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대적자 마귀
말씀: 살후2:4, 벧전5:8

아침 시간에 이어서 계속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있듯이 마귀 역시 성도들과 늘 함께 있으며 대적합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주]의 천사 앞에 서 있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對敵)하는 것을 그분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슥3:1). 주님이 보시는 것은 마귀도 봅니다. 마귀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 속에서 가장 약한 부분을 통해 들어옵니다. 사람이 가장 흔히 짓는 죄는 생각 속에서입니다. 마음으로 짓는 죄는 통제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호하게 생각에서부터 죄와 싸우면서 대적자 마귀와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생각에서 패하면 패배적인 말이 입으로 나오고, 곧 바로 현실에서 그 결과가 드러납니다. [비록 우리가 육신 안에서 행하나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이는 우리의 전쟁 무기가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을 통하여 요새들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라.)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거슬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 (고후10:3~5). 마귀가 여러분의 생각 속에 무엇인가 생각을 넣어 주면 우리는 두 가지 생각 속에서 갈등하고, 고민합니다.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이 있고, 원칙과 기준이 정립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생각을 공격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 속에 법과 기준이 정립되어 있다는 말은 이미 그 법과 기준에 어긋나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갈등하고 고민하고, 전후 사정이나 어떤 사람을 고려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로 알려진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금 신상 앞에서 절하기 전에 몇 일을 고뇌하고 고민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생각 속에 번민이나 갈등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생각을 정립해 두면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된 것”입니다.

마귀는 육신적인 생각을 불어 넣습니다. 육신적인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육신적인 생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참으로 그리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롬8:7). 저는 이곳 미국에 와서 한 가지 원칙을 세운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가르쳐서 돈을 벌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돈 벌이 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자마자, 성경 공부하는 형제들을 통해 개인 헌금이 들어왔습니다. 50불, 100불, 200불씩 저의 호주머니 속으로 넣어 주기도 하고, 따로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돈을 한 번도 제가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대로 교회 헌금함 속으로 넣었습니다. 집에 돈도 없는데, 교회 헌금이 아니고 개인 헌금하는데 그냥 가질까? 란 생각이 침투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 지식을 팔아서 돈을 버는 성경 학원 강사가 아니라 주님의 사역자요, 목자다! 라는 나의 정체성을 확립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유혹을 받거나 갈등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로서 돈, 여자, 명예 이 세 가지 시험에 대해 확고한 기준이 서 있지 않으면 언제나 마귀에게 공격당하고 시험에 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주일 아침에 교회를 올 것인가 말 것인가? 생각을 했다면 이미 그는 전투가 일어난 것입니다. 생각 속에 대적자가 들어 온 것입니다. 주일 예배에 대한 원칙이 서 있어야 합니다. 헌금을 얼마 할 것인가? 고민이 된다면 이미 생각 속에서 대적자가 들어온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사건을 통해 교훈을 얻고 원칙을 정립하는 성도가 됨으로써 육신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마귀는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합니다. 불신의 마음에서 나온 불신의 말은 주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생각은 다르지만 차마 말로 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말로 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로 대적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상을 준비할 수 있으리요? 하였거니와](시78:19). 불신에 빠진 백성들은 혀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했습니다. 마귀는 말로 주님을 모독하고, 대적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말로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욥의 위대한 점이 무엇입니까? 그는 말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는 여러 가지 의문점, 불신이 찾아 들었지만 말로 내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아직도 당신의 순전함을 지키느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 하되 욥이 그녀에게 이르기를, 당신이 어리석은 여자들같이 말하니 도대체 무슨 까닭이냐?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좋은 것을 받을진대 나쁜 것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서 욥이 자기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욥2:9~10). 욥은 자기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생각으로 범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말이 나오기 전에 혀, 이, 입술이란 3중 잠금 장치를 주셨습니다. 혀를 묶어도 말할 수 없고, 이를 악물어도 말할 수 없고, 입술을 다물어도 말할 수 없습니다.

