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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나니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흘려 죽으셨다.’와 같이 단순하게 진술될 수 있지만, 우리에게 더욱 값진 복음은 ‘나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나의 죄만 해결한 것이 아니라 죄의 몸된 ‘나 자신’을 처리하시고 해결했다는데 더 큰 의의가 있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는 마약 단속을 하면서 마약 공장이나 마약 재배지를 그냥 둘 수는 없습니다. 금주령을 내리면서 술병을 깨고, 술집을 없애면서 술 공장을 그냥 둘 수는 더욱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의 죄를 처리하시는 동시에 우리의 죄된 몸, 즉 우리의 자아를 처리하지 않으시고 그냥 둘 수 없습니다. 나의 자아는 죄를 무한대로 생산하는 공장과 같습니다. 모든 불법과 불의는 하나님이 아닌 바로 ‘나’란 자아 중심적인 생각과 추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는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1972년 여름 필리핀 정글에서 원시인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알고 보니 일본군 탈영병이었던 요코이였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난 줄 모르고 28년 동안 숨어 지냈습니다. 비행기에서 살포된 삐라에는 전쟁이 이미 끝났으니 항복하고 나오라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답니다. 그러나 이 군인은 미군들이 회유하기 위한 공작이라고 판단하고 더 깊이 밀림으로 들어갔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을 피해서 잡히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서 더 깊이 더 깊이 밀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28년을 짐승과 똑같이 살았다는 겁니다. 그는 전쟁이 끝났다는 복음을 들었음에도 그것을 믿지 않았고 평생 그 소식에서 도망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이곳은 지금은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의 체험은 성경의 말씀과는 너무나 반대로 나가게 되고,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날은 자기란 말이 얼마나 유행하는 시대인지 모릅니다. 자기 자랑, 자기 연민, 자기 영광, 자기 만족, 자기 학대, 자기 높이기(자존), 자기 방어, 자기 의, 자애(자기 사랑), 자기 확신 ...etc. 자기(self)란 말 뒤에는 거의 모든 단어가 다 합성될 수 있습니다. ‘나의...’란 말 뒤에 무엇이 붙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은 ‘나의...’란 말 뒤에 붙어야만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를 처리하는 동시에 죄인된 나(self)를 처리하는 십자가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이 진리를 선포할 수 있고, 증거할 수 있게 됨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에 대해서 죽었고, 율법에 대해서 죽었고, 세상에 대해서 못 박혔으며, 우리의 옛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조명해 보았습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우리는 그 죽음이 어떤 죽음인지, 나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서 끝없이 탐구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모든 생명과 능력의 비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영적이고 정신적 분야만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물리적으로 우리의 전인격적인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 안에 역사하던 죄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고,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하셨으며, 내 안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심으로 이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새 사람을 입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모든 원리를 다 알고, 이해하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유의 효능과 효과나 성분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해도 그것이 건강에 좋다는 말을 듣고, 믿기 때문에 마시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반면 지금까지 잘 먹던 음식도 누가 그것은 몸에 좋지 않는 것이라고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 우리는 그 이유나 원리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믿기 때문에 다음부터는 먹지 않습니다. 이와같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성경의 진리들에 대해서 성경적 지식이 부족하다 해도 그것을 믿고 구원을 누리고, 신실하게 교회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 능력이 없고, 거짓에 쉽게 속거나 당합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자신이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십자가의 대속의 진리는 무엇인지, 나의 현 상태는 어떠한지 성경적 진리를 자세히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진리는 어려운 것도 아니고, 복잡한 것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아주 쉽게 깨달을 수 있는 말씀들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믿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믿음으로 참된 영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며, 복음의 진수를 몸소 체험하고,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주로 ‘우리는’, ‘우리의’라고 말했지만 갈라디아서에서는 주로 ‘나는’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의 성도들이나 갈라디아의 성도들은 오늘 이곳에 있는 저와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만 구원받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매우 정확하고도 간략하게 기술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갈라디아서 2:20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이 말은 갈보리의 구원에 대한 매우 깊은 의미를 가장 단순하고 쉽게 전달한 복음의 진수입니다. 이 말씀을 더 쉽게, 더 빨리 취하면 취할수록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살며,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고 입증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죄와 정욕가운데 사는 자신을 발견하게 마련입니다. 이유는 구원받지 못했거나, 죄사함 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 반드시 필요한 한 가지 진리는 십자가에서 나를 처리해 주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며, 그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자기 중심적인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을 자기 만족의 수단으로 삼거나 자기 정력으로 할 때, 고통 당할 때의 자기 연민, 사람들이나 친구·친지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자기 추구, 시련의 시기에 흔히 있는 자기 도취나 자기 판단, 다른 사람과의 접촉에서 자기 민감성, 상처받을 때는 자기 방어 본능, 삶의 무게를 느낄 때 드는 자기 염려는 모두 자아(自我)란 본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아(自我)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 때까지 우리의 수고에 대한 영적 열매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때에 구원받은 성도가 더 깊은 구원에의 말씀을 들어야 하며, 한 단계 영적 성장을 이루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죄의 속박으로부터 얻은 자유와 구원 이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선포하는 바울 사도의 놀라운 계시를 접하게 됩니다.

