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십자가와 성령
충만]에 대해 함께 말씀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이미 앞서 [십자가와
성령]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성령’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성령이 없으면 그가 누구든지 간에, 얼마나
높임을 받고, 얼마나 돈이 많고, 권세가 강하든지 간에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
그러나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8:9).
오늘날 주님이 성도들에게 주신 명령 가운데 [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명령만큼 성도들에게 무시되거나
잘못 이해되고 있는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성령에 관련한 몇 가지 명령을 주셨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성령을 받으라(요20:22,
행2:38). 이는 모든 불신자들에게 주는 말씀이며, 예수를
알기는 하지만 예수를 나의 죄를 구속하신 구주로 믿지 않는
자들, 성경에 기록된 대로가 아닌 전통과 인간적 가르침에
따라 믿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회교도들은 예수를
믿지만 대언자로 믿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를 믿지만
피조된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몰몬교는 예수를 믿지만
일부다처주의로 믿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예수를
사생아로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 창시자로, 어떤
사람들은 민중 해방자로, 어떤 사람들은 초월자로, 어떤
사람들은 붓다의 제자로 믿습니다. 이들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이들은 성경대로 복음을 믿고 거듭나야 합니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천하 각지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을 향해
“
회개하여 죄들의 사면을 얻고 너희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라.”(행2:38)고 외쳤습니다.
사도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했고,
그들에게 안수했습니다. 우리 역시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교회는 다니며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제대로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고,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2. 성령으로 충만하라.
이는 성령을 받은 성도들에게만 해당 사항이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령 세례, 성령의 은사를 추구하지만 성령 충만은
별로 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여러분은
증인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게 되면
그에게는 박해가 따르고, 따돌림을 당하게 되며, 육신적인
성도들과 필연적으로 분리가 일어나는데,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성령 충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은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들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3. 성령을 슬프시게 하지
말라(엡4:30). [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救贖)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성도는
성경에 기록된 많은 말씀들 가운데 해야 할 일에 대해서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할 때 성령을
슬프시게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성경을 읽지 않고,
구령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지 않고, 형제들을 서로 섬기지
않을 때 내주하신 성령은 슬퍼하십니다.
4. 성령을 억누르지 말라. [
/성/령을
억누르지 말라(Quench not).](살전5:19).
여기서 “억누르다”란 말은 촛불을 꺼 버리는 행위 등에서
사용되는 말입니다. 불을 끄고, 빛이 사라지게 하듯이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할 때 억눌림을 당합니다. 죄를 짓거나
불법을 행하거나, 자기 욕심대로 행하거나 육신의 정욕을
채울 때 성령은 눌림을 당합니다. 부부 싸움을 하거나
형제들끼리 다투거나 용서하지 못할 때 여러분 안에는
촛불이 꺼지듯이 성령이 소멸하고 마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외에도 5. 성령을 따라
걸으라(롬8:4-5). 6.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롬8:13). [
이는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임이라](롬8:13). 7.
성령님을 대적하지 말라(마12:31, 32, 막3:29, 눅12:10). 8. 성령을
의지하라(딤후1:14)는 명령이 있습니다. 차후에 성령에
대해서 함께 공부할 때 깊이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
십자가와
성령 충만]에 대해서 성경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성령
충만에 대한 너무나 잘못된 가르침이 대세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방황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영적 생활의 결핍과 필요한 능력을 받는데 방해와 지장을
받기도 합니다. 이유는 성령 충만의 중심이 십자가에 있음을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십자가 없이는 성령의 내주하심도, 성령의
충만도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영적 진리의 핵심은 언제나
십자가란 점을 마음에 두고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허락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구원이 없는 사람이요, 새 생명이 없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있지만 성령
충만이 없는 성도는 열매맺는 일도, 승리하는 삶도,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도, 영적인 삶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불쌍하지만 예수를 믿으면서도 영적 결핍과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성도는 더욱 불쌍해 보입니다.