마귀의 입은 신성 모독의 입입니다. [또 /용이/ 그에게 큰 것들을 말하며 신성을 모독하는 입을 주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지속할 권능을 주매 그가 입을 벌려 하나님을 대적하며 모독하되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성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하더라.](계13:5-6). 마귀의 입을 가져서야 되겠습니까? 죽겠다, 미치겠다, 환장한다, 힘들다, 짜증난다, 열 받는다, 뚜껑이 열린다, 돌아 버리겠다 등의 말이 입에 붙어 있으면 그 입은 대적자의 입입니다. 마귀는 모독하는 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왕이 자기 뜻대로 행하며 자기를 높이고 모든 신들보다 자기를 크게 하며 놀라운 말들을 하여 신들의 하나님을 대적하며 형통하기를 /그분의/ 격노가 다 이루어질 때까지 하리니 이는 /그분께서/ 그 작정된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임이라.](단11:36). 요즘 대화법을 보면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고, 깎아 내리고, 한 마디로 상대방의 얼굴을 달아 오르게 하는 농담이나 말이 유행합니다. 말 허리를 자르거나 꼬투리를 잡아서 상대방을 메다치는 것을 훌륭한 대화 기술인양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코메디 프로그램들이 넘치고 있습니다. 마귀의 입과 혀가 생활 안방에 까지 그대로 전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믿는 바를 말로 해야 합니다. 말이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것을 네 마음 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니라.](롬10:9-10). 믿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우편에 강도가 말을 하지 않고 예수님을 쳐다보면서 마음 속으로만 “나를 구원하소서”를 외쳤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차마 구원해 달라는 말이 목에 걸려서 입으로 나오지 못했다면 ...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반대로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목 천정까지 올라왔는데 참았다면 그는 위대한 사람입니다. 마귀를 이긴 것입니다.

근대 계몽주의자 철학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성경의 빛 대신 이성의 빛을 따라야 한다고 성경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사람들을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암흑으로 인도했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진 꼴이 된 것입니다. 가장 유명한 무신론자로 알려진 사람 가운데 프랑스의 계몽주의철학자 볼테르(Francois Marie Arouet Voltaire, 1694~1778)는 말하기를 “기독교가 건설되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지만 불란서의 한 사람이 50년 안에 기독교를 다 파괴해 버리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했고 또 “100년 안에 성경 책은 다 없어진다”고 큰소리치며 하나님을 한껏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기분에 들떠 살았지만 그는 죽을 때 지옥의 공포에 시달리다 죽었습니다. 그는 의사에게 6개월만 더 살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다, 6주도 더 못산다는 소리를 듣고, 의사의 손을 잡고 제발 나와 함께 같이 지옥에 가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혼자 지옥에 떨어지는 공포를 온 몸으로 체험하며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는 대적자 마귀의 운명과 같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그의 결국은 불 못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그가 입을 벌려 하나님을 대적하며 모독하되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성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하더라.](계13:6). 마귀는 겁 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모독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성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합니다. 일찍이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 신이 있다면 바로 내가 그 신이 되어야 한다”고 하나님을 대적하였지만 자신은 말년의 10년을 정신병자로 고통을 당하다가 결국 미치광이가 되어 죽었습니다. 오늘날 신학자들 중에서 유난히 주님을 모독하는 마귀의 일꾼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면 독선이라고 하면서 모든 종교에 다 구원이 있다는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소위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란 신학 이론을 주창합니다. 그들은 불교, 유교나 이슬람교, 힌두교 할 것 없이 다 같은데 기독교는 조금 더 고차원의 종교라고 하며, 십자가의 구속도 부인하고 부활도 부인합니다. 심지어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끌어내리고 너희가 제2, 제3의 예수가 되라”고 합니다. 기독교 복음은 남의 나라에서 흘러 들어온 종교인데, 우리 토속 종교를 지켜 내야 한다고 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모독합니다. 우리는 대적자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 진리로 철저히 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대적자들을 이길 압도적인 권세와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말하기를, “진리를 안 후에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 그 진리 외에 다른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자세야말로 마귀를 대적하는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세상과 친구가 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게 합니다.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약4:4). “저는 기독교를 믿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해도 그는 하나님의 대적자입니다. “저는 한번도 하나님을 부인하고 교회를 욕하거나 비방하고 그러지는 않아요. 종교에 대해서 나쁘게만 보지는 않아요.” 라고 말해도 그가 세상과 친구가 되었다면 그가 누구이건 간에 하나님의 대적자인 것입니다. “저는 매주 교회 주일 예배만큼을 절대 안 빠져요.”라고 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세상과 친구가 되면 이미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의사가 있다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대적은 원수보다 한 단계 위입니다. 마귀는 세상의 대양으로 와서 꿈과 희망을 펼치라고 합니다. 야망을 가지고 도전하라고 합니다. 젊음을 발산하라고 합니다. 학문에 전념해서 명성을 날려 보라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 보라고 합니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고, 영광을 얻을 수 있고,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고, 무엇이든지 맛볼 수 있고,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한 가지 방면에 전념하다 보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지금은 성경이나 교회에 빠져 지낼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어느덧 세상과 친구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 줄도 모른 채 그렇게 살아가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곳이 학교입니다. 가족들입니다. 친척들입니다. 친구들입니다. 심지어 세속적인 교회에서까지 그렇게 가르칩니다. 주님의 능력을 세상에서 더 잘되고, 잘 살고, 잘 먹는데 이용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기도 생활과 기도 응답을 대적합니다. 다니엘은 기도했을 때 마귀는 그 응답을 들고 오는 천사 가브리엘을 3주 동안이나 막았습니다. 성도의 기도는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성도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일하게 되면 마귀는 도저히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초기 기독교 부흥의 역사는 기도의 역사였습니다. C.J Jones 선교사의 보고에 따르면 "부흥운동은 기독교인들의 기도생활을 더욱 심화시켰다. 부흥운동의 시발점이 기도에 있었음은 이미 밝힌 바이다. 부흥운동이 전개되는 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은 기도생활의 비밀을 경험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한 선교사의 증언을 듣는 것이 확실할 것이다. 이 선교사는 전에도 믿음과 기도의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동료 선교사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진지하게 뚜렷한 목적을 갖고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중보기도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남을 위해 기도하는데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느라 자신을 잊을 정도였으며 그 때마다 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새로운 능력에 사로잡힘을 체험하였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기도생활에 붉은 피를 쏟았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런 열정적인 기도 생활을 방해하기 위해 마귀는 여러 가지 기도를 방해할 장애물을 놓습니다. 부부간의 불화는 기도를 막는 대표적인 마귀의 전술입니다. 더 많이 기도해야 할 사건들을 두고 성도들은 일에 매여 기도하지 못함으로 마귀의 대적에 패배합니다. 마귀는 대적자이기 때문에 할 수 없습니다. 맞서 싸워야 합니다. 이겨야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의 이름을 대적하는데, 하나님 역시 마귀를 대적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마귀를 대적해야만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지 않을 때 마귀의 종이 되고 맙니다. [그들이 자유를 약속하나 정작 자기 자신은 부패의 종이 되었으니 이는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라.](벧후2:19).

