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누군가를 위해서
죽는 일도 매우 힘들고 어렵지만 누군가를 위해서 사는 것은
더욱 힘들고 어렵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주님을
위해 초개같이 자신을 버리겠다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오늘날 교회는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은 성도가 되면 '이후로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라는 결심을 한 두 번 이상 해
보지 않는 적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갓 거듭난 성도는
대부분 구원의 감격과 믿음의 선한 양심이 생기면서 남은
생애는 모두 주를 위해 살리라는 굳은 결심을 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결심은 참으로 선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입니다.
죄 가운데 살던 사람이
성도가 되고 나면 삶에 대한 높은 도덕적 표준과 욕망이
생깁니다. 거룩함과 경건함을 추구하고, 내적 평안과 영적인
복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성도답게 살아보고
싶은 욕망은 매우 건전하고 자연스런 영적인 욕구이며, 이는
자신이 거듭났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살면서 좀처럼 만족스럽다는 체험이나 느낌을 갖지
못합니다. 소위 말하는 주님과의 첫사랑의 경험이 지나고
나면 영적인 삶에 대한 깊은 회의가 찾아 들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영적인 삶의 비결이며, 과정이란
사실을 귀가 따갑도록 설교를 듣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선행 조건이란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본 경험 역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삶에 대해서 교회
내에 가장 만연한 잘못된 가르침은 기독교 신비주의와
기독교 금욕주의입니다.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추구해야
할 영적 성숙의 경지, 도달해야 할 목표로 보지만 성경은
이것이 기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나를 위해 죽어
주시도록 간구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나와 함께 죽어
주시도록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주님께서 나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상식적인 믿음입니다. 이
둘은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경험이
없는데, 어떻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그분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은 도무지 믿지 못하겠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고,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이 의외로
너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면 주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이 사실을 믿고
이해할 수 있도록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기초이며, 영적 생활의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줄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는 진리
역시 이해할 수 없습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2:20).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이란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근거란 점을 수없이 말씀드렸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십자가입니다. 성도에게 모든 출발점은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받을 때에
그의 십자가는 우리의 십자가이며, 십자가의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에게 십자가는 사실이 됩니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정도전이란 사람은 고려의
왕족들인 왕씨들을 모조리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렇다고 왕씨들이 모조리 다 죽은 것은 아닙니다. 왕씨들은
전(全), 전(田), 옥(玉)씨로 성을 바꾸어서 살아 남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선 왕조는 왕(王)씨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와 가산을 모조리 몰수 할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조선
땅에는 자신이 왕씨임을 밝히며 토지 대장을 가지고 자기
재산임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정도전이란 사람은 조선의 태조였던 이성계에게 이렇게
보고합니다. “이제 이 조선 땅에는 왕씨는 모두 죽었습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이 죽고 이 성계가 조선의 왕이 되던 순간
당시 왕씨들은 자신들의 왕과 함께 모두 죽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왕씨 가문의 명예도, 자긍심도 없어졌습니다. 왕씨
성을 하사받았던 사람들 역시 모두 왕씨 성을 버렸습니다.
왕씨로써 약 500년 동안 누리던 각종 전답과 임야 등은 다
사라졌습니다. 왕씨가 사라지고 나니 왕씨의 재산도 가문도
명예도 다 사라진 것입니다. 만약 몇몇 왕씨들이 옥씨나
전씨로 개명해서 살면서 ‘왕씨는 죽지 않았다’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진리와 현실을 왜곡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런 예는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습니다.
전에 제가 김포공항에서 근무할 때 소련 사람들의 출입국이
많았습니다. 북방 외교의 기치를 내건 제 6공화국에서
소련과의 근접 외교를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얼마 후
1991년 소련이 붕괴되었고 지금 이 지구상에는 소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들은 소련 사람이 아니라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각자 자기 나라 이름을 댑니다.
아무도 자신을 소련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소련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이런
예가 완벽한 예는 될 수 없겠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함께 못 박혔으며, 그분이 묻히실 때 함께 묻혔고, 그분이
일어나실 때 함께 일어났습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2:20).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로 인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살았습니다. 율법에 대해 죽고 성령에
대해 살았습니다. 자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죽음에 처하는
동시에 우리의 생명이 됩니다. 나는 시체도 아니며, 기계도
아닙니다. 나는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이전에
육신의 일을 하고 죄의 열매를 맺던 육신은 죄의 도구가
아니라 의의 도구로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자기 추구와
자아의 이상과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살았던 나는 더 이상
자아가 아닌 하나님과 그분의 왕국을 추구하는 삶을 삽니다.
나는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표출하는 도구로서 삽니다.