예화) 전에 자기
어머니에게 수표를 보내 준 아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보냈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돈은 오지 않고 종이 위에 백만원정이라고 적힌 글자와
숫자만 보고 황당해 했습니다. 아들이 돈이 없어서 돈을 못
보내고 대신 그냥 액수가 적힌 종이를 대신 보냈구나! 하며
아들이 어렵게 살다 보니 그랬겠거니 생각하며 소중하게 그
수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명절 때 아들이 돈을 잘 찾아
썼느냐고 묻자, 네가 보내 준 돈 은 여기 있다하면서 보관해
둔 수표를 내 놓았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현찰만 돈으로
알았지 수표나 채권이나 주식 등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을
이와 같이 대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는데는 인종,
지역, 나이, 성별, 빈부, 학력, 능력의 차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성령을 받는 유일한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의 피를 통해 내 죄가
사해졌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고자 하노니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받았느냐?](갈3:2). 아무도 믿음 외의 어떤 다른
방법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을 결단코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주셨다면 그 아들을 통해 성령을 주시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
또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이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당연히
주십니다. 주님은 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더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눅11:13). 성령을
주시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며,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령을 주셨고, 풍성히 부어주셨습니다. [
또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그
성령님을 풍성히 부어 주셨으니](딛3:6). 그런데 왜
믿는 자들이 성령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까?
이유는 성령에 대해서
주님이 주신 가르침을 받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때 오순절 이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성령을 받지
못한 예는 역사적으로 단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다음 말씀을 오해해서 성령을
받는데는 어떤 자격이나 절차가 필요한 줄로 압니다.
사도행전 19:2-6절을 보십시오. [
이르되,
너희가 믿은 이래로 성령님을 받은 적이 있느냐?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는 성령님이 계신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노라, 하거늘](행19:2). 이들은 믿었지만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마치 구약만 믿는 유대인들이나 모세 오경만 믿은
사마리아인들처럼 요한의 가르침과 요한의 침례만 받았기
때문에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와 같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고 점검하면서 ‘너희가
믿은 이래로 성령님을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던
것입니다. 당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령은 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율법에
정통하고 침례인 요한의 가르침대로 회개하고,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았다 해도 성령은 임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믿는다면 성령을 받기 위해
어떤 다른 의식이나 절차나 요구 사항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방인들은 성령을 받을
수 없다고 믿었던 유대인들 가운데 하나였던 베드로조차도
자신이 설교하는 도중에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식구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목격하고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
그런즉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거역하겠느냐? 하더라.](행11:17).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부활의 예수를 증거할 때 믿는
자들 위에는 그 순간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을 받는데는
오직 믿음 외에 어떤 다른 것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안수나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인증이나 물 침례나
어떤 의식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이 진리에서
벗어나면 언제나 이단이 되었고, 성도들은 은사주의나
기복신앙으로 흘러갔습니다. 어떤 교회는 성령을 받기
위해서 기도회를 하고 안수 집회를 갖기도 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붙잡고 울부짖기도 합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바로 성령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 안에 이미 성령이 계시고,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이해가 없었습니다(고전3:16,6:19).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 몸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殿)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6:19)고 탄식했습니다.
마귀는 신비적 체험이
있고, 능력이나 은사가 발휘되어야 성령을 받은 줄로 믿는
사람들을 속입니다. 뜨거운 느낌이나 감정이 없으면 성령이
없는 줄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안 보이고, 안 느껴진다고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성령을 주신 것은 이후로 우리가 자신의 정욕이나 육신대로
살지 않고 성령 충만을 받아서 성령 안에서 살고,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을 쫓아 행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갈5:25)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분명히 믿음으로써 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어진 성령은 성도들의 믿음에
따라서 그 능력과 나타남이 확연히 다릅니다. 어떤 이들은
성령이 있지만 없는 것처럼 삽니다. 그들은 단 한번도
성령의 인도를 받은 적이 없고, 성령의 충만을 경험한 적도
없고, 성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삽니다. 성령 충만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성도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에게만 주어집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예수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야 하지만,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 ‘부흥론의 저자’이며
‘마지막 외침’을 썼던 미국의 대 부흥사 찰스 피니는
말하기를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 것도 죄이다.