마귀는 누구를 통해 공격하는가? 누구를 통해 발목을 잡는가? 성경을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적은 바로 가족입니다. 마귀는 어지간한 성도들일지라도 가족을 통해 공격하면 그것을 마귀의 공격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아담을 넘어뜨리기 위해 먼저 아담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공격했습니다. 아담은 속지 않았습니다. [한 아담이 속지 아니하고 여자가 속아 범죄 가운데 있었음이라.] (딤전2: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공격하는 여자를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아내를 향한 애정이 주님의 말씀을 앞섰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가족주의를 통해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립니다. 영적인 성도라도 가족 앞에서는 절절 매기 마련이며, 단호하게 대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마귀 짓 하는 아내를 맞서 싸울 수 있습니까? 마귀 짓하는 남편을 맞서 싸울 수 있습니까?

마귀를 대적하라! 주님은 아담과 달리 육신적 가족주의를 단호하게 부인하고, 가족들을 통해 침투하는 마귀를 대적했습니다.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 형제들에게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형제들과 어머니가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그분을 부르니 무리가 그분 주위에 앉았다가 그분께 이르되, 보소서,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서 선생님을 찾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냐? 하시고 자기 주위에 앉은 자들을 둘러보시고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을 보라! 이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곧 그가 내 형제요 내 자매요 어머니이기 때문이라, 하시더라.](막3:31~35). 주님은 가족들을 사랑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가족들을 통해 파고드는 마귀의 사역을 단호하게 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만을 대적하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육신의 가족들을 대적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실족하게 하는 자로다. 이는 네가 하나님에게서 난 일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에게서 난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로다, 하시니라.](마16:23b)며 단호하게 대적하셨습니다. 주님은 한 분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자는 가족이든 제자든 가리지 않고 대적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마귀를 어떻게 대적하는가의 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마귀를 대적하라고 하셨습니다. 마귀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귀는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으로, 사건으로 우리를 대적하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런 자들과 대적하게 마련입니다. 마귀들이 여러분의 친구, 상관, 직장 동료, 친척, 가족 등을 동원해 대적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대적해야 합니다. 피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에 대한 육신의 애정을 끊고 그 자리를 영적인 사랑으로 채우십시오. 육신의 정욕 대신 그 자리에 십자가를 세우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여러분은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점에 대해서 단호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땅에 화평을 보내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보내러 왔노라. 이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딸이 어머니를,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여 불화하게 하려고 내가 왔기 때문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사람들이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마10:34~38).

