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질문 8 : 성경의 사본들의 출처는 어디인가요?

현존하는 성경 필사본의 대부분은 두개의 계열 혹은 군(群)으로 나뉩니다. 이 계열들은 일반적으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의 안디옥이라는 도시들에 의해 대표됩니다.


단지 두 개의 성경, 즉 하나님의
성경과 마귀의 것이 존재합니다. 성경에 대한 견해도 단지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합니다. 전적으로 완전하다는 견해이든지 혹은 불완전하다는 견해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사본의 형태와 그들이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볼 때, 이 두 성경은 중동 지역의 매우 다른 장소들에서 발원합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의 안디옥이 그것입니다. 어떤 장소가
우리에게 완전한 성경과 정확한 이데올로기를 주며, 어떤 장소가 우리에게
마귀의 성경과 부정확한 이데올로기를 주는가를 식별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러한 연구는 성경이라는 한 가지 원천
때문에 아주 쉽게 이루어집니다.


이미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또다시
언급하겠지만, 우리는 신앙과 행위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성경을 우리의
최종권위로 받아들입니다. 그러하기에 누구나 먼저 해야 할 일은 성경을
연구하여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어떻게 생각하시며 시리아의
안디옥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 우리가 따라
가야할 기본 규칙은 "첫 번째 언급의 법칙"(the law of first
mention)이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대체로 어떤 사람이나 장소가 성경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부분의 문맥이 그 사람이나 장소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에 관한 우리의
연구에 있어서, 우리는 이집트에 대해 성경말씀이 취하는 태도를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집트(애굽, Egypt)


(1) 성경에서 이집트는 창세기 12:10-12에서
제일 먼저 언급됩니다.


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이집트로 내려가 거기에 거하려 하더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 그가 이집트에 가까이 와서 들어가려
할 때에 자기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이제 보라, 내가 알기에 그대는
보기에 아름다운 여인이라.


12 그러므로 이집트 사람들이 그대를
볼 때에 말하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려두리니


창 12:1-3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소위 '아브라함과의 언약'이라고 알려진 것이 주어짐을 봅니다. 문자
그대로, 그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그들의 소유로서 양도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창 12:10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고국에 있었던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12절에는 이집트인들이
그를 죽이고 그의 아내 사래를 강탈할지도 모른다는 아브라함의 두려움이
나타납니다. 분명히 긍정적인 문맥이 아니지요?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이집트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이 매우 부정적임을 봅니다.


(2) 출애굽기 1:11-14에서 우리는
유다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들이었음을 발견합니다.


11 이에 그들이 작업 감독자들을
이스라엘 자손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주어 괴롭게 하였더니,
그들이 파라오를 위하여 국고 도시 곧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니라.


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그들이 더욱 번성하고 커지므로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인하여 근심하며

13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더 엄격히 섬기게 하고

14 고된 노예생활로 그들의 삶을 괴롭게 하니 곧 흙이기는 일과 벽돌
굽는 일과 들에서의 온갖 섬기는 일이라.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섬기게 한 모든 일이 엄격하였더라.


사실상 이집트의 통치자였던 파라오(바로)는
15-16절에서 유대의 모든 남자 아기들이 죽임을 당할 것임을 포고합니다.


15 또한 이집트 왕이 히브리 산파들에게
말하더니 그 중 하나의 이름은 십브라요, 다른 하나의 이름은 부아더라.


16 그가 말하되, 너희가 히브리 여인들을 위하여 산파의 일을 할 때에
해산대를 살펴보아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릴지니라, 하였으나


이 구절도 명백히 부정적인 것을
암시하지 않습니까?


(3) 출애굽기 20장에서, 이집트
땅에서 자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여 내신 후,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목소리로
그분께서 이집트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2절에서
그분께서는 이집트를 "속박의 집"(house of bondage)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속박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주로다."


이것 역시 또 한 번의 부정적인
언급이며, 이번에는 이것이 직접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4) 신명기 4:20에서 모세는 이집트를
"쇠용광로"(the iron furnace)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용광로 곧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사, 이 날의 너희와 같이
자신을 위하여 상속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5) 신명기 17:16에서 이스라엘은,
미래에 그들이 왕을 갖게 될 때, 그들의 왕이 이집트와 상업적인 거래를
해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왕이 된 자는 자기를 위해
말들을 많이 늘리지 말 것이요, 말들을 많이 늘리려고 백성을 이집트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주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후로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며"


(6)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시록 11:8
에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비난하기 원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을
소돔과 이집트에다 비유하십니다.


