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십자가와 속 사람]에
대해 함께 말씀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약한 것이 인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너무나 뜻하지 않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현재 조국 대한민국은 자살 공화국이라 불릴 만큼 연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현재 통계에
따르면 올해 들어 하루 평균 40명이 자살하고 있다고 합니다.
반면 모진 것이 생명이란 말처럼 좀처럼 죽고자 해도 죽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은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합니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는 크리스천들도 이외로 자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살의 대열에는 집사, 장로, 목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의 종교적 짐이 너무 무거워서 목숨을 끊은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이는 단지 그릇된 정신이나 사회 풍조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속 사람이 자라지 못했고,
속 사람이 강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겉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겉
사람은 죄의 법을 섬깁니다. 그러나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환란 중에도 기뻐하며, 모든 오래 참음과
인내로 견디며, 주님을 소망합니다. 저는 자살 소식을 들을
때마다 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앞섭니다. 혼자
죽는 것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오히려 [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고전15:55) 노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루 열 번도 더 죽고 싶은 사람은 성경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은 매일 죽지만 매일 살아납니다.
사람은 누구나 강해지고
싶어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혜롭고, 능력있고, 부유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힘이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욕망이 실현되지
않을 때 절망하고, 죽고 싶어집니다. 교회의 그릇된
가르침은 성도들에게 복된 소망 대신 절망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성도라면 우리를 위로하시는
위로자 성령으로 인해 다시 새 힘을 얻습니다. 잘못된
성경에는 위로자란 말이 없습니다. 그들은 위로자 대신
보혜사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참된 위로자가 있다면
상처받은 혼들은 위로를 얻어서 새롭게 살 수 있습니다.
낙담과 실의를 능히 위로해 주시는 분이 계시다면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고, 승리를 외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
이는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사악한
자는 넘어져서 해악에 빠질 것임이니라.](잠24:16).
성경에서 일곱이란 수의 의미를 잘 아실 것입니다. 문둥병이
걸린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로부터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명을 받고 깨끗해졌습니다(왕하5:10,14).
성경은 일곱 번 단련된 순수한 은과 같다고 말합니다(시12:6).
다윗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했습니다(시119:164).-[
주의
의로운 판단들로 인하여 내가 하루에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주님은 누가복음 17:4에서 [
그가
만일 하루에 일곱 번 네게 범법하고 하루에 일곱 번 네게
돌아와 이르기를,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그를
용서하라, 하시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언제라도 다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이는 성도들 안에는 위로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성도들을 위로하십니다. 성령은
성도들을 위해 각인의 몸 안에 거하시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중보하고 계십니다(롬8:26, 27). 우리 주님 역시 저 하늘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롬8:34, 히7:25).
성도들 역시 서로가 서로를 위해 중보함으로써 연약한
자들의 짐을 나누어집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지난 한 달, 지난 한 해, 지나간 어떤 시점이 최악의
시간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해 보셨기 때문입니다. [
이는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이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라.](히4:15).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극한의 고통과 감정을 주님은 다 당해
보셨습니다. 인간에 대한 배신, 수치, 버림받음, 멸시 등
흔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들이라 불리는 것들은 주님이 다
당해 보셨습니다. 주님은 정신적 문제만 아니라 신체적 고통
역시 많이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사생아란 취급을 받았으며, 주리시고, 목마르셨고, 채찍에
맞으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
그가
무지한 자들과 길에서 벗어난 자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음은
자기 자신도 연약함에 싸여 있기 때문이라.](히5:2).
주님은 삼손과 같이 강한 신체적 특성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천사들과 같은 몸을 입지 않으셨습니다(히2:16). -“
진실로
그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히2:16).