그리스도인은 더 많은 빛을 소유했으므로 죄인이 회개 하지
않는 죄보다 성령 충만하지 않는 죄가 더욱 크다"라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에 대해서 무관심한 성도들은 이 시간
각성하시기 바랍니다. 앤드류 머레이 역시 "성령충만을
받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나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고 일하기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하여 성령충만을 구해야 한다" 하며 성도들을
촉구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간구해야만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며, 날마다 지는 자기 십자가는 성령 충만을 줍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자아를 처리함으로써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역사할 수 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육신과 성령은 첨예한 대립을 이루고 싸우고
다투기 때문입니다. [
이는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기 때문이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갈5:17). 육신과 성령은 상극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육신과 성령은 우리가 육신을 벗는 그
순간까지 서로 대적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십자가로
이끌어서 거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육신과 정과 욕심을 다
십자가에 못박도록 인도하십니다. 갈보리의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모두 못 막지 못한 사람은 결코 성령 충만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육신과 육신의 생각, 마음의 상상까지도 남김없이 철저히
처리하신 후에야 우리를 통해 성령의 열매를 맺으십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
그 까닭은 육신적인
생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참으로 그리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롬8:7).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몸의 행실을 죽여야만 합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지만
여전히 자아가 강한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경험하지 못한 채
육신의 힘으로 성령을 대신하려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검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말씀하십니다(엡6:17).
성령은 이 칼을 원수 마귀를 무찌르는데 사용하시지만 먼저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우리의
생각을 드러내는데 이 칼을 사용하십니다(히4:13).
성령께서는 이 칼을 우리의 마음의 상상과 높아진 생각을
무너뜨리고 사로잡아 오는데 사용합니다(고후10:5). 성령은
이 칼을 사용하여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할례를 행하십니다(골2:11).
갈보리의 십자가,
무덤에서의 부활,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역사적으로 모두 단
한 차례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지만 그 사건들은 지속적으로
믿는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탄이 교회 안에 들어와 빛의 천사로 자신을 가장하고 각종
거짓 은사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성도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제쳐두고 곧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에 있었던
동일한 현상을 체험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을 때 있었던 능력과 표적과 각종 은사들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진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갈보리로 먼저 가는 대신 곧바로
마가의 집으로 가버립니다. 갈보리 언덕, 아리마대 요셉의
동굴(무덤), 그 다음이 마가의 집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만약 십자가의 기초가 전혀 없는
성도들에게 성령의 능력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 발생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도박을 하고, 마약을 사는 아들에게 그것을 알면서 계속
돈을 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에게 돈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마약 공급상이거나 그를 자기 똘마니로
부려먹으려는 목적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십자가에서 자아를 처리 받지 못한 성도가 영적
은사를 받으면 그는 자신이 받은 은사로 돈벌이를 할
것입니다. 교회를 휘젓고 다니며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라며
자랑할 것이며, 자신이 사도인양 성도들 위에 군림하며,
권세를 부리고 다닐 것입니다. 이는 어린아이들에게 거금의
돈을 맡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오늘날 능력을 달라고 부르짖는 성도들에게 능력을 주는
대신 먼저 십자가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능력을 구하는 자녀들에게 능력을 주시지 않는
것은 그들이 능력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인 성도에게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을
주는 것은 그들을 더욱 타락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인 성도들이 가진 성경 지식이 얼마나 연약한
성도들을 무너뜨리고 믿음을 파괴하는지 우리는 생생하게
목격한 경험이 있습니다. 영적인 은사들을 받았다고 해서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영적인 은사들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십자가는 우리 안에 삶의
축을 바꾸어 줍니다. 전에는 내 안에 있는 자아가 왕좌를
차지하고, 모든 것을 결정했지만 이제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것이 되시고, 왕좌를 차지하고,
