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십자가와 영적
부흥]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현재
우리는 전반적인 부흥에 대해 기도해야 하며, 부흥을
사모해야 합니다. 부흥(Revival)이란 말은 사전적으로 소생,
회복, 재건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우리말 성경에는 주로
‘소생’ 또는 ‘회복’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the
Revival]이라고 ‘문예 부흥’(Renaissance)을 의미합니다. [The
Gothic Revival]이라고 하면 고딕 건축 양식의 부흥이란
뜻입니다. 마치 유행처럼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 곳곳에
세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적 부흥이란 말은
곳곳에 죄인들의 회개와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고, 성도들이
죄에 대한 영적 각성으로 깨어지고, 주님을 향한 새로운
헌신과 결단이 일어나며, 구령에 대한 열정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그런 역사를 부흥이라고 합니다.
흔히 이 시대를 부흥의
종말 시대라고 합니다. 미국은 빌리 그래함 목사를 이
시대의 마지막 부흥사라고 말합니다. 더 이상 교회는 그런
부흥의 역사가 없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고 성경에 따라 부흥을
사모하며,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는 부흥이
왔을 때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몇 차례의 영적 부흥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저의 삶은 부흥을 통해서 확연히 변화를 받았습니다. 부흥은
영적인 삶에 대한 분명한 비전과 동기를 부여해 주었고,
거룩한 삶에 대한 열망을 주었으며, 주를 위해 살겠다는
결단을 내리게 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여러분의 삶 속에 이런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교회와 각
성도들은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가장 크게 필요로 한 것은 부흥입니다. 부흥은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며, 성도가 성도다운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올바른 영적
부흥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모두 부흥을 사모하며,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빕니다. ‘부흥’이란
말만큼 교회에서 잘못 사용되는 어휘도 드물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부흥, 부흥회란 말이 전국을
휘저었습니다. 아마 1년에 한, 두 번 부흥회를 하지 않는
교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부흥이란 말은 사라지고
교회 성장이란 말이 대신했습니다. 부흥이란 말은 이제 많은
부작용을 낳는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대신 교회 성장
프로그램, 제자 프로그램 등이 조직되었습니다. 부흥이란
말은 단번에 일시적인 증가를 의미하는 비약적인
도약이라면 성장은 서서히 단계적으로 지속적인 증가를
꾀하는 점진적 도약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결론은 둘
다 교회의 성도를 늘리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
방법론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성경은 교회의 양적 증가를
부흥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교인의 수가 증가하는 것은
부흥의 결과요, 열매입니다. 영적 순결을 회복한 교회,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는 죄인들을 향해 구령의
열정을 가지기 때문에 수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흥이란 믿는 이들이
하나님께 새롭게 순종하기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의
편에서 볼 때 부흥은 항상 죄에 대한 회개를 포함합니다.
타락한 성도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깊이 성찰함이 없이는
깨어날 수도 없고,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도 없습니다.
진정한 부흥에는 항상 그리스도인들의 회개가 포함됩니다.
부흥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새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결과 부흥은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수고하게 만듭니다. 부흥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심판을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 부흥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생활의 유일한 중심 축으로 삼고,
십자가가 성령이 사역하시는 모든 측면의 기초와 중심이
됨을 깨달을 때 부흥은 시작됩니다. 영적 부흥이란 하나님의
성령이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를 통해서 드러나는 일입니다.
부흥은 교회를 교회답게, 성도를 성도답게 변화하게 합니다.
우리 교회는 절실히 부흥이 필요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주를 기뻐하게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시85:6).
