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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십자가와 하나됨



교회의 특징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단연 ‘하나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 어떤 조직이나 단체와는 달리 누가 보아도 하나됨이 보여야 합니다. 요즘 사회는 누구나 ‘하나됨’을 외칩니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하나됨, 청년 불자의 하나됨, 한마음 한 몸 운동 등 어느 분야나 하나됨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천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분리, 성별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되어야 할 것들에서조차도 하나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과는 분리되어야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가족들이 하나되지 못하면 세상은 교회를 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욕합니다. 같은 교회, 같은 성경, 같은 찬송가를 사용하면서도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외적인 통일성이 내적인 통일성을 가져다주지 못함을 웅변적으로 보여 줍니다. 군대는 머리 모양에서부터 복장, 신발, 인사하는 동작까지 똑같게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됨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군대와 같이 외적인 획일성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이고, 자발적인 성령의 하나됨이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캍 날의 양면같이 독특한 두 가지 면이 동시에 있는데 첫째, 도저히 분리될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을 완전히 분리해 내는 능력입니다. 이런 능력으로 인해 우리는 세상과 분리되고, 더러운 것으로부터 분리되고, 이전에 사랑했던 것들 로부터 분리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사랑했던 자기 생명을 미워하게 되고, 세상 친구들과 분리됩니다. 둘째, 도저히 하나될 수 없는 것들을 하나로 만드는 연합의 능력이 있습니다. 물리적인 하나됨이 아니라 화학적으로 완전히 하나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과 세상의 죄인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 둘은 화해되고 하나가 됩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사 모든 것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음이니라.](골1:20). 십자가는 화합, 화해, 하나됨의 능력이 발휘되는 곳이므로, 우리는 원수맺음, 다툼, 분냄, 불평, 불만들을 모두 십자가로 가져감으로써 해결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성경적 예를 봅시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이지만 십자가를 통해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로 취급했고,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이 둘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는 그분께서 우리의 화평이시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둘을 하나로 만드사 우리 사이의 중간 벽을 허무시고](엡2:13-14).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우리는 유대인들을 세상 어떤 민족보다 더 가까운 민족임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유대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유대인들도 그리스도인들의 각별한 사랑과 보살핌, 지지를 얻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런 분리와 하나됨이란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분리의 현장이며, 하나됨의 현장임을 기억하시고,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으니 이는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라.](갈3:28).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분리되었고, 또 십자가를 통해 하나됨을 이루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자기 교회 이름이 마음이 안 든다고 성도들 간에 분열이 있었고, 어떤 교회는 예배의 순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어떤 교회는 목사님의 교회 운영 방식이 마음에 안 든다고 분열이 있습니다. 이런 예는 너무나 많아서 열거하는 것조차 힘이 듭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를 믿지만 마음 가운데 자기를 부인하지도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전도를 하다 가장 자주 듣는 질문 중의 하나는 교회에는 교파가 왜 그리 많습니까? 교회에는 왜 그렇게 분열이 많습니까?란 질문입니다. 제가 찾아 본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교회 가운데 특별히 장로 교회의 상황만을 살펴보아도 교회는 세포 분열하듯이 분열의 역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장로교 내에만 전세계적으로 755개의 교단이 있습니다. 한국의 장로교단은 90개이며, 미국에는 거의 50개의 교단이 있습니다("Schism and Sacrament," Perspective [April 1998], 7). 분열은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일차적인 본능인 것 같습니다. 교리의 순결성과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분리와 분열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분열된 교회는 세상을 향해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분열과 다툼의 원인은 육신입니다. 지금 교회는 십자가를 어느 시대보다 더 절실히 필요하며, 십자가를 선포해야 합니다.

멀리 교단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장 우리 교회, 우리 가정을 살펴봅시다. 모두 그리스도의 마음, 단일한 마음,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지 각자 자기 뜻과 이상으로 갈라져 있는지 보십시오. 신앙적 일치가 없는 교회, 신앙적 일치가 없는 가정이라면 우리는 그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분열의 치료책 역시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됨을 이루는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때가 찬 경륜(經綸) 안에서 모든 것 곧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분 안에서 다 같이 하나로 모으려 하심이라.](엡1:10).