저는 지금까지 제 아들이 교회에서 예배에 방해되는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집 사람을 통해 몇 차례 듣고도 어리석은 제사장 엘리처럼 징계를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마귀 짓을 하고 있는데 단호하게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주 저녁 예배 시간에 엄히 두 대를 쳤는데, 이 일이 성도들 보기에 별로 좋지 않고, 어떤 자매는 저를 대적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대신 목자를 대적하기 시작했는데, 저는 그 시간에 교회에 마귀들이 종횡무진 활동하며 교인들의 마음과 머리 속을 휘젓고 다니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행히 찬송하고 말씀을 전하면서 잦아들었지만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집에 와서 곰곰이 문제를 생각한 후에 여러 가지 교회 행정, 운영, 리더십 등에 대해서 정리하면서 제가 존경하는 목자들에게 ‘교회에서 자기 아이를 매질하거나 때려 본 적이 있는가?’라는 문의를 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 때 좋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한 목회자가 제게 “울도록 때립니까? 멍들도록 때립니까?” 그러면서 말씀을 펴주었습니다. [파랗게 멍든 상처는 악을 깨끗이 없애나니/The blueness of a wound cleanseth away evil/ 이와 같이 채찍도 뱃속의 모든 부분을 깨끗하게 하느니라.: so do stripes the inward parts of the belly.](잠20:30). 멍들도록 때리지 않고 울도록 때리면 악이 떠나가지 않습니다. 한번 때리기 시작하면 운다고 그치지 말고 반드시 멍이 들도록 때려 주라고 권면해 주었습니다. 제게 이 말은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소망이 있을 동안에 네 아들을 징계하되 그가 운다고 네 혼이 용서하지 말지니라./Chasten thy son while there is hope, and let not thy soul spare for his crying.](잠19:18). 자기는 교회에서든 어디에서든 한번 패면 반드시 멍이 들게 해 준다고 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듣고 때리는 것 하나도 성경대로 때리지 못하고, 어설프게 때려서 주님의 말씀을 무용지물로 만들었구나!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작은 문제 하나까지 성경에 불순종하고 성경대로 징계하지 않고 내 뜻대로 징계한 죄악을 깊이 회개했습니다. 완전히 마귀에게 이용만 당한 꼴이었습니다.

육신적 애정이 늘 성경적 징계를 가로 막고, 어중간한 상태로 만들었고, 마귀에게 밥이 되었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사람들은 아이를 때려서 아이가 잘못된다고 부모 책임을 돌리지만 성경은 부모가 아이를 제대로 매질하지 않아서 “네가 뿌린 대로 열매를 거둔다”고 말합니다. 이 두 말씀을 현대 교육이나 미국의 사정 때문에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는 성경을 최종 권위로 믿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전에 이곳에 있던 한 형제는 자식 교육에 그렇게도 열성적이었지만 용돈 줄이는 것 외에는 절대 징계를 못하는 아비가 되어 교회를 옮겨 다니고, 학교를 옮겨 다녀도 지금까지 자식 교육에 관한 한 욕먹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적 실행을 하지 않는 이상 참된 교육은 없습니다. 교육학을 성경보다 더 높은 권위로 세우는 것은 마귀의 영입니다. 아이를 징계하다 경찰에 잡혀가면 그것은 ‘의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이며, 주를 위해 고난 받는 것입니다. 그러다 야곱처럼 “아이를 잃어버리면 잃어버리리라!” 굳게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아이 매질하는 문제에 대해서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개똥철학으로 반론을 펼치며, 자꾸 성경 말씀에 토를 달고 반역하는 성도들은 이 시간 깊이 회개하기 바랍니다. 아이를 노엽게 하지 말라(provoke)는 말은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때리는 것이 노엽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성경은 모순입니다. 구약에서는 멍들게 매질하라고 했다고 신약에서는 손도 대지 말라는 말씀이 되고 맙니다. 때리는 것은 노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리는 것은 징계요, 노엽게 하는 것은 아이의 성질을 부추겨 약을 올리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무절제한 애정은 냉정함보다 못하며, 육신적 애정은 무정함만 못합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마귀를 대적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對敵)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겪는 줄 너희가 알기 때문이니라.](벧전5:8-9).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진리 위에 굳게 서서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공생애 사역 동안 끊임없이 마귀를 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셨습니다. 주님은 마귀를 쫓아내시고,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마귀의 고통을 받는 자들을 풀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마귀를 멸하시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자녀들은 살과 피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에 참여하셨으니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히2:14).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능을 가진 마귀를 멸하시고, 그의 권세를 완전히 파해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손으로 쓴 규례들 곧 우리를 대적하고 반대하는 규례들을 지우시고 그것들을 길에서 취하사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政事)들과 권능들을 노략하사 십자가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골2:14-15). 앞으로 주님의 역사 역시 대적자 마귀를 부수시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밑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롬16:20). 이 일은 천년 왕국이 끝나는 무렵에 집행될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귀를 멸하실 것이란 약속은 이미 창세기 3:15에서 선포되었습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일을 대적했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마귀로 인해 실패한 적이 없으시며, 뜻이 좌절된 적이 없으십니다. 반면 성도들은 끊임없이 마귀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좌절합니다.

