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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예언된 죽음



우리는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묵상과 경건의 시간에 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먼저 오고, 그 믿음의 말씀에 따라 성령의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납니다. 믿음이 없을 때 우리가 듣고, 읽고, 배우는 성경의 진리는 단지 개념(idea)에 지나지 않습니다. 개념은 지적 이해를 주지만 생명과 능력을 주지 않습니다. 이는 법조문을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법을 더 잘 지키는 것이 아닌 것처럼, 기독교의 교리에 더 깊은 인식과 이해를 가졌다고 해서 더 성경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 방면에 무지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범죄를 짓는 것을 자주 봅니다. 세법에 관한 전문가들인 회계사나 세무사들은 세법에 무지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지능적으로 탈세를 저지르며, 탈세하는 방법을 절세(折稅)라고 하며 방법을 가르쳐 주고, 돈을 벌어먹습니다. 세법에 대한 깊은 지식과 이해가 ‘세법을 잘 지켜야지!’ 하는 선한 양심이나 세법을 지킬 능력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변호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곳에 큰 사건이 터지면 경찰이나 검찰은 먼저 그 방면의 전문가들을 제 1차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수사를 합니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다 자신이 배운 지식을 이용해서 악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신학적 지식에 정통한 신자들이라 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더 깊은 믿음을 가진 것이 결코 아니며, 그들의 지식이 결코 죄를 이기는 삶의 능력이 되지 못하며, 악을 물리치는 힘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교회 내에 만연한 목회자들의 비리나 불륜, 사기 행각 등은 그들의 성경에 대한 지식이 믿음으로 마음 가운데 얻은 지식이 아니라 단지 머리로, 개념으로 익힌 지식으로써 삶과는 얼마나 무관한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도 성경에 대한 각종 용어의 개념으로 만도 얼마든지 설교할 수 있고, 책에서 읽고 배운 지식만으로도 얼마든지 성경을 가르칠 수 있고, 삶에 대해 강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배운 신학적 용어와 개념들, 성경에 대한 이해는 결코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들을 때 이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두려움 가운데 말씀을 듣고 배우며, 믿음으로 결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때로 성경 공부를 거의 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훌륭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을 볼 수 있고, 많은 열매를 거둔 신앙인들의 간증을 들을 수 있습니다. (글자를 모르는 문맹의 할머니가 지닌 믿음, etc...). 반면 성경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위선과 거짓, 비성경적인 행위들을 목격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현상으로 인해 영적 생활을 잘하기 위해서 성경을 공부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극단적인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법을 몰라도 법대로 사는 선량한 시민이 있고, 법을 잘 알아도 법을 이용해 먹고 범죄하는 법조인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법학이 필요없고, 법학대가 필요없고, 법률가들이 필요없고, 법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세상 공부와 달리 성경 공부는 ‘지적인 공부’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성경 공부는 지성과 이성, 감성을 자극하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마음과 영을 깨우치는 참된 믿음의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에드워드 힐스 박사는 ‘성경은 믿음으로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참으로 진리입니다.

참된 기독교인은 모두 십자가 정신으로 산 사람들이며, 십자가 정신을 몸소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을 삶의 요체로 삼고, 평생의 신조로 삼는다면 누구나 위대한 희생, 위대한 사랑을 실천한 사람의 삶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주님과 주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믿을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영적 사실이며,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믿을 때 ‘사실’(fact)은 우리의 체험이 되고, 열매가 되며, 능력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설교를 듣고, 그 사실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상 십자가의 죽음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듯 합니다. 너무나 자주 들었기 때문에 평범한 십자가에 관한 설교는 더 이상 성도들의 관심을 끌 수 없는 주제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대한 깊은 이해와 믿음이 없을 때, 십자가의 원리로 사는 삶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성도들이 오직 십자가를 바르게 이해할 때에만 영적 권위와 생명력이 충족되며, 성경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진리입니다. 갈보리 십자가야말로 이 시대에 교회에서 붙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범죄를 처리하는 종결점이며, 옛 사람을 처리하는 종결점입니다. 십자가는 새로운 생명의 출발점이며, 탄생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시고, 숨을 거두신 곳은 안락한 병원이 아니라 갈보리 동산의 험한 십자가였습니다.