지역 교회는 하나됨이 실현되는 실제적인 공간이며,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나됨이 없이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長成)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엡4:13). 이런 이유로 바울 사도는 성령의 하나됨을 힘써 지킬 것을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화평의 매는 띠로 /성/령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라.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같이 한 몸과 한 /성/령이 있고 한 {주}와 한 믿음과 한 침례가 있으며 한 하나님이 계시니 곧 모든 것의 아버지시라. /그분께서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 속에 계시고 또 너희 모두 안에 계시느니라.](엡4:3-6).

자, 보십시오. 현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요, 지체임을 믿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도들의 마음은 완전히 하나가 되지 못한 채 따로 놉니다. 예를 들어 A란 형제가 이번 수련회에 가면 나는 안가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전 예배는 어떻게 드리겠지만 오후 예배는 같이 안 드리겠다며 집에 가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유는 같이 있어봐야 은혜도 안되고, 말씀도 안 들리고,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침례식이 있는데, 어떤 형제가 자기는 다음 기회에 받고 이번에는 안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물었는데, ‘신앙이 좀 성숙한 다음에 받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시지요.’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자기와 마음에 안 맞는 형제가 침례를 받기 때문에 침례 동기가 되고 싶지 않아서 피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교회를 병들게 할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적 상태를 황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합니까? 자아 존중 때문입니다. 자기는 수치와 모욕을 받아서는 안될 사람인데, 유독 누구는 나를 무시한다면 그 사람과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정신을 지녔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지 아십니까? 십자가의 정신이란 ‘누가 나에게 만인에게 공개적으로 수치와 모욕을 다 주고 난 후에 채찍으로 온 몸이 찢어지도록 고문을 하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다 벗긴 다음에 손과 발에 못을 박아 십자가에 높이 메달아 버리는데, 묵묵히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란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들의 정신’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죽으셨는데, 그 죽음을 나를 대신한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인 성도들에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성도들은 너무나 자존심과 자만심이 강합니다. 그래서 고슴도치 부부처럼 떨어지면 춥고, 같이 부둥켜안으면 서로를 찌르는 그런 삶을 삽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제자들을 위해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12명 밖에 안되었지만 모두 개성이 강하고, 자아가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심한 경쟁 관계였고, 서로를 견제하는 사이였습니다.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은 주님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셨습니다. [이제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이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키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사람들은 모두 자기 목표가 있고, 자기 이상이 있고, 자기 꿈이 있고, 각자 자기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자기(self)입니다. 군대나 교도소에서는 적은 수의 지휘관이 많은 수의 병사나 죄수들을 통제해야 하기 때문에 ‘자아’(self)를 짓밟고 억누릅니다. 그들은 외적으로는 하나 된 것 같은 통일성을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많은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그 프로그램대로 양육을 함으로써 일사불란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하나됨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아는 짓밟고 눌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부인’(self-denial)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야만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면 하나 되는 길은 너무 쉽습니다. 십자가는 자기(self)를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2년간 집회를 가졌지만 매우 적은 무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됨이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됨이 없으면 우리를 통해 주님의 생명과 권능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신자가 올 수도 없습니다. 설령 왔다고 해도 교회에서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없으며, 교인들에게서 주님의 향기를 맡는 대신 육신의 송장 냄새만 맡게 되기 때문에 다시 오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집을 방문하면 그 집의 가구나 고급 차나 멋진 정원을 본다고 해도 가족들이 서로 서로 따로 노는 집, 서로 헐뜯거나, 무관심한 가정을 보면 한심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사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교회가 하나가 되면 그 자체만으로도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하나됨을 통해서 세상으로 하여금 자신을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사명을 맡기기에 앞서 그들이 하나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임을 잘 아셨습니다. 하나됨이 없이는 사역의 어떤 열매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2).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성령을 주시고, 은혜와 각양 다양한 은사를 주신 것은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 교회를 주신 것도 하나가 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이런 기도는 초대 교회 때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형제들과 함께 한 마음이 되어 기도와 간구를 계속하더라.](행1:14).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하고 믿은 사람들은 한 마음이 되어 기도회를 가졌고, 계속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함께 기도한다는 것은 그와 내가 한 마음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기도 모임으로 나오십시오. 기도 모임을 성경 공부 모임이나 다른 집회보다 덜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하십시오. 혼자 기도할 수 있지만 함께 기도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오순절 날이 충만히 임하매 그들이 다 한 마음이 되어 한 곳에 있더니](행2:1). 여기서 우리는 초대 교회 성도들의 하나됨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습니다. 각자 따로 있으면서 주님의 약속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한 마음이 되면 집회로 모입니다. 그들은 어떤 어려움을 감수해서라도 함께 있고 싶어합니다. 형제들이 있는 그곳에 내가 있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런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모임이 부담이 되고, 따로 집에 있고 싶고, 혼자 놀러 가고 싶은 것은 딴 마음이 있거나 한 마음이 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보여준 하나됨은 십자가와 전달자요, 부활의 증인들의 생활 방식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 날마다 한 마음이 되어 /성/전에 거하고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빵을 나누면서 단일(單一)한 마음으로 즐겁게 자기들의 음식을 먹으며](행2:46). 집회는 거의 매일 있었습니다. 오늘날처럼 일주일에 한번 예배로 모이는 것도 힘들어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믿는 사람들은 매일 성전에 모였는데, 이들은 한 마음이었습니다. 집회가 끝나면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며’(from house to house) 빵을 나누고, 자기들의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것은 house open을 했다는 말입니다. privacy를 중히 여기는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실천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거의 매일 돌아가면서 이렇게 했다는 것은 이들이 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들만이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일은 자기 소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분란과 다툼과 분열은 자기 소유를 주장하고 자기 권리를 챙기고, 자기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데서 온다는 점을 볼 때 이 점은 성도들에게는 최후의 시험과도 같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무리가 한 마음 한 혼이 되어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그들 중에 자기 소유를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말하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행4:32).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자아’가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손해요, 특권입니다. 만약 십자가에 못 박힌 믿음과 경험이 없이 이런 일을 강제적으로 실행하려 한다면 교회는 폭동이 일어나고 말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하나됨은 주님의 기도 응답의 결과였으며, 이런 삶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감화와 간증을 남김으로써 믿는 자들은 날마다 교회에 더해졌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자라나고 흥왕 해졌습니다(행12:24).

