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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십자가와 새로운 생명



사람들이 가장 관심 갖는 것 가운데 하나는 단연 생명, 삶이란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주로 삶에 관심을 갖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하여(for the better life)! 이것은 누구나 추구하는 이상입니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 없진 않겠지만 대부분은 만족스런 삶, 행복한 인생을 갈망합니다. 왜 이사를 가고, 이민을 갑니까? 왜 대학을 가고 공부를 합니까? 이유는 많지만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입니다.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은 삶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최상의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최상의 생명이란 사실을 잊고 삽니다. 부요한 삶, 행복한 삶, 건강한 삶, 자아 실현을 위한 삶, 성공적인 삶...세상은 온통 삶과 인생이란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2장에서 주님이 삶보다 생명이 훨씬 더 중요함을 역설하신 귀한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을 하시기 전과 말씀을 마친 후에 생명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탐욕을 조심하라. 이는 사람의 생명이 그의 풍부한 소유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하시니라.](눅12:15),- 생명과 소유의 관계. [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생명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생명은 음식보다 소중하며 몸은 옷보다 소중하니라.](눅12:22,23), - 생명과 먹고사는 삶의 문제. 주님은 삶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부지런히, 열심히 살고자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회없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뭔가를 남길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삶에만 정신이 팔린 사람은 생명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사고나 질병으로 죽음에 처했을 때 삶보다는 생명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생명이 있어야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 다양한 삶의 종류가 있지만 생명은 단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육신의 생명과 영적인 생명입니다. 육신적인 생명은 잠깐 보이다 사라지는 수증기요(약4:14), 시들어 없어지는 꽃이요, 마른 풀과 같습니다. 반면 영적인 생명은 영원한 것이요, 영광스런 것입니다. 전에 이미 몇 차례 말씀드렸듯이 생명(life)과 삶(life)은 같은 말입니다. 육신의 생명은 육신을 위해 삽니다. 육신의 생명으로 육신적인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때로 종교적인 삶을 살수도 있지만 육신의 생명으로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이어져 온 생명, 아담에게 물려받은 생명은 땅에 속한 것이며, 죽음으로 가는 생명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아담 안에 있던 생명을 물려받았습니다. 그 생명은 육체의 피 속에 있습니다. [이는 피가 모든 육체의 생명이기 때문이니 육체의 피는 육체의 생명을 위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피가 그 육체의 생명인즉 누구든지 피를 먹는 자는 끊어지리라.](레17:14). 하지만 이 피는 죄로 오염되었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피 속에 있는 육체의 생명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길어도 70년이요, 강건하면 80이면 생명은 급격히 약화되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롬5:12).

반면 영적인 생명은 영적인 것을 위해 삽니다. 영적인 생명은 영원한 생명(eternal life, everlasting life · 영존하는 생명)이며, 불멸하는 생명이며, 하늘에 속한 생명입니다. 영적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또 그 증거는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1-12).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곧 죽고 없어질 육신의 생명이 전부입니다. 영적인 생명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께서 육신을 입으심으로 주님의 생명 역시 주님 자신의 육체의 피에 있었습니다. 고로 영생은 갈보리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있습니다. 주님의 피는 순수한 피요, 보배로운 피요, 언약의 피요, 하나님의 피입니다(행20:28). 아담의 피를 받은 사람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아담 안에 있던 생명을 받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던 생명을 받는 것이 구원의 핵심입니다. 사람의 구원은 그가 무엇을 했느냐? 어떻게 살았느냐? 에 앞서 누구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생명을 지니고 있는가? 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의 생명은 나의 것이라고 하지만 그 생명은 나의 부모가 나에게 물려 준 것이고, 부모는 그 부모가 물려 준 것이고, 결국은 아담이 물려 준 것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의 육신의 생명은 아담에게 속한 것이요, 아담의 피요, 아담의 생명입니다. 반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의 피요, 예수의 생명이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됩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아담 안에서 그 피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된 육신의 생명을 처리하고, 죄를 처리했습니다. 십자가는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열어 줍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 뭔가 달라진 인생을 살아보고 싶어하지만 더 나은 생명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요한복음 1: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삶, 경건한 삶,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기초가 마련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을 어떻게 얻어야 합니까? 예수를 믿으면 됩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가졌나니](요6:47).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값없이 거저 주시는 영원한 생명, 영존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전에 어떤 부자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자신의 몸 속에 있는 피를 젊은 사람의 피로 완전히 바꾸어 버리면 자신은 그만큼 더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병원에 가서 이 일을 문의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그 생명은 여전히 육신의 생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얻은 생명은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얻은 생명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께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생명입니다. 영생이란 말은 단지 오래 산다, 죽지 않는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생명 즉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는 하나님의 권능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3-4, [우리를 부르사 영광과 덕에 이르게 하신 분을 아는 것을 통하여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divine power)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나니 곧 /주께서/ 이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사 너희로 하여금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divine nature)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느니라.](벧후1:3-4). Divine Power, Divine Nature. 이런 이유로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경건하게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말로 경건(godly)이라고 번역한 말은 ‘하나님처럼, 하나님같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없이 하나님처럼 살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신 분은 우리에게 그 생명을 얻게 하심으로 그 생명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셨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생명이신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양들에게 주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방법은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양들에게 생명을 주는 유일한 방법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갈보리 십자가에서 내어놓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주거니와](요10:11). 