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A.W. 토저
교회가 권위를 상실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찾아볼 수 없는 교회는 이미 그 자체의 권위를 잃어 버린 것이다.
집은 집주인보다 크지 못하다. 집은 집주인이 있어야 집다운 구실을 한다. 집주인이 들어와 살지 아니하는 집은 폐가일 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교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아니다.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가진 교회도 아니다. 이단적인 잡종파도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개신교회 중에서도 복음주의적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인이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이 다 그분의 것이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만 그렇고 형식으로만 그런 것으로 교회가 인식 될 때, 다시 말하면 교회의 권위가 무시될 때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리석은 우리 자신의 처지가 너무 가련하고 불쌍하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내 마음이 몹시 쓰리다. 결코 내 형제들을 정죄하자는 생각은 없다. 오직 사랑의 마음이다. 내가 이 괴로움을 말하는 것은 내 교파도 그렇고 남의 교파도 그렇다는 것이다. 내 교회, 네 교회 할 것없이 교회 안에서 되어지는 일을 보니 너무 쓰리고 괴롭다는 것이다.
나의 괴로움은 내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는 괴로움이기도 하다. "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 내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의 불법이 많아 우리 머리 위로 넘치고 또 우리의 범법이 커서 하늘에까지 이르렀음이니이다"(스9:6)하고 자기 자신을 죄인의 대열에 앞세워 기도한 에스라처럼 나 자신도 정직하게 말해서 부끄러운 것밖에 없다. 다만 우리들 모두 마음을 모아서 우리 주 하나님께로 돌이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겠다.
세상이 교회를 멸시한다. 복음을 전하고 거룩한 행실로 세상을 정죄하기 때문에 핍박을 받아서가 아니다. 세상이 교회를 미워하며 핍박한다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없으련만 그것이 아니라 싫어하고 멀리하는 현상이다. 멸시를 받고서도 교회는 할 말이 없다.
몸된 교회로서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무시하는 교회는 세상에 향수를 느끼고 세상을 추종한다. 모든 교회가 다 그러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까지 그렇지 아니한 교회가 너무 적다는 말이다.
영적 해결점을 얻기 위하여 교회의 문을 두드리던 구도자의 대열은 이제 발 길이 거의 끊어졌다. 갈증만 더하고 혼돈만 더 느끼기 떄문이다. 교회의 문을 두드릴 생각이 아예 없을 뿐 아니라 들어왔던 사람마저 하나씩 발을 끊는다. 교회에 사람이 없다. 젊은 이들이 없다. 일꾼이 없다. 영혼의 갈증을 풀려고 그들은 사방으로 방황한다. 그러나 교회는 찾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만 상징적인 존재일뿐이다. 그분의 이름으로 찬송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설교하고 또 모이나 교인들의 실제생활과 교회의 실제 활동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권위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강대상에서 나오는 설교나 주일학교 교사들의 입에서 나오는 가르침은 성경적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 운영면과 생활면에 있어서는 비성경적인 것이 있어도 개의치 않는다. 신앙생활은 성경대로가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에 충실히 가담하면 되는 것이다. 성경은 문자 그대로 지킬 것이 아니라 원칙적인 이론만을 세운데 불과하며 생활은 현대의 양식에 맞추어 하면 되는 것이다. 단지 선하게 살고 양심적으로 생활하고 그렇게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양심대로 살면 된다는 결론은 로마 카톨릭에서만 얻어진 것이 아니라, 자체의 권위를 상실한 교회가 가치 척도의 대안으로 세운 것이다. 성경을 신앙없는 육신 생활에 편리하도록 적당히 해석하는 것은 신신학주의만의 전용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가 그 자신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제 나름대로 파놓은 돌파구이다.
당회나 제직회의 때의 광경을 보자. 한번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제를 결정지워본 일이 있는가? 누구하나 성경을 펴들고 "주님의 교훈이 분명히 이러하니 이 말씀대로 합시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는가? 회의를 열기 전에 기도는 빠지지 않고 한다. 그러나 실제 회의 진행과 의결 때면 그리스도의 말씀과 권위는 한결같이 침묵한다. 아무 발언권이 없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말해보라.
주일학교 간부들은 그들의 모든 사업 계획에 있어서 먼저 말씀을 연구하고 찾는가? 아니면 보다 좋은 계획, 보다 좋은 방침, 좋은 방법, 등 기술적인 새것을 추구했지, 참으로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주님의 방법이 무엇인가? 일심으로 기도하여 주님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것은 없다. 기도가 있다면 이미 계획되어진 일을 도와주고 형통케 해달라는 것 뿐이다.
선교부의 사업 진행을 보자. 오직 말씀과 성령님을 통한 주의 인도를 실제로 간구하고 있는가? 자기네들은 그렇게 하는 것으로 자부할지 모르나 사실은 그들 자신이 계획하여 세운 사업을 성경적으로 합리화시켜놓은 것에 불과하고 기도가 있다면 그 계획을 잘 추진할 수 있는 방법과 길로 인도해달라는 것 뿐이다. 그들 자신의 사업 발전을 위하여 온 밤을 새며 기도할지는 모르지만 주님은 그들의 사업의 일개의 조력자일 뿐이지 주인의 위치는 아닌 것이다. 먼저 주님의 뜻을 진정으로 구하여 알고 그 뜻대로 인도하여 시작되는 사업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들 자신의 사업이다. 주님의 사업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업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인간적으로 계획하고 수행하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 바치고 주님을 위해 일하고, 수고하고 산다고 해놓고서는 "주님, 제발 우리를 간섭하지 마소서. 우리를 다스리지 마소서."하는 그 마음 자리요 생활 태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주(Saviour)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Lord)이시다. 일개의 조력자가 아니라 모든 것을 그 뜻대로 펴시는 주인이시다. 하나니의 상징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안에 활동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는 만유의 주님이시다. 우리의 실상을 바로 깨달아야 하겠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해결은 각자가 해야 한다. 나의 이 괴로운 소리를 듣고서 무책임한 말을 하지 말라고 격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은 그렇다고 수긍하면서도 우리만은 그렇지 않다고 자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재를 무릅쓰고 통회하며 나와 내 이웃의 죄를 회개 자복하고, 겸손히 주께 나아가는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앞의 두 사람은 괴로운 중에 더욱 괴로움만 더할 분이다. 그러나 세 번째 사람이 진실하게 그 결론에 도달한다면 이 쓰리고 괴로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결단은 각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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