이런 일은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는 거의 포기한 사역이요, 막연한 이상 가운데 하나로 잡을 정도로 요원해졌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성도의 하나됨과 십자가에 대해서 멀어진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진리는 이론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되고, 소망으로 하나되고, 사랑으로 하나된다는 말은 영적이고 추상적인 명사로서는 누구에게도 어렵지 않지만 그것이 내 몸으로, 내 생활에 실천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내 마음속에 없는데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행동하는 것을 위선(僞善), 가식(假飾)이라고 합니다. 반면 내 안에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을 ‘비겁’이라고 합니다. 사건을 목격했지만 증언하지 않는 사람, 불의인 줄 알지만 피해 버리는 사람들을 향해 비겁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들은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었고, 말씀을 두려워함도 없었지만 있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반면 이와는 반대로 마음 가운데 믿음도 있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있고, 선한 양심도, 지식도 있지만 도무지 몸으로, 삶으로,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은 이런 사람을 [허무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약2:20). 이는 위선과 가식보다 훨씬 더 심각한 죄입니다. 이는 음식을 먹었지만 소화가 되지 않는 사람이나 돈은 있지만 쓸 줄 몰라서 빈핍하게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믿음은 있지만 도무지 행함이 없을 때’ 주님은 그것을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시고, 그 사람은 ‘허무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둘 중에 어디에 속하십니까? 위선자이거나 허무한 사람입니까? [그러므로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죄가 되느니라.](약4:17).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의 진리를 압니다. 배웠습니다. 매주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진리대로 살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죄가 된다는 사실을 경고로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자기를 예비하지 아니하고 주인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그 종은 채찍을 많이 맞을 것이로되](눅12:47). 우리는 진리를 안 사람들로서 그에 해당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새 생명과 성령도 없이 그리스도인처럼 행세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염증을 느끼고, 환멸을 느낍니다. 생명과 열매는 속이려고 해도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반면 주님을 믿고 새 생명을 가지고도 육신적으로 사는 사람은 구원의 가치를 격하시키고,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며,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육신을 죽음에 처하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몸에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믿는 자들 내주하신 성령께서 몸을 통해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이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첫 번째 일은 함께 기도하고, 함께 집회를 열고, 함께 식사를 나누고(함께 교제하고), 함께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서로 해야 할 일, 함께 해야 할 일을 혼자서 해도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함께 힘써야 할 일은 반드시 함께 해야만 합니다. [오직 너희 행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할지니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 대한 일들 곧 내가 너희에게 가서 보든지 떠나 있든지 너희가 한 영 안에 굳게 서서 이 복음의 믿음을 위하여 한 마음으로 함께 힘쓰며](빌1:27). [너희는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 마음으로 일치하여 내 기쁨을 성취하라.](빌2:2).

