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는 이 세상의 통치자이며(엡2:2), 공중 권세 잡은 자입니다. 마귀는 높은 처소에 자신의 영적 군대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사역자들을 가지고 있고(고후11:15), 자신의 교회가 있습니다(계2:9, 3:9). 마귀는 천사장 미가엘과 다투기도 했으며, 다니엘의 기도 응답을 들고 오는 천사 가브리엘을 21일간 막기도 했습니다. 마귀는 자신의 신부가 있고, 자신의 천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는 것처럼 마귀 역시 자신의 자녀들이 있습니다(요일3:10, 요8:44). 마귀는 성도들을 대적하며, 삼키려 하며, 범죄하게 하며, 하나님을 불신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처럼 마귀는 악령을 통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불순종하는 자녀들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엡2:2). 마귀는 다니엘보다 지혜롭습니다. [보라,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사람들이 네게 숨길 수 있는 은밀한 일이 없나니](겔28:3). 마귀는 이런 지혜로 사람들을 점쟁이로 만들어서 점괘를 봐 주기도 하고, 점성술이나 각종 운명 철학관을 운영하게 합니다. 교회 내에 성도들도 마귀로부터 이런 점치는 영을 받은 사람들이 크게 오해를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신통력이나 영안을 받았다고 굳게 믿거나,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하게 하기도 합니다.
마귀는 습하고, 어둡고, 더러운 무덤 가에만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에 어디에나 마음대로 들락거립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던 바로 그곳에도 마귀는 있었습니다. 마귀는 회당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듣는 회중 안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설교를 하는 그 장소에 마귀는 함께 있었고, 마귀들린 사람 역시 그 곳에 있었습니다. [회당에 부정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어 큰 소리로 외치며](눅4:33). 어디에? 회당에.... 마찬가지로 마귀는 오늘날 교회를 자신의 거처로 삼고 있다고 해서 아무런 이상이 있을 것이 없습니다.
사탄은 성도들을 이용하기도 합니다(고후2:11). 사탄은 전도 여행을 막기도 했습니다(살전2:18). [그러므로 우리가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고 특히 나 바울은 한번 두번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살전2:18). 사탄은 성도가 기도하는 것을 막고 성경을 읽는 것을 막기도 합니다. 사탄은 온 세상을 속이며, 성도들이 들은 말씀이 마음속에서 자라지 못하도록 즉시 와서 빼앗아 가며(막4:15),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습니다(벧전5:8). 전에 저와 교제하던 한 형제는 영적 열정도 있고, 기도도 열심히 했고, 신앙 서적도 열심히 읽었는데 유독 성경만은 읽지 못했습니다. 제가 성경을 읽으라고 권면하자 그는 한 동안 머뭇거리다 고백하기를 자기는 성경을 읽으려고만 하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전화가 오거나 누가 찾아 오거나 일이 생기거나 머리가 어지럽거나 별별 일이 다 생겨서 그는 몇 년 동안 한번도 성경을 제대로 읽어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가 외우는 성경 구절은 모두 신앙 서적에서 인용된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르고 균형잡힌 진리의 지식이 아니라 매우 왜곡된 지식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마귀에게 사로 잡혀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구령의 열매를 맺듯이 사탄 역시 자신의 사역의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이는 이미 사탄에게 돌아선 자들도 있기 때문이라.](딤전5:15).
