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십자가의 전달자]란
제목으로 주님의 말씀을 증거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외 없이 [십자가의 전달자요, 부활의
증인]으로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전도 훈련’을 많이 시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교회에 사람을 데리고 오도록 촉구합니다. 전도 요령,
전도 방식, 전도의 기법 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가르치지만
전도자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전도하는가? 보다는
전도자로서의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기도의 형식이나 요령보다는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기도자의 자세가 더 중요한 것이나 설교의 기법보다는
진실한 설교자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십자가에 못박힌 성도가
아니면 흉내는 낼 수 있어도 결코 십자가의 생명, 십자가의
주님을 전할 수 없습니다. 개인 전도를 위해서는 박학한
성경 지식이나 뛰어난 인품이나 남들이 나의 말을 무시 못할
영향력 있는 위치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채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성도가 필요합니다.
많은 교회들에서 전도를
위해서 갖가지 프로그램들을 만들어서 한 사람의
발길이라도 교회로 돌려보고자 갖은 애를 다 쓰고 있음을
쉽게 목격합니다. 무료 성경 학교는 기본이고, 어린이
성경학교, 한글 학교, 노인들에게 무료 급식이나 여가
시간을 마련해 주기도 합니다. 또는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법률이나 세무, 건강 등에 대해 무료 상담으로
봉사하게 하기도 합니다. 이런 피와 땀의 결정체로 교회의
멤버들은 늘어나고 교회 건물은 넓어지고 높아집니다. 저는
대학교 다닐 때 이런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요즘과는 달리
컴퓨터가 갓 보급되던 시절에 무료 타자 교육을 시켜 주었고,
무료 토플 강의, 영어 회화반도 만들고 갖가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학생들을 끌어 당겼습니다. 물론 이런 눈물겨운
수고와 땀에 대해서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본질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많은 회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받은 새 생명을 지닌 사람, 예수로 인해
변화된 새 사람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은 누구나 다 누군가의
복음 선포를 통해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모두 복음에 빚진 자라고 할 수 있으며, 복음 선포의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복음의 선포는 목사나 선교사처럼
full time 사역자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의
몫입니다.
1. 왜 선포해야 하는가?
복음 선포는 해도 되고
말아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성도들이라면 반드시
복음을 선포해야 하며, 복음의 핵심 요소인 십자가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해야만 합니다.
이유는 많겠지만 가장 절박하고도 시급한 이유는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을 때, 내게 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
내가 복음을
선포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고전9:16).
주님은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화를
선포하셨고, 요한 계시록에서 환란 때 닥칠 재앙을 화(禍)라고
말씀하신 것 외에 교회 시대의 성도들을 향해 선포된 유일한 화(禍)가
바로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성도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심각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늘에
속한 모든 영적인 복을 받은 성도가 복음 선포를
중단함으로써, 아니면 포기함으로써 화를 초래한다는
사실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
만일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고전9:16)고 했습니다. 복음 선포를
기피함으로써, 또는 중단함으로써 현 세상에서 화를 입지
않았다면 우리는 저 하늘에서 그에 상응한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를 보십시오. [
누구든지 그 일이
불타면 /보상을/ 잃게 되리라 [손실을 당하리라-직역/he
shall suffer loss].
그러나 그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로써 받는 것 같으리라.](고전3:15). 이것은 “받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에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보상을 받지
못하면 ‘손실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쉬는 것이
죄악인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 전파를 쉬는 것 역시
죄악입니다.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것이 그에게 죄가 된다(약4:17)는 말씀대로 우리가 세상과
죄인을 향해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선(善)은 복음 선포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교회는 복을 받기를 갈망하면서도
복대신 화(禍)가 넘치는 것은 그들이 십자가를 선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이 비대해지는 것이 건강한 것이 아니며,
살이 찐다고 성장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교회가 커지고,
교인의 수가 늘어난다고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선포 없이
늘어난 교인과 커진 교회는 복이 아니라 화(禍) 덩어립니다.
2. 언제 전하는가?