우리는 마땅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 채 주님을 쫓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하는 일이나 나의 재능이나 나의 무엇이 아닌 ‘나’(self)란 본질을 건드리는 말씀입니다. 모든 종교와 철학은 ‘나’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어떠함’-나의 성질, 나의 욕심, 나의 마음...-을 수양하거나 처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어떠함이 문제가 아니라 ‘나’(자아)가 문제이기 때문에 부인하고 십자가에 처리할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아(나)를 주장한 사람들이 항상 문제임을 분명히 제시해 줍니다. 성경적인 몇 가지 예를 보겠습니다.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빌론은 내가 내 권능의 힘으로 건설하여 왕국의 집으로 삼고 내 위엄의 영광으로 삼은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단4:30). 위대한 절대 권력자의 입에서 ‘자아’가 주체임을 외칩니다. 문제는 항상 자아에서 나옵니다. [또 내 혼에게 말하기를, 혼아,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편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 하리라, 하였느니라.](눅12:19). 한 어리석은 부자의 입에서 역시 “나”가 만물의 중심이요, 척도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이렇게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착취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2). 율법에 충실한 종교인 역시 만물의 중심은 자신이었습니다. [이르기를, 너는 너 스스로 서 있고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 이는 내가 너보다 거룩하기 때문이니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하루 종일 타오르는 불이로다](사65:5). 사람들은 ‘나는 너보다 거룩하다’고 주장하며, 비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자기 성찰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네가 이르기를, 나는 부자라. 재산을 불렸으니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계3:17). 이는 자기 만족을 나타내는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을 봅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역시 온통 ‘나’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나는 이 사람에게 속해 있고, 나는 저 사람에게 속해 있다고 주장하며 분쟁을 일으키는 나를 보게 됩니다. [이는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 속하였다, 하고 다른 이는 말하기를, 나는 아볼로에게 속하였다, 하기 때문이니 어찌 너희가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리요?](고전3:4). ‘나’를 부인하고,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자아를 부추깁니다. 처음에 에덴 동산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마귀는 인간의 자아를 자극하고,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삶을 살게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모든 죄의 근본입니다. 마귀는 스스로 ‘나는...’이라며 자기를 주장한 존재입니다. [이는 네가 네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별들 위로 내 왕좌를 높이리라. 또 내가 북쪽의 옆면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내가 구름들이 있는 높은 곳 위로 올라가서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이 되리라, 하였음이라.](사14:13-14). 마귀의 영은 하나님이 아닌 자아를 추구하게 합니다. 마귀가 이러하다 보니 마귀의 자녀들 역시 동일한 영,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반면 주님은 어떻습니까? 끊임없이 자아를 부인하는 삶이셨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내가 내 뜻대로 하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5:30). 주님의 공생애 사역 기간은 자아를 철저히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 삶이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무려 12번에 걸쳐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시며,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니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나...](요7:28).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 말을 하는 줄도 알리라.](요8:28).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8:42). 요12:49, 14:10참조할 것. 주님은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셨지만 모든 일에 철저히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하고,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진 삶을 사셨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이든지 듣는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실 것임이라.](요16:13). 성령은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주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님을 드러내시는 사역만 하십니다. 자기를 추구하는 삶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며,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삶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숨겨둔 욕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그 뜻을 이루어 주시기를 소원하고 구하는 성도들이 있다면 이 시간 십자가에 내려놓으십시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육신과 함께 그 애착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가 십자가에서 처리되어야만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가르침을 주셨는데, 이는 자아의 추구가 자기 완성의 삶이 아닌 철저히 주님 한 분을 의뢰하고 그 안에 거하는 의존적인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이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이는 나 없이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요15:5).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빌4:13). 하나님은 어떤 작은 일에도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행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나에게 ‘자존심’과 ‘자부심’을 가질 것을 가르치지만 하나님은 “나”란 아무 쓸모없으며, 십자가에 못박아 버려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죄없고 순결하신 주님께서도 육신을 입으신 동안에 자신을 의뢰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셨는데,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못박아 버린 자아를 위해 산다는 것은 불신이며, 배교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20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2:20). 성도들이 자주 오해하는 진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나’에 대한 것입니다. 2천년 전에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나의 죄를 처리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의 자아까지 처리하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죄를 짊어지셨고, 동시에 나의 옛 사람을 짊어지셨습니다. 나의 죄가 2천년 전에 갈보리 언덕의 그리스도 위에 올려졌음을 믿는다면, 나 역시 그 때에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도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나 역시 그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원하거나, 기도하거나, 구해서는 안됩니다.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며 이는 소망이나 간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 진리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진리의 지식입니다. 저는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고, 이 진리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히 보여 주실 것을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 사실을 알기 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생활은 매우 인위적이고 자기 힘을 의뢰하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진리를 안 그리스도인들은 오래 전에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도리어 놀라고 말 것입니다. 성경은 반복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선포합니다.