기독교 금욕주의자들은
십자가를 금욕적인 삶을 살라는 메시지로 생각합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란 삶은 철저히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성도는 결코 기계나
시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성과 감정과 의지를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과 세상의 철학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며, 그렇게 살도록 말합니다. [
(곧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손을 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사용하는 대로 없어지는 것이요,) 사람들의
명령과 교리들에 따른 것이라. ](골2:21-22). 사도
바울은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나 교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명령과 교리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도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런 식의 삶을 살면서 그것이 경건이요,
거룩이며, 승리의 삶을 사는 것인 줄 아는 것은 무지의
소치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유난히
금식 기도원이 많은 한국에는 기독교 금욕주의가 널리 번져
있습니다. 은혜나 은사를 얻기 위해 40일 금식 기도는
기본이고, 매주 몇 차례 금식하고 철야 기도하고, 산에
올라가서 산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매우 많이 있습니다.
금욕주의는 세속을 떠난 존경스런 삶일 수는 있지만 그것은
성경의 계시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난 계시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와 전혀 무관한 삶입니다. 기독교 금욕주의 역시
기독교 신비주의와 같이 십자가를 이상으로, 목표로, 따라야
할 고행의 본으로 삼는데 이는 하나님의 복음을 무(無)로
돌리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결코 목표나 이상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너희가 왜 그렇게 사느냐?’입니다. [
그러므로
너희가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로부터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늘 어찌하여 세상에 살고 있는 것같이 규례들에
복종하느냐?](골2:20).
만약 술주정뱅이가 술에서
해방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죽는
것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 욕심에서 구출되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욕심을 버리라, 술·담배를 끊어라, 정욕을 피하라,
탐심을 버리라는 등의 인간적인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종교적 금욕주의, 도덕적 교훈이 될 수 있겠지만
성경적인 가르침은 아닙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그런
가르침이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금욕주의적 설교와
사고가 교회에 팽배한 이유는 금욕주의가 지혜의 모양이며,
자의적 숭배이며, 인위적인 겸손이요,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기 때문입니다. [
참으로
이런 것들은 자기 의지대로 경배를 드리며(나는 ..을
할 것이다, 나는 ...을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결심, I
will...종교임)
자기를 낮추며 몸을
경시하는(인위적 겸손, 자의적 겸손, 이는 자아에서
나온 겸손이다)
데는 지혜 있는 것같이
보이나 육체를 만족시키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느니라](골2:23).
하지만 이런 것들로는 결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도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평강과 기쁨을
누리지도 못합니다.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이나 기독교
금욕주의자들은 교회 내에서 성경 공부나 기도나 예배에
특별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지 결코 어중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뭔가를 하는 사람들이지 대충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들의 모습은 신앙의 표준이
되고, 본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런 금욕주의와 신비주의는 마귀의 인본주의의
산물이요, 마귀의 가르침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때가 될수록 이런 금욕주의가 팽배해질 것임을
경고했습니다. [
이제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셨으니.../이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 명령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니 진리를 믿고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4:1,3).
전에 어떤 목사님은 결혼한 후에 2개월 동안 부인 얼굴을
한번도 보지 않고 곧바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는 간증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저는
미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신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노라고
간증을 했는데, 제가 볼 때는 마귀들린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성경적인 행위가 신앙의 표준이 될 때
교회는 급격하게 타락하게 되며, 영적인 자유함과 평안은 다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들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신비를 사실로 받아들인 사람이며, 그대로 믿음으로 삽니다.
우리는 신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고
시인합니다. 골로새서 1:26-27, 골2:2을 보겠습니다. [
이것은
곧 여러 시대와 여러 세대로부터 감추어졌으나 이제는
그분의 성도들에게 드러난 신비에 관한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이 신비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가를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게 하려 하시나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골1:26-27).
[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마음에 위로를
받고 사랑 안에서 서로 결합하여 전적으로 충만하고 확실한
깨달음에 이르고 하나님과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신비를
시인하게 하려 함이라.](골2:2). 이 부분은 신비의
영역에 속하지만 믿음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의 개성이나 특질, 그리고 기호를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나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그런 모습으로서의
속성을 계속해서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시인하며 삽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아들을 계시해
주시는 것은 선포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
자신의
아들을 이교도들 가운데 선포하시려고 그 아들을 내 안에
계시하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즉시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갈1:16).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없다면
여러분의 선포는 거짓이며, 전도는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성도는
하나님 앞에 ‘내가...하리라’, ‘나는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결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결심은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대신 ‘주께서 나를 통해..를 이루어 주시기를
의뢰하고, 기도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을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성도들에게 능력을 발휘하시며,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박힌 성도의 일상 생활입니다. 나는 작은
습관, 손버릇, 말버릇, 혈기, 조급증, 시기, 판단...갖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그 문제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을 산출하는 자아를 주님께서 처리해 주셨음을 믿고
시인합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달리는 성도는 승리를
맛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의 근원인 나를 십자가에
처리해 주신 주님을 믿는 성도는 누구나 승리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는
고통과 죽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어느덧 교인들은 ‘십자가’란 말이 고통스런 삶이란 말과
동의어가 되었고, 힘겹게 하는 신앙 생활을 ‘십자가를 진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란 말은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나의 옛 사람을 처리하고,
나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지음 받은 새 사람을
창조한 장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옷 입고, 영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가리켜
성도의 삶이라고 합니다. 성도의 삶이란 그리스도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 역시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라](빌1:21).
