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십자가와 세상



오늘은 [십자가와 세상]이란 제목으로 함께 성경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학자요, 목사였던 윌리엄 로(William Law)는 말하기를 “이단들 중의 이단은 세상의 영이다. 오늘날 기독교회의 타락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나는 그 모든 것을 세상적인 영에서 비롯된다고 말해야만 할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교회나 성도를 막론하고 그 교회의 생명력과 영성을 측정하는데는 그들이 세상이란 단어에 대해 얼마나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미워할 줄 알고, 세상에서 미움받는 성도만이 갈보리의 십자가를 경험한 참 성도입니다. 성도들의 영은 세상의 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 영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2).

요한복음 17장을 펴 보십시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를 통해 세상과 성도의 관계에 대해서 일목 요연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①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분리된 존재입니다(6).
② 성도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속한 존재들입니다(14,16).
③ 성도는 세상의 악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으며(15),
④ 이 세상에 남겨졌으며(11),
⑤ 이 세상에 말씀을 전파하도록 보내졌으며(18,20),
⑥ 세상의 미움을 받는 자들(14)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성도들이 세상과 너무나 밀접한 관계요, 우호적인 관계여서 세상을 미워할 줄도 모르고, 미움도 받지 않는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원수들의 친구들이지,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기독교가 공인받기 전에)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온다는 것은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기독교 초기 시대에 누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멸시받고 박해받는 이단 종파에 가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국가에서 금지하는 반 종교 단체의 회원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곧 전과자가 되었다는 의미였으며, 학업과 취업, 공직 사회로 나가는 길을 포기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언제라도 재산의 몰수, 투옥과 죽음이 자신에게 들이닥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로마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에 ‘그는 기독교인이다’란 한 마디는 중세에 ‘그는 마녀다’란 말이나 동일한 말이었고, 일제 시대에 ‘그는 독립군이다.’란 말이나 제3-5공화국 시대에 ‘그는 빨갱이다.’란 말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말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다”란 한 마디는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을 향해 선포되는 사형 선고문과 같았으며, 더 이상 이 세상에 살아서는 안 되는 극악한 범죄자임을 선포하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만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입니다. 때로는 사자 굴에 넣어 죽이고, 돌로 쳐서 죽이고, 칼로 죽이고, 장작더미 위에 묶어서 불로 태워 죽였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오물 취급을 받고, 치워 버려야 할 대상이 된다는 의미였으며,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세상과 기독교인은 결코 서로를 사랑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기독교인이 된다고 해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이익을 거의 받지 않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해서 세상과 화해하거나 일치하거나 동화하거나 사랑하는 일이 용인된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誤算)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겪었던 영적 환경은 물리적으로는 변했을지라도 기본적으로 세상과 성도의 관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며, 그 때 있었던 일들은 언제든지 다시 재현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이런 삶을 의미하는 세상에 산다면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세상을 미워하고, 세상의 미움을 받고 있습니까? 성도들이 세상에 대한 비성경적인 관계성을 갖는 것은 자신이 악한 현 세상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십자가의 피를 통해 구원받은 경험이 없는 성도들은 항상 구원 간증이 애매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어설프며, 신앙이 사상누각(沙上樓閣)입니다. 이런 성도들은 십자가의 의미나 구원의 의미를 전혀 모릅니다. 이들은 신학적으로나 들은 풍월로 구원 교리를 바르게 알 수도 있고 자신은 남들보다 더 많은 성경적 지식과 바른 생활을 한다고 자부할 수도 있지만 그는 분명 주님의 십자가와 보혈에 대해서 어떤 감격도 놀라움도 은혜도 없는 피상적이고 이론적인데 머물러 있습니다. 자신을 대신해 죽으시고, 저주와 형벌을 받으시고, 모욕과 수치를 당하시고, 생명을 주신 분을 만났고, 그분을 영접했는데 이성과 감성과 지성에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것은 그가 종교인일 뿐 결코 구원받은 경험이 없음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은 결코 세상을 미워할 줄 모릅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십자가를 선포하는 대신 거짓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결코 핍박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아직도 할례를 선포한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핍박을 받겠느냐? 그렇다면 십자가의 실족하게 하는 것이 그쳤으리라.](갈5:11).

