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바른 해석은 교회의 바른 성장과 우리의 신앙과 영적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해석에 따른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십자가의 해석을
믿을 때 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죄와 사망을 이긴 죽음이며, 새
생명을 낳는 죽음이요, 세상을 이긴 승리의 죽음이란 사실을
깊이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종교
창시자들이나 위인들처럼 후대의 뛰어난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에 의해서 삶과 죽음이 미화되고 신격화되어
교주로 추앙받고 군림받은 것이 아니라 미리 기록되고
증거된 말씀에 따라 역사 속에서 말씀을 성취하심으로
자신의 삶과 죽음을 친히 스스로 해석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탁월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몇 명은
어부였고, 하나는 세리 출신이었고, 하나는 열혈당원
출신이었고, 하나는 의심많은 도마였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영적 의미나 역사적 의의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슬픔과 두려움 속에서 숨어 지낸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을 인간들이 마음대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해서 신격화되도록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죽음에 대한 바른 영적인 조명과 해석을
주시고, 그 죽음을 통해 이루신 일들을 기록해 두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 성경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두 번째 의의는 “갈보리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해석”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첫 번째 의의는 “미리 예언된
죽음이요,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작정하신 계획된 죽으심”이었음을
공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대언자를 통해서 영으로
말씀을 주시고, 기록하심으로써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의(意義),
죽으심에 대한 의미, 죽음의 참된 해석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의 모든 사건은 후대에
기록하고, 후대의 사가(史家)들이 그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해석은 역사의 승자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술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정당화하기 마련입니다. 만약 십자가의
사건이 미리 예언되고, 기록된 죽음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면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 역시 그런
식으로 의미가 부여되고, 해석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미리 기록된 죽음이었기에 우리는 그 죽음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흔히 십자가 하면
기독교나 교회, 병원의 상징처럼 사용되고 있지만 본래
십자가는 저주와 수치, 모욕의 상징이었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극악한 죄수들에게 내려진 가장 극형의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각 시대별로 각 민족마다 다양한
사형제도가 있습니다. 한국은 수백 년간 참형(목베어 죽이는
것)을 선호했고, 중동 지역은 투석형(돌로 죽이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중국은 끓는 가마솥에 넣어 죽이고, 근대
프랑스에서는 단두대를 만들어 목을 잘라 죽였습니다. 요즘
미국은 전기 의자에 앉혀서 감전시켜 죽입니다. 고대
페니키아에서 유래한 십자가형은 사람을 나무에 메달아
사지에 못을 박아 죽였는데, 가장 잔혹한 살인 방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단두대가 공포의
상징이었듯이 당시의 십자가는 생각만 해도 무섭고 떨리는
가장 수치스런 사형 제도였습니다. 한국에서는
능지처참이라는 사형제도가 있었는데, 죄인의 사지를 여러
마리의 말에 묶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리게 해서 죽인
다음, 그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 각기 네 조각으로 찢어진
사체를 네 개의 성문에 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능지처참’이란
말은 가장 큰 저주와 욕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누가
능지처참을 선포하고, 누가 단두대를 선포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십자가를 선포한다는 것은 이와 비슷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계속해서 이 십자가를
선포했습니다. 주님께서 미리 기록된 말씀대로 죽으셔야
한다면 왜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이 극심한 십자가에서
모욕을 받으며 죽으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가
그런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극심한 죄요, 우리가 그런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계시로 주어진 십자가의 해석이 아닌
어떤 인간적이고 신학적인 해석으로 주어진 십자가는
새생명을 주지 못하며, 죄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구약의
대언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역사적인
사건으로 미리 예언했고, 신약의 사도들은 그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을 선포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조명을 받고, 십자가의 전달자가
된 사람은 단연 바울 사도였습니다. 성령의 계시를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갈보리의 십자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믿을 수 없습니다. 자연인들은 십자가를 어리석게 봅니다. [
이는
십자가를 선포함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고전1:18a)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인간의 지성은 어두워졌고, 인간의 의지는 반역적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조명과 계시 없이 자신의 지성과 세상의
지혜로 갈보리의 십자가를 이해하고 믿는 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말씀과 성령의 빛을
통해 죄인들에게 이 십자가를 계시해 주고 계십니다.
누구라도 빛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햇빛을 이 땅의 모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 동일하게 비추시듯이, 계속해서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시고 계십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마음
문을 열기만 하면 이 빛은 어두운 마음속을 가득 채우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은 계시의 조명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계속되는 조명과 빛 비추임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 까닭은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요,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 까닭은
이러한 것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받아들이지 않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면
영생을 얻습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입니까? 첫째,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
이는 십자가를 선포함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되기 때문이라.](고전1:18).
