그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마태복음 12:40에서 주님의 말씀은 거짓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는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고래 뱃 속에 있었던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동안 땅의 중심부에 있을 것임이라.](마12:40). 예수님의 몸은 요셉의 동굴 무덤에 있었지만 예수님의 혼은 땅의 중심부 즉 지옥에 가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성경의 문자적인 해석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웁니다.

3. 첫 번째 언급의 법칙 → 하나님은 성경 전체의 용례를 규정해 주기 위해 첫 번째 언급의 법칙을 사용하십니다. 처음 언급된 단어는 이후로 나올 단어의 의미를 정의해 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들어 “사랑”(love)이란 말이 제일 처음 나오는 곳은 창세기 22:2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사랑한다는 표현입니다. 성경의 첫 번째 언급의 법칙에 따르면 사랑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아닙니다. 부부간에, 연인간의 사랑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는 것,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갈보리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 등을 첫 번째 언급하실 때 이미 다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언급에서 좋은 뜻이면 그것은 성경 전체적으로 좋은 뜻으로 쓰입니다. 반면 첫 번째 언급에서 부정적이면 성경 전체에서 부정적인 내용으로 쓰입니다. 방언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tongue에 대해서 성경이 맨 먼저 언급한 곳을 찾아보면 됩니다(창10:4).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 언급된 곳은 어디인가를 찾아 보십시오(행11:26, 안디옥에서).

4. 점진적 언급의 법칙 →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주님의 계시가 점진적으로 더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계시됩니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보면 창세기 3:15에서는 여자의 씨라고 언급됩니다. 출애굽기에는 유월절 어린 양으로 나옵니다. 레위기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피를 뿌리는 대속의 어린 양으로 나옵니다. 시편22편은 십자가의 사건을 기록합니다. 이사야 53장은 훨씬 더 구체적으로 채찍에 맞으시는 장면까지 나옵니다. 신약에서는 그분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의 대속이 더 분명하고 다가 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주님의 완전한 모습이 나옵니다. 이렇게 성경은 어떤 사건이나 예언에 대해 점진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심판에 대한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처음부터 차례대로 통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점진적 언급” 때문입니다.

5. 종속의 법칙 → 성경은 어떤 특정 진리를 말한 후에 거기에 따르는 세부 사항을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요나서 2장에는 요나가 큰 물고기의 뱃 속에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2장에서 그것이 고래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경으로 자세히 비교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신명기에는 모세가 죽어서 묻힌 장소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유다서에 보면 천사장 미카엘이 모세의 시체를 하늘로 가져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12장에는 모세가 이 땅에 다시 나타납니다. 우리는 성경의 한 사건이 그 한 곳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이곳 저곳에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문맥의 법칙 → 성경은 앞, 뒤 문맥을 통해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문맥에서 벗어난 말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저는 몇몇 이단 연구소를 운영하는 사람들을 압니다. 그들은 어떤 교회나 목사를 이단으로 정죄할 때, 그 사람의 설교나 책에서 앞뒤를 다 잘라 버리고 특정 부분만 부풀려서 이단이라고 매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이 주장하고 싶은 내용만 딱 인용해서 성경을 써 먹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으로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는도다.”(시14:1)을 인용할 때, “하나님은 없다”고 인용하는 경우입니다.

7. 차별의 법칙 → 하나님께서 구분하시고 차이를 두신 것에는 우리도 반드시 차이를 두고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합하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듯이 하나님이 나누신 것을 사람이 합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그분의 백성과 세상을 엄격히 구분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1:7에서 주님은 이집트와 이스라엘 가운데 차이를 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10:10에서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는 것,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 사이에 차이를 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11:47에서는 먹을 것과 먹어서는 안될 것에 차이를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차이를 두셨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차이를 두지 않으면 그것은 죄입니다(겔22:26). 신약에 와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데는 차이가 없습니다(행15:9, 롬3:22). 신약 성경에서 차이를 둔 것은 성도들 간에 직무(고전12:5), 처녀와 아내(고전7:34), 대인 관계에서는 차이를 두어야 합니다(유1:22,23). 우리는 당연히 믿는 자들을 형제로서 믿지 않는 자들보다 더 잘 대해 주어야 합니다.