"그들의 죽은 몸이 그 큰 도시의
거리에 놓이리니, 그 도시는 영적으로 소돔과 이집트라고 하며 곧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이상의 간략한 연구는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살펴 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이 이집트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우리는 성경에서 알렉산드리아가
단지 네 번 언급되며, 네 번 모두 다 나쁘게 언급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1) 알렉산드리아는 사도행전 6:9에서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그 때에 리베르티 사람과
구레네 사람과 알렉산드리아 사람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 하는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논쟁을 벌이더니"


스데반과 더불어 변론하며 실제
그를 죽였던 무리들 가운데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온 유다인들이 있었습니다.


(2)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두 번째
언급은 사도행전 18:24에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폴로라 하는 유다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여기서 우리는 영적으로 매우 열심이
있었으나 복음에 관해 잘못 알고 있었던 아볼로라 하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유다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은 모르는
채 그는 에베소에서 침례자 요한의 침례에 대해서만 가르쳤습니다(행
18:25, 19:3). 아볼로는 그때까지도 구원받지 못했으며 그가 개종시킨
자들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후에, 아볼로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 의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되었으며(26절), 그의 메시지가 완전해지게 됩니다(28절).
그러나 두 번째 언급된 곳에서도 알렉산드리아는 여전히 잘못된 성경
가르침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3)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세 번째와
네 번째 언급 역시 매우 비슷합니다. 바울이 사도행전 21장에서 체포되고
카이사르에게 변론을 요구한 후, 그는 알렉산드리아로부터 배를 타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로마로 보내집니다(행27:6).


"거기서 백부장이 이탈리아로
항해 중인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거기에 태우니라."


(4) 로마로 항해하는 도중 바울이
탄 배는 폭풍우로 인해 가라앉게 됩니다. 멜리데라 하는 섬에서 석 달을
보낸 후 그는 또 다른 배를 타고 죽음을 향한 길로 보내집니다. 바울을
죽음으로 몰고 갈 이 두 번째 배는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석달 뒤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의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기호(記號)는 카스토르와
폴룩스더라."(사도행전 28:11)


위에서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성경의 네 군데 언급들이 모두 부정적임을 알았습니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성경의 판결이 좋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100년 경에
아테네로부터 철학과 교육을 받아 들였고(행17:16), 그 이후에 세상
철학과 학문의 중심지로 불리워졌음에 주목해야 겠습니다(골로새서 2:8).
거기에는 철학자였던 판테누스(Pantaenus)에 의해 설립된 성경 학교가
있었습니다. 판테누스는 성경을 모두 철학적으로 그리고 알레고리로
해석했습니다. 철학적이라 함은 그가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 진리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경의 무오류함을 믿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알레고리적으로
봄으로써 그는 아담, 노아, 모세, 다윗 같은 사람들은 단지 유다인들의
시(詩)에나 존재하며 실재의 역사적 인물은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와 후에 오리겐(Origen)에 의해 그
학파의 우두머리로 칭송받게 되었습니다.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그의
회의론을 공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의 순수한 복사본들(pure copies)을
받는 즉시 그의 뒤틀린 사상과 병행하도록 성경을 개조한 사람은, 교육과
철학이라는 두 개의 마취제에 미혹된 오리겐(Origen)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성경 비평학자들의 아버지이며, 누가복음 24:40, 사도행전 8:37과
요한일서 5:7 같은 구절들을 삭제해 버린 필사본들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경은 완전하며 무오류하다"고 단숨에
말한 뒤에 곧바로 "성경에는 실수들과 오역들이 있다"고 진술하는
많은 근본주의 학자들이 앵무새처럼 되풀이되는 알렉산드리아 철학의
창시자이기도 합니다. 부패한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에다 맨 처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 바로 이 실성한 이데올로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 부패한 것이므로 마땅히 폐기 처분되어야 할 뿐 아니라, 성경에
오류가 있으므로 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알렉산드리아 철학은 더더욱
교활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으므로 참된 성경 신자들이라면 마땅히 배격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안디옥(Antioch)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 안디옥은
알렉산드리아가 나오는 똑같은 책의 같은 장인 사도행전 6장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는데 알렉산드리아와 비교해 보면 전혀 다른 맥락으로 나타납니다.


(1) 사도들은 오늘날 우리가 "집사"(deacons)라고
알고 있는 "돕는 자들"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그 직분을 맡아야 하는가를 가르쳤습니다.


