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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죽음으로 얻게 된 생명



세상에는 역설(paradox)의 진리란 말이 있습니다. 역설이란 모순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인 것, 일반적인 상식과 이성을 거스르지만 실질적 내용은 진리를 나타내고 있는 표현이나 말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바쁘거든 돌아서 가라’ 이런 식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경만큼 역설의 진리가 풍성한 책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온통 역설의 진리로 가득한데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지혜, 세상의 지혜를 무(無)로 돌리시고, 하나님의 약하고 어리석은 것들로 세상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해 마련한 장치입니다. 우리는 당장 산상 수훈의 몇 절만 읽어보아도 우리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주님의 말씀들로 가득 차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세상 관점으로서는 말이 되지 않고, 복이라 할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복되도다. 역시 동일한 역설입니다.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뺨을 돌려대라.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내어 주라...이런 것은 다 인간의 지혜와 이성을 무용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상식적으로, 합리적으로, 법률적으로, 사회 관습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있어서도 안될 일들입니다. 하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신 법적으로 해결하거나 상식적으로 해결하자고 한다면 그는 결코 마음의 평안이나 성령의 충만을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김익두 목사님 이야기- 자신이 죽었다는 부고를 친구들과 친지들에게 돌림. 어느날 친구가 죽었다는 김익두가 살아서 돌아 다니자 속았다는 생각에 물을 끼얹었다. 그는 물세례를 받은 후에 ‘김익두가 죽었으니 망정이지, 김 익두가 살아 있었더라면 자네 오늘 죽었을 걸세.’ 이 분은 역설의 진리를 제대로 이해했고, 실천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역설의 진리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전에 제게 성경을 가르쳐 주셨던 목자님은 이런 말을 자주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헷갈리면 세상이 하는 것과 반대로 하면 성경적일 것이다.” 이 말은 전적으로 옳은 말이었습니다. 성경에 많고 많은 역설의 진리 가운데 단연 압권을 꼽으라면 그것은 당연히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야말로 모든 지혜와 철학과 상식과 이성을 뛰어넘는 역설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분명 저주의 형벌이지만 그것은 인류에게 가장 큰 하나님의 선물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십자가는 분명 사형 도구이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고 혐오스러워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역사상 가장 억울한 죽음이셨지만 그 죽음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죽음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가장 불의한 재판에 의한 처형이었지만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의를 선포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분명 약함의 상징이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능력을 선포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면에서 역설의 진수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첫 시간에 십자가의 죽음이 미리 예언되고, 하나님의 작정된 계획에 따른 죽음이었음을 선포했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 십자가의 죽으신 죽음은 인간의 지혜나 해석이 아니라 오직 성령에 의해 계시로 해석되어야만 함을 배웠습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역설적 진리를 선포하고자 합니다. 모든 생명은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어떤 사람도 죽음 뒤의 활동이나 성취는 있을 수 없습니다. 때로 죽은 후 한 참 후대에 그의 생이 조명 받거나 재평가되는 일이 있어도 어디까지나 살아 있었을 때의 일에 대한 조명이요, 재평가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부터 진짜 스토리가 전개되고, 진정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죽음과 생명이란 극과 극이 한 곳에서 일치합니다. 십자가는 옛 생명의 종결점이며 새 생명의 시작점입니다. 십자가는 율법의 종결지인 동시에 은혜와 생명의 출발점입니다. 십자가는 죽음과 생명이란 두 가지 역설이 절묘하게 합치하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지 자신 혼자 만의 죽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죽음은 죄와 저주로 점철된 옛 창조와 옛 세상과 옛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을 포함하는 죽음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아담 안에 있는 옛 사람을 사망에 처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14,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强勸)하시기 때문이라. 우리가 이같이 판단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으면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4-15). 바울의 판단은 정확한 판단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을 죽음에 처해 버리셨습니다. 주님이 죽으심으로 모두 죽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신 것은 몇몇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 보셨습니다. 주님이 인간이 되신 것 역시 모든 사람을 죽음을 맛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보노니 이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사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2:9).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저와 여러분을 포함하는 죽음이란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로마서 8:32, [또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이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하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 주셨습니다. 디모데전서 2:6, [그분께서 자기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代贖物)로 내주셨으니 이것은 정하신 때에 증거되기 위함이라.](딤전2:6). 주님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이셨으며,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를 개조하거나 개혁하거나 변형시키는 삶이 아니라 옛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을 죽음에 처해 버리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 새로운 생명, 새로운 영에 기반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0:10,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모든 사람을 위해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히10:10).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해 드려진 것이며, 그 결과 우리는 단번에 거룩히 구별되었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자신의 몸에 고통과 학대와 상함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신 분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으므로 주님의 생명의 치유하시는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부여하십니다. 십자가를 믿는 이들은 주님 안에서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살게 됩니다. 십자가는 죄의 권세로부터의 구원이 진보된 경험, 점진적 경험이 아닙니다. 성경은 신앙에 입문해서 점진적 신앙 성숙에 도달해야만 십자가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십자가를 토대로 삶을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단번에 이루어진 사건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신앙 생활에서 경험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의 친교가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됩니다.