구약의 믿음의 영웅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적들에게는 패전을 용납하지 않는 백전불굴의 장수였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져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가족을 통해 들어오는 마귀의 공격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은 엉망으로 컸지만 아들에 대한 인간적 애정으로 인해 나라를 내전(內戰)의 혼란 속으로 몰아갔고, 전쟁으로 황폐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압살롬은 그에게 자식이 아니라 우상이었습니다. 마귀는 당연히 압살롬을 통해 다윗을 공격했고, 다윗은 마귀를 대적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아내를 얻는 것을 [누구든지 아내를 얻는 자는 좋은 것을 얻고 [주]의 은총을 얻는 자니라.](잠18:22)고 말합니다. 자식에 대해서는 [보라, 자식들은 [주]의 유산이요, 태의 열매는 그분의 보상이로다.](시127:3)고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은총인 아내와 주의 유산인 자식들이 불경건한 자들에 의해서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된다면 ‘우상숭배’로 떨어지게 됩니다.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지 못하게 하는 방법 가운데 첫 번째 방법이 다름 아닌 가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선물이 최악의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귀는 이혼, 불륜, 폭행, 술 취함, 파산, 질병 등과 같은 것으로 건전한 가정을 파산시킴으로 지역 교회를 약화시키고,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동시에 가족애라는 육신적 애정의 끈을 통해 성도의 영적 성장을 방해합니다. 우리는 가족과 건전한 가정생활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서도 인식해야 합니다. 부패한 사람의 육신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상숭배’라 합니다.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종류의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 것들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욕심, 안위, 권세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주신 최상의 선물이 때로는 최악의 우상 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예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곳을 떠나지 않고는 결코 영적 성장을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데리고 왔는데 롯으로 인해 받은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롯과 분리하게 하셨습니다. 롯을 데리고 오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모압과 암몬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대대로 괴롭혔던 모암과 암몬은 주의 심판을 보고도 전혀 깨달음이 없었던 롯과 그 자식들(딸들)의 가족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맏딸이 작은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었고 온 땅의 관례(慣例)대로 우리에게 들어올 남자가 이 땅에는 없으니 오라,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하고 우리가 함께 누워 우리 아버지의 씨를 보존하자, 하고](창19:31-32). 눈앞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불과 유황으로 심판받는 모습을 보았지만 롯은 딸들이 주는 포도주를 마시고 딸들과 동침하여 자식을 낳았습니다. 가족을 보존하자. 씨를 보존하자는 강한 혈통주의 앞에서 방금 본 불 심판의 무서움도 한 잔 술에 잊어 버리고, 주님의 율법이나 말씀도 모두 버렸습니다. 롯은 딸들을 통해 들어오는 마귀를 대적하기는 고사하고 맨 정신에는 차마할 수 없는 부끄러운 짓을 술기운을 빌려서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대신 마귀를 환영했습니다. 롯의 딸들은 자신들이 시집을 못 갈까봐 걱정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대가 끊기는 것을 걱정한 것입니다. 그들은 투철한 혈통적 중심의 가족애로 뭉쳐 있었습니다. 알량한 동정심과 혈통 보존에 대한 육신적 정욕이 결국 엄청난 화를 불러 온 것입니다. 가족과 친족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우리들에게 주신 선물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가족이 가치 판단의 최종적인 기준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가족이나 가정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썩어질 전통과 이교도의 사상이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최근에 ‘가정 사역’이라는 것이 인기입니다. 반역적인 사람은 우리의 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선사하신 가정을 우상으로 섬깁니다. 인간의 타락은 가정의 부부 관계를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시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일제 시대 때 평양 봉수 교회의 목사였던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가 감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일본 형사들은 어머니 조 재선, 아내 오 정모, 아들 주 광조가 지켜보는 앞에서 고문을 가하고, 공중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고추 가루 물을 붓거나 몸을 밧줄로 묶어 그네에 태운 후 매질을 가했습니다. 손톱과 발톱이 차례대로 뽑았고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 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순사들은 주기철 목사님의 가족들에게 주 기철 목사님의 믿음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게 했습니다. 그때, 주기철 목사님의 사모님인 조재선 자매는 “여보, 힘 내세요. 꼭 순교하세요. 여기서 포기하면 안되요.” 하며 믿음을 북돋우어 주었습니다. 가족을 통해 유혹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고 주 기철 목사님은 결국 순교의 반열에 들었습니다. 주 기철 목사나 가족들은 한결같이 가족애란 육신적 애정을 들고 공격하는 마귀를 단호히 대적했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가족 사랑이 아니면 그 사랑은 참된 가족 사랑이 아닙니다. 청교도의 창시자 존 낙스(John Knox, 1514-72)의 딸 제인 웰시는 아버지의 믿음을 그대로 간직한 존 웰시와 결혼했는데, 남편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밤에 그녀에게 몇몇 교도관이 찾아와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포기하도록 권면하면 살 수 있다고 설득하자, 자기 앞치마를 둘둘 말고서 ‘제 남편의 머리를 여기에 담아다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인간적인 애정에 끌리지 않고 자기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함께 죽기를 결심했던 것입니다. 가족애를 통해 공격하는 마귀를 대적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십자가임을 보여 주는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런 평안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미국에서 왜 말씀을 듣고도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가? 핍박이 있습니까? 저는 이 교회 누구도 신앙의 박해를 받는 것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입니까? 몇 가지 우상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을 살펴보면 자녀, 교육, 돈이 우상입니다. 지금도 그 우상들을 굳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돈에 대해서는 버렸다는 사람들도 몇 있지만 자녀와 교육에 대해서 우상을 버린 사람은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고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이는 마귀가 처음부터 범죄하기 때문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마귀의 일들을 멸하려 하시는 것이라](요일3:8). 주님은 자신의 일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셔서 지금도 동일한 일을 계속해서 수행하고 계십니다. 12제자에게 마귀의 일을 멸하게 하셨고, 70인 제자들에게 동일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강한 자를 결박하셨습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의 집에 들어가 그의 재산을 노략하겠느냐? 그 강한 자를 결박한 뒤에야 그의 집을 노략하리라.](마12:29). 주님은 마귀와의 영적 전쟁을 계속해서 수행하셨으며, 그 전쟁의 전리품으로 취한 것이 바로 구원받은 영혼들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마귀를 대적하는가? 마귀는 전통으로 성도들을 속이고 공격합니다.