저는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우리 교회 형제 자매님들이 모두 [십자가와 마귀]에 대해 바른 진리의 지식을 소유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주께서 저희 눈을 열어 주시고, 이 시간 특별히 마귀를 결박해 주셔서 마음 속에 말씀이 깊이 뿌리 내리기를 빕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성경을 통해서 마귀의 정체와 그를 대적하는 법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귀에 대한 그들의 지식과 정보는 상업 영화나 전설의 고향이나 신화같은 것에서 그릇되이 얻은 것이 전부입니다. [십자가와 마귀]는 영화의 소재로, 전설이나 민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합니다. 영화 속의 사제들이나 주술사들은 마귀를 퇴치하기 위해서 십자가 목걸이에, 십자가가 그려진 성경책과 손에는 십자가 문양이 된 장난감 하나를 들고 있다가 그것을 앞으로 내밀면서 마귀와 대적하는 그런 장면을 자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독교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유럽에서는 마귀는 십자가의 모양만 보아도 무서워한다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십자가의 문양이나 틀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두려워합니다.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주님은 마귀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마귀에 대해서 무지한 만큼 마귀는 쉽게 속일 수 있고, 포로로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인류 6000년 역사에서 마귀를 1:1로 맞싸워서 이기신 분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연약하게 되셨지만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주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마귀를 이기는 일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이는 우리가 개미 한 마리를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되시고 마귀는 그대로인 채 싸우라면 마귀도 자신감이 넘칠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길 수 없으랴?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마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의 아들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곤경에 몰아 넣으셨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도록 만들었습니다. 결국은 십자가에 메달아 죽여 버렸습니다. 마귀는 완전히 승리한 것 같았습니다. 사람이신 주님은 마귀와의 전투에서 불리하다고 해서 단 한번도 반칙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단 한 차례도 속임수나 편법을 동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고통은 고통대로 다 감당하셨고, 수치와 모욕은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단 한번도 마귀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으셨고, 범죄하지 않으셨고, 시험에 무너지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마귀를 멸하시고, 부활을 통해 승리하셨습니다. 갈보리는 마귀의 승전지가 아니라 주님의 결정적 승리를 이룬 빛나는 역사의 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성경은 승리의 비결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 그리스도를 통하여서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15:57). 영적 승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승리는 목표가 아니라 갈보리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결과입니다. 승리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결코 해결할 수 없고, 이길 수 없던 문제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승리의 선물을 주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음으로 이런 승리를 여러 번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승리가 연중 행사처럼 일년에 간혹 몇 번 있는 그런 것에 불과한 경험적 사건이 아니라 매 순간 늘 있는 지속적 체험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속적인 승리, 항구적인 승리를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비결은 간단합니다. In Christ.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이제 감사하노라.](고후2:14).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심으로써 그리스도의 모든 자원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십니다. 마치 뿌리가 가지에게 자양분을 일분일초의 간격도 없이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심으로 그렇게 승리를 주십니다. 갈보리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에게 부어졌고, 죽음의 침례를 통해 우리는 그분 안으로 깊이 잠기게 되었습니다.
셋째,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4-5). 말씀을 통해서 형성된 믿음, 성령의 열매로 자라난 믿음은 세상을 이깁니다. 믿음은 마귀를 이기신 주님과 우리를 하나로 연합하기 때문에 마귀가 우리를 이길 수 없지만 믿음이 없다면 주님과 우리는 각각 독립적인 존재로 분리되고 맙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의존한 상태, 주님과 연합된 상태가 바로 믿음입니다.
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현재 현실에서 겪는 경험은 승리는 고사하고 비참할 정도로 패배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육신은 지치고, 정신은 고갈되고, 영은 메마릅니다. 말씀과 생활의 완전한 분리와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간격으로 인해 결국에는 믿음마저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합니까? 이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닌 ‘자아’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청교도의 대부였던 윌리엄 로(William Law)는 말하기를 ‘자아는 죄가 머무르는 거처와 좌석일 뿐 아니라 죄의 생명 자체이다. 마귀의 모든 역사는 자아 안에서 이루어진다. 자아야말로 마귀가 일하는 작업장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우리에게 처절한 실패와 슬픔과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하도록 하시며, 마귀의 올무에 사로잡히게 허락하시며(딤전3:7), 마귀의 간계에 빠지게도 하시며(엡6:11), 마귀의 정죄에 시달리게도 하며(딤전3:6), 간혹 마귀의 뜻대로 마귀에게 사로잡히도록 허락하십니다(딤후2:26). 실제로 베드로를 비롯한 열 한 제자는 사탄에게 밀 까부르듯 심한 시험을 당했습니다. [또 {주}께서 이르시되,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갖기 원하였으나](눅22:31). 이는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대신 자신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야와 삽비라 역시 초대교회의 성도들이었지만 사탄으로 충만하여 성령께 거짓말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야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행5:3). 구약의 3대 의인이요, 우리에게 인내의 본으로 기록된 욥 역시 자기 의를 신뢰했을 때 그는 마귀로부터 극심한 시험을 당했습니다. 그는 처음에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를 보이리라, 주님과 변론하리라 주장했지만(욥13:3, 욥29:14, 31:6) 후에 시험을 당한 후에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더라.](욥42:6)고 고백했습니다.
