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십자가와 제자도]에
대해서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 으레 오해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부활 역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입니다. 그러다 보니 십자가를
지라는 설교는 곧 자신이 강한 능력을 소유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성령 충만을 통해서 엘리야나
모세, 바울과 같은 사람으로 변화되거나 삼손과 같이 주체할
수 없는 넘치는 힘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이는
지혜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약함을 의미합니다. 고로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힌 삶을 산다는 것은 곧 어리석고, 약하게
보이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약하고 어리석게 보이면
그는 환영과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십자가에 못박힌 성도의 삶은 칭찬과 화려한 간증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수치와 모욕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확연히 달라 보이고, 얼굴에 광채가
빛나고, 말하는 모습이나 걷는 걸음걸이라도 달라 보일
것처럼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의 특징은 연약함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십자가의
도를 전파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삶을 살았던
표준적인 모델을 제공한 사람은 단연 바울 사도입니다. 그는
결코 성령을 통해 삼손과 같은 힘이나 다니엘이나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압도한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동정이 갈 정도로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진
제자도를 배우면 배울수록 약해졌습니다. 그는 본래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대한 조명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는 지혜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녔던 지혜와 모든 것을 똥으로 여겼습니다(빌3:8).
그는 본래 넘치는 체력과 열정의 소유자였습니다. 얼마나
열심이었든지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다마스커스까지 체포
영장을 들고 가서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힌 이후에는 자신이 자랑했던 지혜는
배설물로 여겼고, 넘치는 체력은 사탄의 가시로 극도로
약해져서 평생동안 의사(누가)를 달고 다녀야 했습니다. [
내가
어쩔 수 없이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연약한 것과 관련 있는
것들을 자랑하리라.](고후11:30). [
내가
이러한 사람에 관하여는 자랑하겠으나 내 자신에 관하여는
연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고후12:5).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가장 깊은 계시와 풍부한 이해에
도달했던 한 인간은 참으로 연약했습니다. 그의 사역은 힘이
넘쳐서 전한 것이 아니라 연약함으로 행해졌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바울은 산 송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
내가
처음에 육체의 연약함을 통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선포한
것은 너희가 아는 바라.](갈4:13). 주님은 왜 그렇게
했습니까? 바울을 왜 삼손처럼 만들어 주지 않으시고, 약함
가운데 두신 것입니까? 모세는 120세가 되어서도 젊은이
못잖은 건강을 유지했고, 갈렙 역시 늙어서도 힘이 조금도
쇠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진리를 선포하는
바울 자신의 몸 안에는 그런 힘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나의 강한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해지기 때문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연약한
것들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 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하기 때문이라.](고후12:9-10).
하나님은 인간의 강함보다는 약함을, 세상의 지혜보다는
어리석음을 선택하십니다. 가끔 십자가의 설교나 성령의
은사, 능력에 관한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나를 초인으로, 슈퍼맨으로 변모 시켜 주기를
원합니다. 힘도, 지혜도 넘쳐 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설교
방향도 그런 식으로 흐르게 마련입니다.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자신들 안에 능력을 체험하고, 느끼고, 자신들이
마치 능력의 저장고나 하늘의 능력이 넘치는 매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십자가에 대한 이런 잘못된
이해와 인간적인 생각 때문에 갈보리의 십자가의 진리는
왜곡되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영국의 대 부흥을
주도했던 제시 팬 루이스 자매는 ‘십자가와 부활에 있어서
주님의 죽음을 본받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심각한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이지, 힘이 증가하는 어떤 감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못 박힌다는 것은 참으로 연약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다는
본능적인 욕망과는 반대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의 상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한 말입니다. 저는 십자가의 진리를 전파하면서
성도들이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오해를 하거나
잘못된 인상을 받게 될 것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도의
증언을 들어보십시오. [
이는 그분께서
약하심을 통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아 계시기 때문이며 또 우리도 그분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분과 함께 살
것이기 때문이라.](고후13:4).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도 그분 안에서 약하나...”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약하지만 하나님의 권능으로 사는 것’이
신자의 삶이며, 제자들의 삶입니다. 약한 것이 무엇입니까?