눈에 보이는 절기나 행사 등만이 전통이 아닙니다. 우리 사고 속에 스며들어 있는 사상, 가치관, 습관 등이야말로 훨씬 강력하고 무서운 전통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대속(代贖) 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썩을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벧전1:18). 우리는 우리 조상들로부터 유교, 가족주의, 혈통 중심이란 혈연에 대한 강한 연대감, 구속감과 같은 전통을 물려받았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사람들의 보고를 듣고 불신 가운데 떨어진 것은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가족이란 우상 숭배 때문입니다.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 어찌하여 주가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가? 우리의 아내와 자녀가 탈취물이 되리니 우리가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 14:2-3). 우리의 아내, 우리의 자녀가 걱정되었습니다. 이들은 가족이라는 마귀의 올무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제 아무리 좋은 것이든지, 소중한 것이든지, 하나 밖에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보다 앞세우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앞세우게 되면, 마귀의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가족주의’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감히 “악”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우리를 몰고 가서 결국 하나님 말씀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듭니다. 주께서는 선한 것마저 우상이 될 수도 있는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과 위태로움을 아시기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10:35-37)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가족주의를 중심으로 공격해 오는 마귀를 단호하게 대적하고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믿는 신자들은 하나님 말씀에서 지지받지 못하는 ‘전통’에 저항하며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가족에 대해서 단순하게 설명합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해라. 아버지들아, 주의 교육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라.] 별 다른 명령이 없습니다. 다른 무엇이 개입할 틈이 없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가정 문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는 단순한 마음이 없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을 통해 역사하는 마귀에게 연전연패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다.’라는 말로 가족에 대한 성경적 원칙보다도 인간적 전통을 강조하려는 모든 마귀의 시도에 대해서 거부하고 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끊임없이 가족주의를 떠나는 일에서 영적 성장을 거듭합니다. 그의 믿음의 여정은 가족주의를 떠나면서 시작됩니다. [...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집에서 나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고향, 친족, 아버지의 집을 떠나면서 시작된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은 롯과 헤어지고, 자신의 몸에서 처음 난 첫 아들인 이스마엘을 집에서 쫓아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죽이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제단에 드림으로 가족주의, 가족에 대한 애정을 모조리 처리한 후에야 비로소 믿음은 완성됩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 네가 네 아들 곧 네 유일한 아들이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이제야 비로소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 알기 때문이니라.](창 22:12). 이제 누구도 아브라함에게 가족주의란 약점을 타고 공격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에게 자식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자녀는 가문의 대를 잇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의 뜻대로 살아주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태어나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자식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아이들 인생은 무가치합니다. 부모(사람)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살도록 강요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훈계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러운 사람이면서도, 자식만큼은 주님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은 성경의 경고를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족주의란 육신적 애정과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을 십자가에 처리하지 못한다면 결코 마귀를 대적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재판관이자 제사장이었던 엘리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희생물과 내 헌물을 발로 차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귀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모든 헌물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 자신을 살지게 하느냐?](삼상 2:29).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리라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알고 있는 불법 때문이니 이는 곧 그의 아들들이 스스로를 더럽혔으나 그가 그들을 억제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 3:13). 엘리는 아들들의 엄청난 악행에 대해서 응분의 처벌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을 방임해 두고, 육신적 인정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옹졸한 ‘가족주의’ 때문입니다. [마땅히 갈 길로 아이를 훈련시키라. 그리하면 그가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이것은 교회의 책임이 아니라 부모의 책임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적인 가치관대로 살지 않으면서 교회에 책임을 맡긴다고 교회가 책임질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녀는 부모들의 이중성, 위선, 이기심 등을 그대로 정확하게 보고 배웁니다. 자식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왜곡된 부모들의 애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선이 파괴되었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불법이 저질러지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부모, 자식, 형제들이 가족이 저지른 ‘사건’ 때문에 뒷감당을 하느라고 정신을 못 차립니다. 가족 중 누가 ‘사기’를 치면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를 가르치기 보다는, 아무런 죄책감이 없는 사람에게 ‘능력’도 없는 가족들이 뒷수습해 주느라고 정신을 못 차립니다. 정녕 가족을 사랑한다면, 심는 대로 거둔다는 법칙을 온몸으로 깨닫게 하십시오. 인륜, 인정, 동정이 성경의 권위보다 앞선다면 불법이 자행됩니다. 여러분의 애정은 육신적 애정입니까? 십자가를 통과한 영적인 사랑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말씀이 가족과 관련해서 주시는 경고를 명심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더 이상 낯선 자도 아니요, 외국인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더불어 동료 시민이요, 하나님의 집안 (the household of God) 에 속한 자들이며] (엡 2:19). [그러나 내가 오랫동안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 (the house of God) 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게 하려 하노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영적 가족이 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로 인해서 첫 번째 출생을 했고, 첫 번째 출생으로 가족이 갖게 되었다면, 영들의 아버지로 인해서 두 번째 출생을 했고, 두 번째 출생으로 또 다른 가족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안이나 하나님의 집은 이론상의 추상적 개념이 아닙니다. 첫 번째 출생이 분명한 사실이고 그렇게 형성된 가족이 실제라면, 두 번째 출생도 분명한 사실이고, 그렇게 형성된 가족도 실제입니다. 가족은 고귀하나, 가족주의는 죄악입니다. 삶과 신앙의 모든 것을 ‘가족’이라는 기초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한다면 동산에서 아담, 롯의 딸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재판관 기드온과 엘리의 과오를 뒤쫓아 가는 셈입니다. 옹졸한 가족주의를 벗어납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또 다른 가족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첫 번째 출생으로 형성된 가족도 중요하고, 두 번째 출생으로 형성된 가족도 중요합니다. 이산가족 상봉을 보면서, 몇 십 년 만이지만 ‘가족’이라는 이유로 만남 자체가 목적이라면, 하나님의 집안사람들도 만남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집이지, 첫 번째 출생으로 형성된 가족의 모임이 아닙니다. 장인, 장모, 이모, 고모, 삼촌, 조카, 작은 아버지.... 육신적 친족의 만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안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집안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인해 믿음의 집안에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특히 믿음의 집안사람들에게 할지니라.](갈6:10). 우선 순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가족을 사랑해야 하고, 섬겨야 하지만 영적인 가족과 가치관이 충돌하고 우선 순위를 다툴 때는 영적 가족이 우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가족 같다는 평가만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실제 가족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지지받지 못하는 전통에서 나온 ‘가족주의’를 벗어나서, 단순한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소중한 가족이 우상이 아니라, 축복이 되게 하십시오.