사도행전 6:3,4: " 3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정직하다는 평판이 있고 성령님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직 계속해서 기도와
말씀 사역에 헌신하리라, 하니"


그 뒤 사도행전 6:5에서 일곱 사람이
선택됩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쁘게
여기고, 믿음과 성령님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안디옥 출신의 유다교 개종자 니골라를 선택하여"


첫 번째 집사들 중 한 명인 니골라가
안디옥 사람이었음을 주목하십시오. 이것이 단순한 일치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집사들 가운데 니골라만이 그 고향이 제시된 집사였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또한 안디옥이 성경에서 처음 언급된
곳에 알렉산드리아가 언급된 것도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그리고 같은
구절에서 안디옥은 긍정적인 견지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 알렉산드리아는
부정적인 견지에서 처음 언급되었음을 아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안디옥에 대한 다음 몇 개의 적절한
보기들은 하나님께서 신약 교회의 중심지로서 안디옥을 선택하심에 대하여
보여주는데 물방울 같은 증언으로 시작해서 홍수 같은 증언으로 그 끝을
맺습니다.


(2) 안디옥은 사도행전 11:19-21에
나타납니다.


"한편 스데반으로 인하여 일어난
핍박으로 말미암아 널리 흩어진 자들이 멀리 베니게와 키프러스와 안디옥까지
여행하며 오직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선포하는데 그 가운데 키프러스와
구레네 출신의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그리스파 사람들에게 말하여
주 예수님을 선포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오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핍박을 피해 도피한
크리스천들 중 한 무리가 도피한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이 안디옥에 도달했을 때,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을 연 사건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리스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21절에서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안디옥에서 힘있게 일하셔서
"상당수"가 구원받았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최초의
이방인 대각성 운동이 안디옥에서 일어났음을 보게 됩니다.


(3) 사도행전 11:22-24에서 바나바(위안의
아들; the son of consolation 행 4:36)가 안디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아보기 위해 안디옥에 파견됨을 보게 됩니다.


"이 일에 관한 소식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귀에 들어가매 그들이 바나바를 보내어 멀리 안디옥까지
가게 하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람에게
권면하여 마음에 작정을 하고 주께 붙어 있으라 하니라. 바나바는 선한
사람이요, 성령님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많은 백성이 주께
더하여지더라."


(4) 사도행전 11:25,26에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떠나서


26 그를 만나매 안디옥으로 데려와
그들이 일년 동안 그 교회와 함께 모임을 갖으며 많은 백성을 가르치더니,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첫 번째로 우리는 바나바가 젊은
개심자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도행전 9:26,27에서,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바울의 개종을 변호해 주었던 이가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열심있는 한 젊은 개종자가 다소에 가서(행 9:30),
잊혀져 가는 것을 보고 슬퍼하였습니다. 사울을 찾아낸 뒤, 바나바는
그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데려오지 않았습니다(그리고 확실히 알렉산드리아도
아닙니다.). 그는 그를 신약 교회의 영적 수도인 안디옥로 데리고 왔습니다.
바울의 된 바 모든 것이 이 경건한 노성도의 친절한 행동 덕분이었습니다.


(5) 사도행전 11:26에서 우리는
거듭난 신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크리스천"이라 불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믿는 자들이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부를 때마다 안디옥의 우리 영적 선조들과 영적인 연대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안디옥과 크리스천의 관계는 플리머스록(Plymouth Rock: 청교도
조상들이 상륙했다고 하는 미국 플리머스 지방의 사적지)과 미국인의
관계와도 같은 것입니다.


(6) 27,28절에서, 하나님께서 대언자들을
북쪽에 있는 안디옥으로 보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무렵에 대언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가운데 아가보라 하는 사람이 일어나 성령을 통하여
보여주기를 온 세상에 두루 큰 흉년이 있으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때에 그렇게 되니라."


예루살렘은 영적으로 버림을 받았습니다.
몇 해 전 사도행전 1:8에서 그곳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던 제자들의
고향일 뿐입니다.


(7) 사도행전 11:29,30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안디옥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축복하지 않으신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보내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저마다 자기 능력대로
유대에 거하는 형제들에게 구호금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구호금을 바나바와 사울의 손에 맡겨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신약교회의
본거지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언급은 아닙니다.


(8) 하나님께서 복음선포를 위해
온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하고자 결심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예루살렘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셨습니다(물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대신에 안디옥에서 자신의 충성스런
종들을 찾으셨습니다.