약하면 병들고, 더 약하면 죽습니다. 약하면 아무 것도 이길
수 없고, 마음에 소원이 있어도 할 수 없고, 더 약하면 그런
소원도 갖지 않게 됩니다. 십자가를 체험하지 못한 성도들은
늘 지혜와 힘이 넘칩니다. 결심도 잘합니다. 자신감도
넘칩니다. 방법과 요령을 찾는데 빠르고 능합니다. 이들은
인간적인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을 구분하는 예리한
통찰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한 일도 하나님이 했다고
간증하고 자신은 하나님께 충분히 영광을 돌려 드렸다고
의기양양해 합니다. 이는 마치 음치들이 음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이나 색맹이 색에 대한 구별력이 없는 것처럼
육신적인 성도들은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손길이고 어디부터
자신의 육신의 힘인지 도저히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설명도 불가능합니다. 이들은 그냥 혼잡해
버립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 기도만
한다고 됩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나서 기도해야지!라고
따지고 반대로 무슨 일을 하라고 하면 ‘기도합니다.’라고
해 버립니다. 전에 음악 듣기 시험을 본 적이 있는데,
녹음기에서는 현악기로 어떤 곡을 연주해 주고 나서 ‘이
곡은 무엇일까요? 가 아니라 “이 곡은 무슨 악기로 연주한
것일까요?’라는 문제였습니다. 첼로, 바이올린, 비올라
등으로 예문이 나왔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 이름만 알았지 그 소리의 차이를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초신자들은 다 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속한 것과 자아에서 비롯된 것의 차이를
전혀 모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들의 영적인 생활’이란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겉 사람은 죽음에 처해지는
그런 삶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삶입니다.
[
이는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이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라.](히4:15).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느끼시고 동정하실 수 있는 것은 주님 자신이 극도로
연약하셨기 때문입니다. [
그가 무지한
자들과 길에서 벗어난 자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음은 자기
자신도 연약함에 싸여 있기 때문이라.](히5:2).
오늘날 강단에서 십자가의 진리나 부활의 능력, 성령을
체험하면 구약의 대언자들, 신약의 사도들, 부흥을 주도했던
믿음의 선배들과 같이 초인이 될 것처럼 가르치지만 이는
모두 이 세상 신이 거짓 사역자들을 통해 전파하는 거짓
복음입니다. 대언자들, 사도들, 부흥을 주도했던 믿음의
영웅들은 모두 자신의 연약함을 절감했던 사람들이요, 약함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이며, 극심한 고난과 멸시와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초라한 힘, 약함, 두려움, 떨림
등이 우리를 휘감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 [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감과 열정이 넘치는 불타는 청년
사도가 아니라 한없이 약하고 약한 그런 사도였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두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죽은 시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란 사실을 깊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전에 어떤 목사님과
기도를 하는데 그분은 기도 가운데 반복해서, “주님,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제가 하면 실패합니다.”를
반복했습니다. 그분은 실로 자신의 연약함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직시하고 있었고, 일의 계획이나 과정이나 성취를
모두 주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기를 간구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8-9절을
보십시오. [
형제들아, 아시아에서
우리에게 닥친 고난에 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가 힘에 겹도록 너무 눌림을 당하여 심지어
생명까지도 단념하고 우리 속에 사형 선고를 받았느니라.](고후1:8).
십자가에 대해서 깊이 깨달았던 한 사도라 해도 그는 힘에
겹도록 눌림을 당했고, 생명까지도 단념했습니다. 주님은 왜
사도와 그 일행들에게 이런 환란을 허락하셨습니까? 주님은
육신을 신뢰하는 자는 누구라도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두심으로써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주님만을 신뢰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1:9).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진리를 배운 후에
실제로 삶 가운데서 그런 진리를 입증하는 경험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계 상황을 벗어난 상태에
이를 때 우리는 자신의 지혜와 육신의 힘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고
어디서도 도움이 올 수 없을 때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신자가 제자의 길에
들어서면 이런 진리들을 삶 속에서 몸소 배우게 되는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전혀 경험하고 싶어하지 않는 그런
것들입니다. No thank you, God. 그런 것들입니다. 하지만 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것들이며, 배워야 합니다.