주님은 양들에게 자기 생명(남의 생명이 아니다)을 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아담의 생명을 받고 태어나 연약하고, 제한적이고, 죄성이 가득한 육신의 성품을 지닌 육신의 생명밖에 없지만 이제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생명을 내 주셨습니다. 주님은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어디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입니다. 이곳이 아니면 누구도 주님의 생명을 찾을 수 없고, 얻을 수 없습니다. 생명을 얻기는 원하지만 갈보리로 눈길을 돌리지 않고, 십자가로 가지 않는다면 그는 주님의 생명과는 무관합니다.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으니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생명을 버리노라.](요10:15). 주님은 양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요10:28).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이 주신 생명은 분명 하나님의 생명이요, 그 생명은 하나님의 신성과 하나님의 성품과 권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새 생명을 주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앙 생활 자체가 무의미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영원한 삶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적 삶의 방향과 원동력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심을 받은 것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은 현재 우리가 이 땅에서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걷고, 성령 안에서 걷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새로운 생명을 받은 성도들만이 새로운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옛 생명을 처리했습니다. 옛 성품을 처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기에 앞서 먼저 우리 자신이 새롭게 된 새로운 피조물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우리는 무엇을 하기에 앞서 어떤 존재가 되느냐?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새로운 삶에 관심을 갖기에 앞서 새로운 생명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로운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신성한 권능과 하나님의 성품을 얻었다는 분명한 진리를 마음 가운데 깊이 새기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면 더욱더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이 갖는 진리의 지식을 통해 참된 자유와 새 생명을 통해 의와 거룩함 가운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 없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 없이 성령을 외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 없이 진리를 외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십자가에서 처리하셨고, 우리를 그분의 십자가에서 일으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든 성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진리의 지식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 걷는 것이 투쟁이나 고행이나 금욕을 통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런 일임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행동은 모방할 수 있고, 가장할 수 있고, 거짓으로 자신을 가릴 수도 있지만 생명은 모방하거나 위조하거나 복사할 수 없습니다. 일은 속일 수 있지만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만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의롭고 경건하고 거룩해 지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것이 어떤 인위적인 훈련이나 어떤 사람의 삶을 흉내낸다고 되는 일이 결코 아니란 사실을 확실히 증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새벽 기도와 성경 읽기와 철야 기도와 금식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구제할 수 있고, 전도할 수 있고, 성경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형제들에게 좋은 말로 상담도 하고 권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 하는 일이 아니라면 무거운 짐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얼마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그런 것을 하지 않는 것보다 백배 더 선하고 옳은 일이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그런 생활은 매우 고달픕니다. 어느날 여러분은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때로 자신은 몰라도 가족들은 압니다.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여전히 성질은 그대로 살아있고, 생활 태도나 행동 패턴은 변했지만 본질적인 면은 그대로란 사실을 여러분의 아내와 남편과 자식들은 분명히 압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의 신앙 생활에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단 말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고민 한번 없이 마음 편하게 산 사람들은 솔직히 거듭난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새롭게 되기를 원하신다면 갈보리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 십자가를 짊어지십시오. 십자가만 알면 됩니다.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의 결심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음이라.](고전2:2). 이는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지혜요, 권능이요,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고전1:17-8).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성도의 일생입니다(갈2:20). 십자가를 떠난, 십자가와 분리된 성도의 삶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 보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결심에 앞서 먼저 나를 위해 이루어 놓으신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생명이 먼저이고 삶은 그에 뒤따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먼저고 행위는 거기에 종속되는 것입니다. 행위는 사람을 앞 설 수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고 오직 새로운 피조물만 /효력이/ 있기 때문이라.](갈6:15). 성도들이 흔히 하는 실수와 오류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을 해야지, 이런 것은 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하면 좋아질 것이야...’와 같이 주로 행위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할례, 무할례, 안식일, 율법은 모두 어떤 행위에 관한 것들입니다. 바울은 그런 율법에 관련된 행위가 결코 사람을 앞 설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그런 것은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외적 행실이전에 우리의 내적 존재를 먼저 묻습니다. 내가 옛 사람이냐? 새 사람이냐?가 더 중요하며, 관건입니다. [이전의 행실에 관하여는 너희가 속이는 것으로 가득한 욕심들에 따라 부패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너희의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었도다](엡4:22).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너희가 옛 사람과 그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골3:9~10).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사는 비결이 잘 기술된 것을 봅니다. 옛 사람과 그의 행위(사람이 먼저이고 행위가 다음이다)를 벗어야 합니다. 다음은 새 사람을 입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옛 행실, 더러운 욕심, 거짓말, 헛된 생각 등은 따라서 버려진 것이란 것입니다. 어떻게 옛 사람을 버리는가? 내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처리해 주셨음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롬6:6).