예전에 저는 한국에서 어떤 외국인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그 선교사와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시 저는 은사주의와 기복 신앙이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 들어 조국의 교회들과 성도들에 대한 강한 부담(문제점)은 구원에 대해 매우 의식이 불분명하고, 지식이 거의 전무하며, 구원받은 감격이 없다는 점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가장 큰 문제는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지식과 감격, 그 믿음에 대한 결여에 기인합니다. 건강하게 태어나지 못한 아이는 건강하게 자랄 수 없는 것처럼 불분명한 구원, 불분명한 진리의 지식은 영적 성장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갓 태어난 아이들은 교회에서 순수한 말씀의 젖을 먹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고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 링겔을 맞고, 인큐베이터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와 같은 모습입니다.

“구원은 받았습니까?”, “거듭나셨습니까?”란 질문에 상당히 당황하는 성도들,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 실례라고 여기는 성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실제로 자신이 언제 어떻게 구원받았는지에 대해서도 스스로 간증할 수 없는 분들이 교회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원받았다는 말은 자신이 구원받아야만 할 존재란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했음을 말합니다. 구원받았다는 말은 자신이 난파한 배속에서 물에 빠져 죽을 위기에서 구해 냄을 받은 것이나 화재의 불 길 속에서 건짐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 의미입니다. 구원받았다는 말은 자신이 어떤 상태이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누구인지를 알고 인정하는데서 출발합니다. 구원받았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주님의 정죄와 저주를 받은 상태이며, 영원히 죄로 인해 지옥의 형벌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음을 알고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잃어버린 존재, 상실의 상태, 전적으로 부정한 존재요, 어떤 선한 것도, 의로운 것도 없음을 자백하는데서 구원은 일어납니다. 죄와 죄인됨의 고백과 인정없이 회개가 있을 수 없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더럽고 사악한 죄인임을 알고, 자신의 죄를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나의 공로나 업적이나 어떤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나의 죄를 대속한 구속의 몸값이요, 그 죽음이 나의 옛 사람을 처리하는 죽음임을 믿고 고백할 때 내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임하게 되며, 나의 혼은 지옥으로 향하던 길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며,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주님을 영접한 일은 일생에서 자신이 모태에서 육신의 생명을 입고 태어난 것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사건일진대, 어떻게 이 일이 불분명할 수가 있고, 애매할 수가 있으며, 모른다는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런 사람은 백중 구십 구 이상은 구원받지 못한 종교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자신을 점검하고 입증할 수 있습니다. 

1. 나는 죄인임을 확실히 압니다. 2. 나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압니다. 3. 나는 죄로부터 돌아서서 주님께로 나아가야 함을 압니다. 4. 주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해결해 주셨음을 믿습니다. 5.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내 안에 영적인 욕구가 생깁니다. 새 생명은 새로운 성품과 영적인 것에 대한 갈급함과 선물들을 줍니다. 6.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할 수 있게 됩니다. 증거의 능력을 얻습니다. 논리적이지 못할지라도, 지식이 부족할지라도 예수를 외치는 일이 자연스럽습니다. 7. 성경에 대한 인식이 달라집니다. 8. 선한 양심과 순수한 양심이 생깁니다. 우리는 이런 자기 점검을 통해 자신이 분명하게 구원받았는지 아닌지를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의 증거를 믿음으로써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세상이란 말은 지질학적으로 이 땅 곧 지구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이 세상의 제도를 가리키기도 하며, 인류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성경은 세상의 통치자(요12:31)에 대해 언급하며, 사람들은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며(엡2:2),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리고 있음(고후4:4)을 말해 줍니다. 이 세상의 영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고전2:12), 이 세상의 형체는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또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와는 달리 마귀적이고 정욕적입니다. 이 세상의 관원과 통치자들은 영광의 주를 알지 못했고 주님을 못박아 죽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하는 오해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고,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교묘하게 왜곡된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던 것은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뿐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지만 그 방법은 세상을 사랑함으로써가 아니라 세상과 철저히 분리되고,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림으로써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이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도록 왕권을 준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범죄 했을 때 더 이상 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과 애정의 대상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준 이 세상은 죄로 인해 마귀가 통치자가 되었고, 마귀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마귀는 주님 앞에서 자신이 이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당당히 선언했습니다. [마귀가 다시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올라가 세상의 모든 왕국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보여 주며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엎드려 내게 경배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하매](마4:8~9). 주님 역시 마귀가 현 세상의 통치자란 사실을 인정하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 세상은 악한 현 세상이라 불리며(갈1:4), 사악함 가운데 있습니다. [또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사악함 가운데 있는 것이며](요일5:19). 성도들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그대로 수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하시기로 결정한 세상, 저주와 심판을 선포한 세상을 사랑한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범죄한 세상을 결코 아끼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이미 그 예를 한 번 보여 주셨으며, 장차 있을 심판의 모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옛 세상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의 선포자인 여덟번째 사람 노아만 구원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2:5). 이를 통해 주님은 세상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임을 역사적 예로, 본보기로,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경고로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세상 역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이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개혁하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이 악하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심판이 오고 있음을 경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주께서/ 같은 말씀으로 보관하사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기 위하여 예비해 두신 것이라.](벧후3:7). 불타 없어질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거기에 집착하고 동화되고 일치되어 세상에 속한 삶을 산다면 우리의 인생은 후회로 점철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셨지만 결코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니라.](요8:23).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나이다.](요17:16). 이런 이유로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원수지간이며,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속했는가? 아니면 세상에 속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소속을 알고 싶다면 세상이 나의 친구인가, 원수인가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의 원수입니까? 세상의 원수입니까?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 것을 사랑할 것이라.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며 도리어 내가 세상에서 너희를 택하였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세상의 원수가 되어야 할 성도가 세상의 친구가 되었다면 그는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이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이기 때문이라.](빌3:18). 십자가는 중립 지대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믿음으로) 하나님에게서 나고, 십자가를 (거부함으로써) 저주를 받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분명 이 땅에 있지만 우리의 생활권은 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의 생활권(生活圈)이 하늘이기 때문이라. 우리가 또한 거기로부터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0). 주님은 악한 현 세상, 불타 없어질 세상에서 지옥으로 치닫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십자가는 악한 현 세상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피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유일한 길입니다. 십자가는 성도들을 세상에서 분리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는 표시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세상을 못박고, 세상에 대해 못 박히는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십자가를 통해 세상에 대한 바른 관계성을 정립하지 못한 교회는 이미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요, 빛이 없는 등불과 같습니다. 이들은 오히려 복음의 원수노릇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으로부터 어떤 것도 취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시며(고전1:20, 2:6, 3:19), 세상의 자랑과 세상의 영광을 다 버리시며 가증스럽게 여기십니다.