결정합니다. 여러분이 자아를 십자가에 처리하고 성령께
자신을 내어 드리는 일이야말로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자기 의식’으로부터 해방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외적인 영역이 아니라 우리의 내적인 모든
영역에서 내주 해 계시며 일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밖에서
일하시고,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날마다 지는 십자가는 매일
지속되는 사건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는 것은 믿을 때
일어나는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성령 충만은 지속적인
일입니다. 현재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있지 않다면 현재
여러분은 성령 충만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성도들은 이미 마음이 타락한 성도입니다. 마음이
타락한 증거를 제시해 보면 가정 기도를 거의 하지 않고,
신앙에 무관심하며, 세상을 사랑하고, 선교에 관심이 없고,
은밀한 기도 사역을 전혀 하지 않으며, 비난하는 마음이
들고, 성경에 제시된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끌어내리며,
쉽게 화를 내거나 분을 품으며 절제하지 못합니다. 성경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고, 기도 모임이나 교회의 집회에
참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바쁜 일이 많이 생길 때
여러분은 십자가를 벗어버린 상태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과 교제하고 대화하는 것보다 같은 수준의 사람들끼지
잡담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하고, 예배를 전혀 즐기지
못하고 따분하고 잠이 오는 사람, 선한 양심이 더럽혀져
사람이나 어떤 사건이 자기에게 닥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들거나, 사소한 일들을 매우 중요한 것처럼 부풀려 헐뜯고
비판하는 마음이 자꾸 들 때 여러분의 마음은 심히 타락한
상태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자신을 성찰해 보십시오.
저는 타락한 성도를 금방
알아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이는 쉽게
판단한다고 비난받을 소지가 있지만 타락한 성도들은
성령이 충만한 성도와 마찬가지로 뚜렷한 특징이 금방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생활의 염려가 갑자기 많이 생기고,
자신의 편견이나 자신의 잘못이나 자신의 주장으로 인해
발생한 여러 가지 일들을 남의 탓으로 돌리며, 입에서는
험담과 욕설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때 그는 현재 분명
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가 아닙니다. 또한 성령 충만한
상태가 아닙니다. 이 때 우리는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씻어 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아를 죽음으로 이끕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오는 타락한 성도들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은혜 안에서 자라게 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
성도들은 삶에서 심각한 고통과 실망스런 결과들을
겪으면서도 평안과 기쁨을 유지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순결, 부흥을 위한 마음이
갈수록 커집니다. 나에 대한 남의 평가에 무관심해지고,
무감각해지며 모든 활동 영역에서 자아에 대한 의식과
중요성을 갈수록 잃게 됩니다. 은혜 아래서 자라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성령 충만함의 결과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옛
사람을 완전히 죽음으로 몰아 넣음으로서 새 사람이 영
안에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게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들은 그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됩니다. 바울 사도는
[
나의 어린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시기까지 내가 다시 너희를 위하여
산고(産苦)를 겪노라.](갈4:19). 바울은 갓 거듭난
성도들을 순수한 말씀의 젖으로 먹이고, 밤낮으로 훈계하며,
눈물을 흘렸으며, 그들 안에 내주 하시는 그리스도께서
형성될 수 있도록 산고를 겪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형성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
이로써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長成)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엡4:13). 십자가에 못박힌
성도는 분을 내는 일이 갈수록 줄어들며, 세상과는 철저히
분리되며, 자신이 손해를 당하는 일에 대해서는 쉽게
용서하고 잊어 버리는 반면 자신이 진 빚이나 상처를 입힌
일에 대해서는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청하며, 갚으려고 애를
씁니다. 성령 충만은 영적인 일이지만 그 결과는 삶의 전
영역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나며, 그 주변 사람들에게
영적인 유익을 끼치고 덕을 세워 줍니다. 특히 십자가를
짐으로써 성령 충만한 성도는 예기치 않는 재난이나 손실,
손해에도 평온함을 유지합니다. 이런 일은 행위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갈보리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죽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성령을
받았고, 성령 충만함을 구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령을
따라 살아야만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힌
경험이 없고, 자아를 처리하지 못했으며,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지 못했다면 마치 군대에 가본 적도 없는
사람이 병정 놀이를 하면서 전쟁을 치르는 줄 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단지 머리로만 설교를 듣고,
삶에서는 아무런 영적 경험과 열매도 없이 살아왔다면 이