1. 죄에 대하여 죽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를 죄에 대한 죽음으로 이끕니다. 로마서 6:2,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2).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죄에 대해서 죽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의지나 결심으로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만약 스스로 죄에 대하여 죽기로 결심해 본 적이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며, 아무 쓸모 없는 일인지 경험적으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죽어보고자 애를 쓰면 쓸수록 죄는 더욱 살아나는 경험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이를 악물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지 생각해지만 그것은 길어야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맙니다. 성질 내지 말아야지, 분을 품지 말아야지, 이제는 성도답게 살아 보아야지...어떤 선한 결심과 의지도 허무하게 쓰러집니다. 세월이 약이려니 생각해 보지만 10년, 20년 신앙 생활 한 사람을 보아도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을 볼 때 이것은 별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생각하고 승리의 삶, 거룩을 추구하는 마음을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내가 죄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죄는 법이기 때문입니다(롬7:25). 죄는 권세가 있습니다. 죄 가운데 살고 싶지 않지만 여전히 그 가운데 사는 것은 죄의 속박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죄의 사람입니다(살후2:3). 율법은 죄의 힘입니다(고전15:56).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 내 안에는 죄의 법이 있어서(롬7:23) 내 지체 속에 있는 마음의 법과 싸웁니다. 돈과 재물에는 죄의 속임수가 있습니다(히3:13). 우리는 전에 오랫동안 죄의 종이었습니다(롬6:17,20). 우리의 몸은 죄의 몸입니다(롬6:6). 그래서 죄의 쾌락을 즐기고자 합니다(히11:25).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며, 경향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죄에 대해서 죽는 것뿐입니다. 죄에 대해서 죽는다면 죄와의 관계는 단절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죄에 대해서 죽으라.”, “이렇게 하면 죽게 된다”, “죄에 대하여 죽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노력해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다고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롬6:2)라며 이미 기정 사실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모든 거짓과 사기 행각은 사실을 왜곡하고 가리는 속임수에서 출발합니다. 사기꾼들은 사실을 가린 다음 요령과 방법을 가르쳐 주고 대가를 요구합니다. 마귀 역시 속임수와 기만의 대가인지라 늘 진리를 가린 다음 방법을 제시해 줍니다. 죄에 대해 이미 죽은 우리에게 죄에 대해서 죽는 법에 대해서 설교하고, 죄에 대해서 죽으라고 명령하고, 죄에 대해서 죽기 위해선 오랜 시간, 오랜 신앙 연륜과 체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등입니다. 이는 복역을 마친 죄수에게 빨리 감옥을 나가는 법을 설교하는 것이나 제대한 군인에게 전역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에 대해 죽은 사실’을 선포하고,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10, [이는 그분께서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하여 단 한 번 죽으신 것이요, 그분께서 살아 계신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신 것이기 때문이니](롬6:10). 신앙이란 주님의 인격, 주님의 권능, 주님의 경험, 주님이 하신 모든 사역을 나의 자원으로 삼는 것입니다. 당연히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십자가는 나에게 구원의 능력도 죄 사함의 능력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는 참다운 비결은 죄와 싸우는데 있지 않고,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로마서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참으로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바울은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참으로 죽은 자로 여기라(reckon, account)고 했는데 이 단어는 회계학에서 사용되는 말입니다. 장부에 그렇게 기입하라는 것입니다. 죽지도 않았는데 죽었다고 기입한다면 문서 위조이며, 거짓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어떻게 죽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죽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됩니다. 이것은 죽은 체 가장하는 것도 아니고, 죽음을 흉내내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입니다. 나의 호적 기록부에 ‘죽었음’이라고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는 예수 그리스도란 근거 없이 흉내를 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행전 19:13-15, [그때에 떠돌아다니는 유대인들 가운데 마귀를 내쫓는다 하는 자들이 자기들도 흉내내어 악한 영들이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이르되, 바울이 선포하는 예수님을 힘입어 우리가 너희에게 엄히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인으로 제사장들 가운데 우두머리인 스게바라 하는 사람에게 아들 일곱이 있어 이들도 그와 같이 하매 그 악한 영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행19:13-15). 흉내를 낸 결과 그들은 참담한 패배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이었고, 제사장이었습니다. 