주님은 사업이 망해 본
적이 없으신지 모릅니다. 주님은 파산을 경험해 보지
못하셨고, 주님은 빚더미에 올라 서 본 적이 없으시고,
주님은 이혼의 아픔이나, 자녀를 먼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고통이 없었지 않느냐고 항변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죄로 인한 고통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자신이 친히
담당하심으로써 죄와 저주로 인한 모든 슬픔, 걱정, 고통,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인간의 연약함,
인간의 죄의 결과로 인해 빚어진 모든 고통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전달된 순간이며, 그 위에 놓여진
사건입니다. 어떤 자매가 아이를 낳다가 사산(死産)을
했습니다. 그 자매는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저의
아이가 죽을 때 당신은 어디에 계셨나요?” 그 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나의 아들이 죽는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 있었다!” 여러분은 “주님 당신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물으실 때마다 주님은 ‘나는 그 때 갈보리 십자가 위에
있었노라’고 답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겪는 아픔과
슬픔을 주님은 바로 그곳 갈보리에서 다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 각 개개인이 겪는 개별적인 모든
경험을 다 겪지는 않으셨지만 그 모든 아픔의 고통의 근원을
다 겪으셨으며, 몸소 담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연약하듯이 주님
역시 연약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연약함으로 인한 것입니다. [
이는
그분께서 약하심을 통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아 계시기 때문이며 또 우리도 그분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분과 함께
살 것이기 때문이라.](고후13:4). 갈보리의 십자가는
우리를 죽음에 처함으로써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한없이 연약하게 만듭니다.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나의 옛 생명이 완전히 죽음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부활의 생명을 주심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새로운 생명,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겉 사람이 처리되지 않으면 속 사람은
존재하지만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복음주의를
자처하는 교인들조차도 겉으로는 지혜롭게 보이고, 강하게
보이고, 능력 있어 보여도 속은 텅 빈 강정과 같습니다.
대학을 나오고, 많이 배웠지만 삶의 지혜는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체격이 커졌다고 덩달아 체력이 좋아진 것이
아니며, 몸집이 비대하다고 건강한 것이 아니듯이
현대인들은 머리 속에 많은 정보를 담고 있지만 속은 더
비어 있습니다. 현대 교육은 겉 사람의 성장에만 매달렸기
때문에 속 사람은 형편없이 약해지고 말았습니다. 이는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성경과 각종
경건 서적들이 범람하고, 복음 방송 등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에 너무나 빈번하게 노출되지만 정작 그에 비례해서
믿음이 강한 것은 아닙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겉 사람을 먹이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 속
사람을 먹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의 건강에는
신경쓰지만 속 사람의 건강에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권능, 재림의 소망, 지옥의 무서움,
하늘의 영광 등에 대해 깊은 자각(自覺)이 거의 전무한
실정입니다.
자신의 무능과 연약함을
한없이 슬퍼하고, 절망 가운데 울부짖는 성도들은 복음의
초보가 무엇인지도 아직 접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성도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없으며, 이길 수 없는 무거운 짐은
없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시험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하여금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주님은 우리의 겉
사람에는 아무런 능력도 힘도 주지 않으시지만 우리 속
사람은 강건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사람의 구조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현대 의학이나 철학이 도저히 밝힐 수 없는
부분입니다. 사람을 지으신 설계자요, 창조자만이 사람의
구조에 대해서 정확하게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영, 혼, 육으로 분명하게 구분되는데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겉
사람, 자아, 속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신 것같이 사람 역시 삼위일체로 되어 있습니다(살전
5:23). Heart, mind, body도 같은 표현입니다. 때로 영과 혼은
너무나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서로 교차되어 사용되기도
하고, 마음(heart)와 마음(mind)은 우리말로 달리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흔히 직관(intuition), 양심(consciousness), 영교(communion)는
영의 기능으로 분류합니다. 생각, 정신, 감정, 의지, 이성과
오성은 혼의 기능이라고 합니다. 몸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그대로 우리의 각 신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의
몸은 흙으로 빚어졌지만 주님은 그 코에 친히 생명의 숨을
그 코에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습니다. [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魂)이 되니라.](창2:7). [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사람의 실체는 혼입니다. 몸은 혼을 담는 그릇이며, 집이며,
장막이요, 옷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몸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죽으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영은
하나님의 호흡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호흡을 거두어 가
버리십니다. 전도서 기자는 [
위로
올라가는 사람의 영과 땅으로 내려가는 짐승의 영을 아는
자가 누구이랴?](전3:21)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을 회수해 가십니다. 누가복음 9:25, 마태복음 16:26을 펴
보십시오. [
사람이 만일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himself)를 잃든지 버림을 받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눅9:25). [
사람이
만일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혼(soul)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16:26). 여기서 자기는 곧 혼이란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혼이 우리의 자아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영, 혼, 육은 속 사람, 자아, 겉
사람입니다. 겉 사람은 장막 집이기 때문에 해체됩니다.
날마다 썩어갑니다. 자아는 부인되어야 합니다. 속 사람은
자라나고 강해져야 합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은 겉 사람은 강했지만 속 사람은 약했습니다.
마태복음 26:35, [
베드로가 그분께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 모든 제자들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마26:35).