십자가는 세상 종교나 철학처럼 아주 깊고 높은 형이상학적
용어가 아닙니다. 평범한 민초들이 일상적으로 듣고 보는
사형제도이며, 사형 틀입니다. 그렇다고 깊은 깨달음이
있거나 수행을 통해 도달해야 얻을 수 있는 그런 고상한
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듣기 거북한 단어입니다. 단두대,
능지처참, 총살, 참수형과 같은 부류의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교양과 지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은 너무나 하찮은 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선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내가 바로 그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마땅한 죄인이란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존심과 긍지, 존엄성과 품위를 모독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선포한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죄인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에 처형하셨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의
죄인 됨, 나를 향해 정하신 하나님의 형벌을 다 받아들이는
것이며, 나를 대신한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는 분명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때문이라. /그분은/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고전1:23).
이왕이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그리스도를
선포하거나 병자를 일으킨 그리스도, 죽은 나사로를 일으킨
그리스도를 선포한다면 얼마나 멋있어 보이겠습니까?
그러나 바울 사도는 3년 반 동안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신
가운데 가장 큰 실패로 보이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했습니다. 십자가란 이야기만 나와도
유대인들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는 수치와 모욕, 고난,
입에 담기에 부끄럽고 거북한 주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따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신명기 21:23, [
그 시체를
밤새도록 나무 위에 두지 말고 반드시 그 날에 그를 묻어서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상속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지니
(이는 나무에 달린 자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는데, 그 저주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말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요, 성경에 무지를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저주를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이해하는 십자가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였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저주는 우리를 대신한
저주였습니다. 베드로가 [
너희가 나무
위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시고](행5:30)라며 역사적 사건을
증거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저주가 아니라
우리를 대신한 저주였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 신명기 21:23을 이렇게 해석해 주셨습니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대속(代贖)하셨으니
이는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는 다 저주받은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이를 안다면 십자가는 더 이상
유대인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저주가 되신 이유는 우리의 죄들을 지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24에 이르기를, [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벧전2:24).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기보다는 표적을 구했는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표적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바로 이사야 7:14에 예언된
표적이었습니다. 이사야 7:14, [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천사들은 들판에 있는 목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며 [
너희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 되리라, 하매](눅2:12)라고
증거했습니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유대인이라면 이
말을 금방 알아들을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하나님이 주신 표적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32-3, [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어떤 죽음으로 죽을 것인지
표적으로 보여 주신 것이라.](요12:32-3). 주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표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의 죽음은 구약을 성취하는 가장 위대한
표적이었습니다. 부활 역시 표적이었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요나의 표적에 비유하셨습니다. 십자가와 장사지낸 바 된 것,
부활 전체는 유대인들이 구하는 표적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표적을 구했으나
갈보리의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가장 큰
표적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구했지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권능이요,
지혜가 됨을 알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로부터 주어진 십자가의 계시를 받았던 바울은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음이라.](고전2:2).
우리도 이 시간 동일한 결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이
정하신 범위를 넘어서 지혜와 지식을 추구하다 범죄
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의 실과를
탐함으로써 범죄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가장 혐오스럽고,
무식한 십자가의 나무로 치유하셨습니다. 어리석다고
여겨지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죄악의 권세로부터
구원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세상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연약함 가운데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의 약함이 인간의 강함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지혜입니다. [
그러나
우리가 완전한 자들 가운데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것은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아무 쓸모 없는 이 세상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며 오직 신비에 쌓인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6-8).
헬라인들은 철학을 추구하고, 늘 새로운 것에 귀를 기울이며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런 지혜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요, 감추어진 지혜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와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연관 관계가
있으며, 영적 역사적 의의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밝혀
놓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1:11-12절을 보겠습니다. [
형제들아,
오직 내가 너희에게 확실히 알게 하노니 내가 선포한 복음은
사람을 따라 난 것이 아니니라. 이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1-12). 하나님은
자신을 따라 다니던 12제자가 아니라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를 배척하고,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조했던 히브리의 한
열혈 청년을 통해 십자가를 계시하심으로써 십자가의
해석이 결코 인간적이거나 우호적이거나 편견에 따른
해석이 아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은 그분의
죽음이 구약의 대언자들에 의해 미리 예언된 메시야의
죽음이란 사실을 선포했다면,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본질적
의미와 그 십자가의 믿음의 효력이 우리에게 미치는 신학적,
영적 의미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바 십자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도 아니요,
사람들로부터 배운 가르침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계시로 주어진 것이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따라 죽으심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해석해 주심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죽음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선명하게 믿고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바울 사도를 통해
계시로 주어진 십자가의 복음을 읽는다면 “십자가의 말씀”은
바울에게 그러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바울이 깨달았던 것을 우리 역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사울을 바울로 바꾸었듯이,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안에서 새 사람을 만들며,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이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바른 조명과 계시를
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도록 지식의 교만을 폐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됩니다. 자연인들과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는 미련하고 걸려 넘어지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계시로 주어지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세상 지혜를 폐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때 더욱더 우리의 영광이 됩니다.