세상을 향한 갈보리의 십자가의 목적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갈라디아서 1:4, 디도서 2:12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악한 현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내주셨으니](갈1:4). 십자가는 믿는 자들을 악한 현 세상에서 건집니다. 십자가를 통해 이 악한 현 세상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딛2:12). 십자가는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거부합니다. 이것들을 거부하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갈보리의 십자가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세상의 정욕들을 단호히 거부하게 하며, 새로운 생명 가운데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세상에 속한 정욕들이란 다음 세 가지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眼目)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 다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났음이라.](요일2:16). ①육신의 정욕, ② 안목의 정욕 ③ 인생의 자랑.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 이런 것들을 거부한다는 것은 지독한 자기 학대, 금욕, 신비주의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이런 것들을 거부하지 않고는 경건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의 문제입니다. 이는 의식주에 관련된 소유욕입니다. 뭔가를 더 소유하고 싶은 물욕(物慾)이 모두 육신의 정욕에 해당합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 것도 입지 못한 채 못 박힘으로써 육신의 정욕을 처리했습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에덴의 동산에서 여자(하와)가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금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보았을 때 보기에 탐스러웠던 것입니다. 사탄이 주님에게 세상의 모든 왕국을 보여 주면서 시험했던 것과 같습니다. 안목의 정욕은 탐욕입니다. 남의 물건이나 집, 남의 사람(아내, 자식, 남편, 종...)이나 남의 권세나 지위, 남의 명예 등 남의 것을 보았을 때 탐하는 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사람들은 남의 것을 나도 갖고 싶어합니다. 똑같은 것이나 더 나은 것을 가지고 싶어합니다. 이 탐욕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루는 근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탐욕, 탐심을 자극함으로써 생산과 소비를 촉진하고 사회를 유지해 갑니다. 매스미디어는 안목의 정욕을 자극하는 창(窓)입니다. 특히 비교의식이 강한 한국인들은 지구상의 어떤 민족보다 더 안목의 정욕에 민감합니다. 남이 가진 것을 갖고 싶어하는 마음-안목의 정욕-, 보지 못했으면 모를까 한번 보았으면 기필코 갖고 싶어합니다. 친구가 외국으로 어학 연수같다고 하면 어떻게 하든지 자기도 가고 싶어하고, 유학갔다고 하면 자기도 유학을 가고 싶어합니다. 남의 떡이 커보이고, 남의 물건이 아름다워 보이고, 탐나는 것이 바로 안목의 정욕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아름다움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어서 안목의 정욕을 자극하지 않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와는 달리 오히려 눈을 돌려 피하고 싶은 더럽고 추한 그런 것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우리 안에 일어나는 안목의 정욕을 처리했습니다.