이런 모습은 매우 강인한 의지력을 보여준 모습이지만
진정한 강함이 아닙니다. 그들은 얼마 후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3번이나 주를 부인했고,
마지막에는 저주로 맹세하면서 부인했습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봅시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에게 가자고 했을 때,
제자들은 상당히 망설였습니다. 그들은 다시 유대로
들어가기 싫었습니다. [
그 뒤에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들어가자, 하시매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방금 전에도
유대인들이 돌로 선생님을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려
하시나이까? 하매](요11:7~8). 이럴 때 참으로 용기를
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의심 많은
도마였습니다. [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자기 동료 제자들에게 이르되,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요11:16). 그러나 이것은 강함이
아니었습니다. 육신의 기질들에서 비롯된 이런 용기와
강함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육신의
지혜, 육신의 힘, 육신의 아름다움은 모두 풀과 같이 마르고
꽃과 같이 시듭니다.
복음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랐지만 자신을 십자가에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새 생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모든 사고와 행위는 겉 사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런
삶은 영적 생활이 아니라 종교 생활이며, 자기 의를
드러내는 생활일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겉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속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3:16, [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부함에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하여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엡3:16).
성경에서 강건이란 말은 늘 속 사람과 연관되어 사용됩니다.
주님의 성령은 우리의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합니다.
골로새서 1:11, [
그분의
영광스런 권능에 따라 모든 강력으로 강건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인내와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1:11).
그분의 영광스런 권능이란 다름 아닌 부활의 권능입니다. 이
권능으로 주님은 우리의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하십니다.
육신은 약해지더라도 영이 강해 지는 것이 정상적인 성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육신의 건강에는
온 신경을 다 쓰면서 영의 건강에는 무신경합니다. 침례인
요한은 영이 강하게 자랐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온 몸이
풍상(風霜)으로 지치고 상했지만, 그의 속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 강했기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독사들의 세대야’라며 회개를 촉구할 수 있었습니다.
당대의 독재자 헤롯의 죄를 거침없이 책망했습니다. 침례인
요한은 한 명의 군대도 없었지만 헤롯 왕은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겉 사람은 속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 역시 영이 강하게 자라셨습니다(눅2:40). 주님의
몸은 30세 때에 이미 50세란 말을 들을 정도로 늙고 상해
버리셨지만(요8:57) 속 사람은 너무나 강건하셨습니다.
마귀들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나 헤롯왕이나
빌라도는 전혀 두려워 하지 않았지만 한 분 주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이는 주님의 육신의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속사람, 즉 영이 강하게 자라나셨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겉 사람의 노화 방지를 위해 보약을
지어먹기도 하고, 맛사지를 하고, 운동을 하지만 속 사람의
건강을 위해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속 사람의 성장과
건강에 온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속 사람의 성장이 없었습니다. [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단단한/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지금까지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못하기 때문이라.](고전3:2). 이는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거듭난지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영적으로 어린 아이 상태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자신밖에
모릅니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유익만 구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받기만을 좋아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유치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선악의 분별력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쉽게 속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전쟁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다투고 싸웁니다. 이런
아이들의 특징은 고린도 교회의 전반적인 문제로 고스란히
다 드러났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대부분의 문제는 성장하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5:12, [
이는
시간으로 보건대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었어야 할
터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원리인 것들을 남에게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 너희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자가 되었나니](히5:12).
바울 사도는 시간이 지났지만 성장하지 못한 성도들을 향해
질책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저와 여러분을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수십년 교회를 다녔고, 주님을 섬겼다고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성장해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
사람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겉 사람이 부서지지 않는
사람은 속 사람의 성장이 없습니다. 겉 사람은 속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딱딱한 껍질과도 같습니다. 옥합 안에 있는
향유는 아무리 향기가 좋아도 사방으로 퍼질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는
성령이 계시고, 이 성령이 우리 몸밖으로 드러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온 세상에 퍼지게 됩니다. 죽음이 부활을
앞서듯이, 깨지고 부숴지는 일은 새 생명의 역사보다
앞섭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만이 날마다 속
사람이 새로워지는 생명의 역사를 맛볼 수 있습니다. [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지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4:16).