바울 사도는 각 교회에 보낸 서신에 이 진리를 엄청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고
했고,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라고 했으며, 골로새 성도들에게는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만약 성도들이 이
진리에 무지하다면 10-20년 신앙 생활을 했다해도 평생에
남는 것은 실패와 절망뿐일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답게 살기
위해서,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무엇을 하셨다는 진리를 깊이 보아야 합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내가 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해
놓으신 일을 말하고 있을 뿐이며,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거듭난 성도는 초신자
시절에 이런 진리를 확실하게 배워야 합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 내게 사신다는 사실을 배움으로써 영적
생활은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사시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사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죄와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삽니다. 저는 이런 진리에 대해서
성도들이 너무 심오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한 죽음의 대속만 믿는 것이 아니라 삶
역시 주님께서 대신 사신다는 진리를 믿습니다. 십자가는
죽음과 삶의 두 가지 방면에서 모두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의 비결을
터득한 사람인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내가
비천하게 되는 것도 알고 풍부하게 되는 것도 알아
어디에서나 모든 일에서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 당하는 것을 다 배웠노라.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2-13).
우리 역시 이런 삶의 비결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이 한 전도와 사역의 수고를 자신의 힘으로
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진
사람은 더 이상 자아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전부입니다.
그는 자신의 전도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신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로마서 15:18절과 골로새서 1:29을
보십시오. [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시려고 나를 통하여 이루신 것들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할 것임이라. 그
이루신 것들은 말과 행실로나](롬15:18). [
이것을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강력하게 활동하시는 분의 활동을
따라 힘쓰며 수고하노라.](골1:29).
전에 어떤 전도자가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분과 함께 살았다’는 주제로
설교를 했는데, 몇몇 성도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참 좋은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나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왜 지금
나에게는 옛 사람의 성품이 그대로 나와서 나를 괴롭히는
것입니까? 죽었는데 어떻게 살아서 활동을 합니까?” 이런
질문은 제 자신도 자주 가져 보았던 질문입니다. 저는
오늘도 이유 없이 화를 내었고, 불평을 했고, 짜증을 내었고,
뭔가 불만족스러워서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내 안에는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사는 것만 같습니다.” 저는
죄성이 솟아날 때 내가 마귀들린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죄의 유혹, 자극, 충동 이런 것들은 마귀가
성도들에게 끝없이 공격하는 무기입니다. 이것은 죄와
싸워본 진실한 성도들의 공통적인 견해요, 체험입니다. 이
때 우리는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
그런즉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거하는 죄니라. 이는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알기 때문이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할는지는 내가 알지 못하노라.](롬7:17-18),
[
이제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그것을 행하는 자가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거하는
죄니라](롬7:20)란 말씀을 절감하게 됩니다. 죄로부터
구원받았고, 죄에 대해 죽었지만 여전히 내 안에, 내 육체
안에 거하는 죄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구원받은 후
자신의 힘으로 죄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주님을 불렀던 것처럼 우리는 이런 상태에서
건짐 받기 위해서 다시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 누가? 누가? 바로 갈보리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에 대해
졌기 때문에 문제를 삼는 것이 아니라 왜 주님을 의지하지
않았느냐는 점을 문제 삼으십니다. 왜 십자가의 진리를 믿지
않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진리-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는 진리만이
내 안에 거하는 죄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2:20b).
패배는 우리가 수고를 적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를
제쳐둔 채 너무 많은 수고를 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생명은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있는 것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연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심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승리의 찬양을 부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사실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침례란 죽음으로
장사를 지낸 것을 자신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몇 가지
삶의 원칙을 제시하겠습니다. 첫째, 나의 옛 성품, 죄들,
악한 습관들은 모조리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주님께서
처리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둘째, 우리 자신을 의의
병기로 거룩한 산 제물로 주님께 드림으로써 성령 안에서
걷도록 하십시오. 셋째,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십시오. 넷째, 마귀와 죄는 죽지
않았습니다. 죽은 것은 나 자신입니다. 마귀와 죄가 나를
속이지 못하도록 더욱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이 믿음만이 지속적인
승리를 보장합니다. 어느 날 여러분은 전에 같으면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근심하고, 불안해해야 마땅한 상황에서
전혀 화를 내지 않고 평안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감사와 찬양과 기쁨이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을 볼 것입니다. 이런 자신을 발견할 때 여러분은 스스로
놀라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생활은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매
순간이어야 하며 지속적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믿음으로 사십시오.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