저는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나무는 자신이 서 있는 그곳이 바로 자신의 무덤입니다. 자신의 뿌리가 있는 그곳, 생명의 탄생이 있는 바로 그곳에 자신의 동류의 무엇인가가 묻혔고, 죽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를 생명의 발원지로 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 대신 저주가 되셔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이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이 일을 하심으로서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예언의 말씀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계획하셨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청중들을 대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과 미리 아심을 통하여 넘겨졌거늘 너희가 그분을 붙잡아 사악한 손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나](행2:23).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핵심은 미리 예언된 죽음이요,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대언자들은 자신들이 보지 못한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늘 탐구했습니다.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있게 될 영광을 미리 증거해 주실 때에 /그것들이/ 무엇을 혹은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 탐구하였느니라.](벧전1:11). 미리 기록된 예언의 말씀이 없다면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영감으로 주신 예언의 말씀이 성취될 때 우리는 믿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대언자는 메시야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을 주면서, 사람들이 이런 사실들을 과연 믿을 수 있겠는가? 생각하며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53:1).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이 일은 창세로부터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고, 계획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살인자들 앞에서 그분의 죽음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른 죽음’이었음을 반복적으로 증거했고, 철저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모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주}의 거룩한 아이 예수님을 대적하였음이오니 /이것은/ 무엇이든지 주의 손과 주의 계획이 미리 작정하사 이루고자 하신 것을 다 행하고자 함이니이다.](행4:27-28). 십자가의 죽음의 첫 번째 의의는 바로 예언된 죽음,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중심을 바로 이 갈보리에 두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이루셨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앞선 과거의 역사뿐만 아니라 현재와 다가올 미래의 모든 역사에 중심이요, 축입니다. 왜냐하면 하늘로 구원받은 자들도 보좌의 중심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이 다 그에게 경배하리니 곧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라.](계13:8).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700년 전에 이미 대언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그분의 죽음에 대해 한 편의 그림같은 서사시를 썼는데, 막상 주님이 예언대로 죽으셨을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아무도 그 죽음이 미리 예언된 죽음이요,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시편과 대언자들과 율법을 통해 갈보리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홍수같은 예언의 빛을 쏟아 부으셨지만 이 예언의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언자 이사야는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53:1)고 반복해서 묻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매주 회당에서 성경을 읽었지만 이 구절이 설마 메시야를 가리키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메시야에 대한 사상과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메시야의 고난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영광의 주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계시와 조명이 없이 인간들의 사고와 철학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십자가를 선포함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되기 때문이라.](고전1:18).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때문이라. /그분은/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고전1:23). 십자가는 유대인들도 이해하지 못했고, 그리스인들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아담 이후의 인류 역사는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는 역사였지만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미리 기록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룬 죽음은 바로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뿐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이는 그가 주 앞에서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것임이라. 그에게 /고운/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사53:2). 이런 모습으로 인해 예수님은 더욱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외모로 사람을 끌어당길 만한 매력은 없습니다. 십자가 역시 고운 모양도 우아함도 없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십자가는 사람들이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치는 잔악한 형틀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십자가에 대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의 피가 식을 정도로 오싹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시인 키케로는 ‘로마에서 십자가를 영원히 없애 버리자’고 연설했을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무서운 저주와 혐오의 대상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 역시 그런 모습으로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는 멸시를 당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우리는 그를 피하려는 것같이 우리의 얼굴을 감추었으니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3). 사람을 지으신 창조주께서 지은바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슬픔의 사람이었고, 고통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형 집행 제도는 가죽 채찍으로 온몸을 때리는 것인데 주님은 70대를 맞으셨습니다. 주님은 이런 목적으로 태어났습니다. 이사야는 주님이 슬픔과 고난을 당하시는 과정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했음을 보여 줍니다.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고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내어 주고 머리털을 뽑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어 주며 수치와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도다. 이는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실 터인즉 내가 당황하지 아니할 것임이라. 그러므로 내가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정하였으니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사50:5-7).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굳게 정하셨던 주님은 자신을 위해 기록된 말씀대로 고통과 슬픔과 모욕을 그대로 받아 들이셨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고통의 원인과 목적에 대해서 의심의 여지를 두지 않습니다. 대속이란 신학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고난의 의미가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는 참으로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찔림을 받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 당한다, 하였노라. 그러나 그가 찔림은 우리의 범죄들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불법들로 인함이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주님은 죽으시기 전에 ‘창에 찔리시고, 상하시고, 징벌을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대언자 이사야를 통해 앞으로 당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이유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로마 병정의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신 것은 우리의 범죄들로 인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범죄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찔림과 아무런 상관 관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십자가와 인류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란 사실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합니다.