인생의 자랑이란 자아를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은 명예욕입니다. 자랑할 만한 것, 내세울 만한 것, 자부심을 가질 만한 것, 남 앞에 당당할 수 있는 것, 인정받고 싶은 마음, 높아지고 싶은 마음 등이 다 인생의 자랑에 해당합니다. 정말 학문이 좋아서 공부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대부분은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면(육신의 정욕), 나의 친구나 친척은 명문대를 나왔다, 교수다 등과 같은 비교 의식에서 남의 것을 탐내는 안목의 정욕, 아니면 ‘내가 이런 대접을 받고 살아야 하나?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이 싫어서-인생의 자랑을 위해서 일하고 공부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생각이며, 거리가 먼 생활 방식입니다. 십자가는 인생의 자랑을 오히려 수치로 여깁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모욕과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얼빠진 성도들은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세상의 정욕들)을 더 많이, 더 빨리 쟁취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믿음이 있어야 이런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 제가 빨리 먹고 살만해야 주님을 위해 뭘 해도 할 것이 아닙니까? 주님, 제가 남들 사는 만큼은 살고 남들 가진 것만큼은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저도 뭔가 내세울만한 자랑거리는 못되어도 명함을 내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식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그런 것들을 채워 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믿는 성도들에게 세상을 못박고, 세상과 세상에 대한 모든 사랑을 단절하는 능력입니다. 인생의 자랑을 위해 살았다면 이제는 십자가를 자랑하면서 사십시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사람들은 다 육체를 따라 자랑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런 식으로 자랑하자면 누구보다도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씨요, 베냐민 지파요, 엄격한 율법의 바리새인이었으며, 당대 석학이었던 가마리엘 문하의 수제자였고, 유대교에서는 특별한 열심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도 누구보다도 많은 계시를 받았고, 많은 교회를 세웠고, 많은 은사를 지녔고, 많은 열매를 맺었으며,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십자가에 못박힌 성도였기에 ‘인생의 자랑’을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연약한 것과 관련 있는 것들을 자랑하리라.](고후11:30). [내가 이러한 사람에 관하여는 자랑하겠으나 내 자신에 관하여는 연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고후12:5). 바울은 주님을 자랑했고,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했는데, 이는 자신의 연약함을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악한 현 세상에서 구원받은 후에 다시 세상으로 들어간다면 이는 소돔으로 들어가 살았던 롯과 같은 인생이 될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통하여 세상의 오염에서 벗어난 뒤에 다시 그 안에 말려들어 지게 되면 그들의 나중 결과가 처음보다 더 나쁘리니](벧후2:20). 구원을 받았지만 차마 세상을 미워하지 못했던 바울의 제자 데마를 보십시오. 그는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 속으로 들어 가 버렸습니다. [이는 데마는 현재의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났고 ...](딤후4:10a). 롯과 데마의 인생이 복된 인생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요한은 세상을 지나치게 사랑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말라’입니다. 세상을 사랑한 결과는 나중 결과가 처음보다 더 나빠지며,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다는 고민을 토로하는 것을 자주 듣게 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자신 안에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알고자 하는 자는 전혀 불가능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갈보리의 십자가에서만 발견할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는 말씀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갈보리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고, 그 십자가를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 위에,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전달되며,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이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은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머물지 않는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과 친구가 되지 말라. 이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약4:4). 하나님은 갈보리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철저히 세상과 분리시켜 놓으셨습니다. 단지 세상과 냉랭한 관계가 아니라 적대관계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우리의 소속을 결정해 주며,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해 주며, 우리의 현재적 위치를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이 바다에 표류하는 배와 같이 방향도 모르고, 현재 위치도 모른 채 막연한 신앙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속 중심에 세워두십시오. 십자가가 없는 성도는 어느덧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과 점점 닮아가며 동화되고 맙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지혜, 세상의 자랑, 세상의 영, 세상의 영광, 세상의 모든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방파제와 같습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12:2). 십자가는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는 힘이며,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임을 다시 한번 깊이 인식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빕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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