이것이 바로 부흥을 위한 기도입니다. 홀로 하나님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고, 우리를 다시 살리 실 수
있습니다. 사데 교회처럼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 라오디케아 교회처럼 부유한 것 같지만 헐벗은 교회,
믿는다고 고백은 하지만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모두 부흥을 필요로 합니다. 부흥이란 영의 소생,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에게는 복음이
필요하고 성도에게는 부흥이 필요합니다. 직업적인
부흥사들에 의해서 종교적 감동과 흥분에 최면이 걸리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는 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 성경에서 부흥이란
말이 처음 사용된 곳은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생존
소식을 들었을 때입니다. 창세기 45:27, [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말한 모든 말로 그에게 고하매 요셉이
자기를 데려가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비로소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영이 소생(蘇生)하였더라.](창45:27).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고, 막내 베냐민마저 이집트로 보낸
야곱의 영은 살았으나 죽은 상태와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음으로써 생긴 슬픔은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런 야곱에게 한줄기 생수와 같은 소생할 힘을
준 것은 바로 요셉의 생존 소식과 더불어 그가 보낸
수레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어떻게 부흥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야곱의 예와 동일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이 지금도 살아 계시며, 저 하늘에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영은 거듭나며 소생합니다. 부흥은 어떤
인위적인 프로그램이나 조작된 흥분과 부추김으로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흥이란 주님을 믿을 때 일어나며,
주님과의 첫 사랑을 잃어버린 성도가 첫 사랑을 회복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는 갈보리 십자가야말로 영적
부흥의 출발점이란 점을 분명히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부흥을 경험하려면 먼저 갈보리 십자가로 가십시오. 피묻은
원색적인 복음이 생명의 충만함을 가져다줍니다. 십자가의
피에 대한 인식이 깊을수록 성령은 그만큼 더 충만해 집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 복음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는 영적 각성, 깊은 은혜를 맛보는 데서부터 부흥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듯이, 십자가
없이는 영적 부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영적 대각성, 영적
부흥의 핵심은 언제나 십자가입니다.
② 타락한 성도가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필히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받아 육신의 뜻대로 마음대로 쓴 성도를
예표하는 인물은 삼손입니다. 그런 그가 갈증으로 죽음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삼손에게 필요한 것은 물이었습니다.
평생 기도를 모르고 살았던 삼손이 드디어 처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필요를 구했으며, 기도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그에게 부흥을 주셨습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턱의 우묵한 곳을 쪼개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
나오므로 삼손이 그 물을 마시매 그의 영이 돌아와 그가
회복되었으므로 그곳의 이름을 엔학고레라 하였으니 이것이
이 날까지 레히에 있더라.](삿15:19). 우리는 지금
모두 삼손처럼 자신의 영적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성도 개개인은 대부분 삼손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육신의 뜻대로, 자기 배를 채우는데 사용하고 있고,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자신의 삶에 문제를 모른 채 살아가다가 어느덧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는 기도하게 됩니다. 지금 삼손처럼 갈증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한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모두
삼손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기도할 때 부흥을
주십니다. 물은 성령을 예표합니다. 엔학고레의 물 역시
성령을 예표하는 물이었습니다. 삼손은 그 물을 마시고 즉시
영이 돌아와 회복되었는데, 우리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물은 말씀을 예표합니다. 말씀은 성도들의
영적 갈증을 해결해 주며 영을 회복시켜 줍니다. 위기의
순간에 받은 말씀은 한없는 힘과 위로를 줍니다. 주님은
갈증으로 죽어 가는 삼손이 기도했을 때, ‘자업자득이니라’,
‘뿌린 대로 거두리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물을 주셨고,
삼손에게 부흥을 주셨습니다. 부흥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능력을 얻는 사건입니다. 엔학고레의 물을 마시는
성도가 바로 부흥을 경험한 성도입니다.
③ 부흥은 죽었던 생명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을 살게 하는 것이 바로
부흥의 핵심입니다. 주님은 살리는 영이십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십니다. 십자가는 생명의 길입니다. 열왕기상
17:22을 보십시오. [
[주]께서 엘리야의
목소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이의 혼이 아이에게 돌아오고
그가 살아났으므로/he revived](왕상17:22). 우리는 이
시대에 모두 엘리야처럼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죽어있는 과부의 아들을 살린 것은 죽어 있는 이스라엘을
살릴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모두
엘리야처럼 죽어 있는 혼들을 살리는 부흥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땅에는 죽어 있는 영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향해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
... 오 너희 마른 뼈들아, [주]의
말씀을 들으라.](겔37:4).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대언했던 에스겔이 마른 뼈들의 골짜기에서
살아나는 사람들을 보았듯이 우리는 주의 명령에 순종해서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만이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엘리야와
에스겔처럼 주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진정한 영적 부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특히 거대한 마른 뼈들의 골짜기와
같은 이곳 LA 지역에서 우리는 엘리야처럼 기도하고,
에스겔처럼 외침으로써 죽은 뼈들이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를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사람은 죽은 뼈들을 볼
때 흙을 덮어 주는 일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을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정성스럽게 장사를
치러 주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그들을 살게
하라’ 명령하셨습니다. [
그때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바람에게
대언하라. 바람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오 숨아, /사방의/ 네 바람으로부터
와서 이 죽임 당한 자들 위에 숨을 불어 그들로 하여금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겔37:9). 우리는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생명의 말씀입니다(행5:20, 빌2:16). 그래서
성령께서는 사도들에게 [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다 말하라,.. (행5:20)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생명의 통치자이십니다(행3:15). 복음은
생명의 약속입니다(딤후1:11). 주님의 오심은 생명의
소망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마른 뼈들의 골짜기로 가서
뼈들을 향해 ‘오 너희 마른 뼈들아, 주의 말씀을 들으라.’