마귀는 성도들의 일상 생활과 너무나 밀접한 관계 속에 있으며 우리의 먹고 입는 것, 생각하는 것 하나 하나에 영향을 미칩니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성령이 아니라 악령을 따라 살았습니다. [지나간 때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靈)이라.](엡2:2). 우리는 마귀의 자녀였고, 세상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성도들은 누구나 다 갈보리의 십자가를 자신의 무덤으로 삼고, 부활의 동굴을 자신의 생명의 탄생지로 삼을 때까지 결코 마귀를 이길 힘을 갖지 못합니다. 성도들이 세상이나 육신을 위해 사는 한 그는 결코 마귀에게 위협을 줄 수도 그 어떤 상처나 타격을 가할 수 없습니다. 때로 마귀는 소유의 풍부함을 제공함으로써, 육신이 지칠 정도의 과중한 일 거리를 줌으로써, 뭐든지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소망이 넘치게 함으로써,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조성함으로써, 지금은 잠시 고생해도 조만간 다 잘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부여함으로써 십자가 없는 신앙 생활을 하도록 유도합니다. 그런 성도는 기도할 시간도, 성경을 읽을 시간도, 교회의 예배나 기도 모임에 나올 시간조차도 마귀에게 헌납해 버린 채 살기 때문에 자신이 마귀의 올무에 단단히 걸린 사실조차도 잊고 삽니다. 그렇게 번 돈, 그렇게 얻은 명예, 그렇게 얻은 어떤 것도 어느 한 순간에 허망하게 날아가 버리거나, 지금까지 투자했던 시간에 상응하는 고통의 세월을 보낸 후에야 자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때로 성도들이 오해하는 구절 가운데 하나는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니 오직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자기 자신을 지키매 저 사악한 자가 그를 건드리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란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오랫동안 크리스천은 마귀 들릴 수도 없고, 악령의 공격을 당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낳았습니다. 우리는 앞선 예에서 보듯이 성도들 역시 사탄이 마음에 가득할 수 있고, 마귀의 뜻대로 마귀의 올무에 사로잡힐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속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성도들의 일생은 마귀와의 영적 전쟁을 하며 사는 삶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과 평안은 없습니다. 때로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끊임없는 고난과 박해를 받으며, 마귀의 불붙은 화살이 쉼없이 날아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영감으로 주어진 생명의 책이요, 주의 법이 기록된 법전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전쟁의 책입니다. 성경은 주님의 전쟁의 책이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전권은 하나님과 마귀의 영적 전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주님과 마귀와의 전쟁은 저 에덴에서부터 시작되어 천년 왕국이 끝나는 그날까지 성경을 관통하는 거대한 역사입니다. [이러므로 [주]의 전쟁의 책에 일렀으되, 그가 홍해와 아르논의 시내에서 행하였고](민21:14). 주님은 전사시며(출15:3-[주]는 전사(戰士)시요, [주]가 그분의 이름이시로다.), 구원의 대장이시며(captain), 우리는 모두 그분의 군사입니다(딤2:3-4).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주의 군대였듯이, 신약에서 교회는 주님의 군대입니다.