성경에는 유난히 분열과 다툼이 많았던 한 교회가 소개되어 있는데, 고린도 교회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잘 있으라. 완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한 마음이 되며 평안히 지낼지어다. 그리하면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후13:11). “한 마음이 되며 평안히 지낼지어다.” 오늘날 각 교회와 각 가정에 절실히 필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조건 평안, 화평만 찾을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로 인해 갈라진 분열과 분란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분란이 있다고 해서 진리를 포기하거나 희생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적 지식이 빈약하고, 분란을 무서워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십자가 없이 화평과 하나됨을 추구함으로써 스스로 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른 말씀, 바른 교리, 바른 생활에 대한 날카로운 대립이 있거나 그런 상황이 지속되면 져주고 맙니다. 가정의 평안을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성경 문제일 수도 있고, 교회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타협으로 얻은 평안은 자신을 속박으로 몰아 넣습니다. 여러분은 갈보리의 십자가를 염두에 두고 부부 생활을 해야 하며, 갈보리의 십자가를 통해 자녀를 교육해야 하고, 교회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은 갈보리의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모두 자식 교육에 관심이 많은 관계로 자녀 교육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실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과 같이 훌륭한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자식 문제 앞에서는 십자가를 내 팽개쳐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때로는 육신적인 감정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 노릇을 합니다. 빗나가는 아들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는 아들의 잘못과 허물을 다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들을 죽이시든 살리시든 마음대로 해 주십시오.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기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들을 향한 우리의 육신적 애정이 그것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전에 한 어머니는 아들의 비행(非行)을 보면서 오랫동안 눈물로 기도했지만 아들이 점점 방탕한 길로 가자, 자신의 기도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나는 더 이상 너를 보호해 주시도록, 네가 어려움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겠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너를 죽이시든 살리시든 주님의 손에 너를 맡기기로 했다. 너의 생명을 하나님의 손에 넘겨 드렸다.”라고 했습니다.

가족이란 육신적 애정의 끈은 그 자체로 엄청나게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해서 정련된 사랑이 아니라면 그 애정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깊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와 상관없는 불신자들도 가족이 원수인 사람이 얼마나 많으며, 형제가 이웃 사촌보다 못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둘러보십시오. 부부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가련한 애정으로 출발해서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고 약속했고, 말하지만 얼마나 자주 위기가 닥치는지 여러분은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됨이 아니면 그 하나됨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한 가족 사랑이 아니면 그 사랑은 참된 가족 사랑이 아닙니다. 청교도의 창시자 존 낙스(John Knox, 1514-72)의 제인 웰시는 아버지의 믿음을 그대로 간직한 존 웰시와 결혼했는데, 남편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밤에 그녀에게 몇몇 교도관이 찾아와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포기하도록 권면하면 살 수 있다고 설득하자, 자기 앞치마를 둘둘 말고서 ‘제 남편의 머리를 여기에 담아다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인간적인 애정에 끌리지 않고 자기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함께 죽기를 결심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자녀 사랑, 십자가를 통한 남편 사랑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하나됨은 십자가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종교인들도 사랑, 희생, 자비를 외칩니다. 그러나 성경의 사랑은 육신의 인간성과 본성에서 비롯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사랑으로 하나되었다면 그것은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결성된 모임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사랑으로 참 사랑을 실천하며, 십자가를 통한 분리와 하나됨을 추구하는 곳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이런 하나됨을 통해 더욱 성장해 나가기를 빕니다.

로마서 15:6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6).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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