복음 선포는 항상 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십자가를 선포하는 대신
행복한 삶의 비결, 승리의 비결, 성공의 비결 등 온통
축복시리즈로 말씀을 도배하고 있습니다. 갈수록 성도들은
십자가의 설교를 듣는 일에 싫증을 내고, 꺼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신실한 종들은 평생토록 십자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시편 68:11, [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그것을 전파하는 자들의 무리가 많았도다.](시68:11)란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종들은 예외 없이 그 말씀을
선포합니다. 성도들이 교회 프로그램이나 강요에 의해서
전도 행위를 할 뿐 자발적으로 잃어버린 혼들에 대한 연민과
깊은 동정, 슬픔을 느끼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구원받았고, 어떤
하나님의 큰사랑과 은혜를 입었는지에 대해서도 막막하고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혼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안고 하지
않는 전도에 변화될 죄인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설교하는
기계가 아니며, 복음을 외워서 전달하는 스피커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이 구원받은 경험과 분명한 진리를 기초로
증인으로서 증언하는 그런 선포여야 합니다.
[
너는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항상
예비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딤후4:2). 이 말씀은 우리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더해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금방 교사 임명장을 받고 교단으로
가는 젊은 교사들에게 ‘언제나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오래
참으며, 바르게 훈도하고, 양육하라’는 당부의 말씀이
무거운 짐이 될 수 없듯이, 성도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찰 학교를
졸업하고 경찰관으로 임명받는 사람들이나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지로 떠나는 자들은 하나같이 ‘항상 해야 할 일’에
대해 임무를 받습니다. 교육이 끝났지만 임무가 주어지지
않는 경찰이나 군인은 아직 경찰이 아니며, 군인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죄에서 갓 구원받은 성도들은 주님으로부터 한
가지 항상 해야 할 일에 대해 권면과 부탁을 받는데 그것이
바로 [
너는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항상 예비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딤후4:2)입니다. 이
명령은 참으로 우리의 신분을 확인해 주는 말이며, 임명장을
주며 복음의 현장으로 보내시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과
같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복음 전파를 명하셨다는 것은 내가
바로 하나님의 대사요, 신실한 청지기요, 동역자가 되었다는
임명장과도 같습니다. 이 얼마나 흥분되고 영광스런
특권입니까?
여러분은 구원받았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보냄을 받았습니까? 주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고, 세상
모든 민족에게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가서 무엇을
합니까? 선교지에 가서 현지 주민들의 농사를 지어주고,
약을 나누어주고, 병을 고쳐 주고, 건물을 지어 아이들
공부를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 희생을 한 것이 복음
선포입니까? 생활방식을 바꾸어 주고, 삶의 질을 높여 주는
것이 생명의 변화는 아닙니다. 그것이 선교의 열매일 수는
없습니다. 슈바이쩌 박사나 마더 테라사 수녀의 방식은 복음
선포가 아닙니다. 참으로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십자가를
선포하고,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은 후 평생을 외지에서 살았고, 선교지에서 살았지만 그는
복음을 선포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교회를 세웠지 그들의
삶의 방식이나 삶의 질을 도모하지 않았습니다.
3. 무엇을 전하는가?
모든 설교와 선포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선포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며, 마음 가운데 십자가가 세워지지 않는
교인은 성도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선포하지 않는 복음
전도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이며, 십자가를
지지 않는 교회 생활은 성도의 삶이 아니라 종교인의 삶에
불과합니다. [
이는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요, 복음을 선포하라고
보내셨음이라. /이것을/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효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1:17).
여기서 우리는 복음 선포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관계를 잘
볼 수 있습니다. 말의 지혜로 복음을 선포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효가 됩니다. 세상의 학문과 지혜와 지식은 삶의
체험이나 그 지식에 대한 전적인 동의나 믿음, 순종없이도
충분히 전파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실존주의 철학에 동의하지 않지만 실존주의 철학의
이념이나 이론을 얼마든지 말할 수 있고, 전파할 수
있습니다. 저는 유교 철학이 진리라고 믿지 않지만 얼마든지
유교를 전파할 수 있고, 거기에 나오는 좋은 말들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과
순종, 십자가에 못 박힌 체험이 없이는 도저히 전할 수
없습니다. 프로 농구 감독이 프로 농구 선수보다 더 농구를
잘 해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농구에 대한 이론을
몸소 실천할 수 없어도 남들을 실천하도록 시킬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런 식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만약 십자가에 대한 믿음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가 아니라면 그는 거짓 증인이요, 이론가요,
말쟁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상한