우리는 옛 생활을 벗어버리고, 옛 습관을 벗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주변에서도 그런 처절한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도박, 술, 담배, 성적 욕망 이런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자신이 집착하는 어떤 것들은 도저히 단절하지 못합니다. 이는 죄의 종이 죄를 이기겠다고 덤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종이 죄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죄의 종이 죄를 이기고 싶다면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서 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 어떤 목사님이 “어둠의 행위를 벗어 버리자, 빛의 갑옷 입자”라고 강력하게 설교했습니다. 듣는 성도들이 모두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 다음 주나 한달 후나 일년 후에라도 매주 아멘!만 할 뿐 아무런 변화도 열매도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생각있는 성도면 이런 고민이 있을 것입니다. ‘나도 간절히 어둠의 행위를 벗어버리고 싶다. 나 역시 빛의 갑옷을 입고 싶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알 수 없다.’ 성도가 된 후 이런 진지한 고민과 번뇌가 있어야 합니다. 이 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옛 사람이 처리되고 죽음에 처해짐으로써 어둠의 행위를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기준으로 생각하면 신약 성경의 모든 명령이나 의무들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매우 가볍고 쉬운 계명이 됩니다. 십자가 없이 우리는 어떤 작은 영적인 일도 할 수 없으며, 어떤 작은 악한 습관도 이길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승리의 삶이란 믿음의 삶이요, 믿음의 삶이란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여러분의 마음 속 중심부에 둘 때 우리의 생각은 새로워집니다. 변화된 삶은 변화된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12:2). [너희의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엡4:23). 우리는 이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주님을 섬깁니다. 이는 온전히 갈보리 십자가의 역사입니다. [이제는 우리를 붙들던 율법 안에서 우리가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이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율법 조문의 낡은 것으로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라.](롬7:6). 주님을 섬기는 사역은 십자가를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떠나서는 어떤 기도도 효과적인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히10:19). 이 말씀은 기도의 능력이 십자가에서 주님이 흘리신 보혈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기도할 때 오늘은 성경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오늘은 무엇 무엇을 했기 때문에 주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는 온전히 십자가의 피에 근거할 때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을 얻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진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나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놓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려면 갈보리 십자가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고,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만이 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과 영적 지식의 풍요로운 이해가 있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생명으로 인해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생명은 논의의 여지가 없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삶 그 자체입니다. 이 생명은 장차 올 시대의 능력을 맛보게 합니다. 여러분은 외적으로 육체적으로 예수를 알고, 외적으로 십자가를 알아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예수를 알고, 십자가를 알고, 부활을 안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역사적인 예수를 알고 외적인 사실들을 인정하지만 삶에서 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본질적인 측면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 생명의 연합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침례를 받았으면서도 그 침례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 그분 안으로의 침례에 대한 신앙 고백임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물로 침례를 받는 것은 교회 행사나 의식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았기에 받는 신앙 고백입니다(롬6:3-4). 정녕 우리가 그런 사실을 알고, 그런 믿음으로 침례를 받았다면 그리스와 함께 못 박혔고, 이제는 그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분의 생명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분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있던 우리의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 그리스도안에 있는 새 사람이 살았습니다. 주님이 주신 새 생명은 점점 자라나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생명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난과 박해와 모욕과 수치와 사방에서 우겨 쌈을 당하는 그런 삶이 전혀 이상할 것도 놀랄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주신 생명은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며,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주님을 위해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얻은 새 생명은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이런 삶을 거부한다면 십자가의 생명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가 겪는 모든 고난과 박해는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선언하는 작은 도구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 로마서 14:7 [이는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기 때문이라.], 우리의 옛 사람과 옛 사람에 속한 생명은 오직 자기를 위하여 살았지만 이제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새 사람과 새 생명은 오직 주를 위해서만 살게 됩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저와 여러분의 생명이 태어난 탄생지요, 새로운 피조물로 빚어진 산실이며, 삶의 영원한 근거입니다. 우리 모두 다시 한번 갈보리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죄와 저주로 온 땅에 내려진 사망을 이기는 새로운 생명이 넘쳐나는 그곳에 깊이 뿌리내립시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우리가 뿌리 내려야 할 거처이며, 거기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모든 것이 됩니다.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세움을 받아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넘치도록 감사를 드리라.](골2:7).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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