외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부흥입니다. 이 시대에
저와 여러분이 이 교회를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외침으로써
참된 부흥을 주도하는 일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④ 주님은 통회하고
겸손한 영을 지닌 자들에게 부흥을 주십니다.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자신의 죄를 생각해 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마땅히 감사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불평하고 있지 않았는가? 성경 읽기에
게으르지는 않았는가? 몇 주 동안, 몇 달 동안 성경을
멀리했다면 마귀는 여러분을 철저히 성경으로부터 보호해
준 것입니다. 기도에 게으르지 않았는가? 사소한 일들
때문에 기도회를 참석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 가버렸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세상과 교회,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의
경계를 구분없이 넘나들면서 죄된 행동을 반복하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이유로 마음의 위안을 받고 있다면
여러분은 회개해야 합니다. 거짓말, 잡담, 험담, 위선,
자기를 부인할 줄 모르며, 불신자들에 대해 염려와 관심이
없고, 그런 것은 선교사들이나 해야 할 일이지 한다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체가 우리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런 죄들을 철저히 통회하고, 자신을 낮추어야만
합니다. [
이는 높고 높으시며 영원히
거하시고 이름이 거룩이신 이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고 또한 통회(痛悔)하며 겸손한
영을 지닌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것은/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들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57:15).
주님은 교만하고 거만한 영을 지닌 자들에게 부흥을 주시는
일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살펴봅시다. 기도는 하지만
회개하는 성도가 거의 없습니다. 죄에 대한 각성이 거의
없습니다. 죄를 범할 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무서운 것이란 죄의식으로 압도당하는
대신 ‘운이 없다’거나 ‘실수였다’거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는 식으로 무마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불신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불신을 합리화하는 성도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지적 우월성을 자랑하거나 합리적인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아마 신앙과 생활이 그토록 철저히
분리된 이유를 찾으라면 단연 불신앙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불신앙은 필연적으로 부도덕을 동반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는 주님 앞에 통회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부흥을 주시도록 기도하며,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야만 합니다.
⑤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
부흥에 관련된 가장 중요한 말씀은 하박국 3:2입니다.
하박국은 이스라엘의 부흥을 위해서 주께 기도했습니다. [
오
[주]여, 내가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두려웠나이다. 오
[주]여, /주는/ 주의 일을 이 /고난의/ 수년 중에
회복하시옵소서. 이 /고난의/ 수년 중에 알리시옵소서.