동기와 이상한 목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한 예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1:15,16 [
참으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선포하되 심지어 시기와 다툼으로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선한 뜻으로 하나니 저들은 내가 결박당한 일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나](빌1:15-16).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도 전도 잘한다는 칭찬이나 인정을 받고
싶어서, 교회 내에서 어떤 위치 때문에,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이 믿는 믿음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싶어서 열변을 토하며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말싸움이나 논쟁에서는 좀처럼 지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가
자기 확신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되면 어디서나 큰 소리로
논쟁을 벌입니다. 이렇게 전한 복음을 통해서도 말씀의
씨앗이 듣는 이의 마음에 뿌려져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 자신에게는 아무 유익도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효가 되고 맙니다. 말의 지혜로 설득
당해 교회에 나오는 교인은 더 말 잘하는 사람에게 반박을
받으면 그의 믿음은 무너지고 맙니다. 표적을 통해 믿게 된
교인은 더 강한 표적이나 거짓 표적에 속절없이 넘어가고
맙니다. 높은 인격과 탁월한 인품, 가족 같은 교회의 영적
분위기 때문에 믿게 된 사람은 사람에게 실망하고 교회에
다툼이 있을 때 그는 신앙마저 잃어버립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선포를 통한 믿음은 어떤 반박과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온 것이며, 내 마음
안에 새 생명으로 자리 잡은 것이요, 참된 회심의 경험이
동반하며,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하나님을 아는 빛을
얻었기에 모든 지각의 이해를 훨씬 초월하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십자가를
전파함으로써 얻어지는 영적 열매요, 혼의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과 이해 없이 믿게 된
하나님은 삶에 어떤 힘도 주지 못하며, 생활에서 어떤
열매를 맺지도 못하며, 죄악이나 유혹이 다가왔을 때 아무런
능력도 소용도 없습니다. 슬프게도 오늘날 교회에는 이렇게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열심은 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로 하는 복음
전파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교회가 이렇게도
많고, 교인들이 이다지도 많지만 믿음을 찾아 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를 무효로 하는 전파와 그런
전파를 통해 교회에 유입된 교인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생명도 복음의 능력도
없습니다.
4. 복음 전파를 위해
주어진 성도의 3대 권능
우리는 왜 십자가를
선포해야 합니까?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이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의 역사와 실제적인 예가 너무나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강한 콧김으로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손가락으로 우리가 보는 온 우주를 지으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권능보다 우리에게 더 실제적이고, 직접적으로
소유한 권능을 그리스도, 복음, 십자가의 선포입니다. 이는
신약 성경에서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3대 권능입니다.
흔히 권능이라고 하면 산을 옮기고, 병을 고치고, 불구자를
일으키는 것을 생각하기 쉽지만 신약 성경에 성도들에게
제시된 하나님의 권능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권능이십니다(고전1:24). [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에게나 그리스인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요, 하나님의 지혜이시니](고전1:24).
♠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이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로다.](롬1:16).
♠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이 됩니다. [
이는 십자가를 선포함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되기 때문이라.](고전1:18).
많은 교인들이 능력
충만을 갈구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권능(power)의 비결이 온통
십자가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간과합니다. 그리스도>그리스도의
복음>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복숭아를 열면
씨앗이 있고, 그 씨앗 속에는 씨 핵이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권능은 우리에게 어떤 외적인
힘이나 지혜를 주심으로써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집니다. 우리는 약하면
약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안에서 더욱 강해집니다. [
이는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으로 생각할 만큼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요, 오직 우리의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나기 때문이니라.](고후3:5). [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나의 강한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해지기 때문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많은 성도들이 예수를
믿으면 성령을 통해, 말씀을 통해 지혜도 받고, 은사도 받고,
능력도 받아서 좀 멋있게 살아 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고,
날마다 그 십자가를 지는 연약함은 아무도 바라지 않습니다.