민족적으로나 종교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아 보였지만 참다운 능력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차이는 능력의 유무요, 생명의 유무에 직결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고자 하는 욕망과 소원은 있지만 실제적인 삶의 비결은 무시한 채 경건의 모습을 흉내내고, 모방하고, 가장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이 아무리 기도하고, 금식하고,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한다해도 결코 경건의 능력, 승리의 삶은 경험할 수 없는데, 이는 마치 스게바의 아들들처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믿고 외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십자가의 죽음의 효력이 내 안에서 실제적으로 역사 하는 놀라운 체험을 매 순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전에 8년간 동남아 선교를 하고 고국에 들어온 선교사 부부가 있었습니다. 고국에 돌아와 보니 먹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아파트 한 채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아파트를 청약한 적도 없고, 돈을 낸 적도 없었습니다. 대신 선교사의 장모님이 만약을 대비해서 그들의 이름으로 주택 은행에 청약 통장을 만들어서 몇 년간 예금을 부었고, 그들의 이름으로 아파트를 청약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가족이 살 수 있는 아파트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사랑한 누가 대신해 준 것인데, 그들이 한 것과 같았습니다. 이들이 만약 ‘어머니가 나를 대신해서 해 준 것은 맞지만 내가 한 것은 아니어서 양심에 걸린다. 이 집에 살지만 뭔가 껄끄럽다. 은행에서 차압이 들어올까 겁이 난다.’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어머님이 제공해 준 것을 받는 순간 어머니가 그동안 한 일은 내가 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 자신의 이름으로 해 준 일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받으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 경건치 아니할 때, 죄인 되었을 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해결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믿는 자들에게는 값없이 주님이 행하신 공로와 모든 것들이 다 우리의 것이 됩니다.

2.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를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본향은 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요일2:15). 세상과 동화되지 말고(롬12:2), 세상과 친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약4: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악한 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은 나를 십자가에 못박고, 나 역시 세상을 못 박은 채 살아갑니다. 현 세상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또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사악함 가운데 있는 것이며](요일5:19). 우리는 세상을 개혁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변화의 세력도 아닙니다. 세상은 모두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생명을 낳습니다. 현 세상에 대해 죽은 우리는 다가올 세상에 대해서 살아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못 박힌 성도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3. 율법에 대해 죽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세 번째 방면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게 되었으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다른 이 곧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킴을 받으신 이와 결혼하게 하려 하심이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하심이라.](롬7:4). 갈라디아서 2:19, [내가 율법을 통하여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고자 함이라.](갈2:19).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사망에 처했습니다. 율법의 요구대로 죽음을 맛보았다면 더 이상 율법은 나에게 아무 것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내가 살아 있을 동안만 나를 정죄할 수 있을 뿐이며, 의무를 부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죽었다면 율법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집니다. 전역한 군인에게 군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들에게는 종의 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은 정죄할 권한도 능력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구약의 율법을 지키려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무효로 만들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죽은 대신 우리는 새로운 생명의 성령의 법에 대해서 살아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죽은 사람은 율법에 대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 때 우리는 자유롭게 됩니다. [진리를 알리니 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저는 한 때 성경을 일주일에 몇 번씩 배우고, 매일 아침 경건의 시간을 가졌지만 도무지 자유를 누리지 못했던 몇 년의 경험이 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죄의 짐이 무거웠고, 구원받은 후에는 율법의 짐이 무거웠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 내가 율법에 대해서 죽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그 안에 굳게 서고 다시는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우리는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고 할례를 행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율법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이유는 율법이 악해서가 아닙니다. 율법 자체는 거룩한 것이며, 좋은 것입니다. 내가 그 율법에 대해서 죽었고, 주님께서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율법의 마침인 죽음이셨기 때문입니다.