간단한 예로, 히틀러의 광기가 독일은 물론이고 유럽, 전 세계에 미친 함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나찌가 유대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역사를 바꾸는 일은 흔히 있습니다. 이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람의 운명과 직접적인 연관 관계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그분의 작품이요, 그분을 대적하여 범죄했고, 그분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 사실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믿든 믿지 않든, 알든 모르든 간에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요, 진리입니다. 때로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부정하고 싶다고 해도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주님은 가상의 세계, 영적 세계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과 물리적 세계에서의 엄연히 실재하는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분의 몸에 찔림과 상함, 징벌과 채찍을 주셨고 죽음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범죄는 주님의 찔리심으로 인해 해결되었습니다. 우리의 불법은 주님의 상함으로 인해 해결되었습니다. 우리의 화평은 주님이 받으신 징벌로 해결되었습니다. 우리의 병든 영혼은 주님이 채찍에 맞으신 것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정신을 강조하면서 그 희생과 사랑을 강조하다 정작 주님이 몸으로 행하신 일들이 주는 효능과 역사하심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죄 문제는 기독교 정신으로, 예를 들어 사랑과 봉사, 희생 정신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죄와 죽음의 문제는 오직 주님이 몸으로 당하신 갈보리 십자가를 믿음으로만 해결됩니다. 갈보리의 십자가 없는 십자가 정신은 헛된 망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당한 형벌, 죽음에 대한 믿음과 수용없이 희생과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눈에 가증스런 일에 불과합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먼 미래에 한 역사적 시점에 이루어질 일을 기술하지만 어느 때, 언제 일어날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언의 실체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우리는 다(all)" 양 같습니다. 예외없는 전부(all)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각각 자기 길로 떠나 버렸습니다. 양 같다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닙니다. 양은 지독한 근시여서 멀리 볼 수 없습니다. 양은 공격용 뿔이나 날카로운 발톱이 없어서 자기 한 몸을 지키지 못합니다. 모든 짐승들은 자신이 먹어야 할 것 먹지 말아야 할 것들을 구분할 능력이 있지만 양은 좋은 풀과 독초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양은 앞발이 짧아서 구르거나 넘어지기를 잘하는데 스스로 잘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양은 고집이 세고, 자기 길로 가기를 잘합니다. 인간의 모습은 짐승들 가운데 비교하면 양과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구원받기 전의 모든 성도들이 길잃은 양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너희가 전에는 길 잃은 양 같았으나 지금은 너희 혼의 목자요 감독이신 분에게 돌아왔음이니라.](벧전2:25).