진노하실 때에라도 긍휼을 기억하시옵소서.](합3:2).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 이것은 우리가 받은 기도 제목이요,
주의 명령입니다. 부흥이 필요없다는 것은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부흥을 비난하는 것은 주님의 사역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나 성도나 모두 부흥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대부흥사였던 R.A 토레이 목사님은 ‘부흥,
곧 하나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얻는 일은 영혼의 유일한 치료
방법이다’라고 역설했습니다. 부흥은 지적 토론이나
탁상공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호흡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생명의 역사요, 능력의 역사입니다. 역사상 대 부흥의
물결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손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8세기에
미국의 영적 각성을 주도했던 죠나단 에드워즈는 기도에
대한 호소와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인디언 선교에 전생을
바쳤던 브레이너드는 자신의 부흥이 전적으로 밤낮으로
하나님께 간구한 기도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챨스
피니 역시 자신의 모든 부흥 사역은 ‘하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의 영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부흥은
언제나 소수의 남녀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끈질기게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부흥의 불길을 당기십니다. 우리는 많지 않아도 기도의
무거운 짐을 마음에 의무로 느끼고, 주님이 그 짐을 덜어
주실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보급과
전파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건전하고도 강력한
독립 침례 교회가 곳곳에 세워지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능력 있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세워지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월간지나 책의 출판, 테잎 보급 등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 학교를
통해서 1.5세, 2세들이 성경적 양육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뜨거운
열정으로 기도해야 하며, 영 안에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더 적어지고,
우리의 능력밖에 있는 일이 점점 많아질 때 주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아침 일찍, 좀 더 일찍
교회에 와서 기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악인들의 사악함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비참하게 하며, 짓누를
때 우리는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부흥은 책상에서
뛰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뛰어야 하는 것이며,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 경험입니다.
저는 부흥을 경험하기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만일 여러분 이
제안들에 따른다면 틀림없이 마음에 부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흥이 얼마나 멀리 퍼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영적인 소생을 얼마나 절실히
필요로 하는지 아십니다. 그리고 그 일은 개개인의 부흥을
통해서만 올 수 있습니다.
첫째, 자신에 대해 철저히
불만족해 하십시오. 영은 가난해야 합니다. 자기 만족은
영적인 진보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만족한 영혼은 정체된
영혼입니다. 바울은 지상의 소유에 대해서 말할 때는 "스스로
만족하기를 배웠다"고 했으나 그의 영적인 삶을 언급할
때는 "푯대를 향하여 쫓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속에 있는 은사를 불일듯 사용하십시오.
둘째, 여러분의 삶의
철저한 변화를 향해 나아가기로 굳게 결심하십시오. 심약한
실험자들은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할 것을 염려하여
움츠러듭니다. 우리는 우리의 온 영혼을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채워야 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셋째, 여러분 자신을
축복의 길 위에 놓으십시오. 은혜가 부드러운 마술로
찾아오기를 고대하거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잘 알려진
적절한 조건들과 별개로 뜻밖의 횡재처럼 올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푸른 초장으로 곧바로 인도하는
뚜렷한 길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길로 걸으십시오. 예를
들어, 부흥을 갈망하면서 동시에 기도와 헌신을 소홀히 하는
것은 한 길을 원하면서 다른 길을 걷는 처사입니다. 우리는
한 번에 두 길로 달릴 수는 없습니다.
넷째, 철저한 회개에
이르십시오. 서둘러 처리하려 하지 마십시오. 조급한 회개는
우리의 삶 전반에 영적인 경험이 옅고, 확실한 면이
결여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경건한 슬픔이 그 치유 사역을
행하도록 하십시오. 죄에 대한 의식이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도록 허락할 때까지 우리는 결코 악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키우지 못할 것입니다. 다름 아닌, 죄를 쉽게
용납하는 우리의 그릇된 타성이 우리로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관계 회복에
힘쓰십시오. 빚을 졌으면 그것을 갚거나, 적어도 채권자에게
당신이 갚을 의사가 있다는 신뢰감을 주십시오. 혹 누구와
다퉜으면 화해를 이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십시오.
가급적 완전하게, 굽은 것을 곧게 펴십시오.
여섯째, 여러분의 삶을
산상수훈과, 우리를 의의 길로 가르치고자 주어진 다른
신약의 말씀들과 일치되게 하십시오. 성경과 종이와 펜을 든
정직한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신속하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자기를 깊이 살피고,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명령들을
순종하고자 일어나십시오. 우리 자신을 다루는 이
투명하고도 직접적인 방법에는 아무 낭만적인 요소도
화려한 요소도 없으나 어쨌든 일을 해 냅니다. 이삭의
종들은 계곡에서 땅을 팔 때 영웅적인 모습을 갖추지
않았으나 우물을 만들었으며, 그것이 그들이 하려던
일이었습니다.