우리의 전쟁은 혈과 육에 속한 전쟁이 아닙니다. 강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원수가 높은 처소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자아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결코 이 전쟁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낼 뿐 아니라 우리를 악한 현 세상에서 건져냈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를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정욕을 거부하고 맑은 정신으로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하셨습니다. 만약 우리 마음이 아직 세상의 정욕(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인생의 자랑)을 그대로 품고 있다면 그는 마귀의 편이지 결코 주님의 편이 아닙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십자가 없이 성령을 외치는 잘못과 더불어 자기 안에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대로 둔 채 모든 일에 마귀를 들먹이는 잘못을 범합니다. 마귀론에 미친 교회를 보면 자기 잘못은 하나도 없고 전부 다 마귀의 짓거리라고만 떠듭니다. 전에 마귀론에 깊이 빠졌던 한 목사님은 입에서 예수란 이야기보다 마귀란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왔습니다. 자기 뜻대로 안되는 모든 일에는 늘 마귀를 탓했습니다. 물론 그분의 말씀 중에 상당수는 마귀의 책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 안에 마귀의 틈(처소·place)을 내 주고 나서 마귀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자신의 죄를 변명하고 핑계로 삼기 위해서 ‘마귀’를 자꾸 언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윗은 마귀의 유혹으로 인구 조사를 했다가 엄한 징계를 받았지만 자신의 죄를 회개했지 마귀 탓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욥은 마귀로부터 까닭없는 고난을 받았지만 마귀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역시 마귀에게 까불림을 받아 주님을 부인했지만 눈물로 자신의 죄를 회개했지 모든 책임을 마귀에게 돌리고 자신은 빠져 버리지 않았습니다. 마귀에게 속았다면 그 속은 책임은 언제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마귀를 탓하는 성도들은 마귀를 탓하는 동시에 먼저 자기 자신을 탓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귀는 어차피 우리의 적인 것입니다. 적이 적에게 하는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육신적인 삶을 사는 것이 전적으로 마귀의 책임은 아닙니다. 일차적인 책임은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7). 내 안에 마귀의 진지를 구축해 놓고 마귀와 전쟁을 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마귀를 불러들이는 자아를 십자가에 내려놓기를 거부하는 신자가 마귀를 대적하는 일은 원천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이 되신 주님을 보십시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올 것임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서 아무것도 취할 것이 없느니라.](요14:30). 주님은 자신 안에 마귀가 취할 것을 전혀 남겨 두지 않으셨습니다. 마귀가 오지만 주님에게서 아무 것도 취할 것이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자아를 처리해 버린다면 마귀는 우리 안에서 아무 것도 취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갈보리의 십자가로 가 봅시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마귀와의 전쟁을 일단락 하는 역사적 분기점입니다. 에덴에서부터 이 전쟁은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적대감(敵對感)을 두리니 여자의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마귀는 이 때부터 여자의 씨가 이 세상에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마귀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31, 16:11을 보십시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제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리라.](요12:3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라.](요16:11). 이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왕국은 완전히 주님이 차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믿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고, 어둠의 권능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왕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능에서 건져 내사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으로 옮기셨으니](골1:13). 눈에 보이는 물질적이고 정치적이며, 지상 왕국인 하늘의 왕국은 아직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피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주님의 죽음을 통해 생명을 얻게 된 신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 마귀를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살과 피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에 참여하셨으니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히2:14).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이 죽은 죽음을 믿는 성도들은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권능이요, 지혜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마귀는 오늘날 강단에서 십자가의 설교를 사라지게 하고 대신 성령의 능력, 성령의 은사, 성령 체험만을 강조하게 함으로써 느낌만 있을 뿐 전혀 열매가 없는 교회 생활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십자가를 통해 옛 생명을 처리하고 새 생명을 얻은 성도들에게만 유효합니다. 갈보리의 죽음을 통해 전에 우리를 다스리고 지배하던 마귀가 패배하고 심판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성도들이 얼마나 적은지 모르겠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패배의 죽음이 아니라 승리의 죽음이란 사실은 다음 구절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정사(政事)들과 권능들을 노략하사 십자가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골2:15). 