시간 주님 앞으로 나와서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회의 순결과 영적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다면 이 시간부터는 그것이 시급한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영적 부흥과 은혜 안에서 자라나는 일을
위해서 여러분은 간절하고도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인지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 전혀
깨달음이 없다면 여러분은 지금 울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행여 성령
충만하면 마음이 달콤하고, 걱정 근심이 다 사라지고,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흔히 영적
쾌락주의자들, 기복적 은사주의자들은 그렇게 알고 성령
충만함을 구합니다. 이들은 십자가 없는 성령 충만을
구하는데, 그들의 영을 채우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마귀의 영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항상 행복하고 슬픔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큰 오해도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성도에게 주어지는 성령 충만은 그 결과
교회와 세상을 볼 때, 특히 자신을 볼 때 큰 고통과 슬픔을
느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때에 영적 현실에 눈을 뜨게 될
것이며,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그대로 이해하고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침례인
요한은 광야에서 살았고, 감옥에 갇히고 목이 잘리는 죽음을
당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예수님은 슬픔의
사람이셨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사도 바울은 고난의
일생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했던 사람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
... 내가 수고를 더욱 넘치도록 하고 매도
지나치게 맞고 감옥에도 더 자주 갇히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로부터 마흔에서 하나 뺀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몽둥이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을
당하여 한 밤과 한 낮을 깊음 속에 있었으며 자주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내 동포로 인한
위험과 이교도들로 인한 위험과 도시에서의 위험과
광야에서의 위험과 바다에서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
가운데서의 위험을 당하였고 또 지치고 괴로워하고 여러 번
밤을 새우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금식하고 추위를
당하고 헐벗었노라. 이렇게 밖에 있는 일들 외에도 날마다
내게 닥치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11:23b~28). 날마다 십자가를 졌고,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성령 충만한 성도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성령 충만하다면 즉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며, 세상과
세상적인 교회와 세상적인 친구들과 교인들로부터 많은
대항을 견딜 각오를 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성령
충만하다면 자주 사탄의 공격과 비방과 괴롭힘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화내거나 짜증나거나
초조하거나 걱정스러워 하지 않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자아는 십자가에서 온전히 죽었고, 새롭게 태어난
새사람은 자라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날마다
죽음으로 날마다 새로워지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고통 가운데서 평온하고, 폭풍이 밀려오는
것을 보아도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당황하지 않는 자신을 볼
때 스스로 놀라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
십자가와
성령 충만]의 밀접한 연관 관계입니다.
사람들은 환란 가운데
고요히 내적 평안을 유지하는 성도들을 볼 때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십자가에 못박힌 성도가 누리는 성령
충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두
유업의 상급이 많기를 구합니다. 이 말은 한 편으로는
여러분의 삶에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이 많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함께 고난을 당해야만 유업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영적 성장과 성숙을 구합니다. 이 역시
여러분에게 많은 고난을 주시라고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난 없이는 아무도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입시다. 그래야만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요, 귀한 그릇으로 빚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농부이신 주님이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들을 사정없이
잘라내 주시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어떤 것이 잘리는 것은 큰 아픔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철저히 주님 한 분만을 신뢰하도록 기도합니다. 이 말은
여러분의 육신의 힘과 지혜를 철저히 부수어 달라는 기도와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복된 소망, 영광스런 소망을
갖도록 기도합니다. 이 말은 여러분에게 많은 환란을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낳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렇게 말하면
목사님, 제발 그렇게 기도하지 말아 주십시오! 애원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세상을 미워하고, 자신을 미워할
줄 알며,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이
기도는 중단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