바울은 극심한 시련 가운데 있으면서 오히려 날마다
새로워지는 자신을 경험했고, 그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 같았으면 열번 아니
백번이라도 더 목숨을 끊었을만한 상황이 연속적으로
바울에게 터졌지만 그는 절망하거나 낙담한 것이 아니라
새로워진다고 고백합니다. 비결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자서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쓴 그의 성경 고린도후서에는
성도의 영적 경험과 실제에 대해서 너무나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지칠 줄 모르는 강인한 체력을
가졌거나, 어떤 환경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거나 정계나 관계의 고위 공무원들이 편의를
봐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안질로 고통을 겪었으며,
몸이 약했으며, 말이 서툴렀고, 동족들에게는 왕따를
당했으며, 교회 성도들에게는 사도권을 의심받았으며,
성격은 불같아서 바나바와 갈라섰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가 전도 여행을 떠날 때 심히 걱정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러므로’란 접속사가 아니라 ‘그러나’란
접속사가 사용된 것을 봅니다. 주님이 앞서고 우리가 뒤따를
때는 항상 ‘그러므로..’란 말이 뒤따릅니다. 반면 우리가
앞서고 주님이 뒤따를 때는 항상 ‘그러나’란 말이 뒤를
잇습니다. [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졌나니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은 성령의 철저한 통제 아래서 바울
자신의 타고난 지혜와 능력을 발휘할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바울 안에 있는 보배, 즉 성령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겉 사람은 질그릇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성령이란 보배를
담고 있습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고, 거기에서 권능이
나옵니다. [
우리가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나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난처한 일을 당하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으나 버림받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나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일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일하느니라.](고후4:8-12).
저와 여러분은 모두 영
안에서, 믿음 안에서, 은혜 안에서 강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쓸모없고, 연약하고, 아무 것도
아닌지를 철저히 깨닫게 하신 후에 능력의 근원이신 주님 한
분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겉사람은
약하고, 속 사람은 강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6:13, [
너희는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행동하며 마음을 강하게 하라.](고전16:13).
♥ 크리스천이 강하게
되는 비결
1. 그리스도를 통해서.
강해지는 방법은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우리는 연약함을 자랑하면서도
한없이 강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시체이지만 의에 대해서는
부활한 새 생명의 소유자입니다.
2. 주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膽大)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이는 [주] 네 하나님
그분께서 너와 함께 가실 것임이니라. 그분께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니라.](신31:6).
우리가 연약함 가운데서 강한 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 때문입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주님은
마음을 강하게 하라는 말씀을 계속 반복하셨습니다(신31:7,
수1:6, 7, 9, 18). 주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에 대한 보증도 우리 안에 주셨습니다.
3. 하나님 앞에서 자기
길을 예비함으로써, [
요담이 [주] 자기
하나님 앞에서 자기 길을 예비하였으므로 점점 강하게
되었더라.](대하27:6).
4. 주께 소망을 둠으로써, [
[주]께
소망을 둔 모든 자들아, /너희는/ 크게 용기를 내라.
그분께서 너희 마음을 강하게 하시리로다.](시31:24).
5. 말씀과 기도를 통해, [
내
혼이 근심으로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에 따라 주는 나를
강하게 하소서.](시119:28), [
내가
부르짖은 날에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기력을 주사 내 혼을
강하게 하셨나이다.](시138:3).
6.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바울 사도는 제자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건한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전에는 죄가 우리를 다스렸으나 이제는 은혜가
우리를 다스립니다. [
이는 죄가 군림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것같이 은혜도 의를 통해 군림하여(reign)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5:21). 히브리서 기자가
말했듯이 마음은 은혜로써 굳건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히13:9).
은혜 안에서 강건하란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은혜의 말씀"(행14:3)이라고 합니다.[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노니 이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히
구별된 모든 자들 가운데서 너희에게 상속을 주리라.](행20:32).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읽는 사람은 속 사람이 강건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은혜의 보좌"(히4:16)입니
다. 누구나 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강건해
질 수 있습니다. 날마다 필요한 때마다 이 보좌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의 어떤 권력자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는 헤롯이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는 교회에 찾아든
엄청난 위기였습니다. 교회가 거대 권력에 맞서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
이에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으나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12:5). 은혜 안에서 강건한 자란
바로 은혜의 보좌 앞에 무릎을 꿇는 기도의 용사들입니다.
성령은 "은혜의 영"(히10:29)이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죄를
범하지 않고,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강건한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비록 몸이
왜소하고 아프다할지라도 그 사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스데반은 이 은혜의 영으로 충만했을 때
자기를 향해 돌을 던지는 동족들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강건함은 바로
이런 강건함입니다. 은혜의 영은 기꺼이 순교할 수 있는
강함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속
사람이 강건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