모든 신자가 모두 제자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성도로 부르셨고, 성도로 부름
받은 사람들을 다시 제자로 부르십니다. 죄인들은 신자가
되어야 하고, 신자들은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연스런 연속적인 과정이지 특별히 구별되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초청하셨고, 부르셨습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마11:28).
이 부르심에 응한 성도는 제자로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마11:29).
주님은 우리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제자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며,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배우는 사람이며,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는데, 이는 제자로의 부르심입니다. 저는 저희
교회의 모든 성도가 다 주님의 제자로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제자의 삶에 핵심 역시
십자가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필수 요소이지만 제자의 삶에도 필수 요소입니다. 주님이 [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는데, 내 멍에란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요건은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날마다 말씀에 거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4, [
그때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주님은 제자의 요건에 학력이나 경력을 기재하거나
얼마만한 능력의 소유자인지, 지혜가 출중한 사람인지,
인간성은 쓸만한지, 인종, 성별의 차이를 전혀 두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교파 출신인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신 따르려는
사람은 예외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제자로서는
결격입니다.
[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나 아내나 자녀나 형제나 자매나 참으로
자기 생명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주님은 너는 나이가 들었으니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하지 않으십니다. 너는 전과자의 경력이 있으니,
이혼 경력이 있으니, 사회적 평판이 좋지 않으니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기준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는 능히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자아(기)를
처리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본 성도들은
결코 자신을 자랑하거나 신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미워하고, 혐오합니다. 자신에게는 흠이 없다고 생각했던
욥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더라.](욥42:6).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었던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
이는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알기 때문이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할는지는 내가
알지 못하노라.](롬7:18).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는 주님의 선고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갈보리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의 죽음과 함께 나를 처리한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성도들이 제자의 삶에 들어서지 못하는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아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 때문입니다.
신앙을 가졌지만 신앙을
자기 개발과 자기 영광, 자기 자랑거리로 삼으려고 할 때
그는 주님의 종이 아니라 주님을 자신의 종으로 만들려고
작정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자아는 교묘하게 자신을
위장하고, 자기 옹호, 자기 영광, 자기 연민, 자기 자랑, 자기
존중을 은밀히 추구합니다. 종교성으로 교묘히 숨겨
놓았지만 은밀히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성도들은 자기가
무시받을 때, 자기에게 모욕이 돌아올 때, 자기에게 반박과
반대가 밀려 들어올 때 그 본성이 다 드러나고 맙니다. 이런
사건들 앞에서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못합니다.
전에 어떤 교도관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수십년간
사형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교정 사역을 감당하는데,
구원받은 사형수들이 얼마나 장엄한 죽음을 맞이하는가를
감동적으로 간증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불교 신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형 집행이 7년 이상 연기되어 그는
온갖 불경을 다 읽었고, 인생의 허무를 깊이 깨달아서
교도소 내에서 생불(生佛)이란 추앙을 받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의 입술에는 저주와 모욕은 고사하고 사소한
욕설조차도 없고, 과거의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뉘우침이
있고, 다시 태어나면 성자로 태어날 것 같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드디어 형이 집행되는 순간이 오자 온
세상을 저주하며 그 입에는 차마 듣기 어려운 욕설들이
강둑이 터진 댐처럼 쏟아져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모범수로 감형되기를 바랐는데 숨겨진 소망이 무너진
것입니다. 자아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자신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건을 통해 여러분의
자아는 마침내 본 모습을 드러내고 맙니다. 겉으로는 멋있게
보일 수 있고, 경건해 보일 수 있고, 사람들 사이에
훌륭하다는 평을 들을 수 있고,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서 여러분은 자아에서
맺힌 쓰디쓴 열매들이 증거되고 말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이 제자도의 자격 요건이란 사실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란 말씀에
전적으로 아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이란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받은
생명입니다. 거듭난 성도는 새 생명, 즉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자기 생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자기 생명’에 대해서 얼마나
반복적으로 가르쳤는지 모릅니다.
① 자기 생명을 잃고(마10:39,
막8:35, 눅17:33), -[
자기 생명을 찾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로 인하여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찾으리라.](마10:39).