십자가는 노략하고 탈취물을 나누는 승리의 전쟁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전리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이사야 53:12, [그러므로 내가 그로 하여금 위대한 자들과 몫을 나누게 하며 강한 자들과 노략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혼을 쏟아 부어 죽기까지 하며 범죄자들과 함께 계수(計數)되었음이니라.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들을 위하여 중보(仲保)하였느니라.](사53:12)는 말씀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육신은 채찍에 맞으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힌 채 죽어 가는 비극적인 종말이었는데 이것이 전리품을 취하는 승리라는 사실은 역설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죄인의 교수대가 승리자의 개선 마차’였습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를 통해 마귀의 권세를 노략하고, 혼들을 이겨 올 수 있습니다. 견고한 마귀의 진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용사가 탈취한 것을 어떻게 빼앗으며 합법적으로 끌려간 포로를 어떻게 건져 낼 수 있으랴? 그러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용사가 끌고 간 포로들도 빼앗아 오고 무서운 자들이 탈취한 것도 건져 내리니 이는 내가 너와 싸우는 자와 싸우고 네 자녀들을 구원할 것임이라.](사49:24-25). 십자가의 핵심 사역이 바로 마귀의 포로들, 마귀의 종살이를 하는 사람들을 노략하고 탈취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야말로 영혼들을 이겨오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주님의 이 승리는 과거의 역사에 한 정점으로 기억되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지속되는 현재적 승리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를 통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전쟁을 치르는 군사들을 보십시오. 계시록 12:11,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거의 말로 그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미래에 있을 이 사건은 그들이 갈보리 십자가의 피를 어떻게 영적 전쟁에서 사용했는지, 어떻게 승리했는지 잘 보여 줍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승리의 길입니다. 환란 성도들의 두려움 없는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얻은 사람만이 자기 생명을 버릴 수 있습니다. 부활의 생명을 소유한 자만이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에 이르도록 그것을 보전하리라.](요12:25).
그렇다면 현재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하셨은즉 그와 같이 너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 이는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한 자가 이미 죄를 그쳤기 때문이라.](벧전4:1).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배우게 됩니다. 십자가는 이론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십자가란 애매한 고난과 모욕과 수치입니다. 십자가는 앞에 올 영광을 보는 것이지 현재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생각으로’-같은 정신으로. 이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이제는 전투에 나갑시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로서 이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영적인 원수는 영적인 방법으로 영적인 사람을 공격해 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공격으로부터 예외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피하는 삶은 하나님의 징계가 기다리며, 십자가를 지는 삶은 마귀의 공격이 기다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승리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베소서 6:1-13, [너희가 마귀의 간계(奸計)를 능히 대적하고 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全身甲?)를 입을지니 이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을 대적(對敵)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정사(政事)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것은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버티어 내고 모든 일을 행한 뒤에 서기 위함이라.](엡6:11-13). 우리는 이 시간 이 구절을 설명하는 관주와 해설을 다는 대신 십자가에 못박힌 성도들이 해야 할 싸움의 실체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맨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전쟁의 병법을 다룬 책이란 사실을 다시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이 성경을 군사학과 병법의 차원에서 보려는 노력조차 해 보지 않았다면 그는 이론과 실전에서 모두 패배에 들어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육신 안에서 행하나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이는 우리의 전쟁 무기가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을 통하여 요새들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라.)](고후10:3-4). 이제 민간인으로서의 삶을 끊어버리고 군인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교회가 갖추어야 할 모습이 있다면 바로 전투하는 군대의 모습입니다. 갈보리에서 피로 구속받았고, 값을 치른바 되었으며, 해방된 성도들이 아직도 세상의 노예가 되어 육신에게 붙들려 마귀의 종노릇하고 있다면 포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갈보리의 십자가를 통해 승리하신 주님의 승리가 현재 나에게 승리로 직결되기 위해서는 그 갈보리의 십자가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는 성경의 선포를 그대로 받아 들이십시오. 주님의 죽음이 내 안에서 역사하며, 주님의 생명이 또한 내 안에 역사한다는 진리를 그대로 믿으십시오. 주님은 지속적인 승리를 보장해 주십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