하나님은 우리 모두(all)의 불법을 주님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우리 모두(all)란 말은 죄의 저주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가 학대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였어도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도살장으로 향하는 어린양같이 끌려가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감옥에도 가지 못하고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밝히 드러내리요? 이는 그가 산 자들의 땅에서 끊어졌으며 내 백성의 범죄로 인하여 매를 맞았음이라. 그가 사악한 자들과 더불어 자기 무덤을 만들었으며 죽어서는 부자와 함께하였으니 이는 그가 폭력을 행사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속임수가 없었음이라.](7-9). 주님은 도살장으로 향하는 어린 양과 같았습니다. 고난과 학대를 당하였어도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감옥에 갇히지도 공정한 재판도 받아 보지 못한 채 십자가 형이 확정되고 바로 집행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갈보리 십자가를 앞에 두고 문자 그대로 남김없이 성취되었습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을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장사 방법도 예언했습니다. 주님은 좌, 우편에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며 죽어서는 공회원이요, 바리새인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의 묘실에 장사되심으로써 이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주님은 다시 한번 자신의 죽음이 내 백성의 범죄로 인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그가 산 자들의 땅에서 끊어졌으며 내 백성의 범죄로 인하여 매를 맞았음이라.]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성경은 모든 사람들의 죽음은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죄란 자기가 지은 죄입니다. 하지만 한 분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관한 증언에서만 ‘내 백성의 범죄로 인하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가 상함 받는 것을 기뻐하사 고통을 받게 하셨은즉 주께서 그의 혼을 죄로 인한 헌물로 삼으실 때에 그가 자기 씨를 보며 자기 날들을 길게 할 것이요, 또 [주]의 기뻐하시는 일이 그의 손에서 형통할 것이며](10).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죄로 인한 헌물로 삼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사랑하는 외 아들 이삭을 어린 양으로 바쳤는데, “주님께서 자신을 어린 양으로 준비하실 것이란 사실”(창22:8)을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준비된 양이 이제 역사 한 가운데 오셔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자신을 어린 양으로 드리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성취요, 신약이 발효되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성전에서 날마다 드리는 희생물을 통해 다가올 모형을 예고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모형의 실체의 한 몸을 예비하시고, 그 혼을 죄 헌물로 삼으심으로 죄를 위한 헌물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흠없고 순전한 어린양을 준비하셨는데, 누구든지 십자가에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또 다른 측면, 즉 그 열매를 보십시오. [그가 자기 혼이 해산의 고통을 치른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기리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리니 이는 그가 그들의 불법들을 담당할 것임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로 하여금 위대한 자들과 몫을 나누게 하며 강한 자들과 노략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혼을 쏟아 부어 죽기까지 하며 범죄자들과 함께 계수(計數)되었음이니라.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들을 위하여 중보(仲保)하였느니라.](11-12).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한 속죄를 만족하게 여기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진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십니다. 주님은 의롭게 된 자들의 불법들을 모두 담당하셨습니다. 몫을 나누고, 노략한 것을 나눈다는 말은 마귀의 권세 아래 있던 자들을 노략하며 아브라함의 품에 있던 모든 성도들을 이끌어 올리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혼을 쏟아 부어 죽으셨으므로 영광스런 전리품을 취할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십자가의 승리를 통해 주님이 얻으신 전리품들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강한 자들을 물리치고 승리한 위대한 사건입니다. 주님이 패배하신 곳같은 갈보리 십자가는 패배의 장소가 아니라 위대한 승리의 장소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곳이 승리의 장소였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정사(政事)들과 권능들을 노략하사 십자가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골2:15). 십자가의 죽음은 마귀를 멸하고, 마귀의 속박 아래 있는 자들을 건져내는 승리였습니다. 히브리서 2:15, [자녀들은 살과 피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에 참여하셨으니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히2:15). 갈보리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승리의 원동력을 제공해 줍니다. 주님은 범죄자로 계수 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들을 위하여 중보하셨습니다. 

본문의 이 기록은 성령께서 빌립을 통해 광야에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이디오피아 내시를 구원하는 본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내시의 마차에 동승한 빌립은 내시가 읽고 있는 이 본문을 통해 미리 예언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증거 함으로써 혼을 구원했습니다. 이사야는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씀했습니다. 주님이 친히 증거 하시기를, [이것들은 이사야가 그분의 영광을 보고 그분을 가리켜 말하였을 때에 이른 것이라.](요12:41) 하셨습니다.

이 시간 모든 성도들이 미리 예언된 십자가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깊이 묵상함으로써 내 안에서 십자가의 진리가 능력있게 살아 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몸으로 당하신 고난과 죽음이 나의 영혼에 평안과 힘과 위로가 되며, 세상과 죄를 이기는 능력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요약하면 ‘십자가는 예언적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미리 기록되고, 예언되어 있음으로 인해 그 사건의 역사적 의의와 영적 의의가 밝히 드러난 것입니다. 예언된 사건이기에 후대에 사가(史家)들이나 사람들이 함부로 사건을 왜곡하거나, 신격화하기 위해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 의미를 약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확실한 믿음의 근거는 바로 눈으로 보기 전에 눈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이 예언되고, 그것이 그대로 역사의 현장에서 발생할 때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십자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의 근거를 정립하고, 흔들림 없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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