자기 생명을 잃으면 주님의 생명을 얻습니다.
②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에 이르도록 그것을 보전하리라.](요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할 수도, 자기를
미워할 수도, 자기를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③ 자기 생명을 돌보지
아니하고- [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렀어도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한 것을 채우려 함이었느니라.](빌2:30).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자기 생명을
돌아 보지 않는 것임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자기 생명을 돌보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④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다- [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거의 말로 그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주님은 복음서에서만 다섯
번 정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또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여기서 우리는 ‘날마다’란
말에 주의해야 합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은 매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이라고 했는데 동일한 말씀입니다. [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사도 바울은 전 생애를 통해 자신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는 것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설교도 성경 공부도 주님의 생명을 내 몸에 드러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내 몸에 주님의 생명을 드러내고 싶다면
주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져야 합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2000년 전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내 삶 속에서 내 몸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때 질그릇 같은 우리
몸 안에 보배로운 성령을 가졌습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내주하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 몸에 드러나게 하는 일이 바로 제자의
길입니다. [
우리 살아 있는 자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
이미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안에는 어떤 능력도
자원도 생명도 없습니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것은 모두
버려야 할 것들이며, 쓸모없는 것들입니다. 자기 생명은
잃어 버려야 하고, 미워해야 하고, 돌보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은
끝났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항상 죽음에
넘겨짐으로써 우리의 죽을 육체에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됩니다. 교회도 많고, 신자도 많지만 몸으로
주님의 생명을 나타내는 성도는 몇이나 됩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의 수치를 짊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
그런즉
우리가 그분의 수치를 짊어지고 진영 밖에 계신 그분께로
나아가자.](히13:13). 우리는 지금 주님의 영광을
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는 앞으로 올 것들의
영광이지 현재의 영광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이 받으신
모욕과 수치를 나도 받으리라! 결단해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정신이며, 십자가를 지는 성도의 삶입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어 보십시오. [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내 속에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자신만을 볼 때는 한없는
약함, 두려움, 심히 떨리는 것을 봅니다. 이런 이유로 더욱더
주님을 의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에 또 하나의
필수 요소는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
이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꾸준히)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8:31).
제자는 스승의 말씀에 꾸준히 거하는 자입니다. 제자의
사전적 의미는 첫째, 배우는 사람, 학생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우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고, 그
말씀에 꾸준히 거하지 않으면 당연히 제자라 할 수 없습니다.
둘째, 스승의 가르침에 대해서 뿐 아니라, 스승에 대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셋째, 스승의 생애를 재연시키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하고,
그리스도의 생애를 저희들을 통해 재연하는 것이 바로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 십자가에
있었듯이 우리의 생애는 마땅히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어야 하며, 십자가의 정신을 삶에
재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몸으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드러내야만 합니다.
주님은 이미 부름받은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후에 다시 한번 부르셨습니다. 주님을
부인함으로써 제자의 자격을 상실했던 베드로를 다시
제자로 부르셨는데, 이는 우리가 주님을 언제든지 다시 따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더 이상 이 땅에 계시지
않으면서도 베드로에게 여전히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19, 21:22 [
그분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 표적으로 보여 주신 것이더라. 그분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매](요21:19).
[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21:22).
어린양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이 제자의 삶입니다. 저 하늘의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 우리는 성령을 통해,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묵묵히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양은 따라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바울 사도는 [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도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전11:1)고 했습니다. 제자는 따르는 자이며,
배우는 자입니다. 제자는 선택받은 자입니다. [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요15:16a).
제자는 위탁받은 자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일을 위탁받은
자요, 우리는 복음 전파와 세계 선교의 사명을
위임받았습니다(살전2:4). [
오직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복음을 위탁받은 대로 우리가 말하노니....](살전2:4a).
제자란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요17:18).
오늘날 교회는 제자도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성도들을 주님의 제자로 만들기 위해서
많은 힘을 쏟습니다. 이 제자도의 핵심이 십자가에 있음을
명심하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 주님을 드러내는 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흔히 제자의 단계는 “와 보라(초청),
나를 따르라, 나와 함께 있으라, 내 안에 거하라.”로
요약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로
부르십니다. 고난으로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