성경을 통해 대적자 마귀를 이기는 법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전신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엡6:10-18). [너희가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고 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지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귀에게 백전백패하는 이유는 스스로 무장해제한 채 평화롭게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갑옷이 무겁든지, 투구가 귀찮든지, 신발이 불편했는지, 방패가 들기 어려운지 무장을 해제해 버린 채 다만 주님이 지켜 주시기만을 막연히 바라고 있다가 당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언제나 입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전쟁의 땅에서 불러내서 저 하늘에 올라갈 때까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늘 입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방패는 ‘믿음’입니다. 전투화는 ‘화평의 복음’입니다. 허리띠는 ‘진리’입니다. 가슴의 흉패는 ‘의’입니다. 머리의 투구는 ‘구원’입니다. 성령의 검은 ‘말씀’입니다. 등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돌아서지 말고 오직 맞서 싸우라는 뜻입니다. 믿음, 복음, 진리, 의, 구원, 말씀이 하나님의 완전한 전신갑주이며, 마귀를 능히 이길 수 있는 전투 장비입니다. 이것들로 무장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약4:7). 하나님께 자신을 복종하지 않은 채 마귀에게 대적하다가는 마귀에게 박살이 나고 말 것입니다. 사도행전 16:15-16에 자세한 기사가 나옵니다. 여러분은 지금 전능하신 하나님께 복종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그분의 모든 말씀에 불순종과 무관심으로 일관하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이미 지금의 신앙 생활은 마귀에게 반 이상 점령당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셋째,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對敵)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겪는 줄 너희가 알기 때문이니라.](벧전5:8,9).