5. 십자가의 전달자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만이 십자가의 전달자로서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으며, 한 명을 구령하더라도 나의 말이나 인간의 지혜나
이론이 아닌 하나님의 권능 위에 세울 수 있습니다. 전에
어떤 목사님은 자신의 신학은 철저히 바울 신학에 기초하며,
정통 캘빈주의가 자신의 기반이라고 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신학이 철저히 근본주의와 정통
신학이라며 유명한 몇몇 사람을 듭니다. 그러나 정작 바울
사도는 성도들의 믿음을 어떤 신학이나 사람이나 교파
교리에 세우지 않았습니다. 성도의 믿음은 하나님의 권능에
있어야만 합니다. [
이것은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있게
하려 함이라.](고전2:5). 여러분의 믿음은 어디에
세워졌으며, 여러분은 십자가를 선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바울 사도의 고백대로, [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때문이라.](고전1:23a)여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식자(識者)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고전1:23)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선포함으로써 실제적인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를 통해 역사
하는 체험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가 빠진
기독교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복음이 없는 교회에 대해
매우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외치고, 십자가만을
선포하는 교회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당대에 잘나가는 선교사나 부흥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디서나 환영받는 부흥사라기 보다는 어디서나
배척받고, 아무 교회에서도 설교해달라고 초청장을 받지
못하는 그런 형편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주제를 설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설교는 언제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였습니다. 고린도전서 2:2,
갈라디아서 6:14절을 보십시오. [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음이라.](고전2:2).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개인 전도와 구령에만 필요한 설교
주제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성도의 평생토록 생활 가운데서
삶의 지표요, 생활 방식이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 안에 구석구석 침투하여 나의 육신에 속한 어떤 생명도
밖으로 분출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만나고 접하는
사람들이 나와 대화할 때 나의 육신이나 자아를 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육신을 통해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접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전달자란 먼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드러내는 사람을
말합니다. 십자가를 전파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거치는 것을 몸에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
형제들아,
내가 아직도 할례를 선포한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핍박을
받겠느냐? 그렇다면 십자가의 실족하게 하는 것이
그쳤으리라.](갈5:11). 십자가의 실족하게 하는
것이란 십자가로 인해 심한 공격과 반대를 몸소 겪는 것을
말합니다.
실로 많은 복음
전도자들이 있지만 십자가의 복음만을 선포하는 전도자는
극히 적습니다. 십자가 외에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빼
버림으로써 그들은 십자가로 인해 받는 수치와 모욕을 덜어
버리고자 합니다. 상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욕을 먹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 대신 세상 이야기로 접근하여
온통 듣기 좋은 소리만 하다 ‘예수 믿으세요.’로 끝을
내거나 전도지 한 장 건네주는 것으로 복음을 다 전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결코 십자가를 전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성도,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십자가 외에 다른 것들을 전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습니다. [
육신으로
잘 보이고자 하는 모든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받지 아니하려
함뿐이니](갈6:12).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 외에 누가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받으려고 하겠습니까?
십자가를 선포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로서 십자가를 진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말을 잘하는 것이 전도의 요건이 아닙니다.
지혜나 출중한 지식이 많다고 전도를 잘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체계적인 신학 교육을 받아서 신학 박사나 목회학
박사 학위를 지녀도 막상 전도하려고 나서면 무식한
촌부들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때는
으레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이 너무 똑똑해서 무식한
사람들과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인도의 선교사로 ‘기도하는 하이드’로 불렸던 기도의
사람 하이드는 ‘누가 자신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닌
육신의 송장 썩는 냄새를 맡는다면 내가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가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깁니까? 아니면
육신의 냄새를 풍깁니까?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고, 그분과 함께 침례로 묻히고, 함께 부활했다면 우리
자신의 육신의 냄새를 흘려 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그리스도의 향기만이 나와야 합니다. 전에 저는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말을 듣지 않는 한 사람을 어떤 목사님에게
데려 갔습니다. 목사님에게 복음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불신자는 다 듣고 나서 형식적으로만 ‘예’, ‘예’
하더니, ‘목사님은 참 돈 욕심이 많은 사람 같군요.’라고
말했습니다. 돈 이야기는 별로 나오지 않은 것 같은데, 그
불신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닌 돈 냄새를 맡았던
것입니다. 저는 얼마나 당황을 했는지 이런 무례한 사람이
있는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불신자가 맡았던
냄새는 너무나 정확하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러하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의 옛사람, 우리의 육신과 정욕,
애정이 아직도 그대로 살아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이제
감사하노라. 이는 우리가 구원받은 자들 중에서나 멸망하는
자들 중에서나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냄새이기 때문이니 멸망하는 자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냄새요, 구원받은 자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냄새라. 누가 이런 일들을 감당하리요?](고후2:14~16).
저는 복음 전파의 요령이나 개인전도 요령이나 기법, technique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전해야 하는가?(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내가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되어야 한다)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악 조건
속에서 참으로 많은 열매를 거두었는데, 그의 복음 전도의
비결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일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일하느니라.](고후4:10~12).
생명을 얻는 비결은 먼저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으로써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인해 죽음(사망)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지만 그로 인해 생명은 양들 안에서 일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열매를 얻는 비결입니다. 주님 역시 이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먼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요12:24). 한 알의 밀알에 죽음이 역사함으로써
많은 알갱이에는 생명이 역사했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죽음의 역사는 죽음으로 허망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생명의 역사를 이룹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얻어진 생명이 아니라면 그가 얻은
혼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개인 전도에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요, 그리스도에 못박힌 내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임을 깊이 새기시고 몸소
실천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