4. 자아에 대해 죽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네 번째 방면은 자아에 대한 죽음입니다. 로마서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롬6:6).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옛 사람이 죽었습니다. 옛 사람이란 첫 사람 아담 안에서 물려받은 성품을 지닌 사람을 말합니다. 옛 사람에 속한 본성은 아무리 선하고 의로와 보여도 그것은 더러운 것이며,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일반적으로 이런 진리에 대해서 매우 무지한 것 같습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옛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는 것 같은 현상이 도처에 널리 발생하고 있습니다. 나의 옛 사람이 죽었다면 나는 결코 자신의 성품을 개선하거나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 죽은 시체에 염을 하고 화장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시체는 어디까지나 시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 페인트를 바르고, 좋은 옷을 입혀도 관에 누워 있다면 시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죽은 시신이 갈 곳은 관이며, 화장터이거나 무덤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 대해서 분명하게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만큼이나 귀중한 진리는 나 역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될 것입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전에 우리 나라는 사형수들을 뽑아서 모두 사망 신고를 하고, 주민등록 번호를 지우고 북파 공작원을 양성해서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도망을 쳐서 사회로 나와도 자신이 이미 죽은 것으로 처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회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을 수도 없었지만 반대로 사회에 어떤 악을 행해도 문제를 삼을 수 없었습니다. 살인을 하고 증거를 남겨도 이미 그는 법적으로 호적에 죽은 사람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경찰은 수사할 길도, 잡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수를 해도 처벌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이미 그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설치다가 잡히면 항상 남파 간첩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인의 피부와 혈통이고, 한국에 대해서 잘 아는데 한국인은 아니었기 때문에 ‘너는 북에서 넘어온 간첩이구나’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담 안에서는 더 이상 족보와 신상 기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행한 모든 기록들을 다 십자가에서 말소해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행한 죄악들만 지우신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의 이름, 존재 그 자체를 지워 버리셨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여러분의 신상 명세서를 떼기 위해 저 하늘에 간다면 여러분이 거듭난 날 사망기록과 출생 기록이 동시에 기재되어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윤성목 -1968년 7월 17일 출생, 1987년 5월 *일 11시 사망, 1987년 5월 *일 출생 -현재 생존. 이런 기록을 볼 것입니다. [손으로 쓴 규례들 곧 우리를 대적하고 반대하는 규례들을 지우시고 그것들을 길에서 취하사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으시고](골2: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이 진리를 알고 있습니까? 아직도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죽음에 처해졌고, 이미 장사지낸 바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 안에 있던 나는 죽었고,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진 나는 살아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이런 영적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사실을 알고 믿을 때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거룩함과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24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육신과 함께 그 애착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저는 오늘 십자가의 죽음이 곧 생명을 얻는 길이며, 죽음이 승리의 길이요, 죽음이 곧 자유를 얻는 길이여, 죽음이 새 사람이 되는 길임을 증거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4가지 방면으로 우리가 어떻게 죽었으며, 무엇에 대해 죽었는가? 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죽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죽이려 하지 말고, 죄에 대해 이미 죽었음을 선포하고, 세상에 대해서 죽었음을 인식하고, 율법에 대해서, 나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여김으로써 율법적이고, 자기 힘으로써가 아닌 참다운 생명과 권능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자원은 바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한없이 공급되고 있습니다. 그분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란 사실을 인식하고, 믿읍시다.

이 사실을 여러분이 모두 깊이 정확하게 알고, 그렇게 여길 때 우리는 죄에 대해 투쟁하는 삶이 아니라 죄에 대해 해방된 삶을 살 것이며, 율법에 대해 자유로운 삶을 살 것이며,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 것이며,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 걷게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예화) 박 하사 이야기/ 실화임. 인도의 카스트 제도, 남부의 노예들.

역설의 진리! 나는 분명 죽었으나 살아 있습니다. 이 진리에 대해 다음 시간에 계속 다루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십자가의 죽음은 신앙의 정점에 도달해야 할 진리가 아니라 신앙의 밑바탕이요, 출발선입니다. 십자가는 점진적 경험이나 체험이 아니라 단번에 일어나 사건임을 명심하십시오. 나의 어떠함이 나를 결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갈보리 언덕에서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나의 나된 것이 결정됩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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