넷째, 마귀를 이기는 방법은 기도와 금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 없이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마17:21).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점점 사라지는 것이 기도와 금식입니다. 여러분의 기도 생활을 스스로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언제 금식을 합니까?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 기도와 금식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함께 기도하는 것은 매우 좋은 방법입니다. 자주 기도 모임을 열어서 기도하는 기도는 혼자 하는 기도보다 몇 갑절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다섯째, 마귀를 이기는 방법은 어린 양의 피와 증거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거의 말로 그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여러분 안에 있는 마귀는 여러분이 이 방법으로 쫓아 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 안에 역사하는 마귀도 몰아 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해서 감사와 찬양을 돌리고, 그것을 더 많이 증거 하십시오.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의 흘리신 보혈에 대한 구절을 표시해서 읽고, 그것을 증거하고 찬송하십시오.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을 증거 해 보십시오. 주님이 승리하신 사실을 증거 해 보십시오. 우리는 말씀을 통해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입에서 거품을 흘리거나 눈에 흰 자위가 나오고, 뒹굴어야 마귀 들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오기 싫어하는 마음, 기도하는 시간을 내기가 어렵고, 성경을 읽는 시간을 만들 수 없고, 사소한 일에 짜증이 나고, T.V를 보는 시간이 늘어나고, 소비 욕구가 증가될 때, 공상이 많아지고, 장래에 대한 염려로 많은 시간을 보낼 때 여러분은 이미 마귀에게 영향을 받고 있으며, 점령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과 입, 마음의 생각은 성령이 충만한지 마귀가 충만한지를 보여 주는 눈금입니다.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 자녀들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마귀를 쫓아내십시오.

여섯째, 우리의 믿음이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은 마귀가 주관하는 왕국입니다. [이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우리를 통해 드러나게 하는 연결 도구입니다.

일곱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신 승리자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하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우리는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요,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셨습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그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라.](요일4:4). 오늘날 마귀 들린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가르치는 교리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인은 마귀 들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요한일서 4:4말씀을 인용하지만 크게 잘못 알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그분을 힘입어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구절이지 마귀 들릴 수 없다는 구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구절이 우리의 승리를 자동적으로 보장해 주는 구절이라면 우리는 왜 깨어있고, 대적해야 하겠습니까?

여덟 번째, 올바른 무기를 사용해야 합니다(히4:12, 엡6:18). 말씀을 배우고 암기하는데 시간을 사용하십시오. 성령의 칼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공격하지 않는다면 마귀를 막을 수는 있겠지만 마귀를 이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마귀와 맞서 싸우실 때 한 번도 성령을 부르짖거나 기도하거나 천사가 나타나서 도와 줄 것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사용하심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성경을 인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인용하는 구절을 제대로,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구절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믿고, 우리가 믿는 바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성경을 별로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때마다 놀라움과 당혹감을 감출 수 없습니다. 성경 없이 교회에 빈손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을 데리고 이 교회를 시작했다고 하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믿는 구절들을 이제는 사용해야 할 때입니다. 말씀을 사용할 때 여러분이 승리의 찬가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대적자 마귀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우리는 어떻게 마귀를 이길 수 있는가? 이론적으로 신학적인 내용이 아닌 성경 속에서 실제적으로 살펴 보았습니다. 모두 말씀을 통해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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