계시로 주어진 십자가의
해석을 몇 가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상의
증거입니다(롬5:8).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할 수 있는 많은 일들 가운데 하나를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가장 귀한 것 한 가지를 주셨는데 이는
전부를 주신 것과 같습니다. 아직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롬5:8). 갈보리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 제시된 곳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싶다면, 그런 사랑을 체험하고, 느끼고
싶다면 갈보리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만 눈물이 없고,
뜨거운 감정이 없다면 갈보리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를 사랑하시냐고 물어 볼
필요도, 의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 이상의 큰 증거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면
할수록 나를 향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부은바 된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사랑의 대상을 알고, 사랑받는다는
사실보다 더 큰 힘이 어디 있겠습니까?
둘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가장 큰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를 미워하시고, 심판하시는
의로우신 성품을 드러내셨습니다. 로마서 3:25은 [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사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려
하심이요,](롬3:25). 모든 사람은 다 죄로 인해,
하나님을 향한 반역으로 인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의
모든 죄와 불의, 불법에 대해 심판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충족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으며,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의입니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 당당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의를 통해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합니다.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고, 죄 가운데 깊이
연루된 자라 해도 십자가를 바라볼수록 우리는 더 큰 은혜를
알게 됩니다. 나의 죄를 깨끗케 하시고, 나의 모든 더러움을
씻어 낸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가장 큰 증거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놀라운
증가를 이룹니다. 하나님은 한 아들밖에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해 계속되는 생명의 역사로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한 수많은 아들들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새로이 지음 받은 많은
아들들을 얻게 되었습니다(벧전2:9).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죄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마귀의 권세 아래 있던 사람들을 이끌어 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을 삼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크게 증대되었습니다.
넷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믿는 자들에게 권능과 지혜가 됩니다. 흔히 하나님의 권능(power)이라고 하면 기적을
일으키거나 병을 고치거나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그런 것이 하나님의 권능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권능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복음, 십자가 선포, 그리스도입니다. 이 셋은
모두 십자가가 중심입니다. 복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로마서 1:16, [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이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로다.](롬1:16).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
이는
십자가를 선포함이 ....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되기 때문이라.](고전1:18).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에게나 그리스인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요, 하나님의 지혜이시니](고전1:24).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나서 능력있는 삶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이지만 그곳은 생명과 권능과
승리의 장소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발원지이며, 능력의 공급처이며, 승리를
선포한 승전지입니다.
다섯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십자가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순종의 가장
완벽한 표현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향한 순종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신앙 생활이 믿음과
순종의 양 축으로 걸어가게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전파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로 생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을 때 그것은 나의 십자가가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 속에서 작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거룩함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단순히 십자가의 죽음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십자가의 생명을 취해야 합니다. 세상과 죄에 대해서 자아에
대해서는 죽은 것으로 여기지만 십자가의 정신 속에서 매일
살아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시며](벧전2:23). 이것이 어린양의
발자취이며,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 준 본입니다. 이런
생활은 이를 악물고, 투쟁과 금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를 내 안에 가져 와서 자연스럽게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일생을 산 삶의 원리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삼는 것이 신앙 생활의 첫 걸음이요, 그분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그분이 맞으신 채찍과 고난을 나의
것으로 삼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인간사에서 육신의 생명이든 영적인
생명이든 모든 생명은 대속의 원리로만 살 수 있습니다.
내가 가죽옷을 입고 있다면 무엇인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고기를 먹고 있다면 그 역시 무엇인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죽어야 나는 먹을 수 있고, 나는 입을 수
있습니다. 짐승의 가죽과 고기는 우리를 위해 죽은 것이며,
내가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점에서 나를 대신해 죽은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대속의 원칙에서만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영적인 생명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
역시 죽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영적 생명은 양과 염소, 소와
같은 짐승의 죽음으로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순결하고
흠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우리의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으셨고,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약 2000년
전에 갈보리 언덕에서 죽으신 주님의 죽음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죽음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참된 해석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