로마서 6:8, [만일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6:8).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함께 살게 됩니다. 디모데후서 2:11, [신실하도다 이 말이여, 이는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것이요,](딤후2:11).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불신자나 다름없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십자가의 영적 능력과 효력을 체험하거나 맛볼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보다 자신을 쳐다봄으로써 진리를 무력화시킵니다.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로부터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늘 어찌하여 세상에 살고 있는 것같이 규례들에 복종하느냐?](골2:20). 우리는 분명히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현재 우리의 생명은 바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에서 살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4,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도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나리라](골3:4). 빌립보서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라.](빌1:21). 저는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믿음의 근거로 삼을 것을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의 도달 목표가 아닙니다. 승리의 삶은 매일 매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한 과정이지 도달점이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현재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지 우리의 목표로, 희망으로 삼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의 비결이지 희망 사항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삶의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내가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과정과 목표를 뒤범벅하지 마십시오. 갈보리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통해 죄인이 의인이 되고, 패배한 자가 승리자가 되고, 부정한 자가 거룩하게 되며, 세속적인 자가 하나님을 추구하며, 땅에 속한 것이 하늘에 속한 것이 되며, 육에 속한 것이 영적인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사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사실을 선포하며 그렇게 믿으면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책을 쓰고, 평생을 설교했던 웟치만 니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죽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애쓰는 것은 참으로 피곤하고 불가능한 일이다.”(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pp144,한국복음서원).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내가 살고, 그리스도께서는 살지 않았지만 구원받은 이후에는 내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저는 구원받은 후에도 오랫동안 죄 가운데 살면서 정말 미치도록 이 진리에 대해서 갈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고, 많은 시간을 기도했고, 그런 분야에 대한 많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승리는 언제나 찰나적 체험이었고 패배는 일상의 생활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더 많은 빛을 주셔서, 빨리 이런 죄악된 생활에서 벗어나서 늘 간증이 넘치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살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주변에 많은 형제들과 목사님들에게 물어 보아도 어느 누구도 제대로 된 조언을 주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지독한 불신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가 구원받은지 10년이 훨씬 넘어서야 이 진리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그동안 제가 빠져 있었던 저의 불신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주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들을 믿지 못하고, 이루어 달라고 구했던 무지를 용서해 주옵소서.”

마귀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 진리에 무지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아를 충동질하고, 유혹하여 십자가의 진리를 믿는 믿음대신 스스로 신앙 생활을 하도록 하게 함으로써 반복적인 실패에 빠지게 만듭니다. 내가 이미 죽었음에도 죽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이미 죽었다는 주님의 말씀을 불신하게 만듭니다. 마귀는 죄의 유혹을 통해 여러분이 언제든지 넘어뜨릴 수 있고, 범죄하게 함으로써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사실이 아님을 확인시키려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죄의 유혹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의 유혹과 육신의 정욕과 세상의 탐심이 더욱 나를 압박합니다. 바로 이때 유혹에 굴복하느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느냐?에 따라 향후 삶의 질과 열매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유혹에 굴복할 때 우리는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고, 다시 마귀의 종노릇을 하지만 믿음으로 설 때 우리는 의의 종으로서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시험의 시간이야 말로, 자신이 죄에 대해서 죽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됩니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는 이제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이 문제를 의탁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알게 하셨습니다.--알라, 알지 못하느냐?

2. 하나님은 그 진리를 여기라고 하셨습니다--여기다(reckon). 여기서 모든 문제가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합니다. 우리의 몸을 누구에게 드리느냐?에 따라 남은 생애가 결정납니다.

3. 하나님은 우리에게 ‘드리라’(yield)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의 종으로,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오늘 우리는 [십자가와 죽음]에 대해서 상고해 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 우리는 [십자가와 삶]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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