8. 일치의 법칙 → 성경은 절대 모순이 없습니다. 모순으로 보이는 구절은 있어도 알고 보면 모순이 아닙니다. 흔히 현대인들이 제기하는 모순은 비과학적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성경은 과학위의 과학이란 사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거짓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제기되는 모순은 성경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마태복음의 산상 수훈과 누가복음의 산상수훈은 완전히 다르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주의깊게 성경을 읽어보면 이는 모순이 아니라 두 가지 다른 설교란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1과 누가복음 6:17을 비교해 보십시오. 앞으로 저희 교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성경 전체를 집중적으로 공부해 볼 것입니다.

9. 반복의 법칙 → 전에 언급한 내용을 다음에 다시 반복하는 것입니다. 모세 오경은 같은 내용이 반복됩니다. 이 내용은 시편에서 더욱 자주 반복됩니다. 사복음서는 반복됩니다. 바울 서신서는 같은 내용이 주기적으로 반복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환란 때 임할 재앙에 대해 4번이나 반복하십니다.

10. 이중 언급의 법칙→ 특정 시간에 특정 사건에 대한 언급. 이 후에 예수 그리스도와 왕국에 대한 이야기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시편에 이런 구절이 특히 많이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다윗이 받는 고난에 대한 이야기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인 경우입니다.

11. 예표의 법칙→ 하나님은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통해 자신의 성품을 나타내시거나 다가 올 일에 대한 모형을 보여 주십니다. 이집트는 세상을 예표합니다. 파라오는 적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아버지를 예표한다면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리브가는 교회를 예표하고, 엘리에셀은 성령을 예표합니다.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렇다면 형제들과 요셉의 관계는 초림 때의 유대인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12. 성경의 수(數)의 법칙→ 성경에 나타난 수는 특정한 진리를 가리킬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5는 죽음의 수입니다. 성경의 수에 관련된 모든 책에는 5가 은혜의 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은혜가 아니라 죽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5는 인간들에게 매우 중요한 수입니다. 손가락과 발가락은 가각 다섯개 씩입니다. 인간의 신체구조는 오장육부로 되어 있습니다. 세계는 오대양 육대륙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전에 있는 놋 제단은 가로, 세로가 다섯 큐빗이었습니다. 어린 양들은 여기서 피를 흘려 죽었습니다. 최초로 사람이 죽은 것은 창세기 5:5이었습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아담과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논한 장은 로마서 5장입니다. 창세기에서 지구에 생명체가 처음 나타난 날은 5일째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넷째 날 해와 달, 별들이 만들어지는데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4000년째 이 땅에 오심으로 어둠에서 빛을 나누십니다. 다섯째 날 최초로 생명이란 말이 나옵니다(창1:20).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생명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천년이 하루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6은 인간의 수입니다. 느부캇네살은 금신상을 세울 때 높이가 60큐빗, 너비가 6큐빗 짜리를 세웠습니다. 장차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수는 666입니다. 13은 반역과 마귀의 수입니다. 성경의 장절 배치는 처음에 인쇄의 편리를 위해 임의로 붙인 것이었으나 킹제임스 성경이 번역되고 역자들이 성경의 순서를 재배치함으로써 진리를 가르치는 한 가지 방법이 되었습니다. 이는 히브리어, 헬라어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13. 간격의 법칙→ 성경은 연대기 순으로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 연대기를 계산하다가 자주 범하는 실수는 하나님께서 연대를 훌쩍 뛰어 넘으실 때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언급도 없이 수 십년, 수백년의 간격을 훌쩍 뛰어넘어 기록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을 배교한 기간은 하나님께서 역사에서 빼버리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순례의 기간 중에 육신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무려 13년이란 세월이 생략되었습니다. 연대기 계산에 애를 먹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400년은 주님께서 전혀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연대기와 관련된 대부분의 의심스런 쟁점들은 이 간격의 법칙으로 인해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에서 간략하게 성경을 공부하는 원칙들과 성격을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이런 주제는 한 가지 한 가지를 철저하게 공부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것들입니다. 처음 성경을 공부하는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기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