일곱째, 진지한 태도를
견지하십시오. 여러분은 TV에 나오는 코미디프로를 쳐다 볼
정도로 생활이 여유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우스꽝스런 사람들에게서 단호히 눈을 떼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마음에서 모든 영적인 인상들이 점차 사라지되
그것도 바로 여러분의 거실에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 종교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피하려고 극장을 드나듭니다. 여러분은 그들과 더불어 그런
곳을 드나 들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집에서 영적인 교제를
즐겨야 합니다.
사단의 목표와 그
도덕적인 표준과 그 정신적인 태도가 여러분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중에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왜
자신의 그리스도인 생활에 아무 진전이 없는지 의아해
합니다. 여러분의 내면의 기후가 영적인 은혜들이
성장하는데 적합치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습관에 뭔가
극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내면
생활에 어떤 영구적인 진보도 없을 것입니다.
여덟째, 의도적으로
여러분의 관심사를 좁히십시오. 만물박사는 어떤 데에도
전문가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가
전문가가 될 것을 요구합니다. 너무도 많은 계획들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보다 가까이 이끄는 일없이 시간과 정력을
앗아갑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관심사를 좁힌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넓히실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죽음의 모토처럼
보이겠으나 수많은 행복한 남녀들은 "오직 예수님"이
그들이 전에 알던 어떤 것보다 무한히 넓고 풍요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 되었다고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지혜와 아름다움과 덕의 본질이 되십니다. 더해 가는
친근감 속에 그분을 알아 가는 것은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감사가 증가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방들은 그
문이 그리스도께 활짝 열리고 세상과 죄를 향해 닫힐 때
더욱 커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 보십시오.
아홉째, 전도를
시작하십시오. 뭔가 하나님과 여러분의 이웃을 위해 할 일을
찾으십시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채 녹슬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교회 지도자의 필요에 응하고 부탁받은
일이면 어떤 일이든 하십시오. 지도자의 위치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순종을 배우십시오. 하나님이 더 높은 자리에
적합하다고 여기실 때까지 낮은 자리를 취하십시오.
여러분의 새로운 생각들을 여러분의 돈과 선물 등으로
뒷받침하십시오. 생각만 해서는 안됩니다. 행동으로
입증하십시오.
열번째,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십시오. 기대를 하십시오. 여러분의 대언자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 보좌를 바라보십시오. 온
하늘이 여러분 편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A.W Tozer 목사님, ‘부흥을
경험하려면’의 글 요약.
저는 오늘 성경적인
부흥에 대해서 말씀을 살펴보았고, 우리가 이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교회에 부흥이 없다면
우리 교회는 문을 닫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부흥을 위해 기도합시다. 위대한 부흥사들이 무엇을 어떻게
기도했는지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조지 휫필드(영국의
유명한 복음 전도자) - "오 주여, 저에게 혼들을 주시던지
아니면 제 혼을 취해 가소서!(Give me souls, or Take my soul!)"
헨리 마틴(선교사) - "주여,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서 불타게
하소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북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갔던 선교사, 1718-1747) - "주님께 제 자신을
바치나이다. 저를 받아주시고 영원히 주님의 소유로 삼아
주소서. 저는 주님 외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가 죽기 일주일 전에 쓴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오 주 예수여,
오시 옵소서. 빨리 오시 옵소서. 아멘"
드와이트 L. 무디 - "나의
구주여, 저를 사용해 주소서.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시든지
주님 원하시는 방법대로 사용하여 주소서. 여기 제 가난한
마음이 있습니다. 여기 빈 그릇이 있사오니 주님의 은혜로
채워 주소서."
마틴 루터 - 루터는 보름스
공회에 가기 전에 이렇게 기도했다. "이 세상의 모든
계략과 지혜와 맞서 싸우는 제 곁에 계셔 주소서.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여, 주님께서는 꼭 제 곁에 계실 줄
아나이다."
존 맥켄지 - 그는 선교사로
떠나기 전에 제방 곁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오 주님,
저를 이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보내 주소서."
기도의 사람 하이드(인도에서
사역한 선교사) - "아버지시여, 이 사람들을 저에게
주시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저를 죽여주소서."
주님께서 저희 모두에게
이런 기도의 영을 부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제 십자가의
복음을 들고 영적 부흥의 작은 불씨가 되도록 간구합시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