"안디옥에 있는 교회에 대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의 루기오와
사분영주 헤롯과 함께 양육을 받은 마나엔과 사울이라. 그들이 주를
섬기며 금식할 때에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서
시킬 일을 위하여 그들을 내게로 구별하라, 하시니, 이에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 위에 손을 얹고 보내니라."(사도행전 13:1-3)


따라서, "크리스천"이라는
명칭이 안디옥에서 기원한 것같이, 성경에 언급된 첫 번째 전도여행
또한 안디옥에서 발원했음이 명백합니다. 이 위대한 임무를 완수하고
나서, 어느 누구도 예루살렘에 보고서를 보내거나 그 도시를 관광하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안디옥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말씀을 버가에서 선포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이
두 사람이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그들을 맡겼던
곳이라. 그들이 도착하여 교회를 함께 모아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또 그분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되풀이하여 말하고 거기에서 제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머무니라."(사도행전
14:25-28)


안디옥에 대한 마지막 두 개의 언급을
살펴보면, 안디옥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는 것임을
확증해 줍니다.


(9) 사도행전 15:23-27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은 이방인 신자들에 관한 결정 사항의 통지를 위해 두 명의
대표를 안디옥에 보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 두 사람 편에 이와
같이 편지하니라. 사도들과 장로들과 형제들은 안디옥과 시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우리가 들은즉 우리로부터 어떤
사람들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혼란에 빠뜨리고 너희 혼을 뒤엎으며 말하되,
너희가 반드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 하나, 우리는 그들에게
그런 명령을 준 적이 없으므로 한 마음으로 모여 사람들을 선택하여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로 보내는 것을 좋게
여겼나니 이 사람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자들이니라. 그리하여 우리가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너희에게 이 일을 입으로 전하리라."(사도행전 15:23-27)


임무를 마친 후에 유다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라는 안디옥에 남기로
하였고(역주 - 한글개역성경에는 34절의 내용 즉 '실라는 거기에 그대로
머무는 것을 기뻐하더라.'(Notwithstanding, it pleased Silas to abide
there still)이 없음.), 바울의 두 번째 전도여행의 선교 동역자로서
성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10) 물론 두 번째 전도여행도 예루살렘에서
발원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5:40이 설명해 주는 대로,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던 안디옥에서 발원했습니다.


안디옥의 어떤 점이 하나님께서
신약교회의 중심부로 선택하실 정도로 매력적이었을까요? 안디옥은 로마,
아테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처럼 문화의 중심지였지만, 그 자신을 이방종교,
이방학문과 이방철학에 빠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것이 주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안디옥이 위에서 언급된 도시들이나
심지어 예루살렘과도 달리, 그 당시 알려졌던 세계의 거의 정확히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고, 동-서 무역로의 교차지점에 세워졌다는 점에 비중이
주어졌을 것입니다. 심지어 안디옥은 오론테스 강을 경유한 항구도시임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기독교의 본거지로서의 활발한
기능을 위해 매우 중요한 속성들입니다. 아마도 바울 서신들의 자필원본들의
대부분은 안디옥에서 쓰여졌을 것입니다.


2세기에 루시안(lucian)이라는 한
제자가 안디옥에서 성경학교를 세웠습니다. 루시안은 이교도 철학을
불신하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그의 학파는 성경의 신성과 권위를 찬미했으며,
성경을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들이 가르쳤던 것처럼 상징적으로서가
아닌,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므로 안디옥은
성경 필사본의 바른 계열의 기원점일 뿐 아니라, 성경을 문자 그대로
그리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이데올로기의 근원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마음은 선하나 "알렉산드리아식"
교육을 받은 수많은 목회자들이 안디옥 성경(킹제임스 성경)을 높이고는
있지만, 성경이 완전할 수 없다는 알렉산드리아적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에 있어 이러한 이집트의 확신 때문에 시편 12:6,7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 완전한 성경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옳지 못한 태도로 옳은 책(성경)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들의
이집트 선조들이 행했던 똑같은 실수들과 개악들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도록 예정될 것입니다.


누가 성경의 충고를 무시하고도
실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장 지혜로웠던 사람 솔로몬은, 이집트를
멀리하고 말(horse)을 늘리려고 이집트에 내려가지 말라(신 17:16)는
성경의 충고를 무시했습니다. 열왕기상 3:1에서 그는 이집트 왕 파라오의
딸과 혼인했습니다. 열왕기상 10:28에서 그는 이집트에서 말(horse)들을
사왔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열왕기상 11:3,4에서 우리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 따르는 것으로부터 돌아섬을 보게 됩니다. 5-8절에서
그는 다른 신들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9-43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이 말을 사기
위해 이집트에 내려가기를 원치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찌 감히 그 곳에
내려갈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도
이집트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무시하고서는 일들을 잘해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솔로몬보다 더 지혜롭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