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론 강해
말씀. 계12:10
마귀는 성도들을 하나님께 참소하여 심판과 저주를 받게 하는 참소자입니다. 참소란 말은 고소하다, 비방하다란 뜻인데 개역 성경에서는 많이 쓰였지만 어려운 한자어로 요즘은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고소하는 자, 비방하는 자로 번역했습니다. 사람들이 당하는 영적, 정신적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이유 없는 비방, 참소입니다. 누가 나에게 직접 비방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모르는데서 다른 사람에게 비방하는 것도 참기 어렵습니다. 마귀는 대적자(계12:9), 방해자(살전2:18), 살인자(요8:44), 거짓의 아비(요8:44), 빛의 천사로 가장하는 자(고후11:14), 성도들을 고소하는 자요(계12:10), 높은 권세를 비방하는 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고소하는 자요, 비방자 마귀에 대해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고소하는 자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구원과 힘과 우리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그리스도의 권능이 임하였으니 이는 우리 형제들을 고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밤낮으로 고소하던 자가 내쫓기었음이라.] (계12:10). 마귀는 성도들을 거짓 되이 하나님께 고소하고 비방하는 허위 사실 유포자이며, 심판과 징계를 받도록 하기 위해 시험해 볼 것을 유도합니다. 오늘날 횡횡하는 유언비어, 스캔들, 거짓 소문 등은 모두 마귀의 영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들입니다. 말이 부풀려지고, 왜곡되어 퍼지는 것도 마귀의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의 문제로 생각하지만 우리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그 본질과 실체가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 형제들을 고소하던 자”라고 분명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 고소합니까? “우리 하나님 앞에서” 고소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행하는 죄, 불의, 불법, 악한 생각과 말 등을 꼬투리 잡아서 하나님께 고소합니다.
한국인들은 고소와 비방, 험담, 음해 등 갖가지 악한 짓들은 유독 잘하는데 이는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현재 한국(남한)의 고소 고발 건수는 일본의 2배를 넘습니다. 인구 비율로 하면 무려 4배나 됩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실제 검찰에 접수된 고소, 고발 사건 수는 전체 사건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등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일본의 수십 배에 해당하고 있어 이 같은 사건을 처리하기 위한 수사 인력의 보강도 무색케하고 있다. 더군다나 고소고발 사건 중 실제 혐의가 인정돼 기소되는 건수는 전체의 30%대에 불과한 반면 무혐의, 기소유예, 각하 등 불기소 처분 건수는 60%를 넘어서고 있어 수사력이 낭비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검찰은 좀더 효과적으로 고소, 고발 남발을 방지하고 좀 더 신속한 처리를 위해 지난 5월부터 10개 지검, 청 20개 검사실에서 시범 실시되고 있는 `수사과정 녹음녹화' 제도를 확대, 시행하기로 했다. 녹음녹화 제도가 도입될 경우 조서를 작성하는데 들어가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 사건 처리가 훨씬 빨라지는 것은 물론 인권침해 시비도 불식시키는 효과를 낳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녹음, 녹화제 도입은 각 지검, 청에 기자재와 녹화실 등이 갖춰진다면 불기소 처분이 내려지는 고소, 고발 사건에 대해서 이르면 내년부터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12일 대검찰청에 따르면 올 상반기 접수된 고소, 고발 사건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5% 증가한 33만6464건에 이르고 있다. 접수된 고소, 고발 사건은 지난 2000년 55만4404건 → 2001년 57만6034건 → 2002년 58만5930건 → 2003년 64만3012건 등 증가세를 지속해왔다.’
우리 사회는 완전히 마귀의 영으로 충만한 사회이며, 마귀의 비방과 고소가 온 국민의 뇌리 속에 깊이 스며들고 있으며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중에는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가 서로를 고소하고, 목회자들과 교회간이 고소 고발 사건이 엄청난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입니다. 공공 기관이 아니라 서로 고소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습니까? 집안에 모임이 있으면 끼리끼리 모여 서로 고소하고 비방합니다. 딸과 어머니가 마주 앉으면 며느리를 고소하고 비방합니다. 친구들끼리 마주 앉으면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은 완전히 밥이 됩니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밤낮으로 고소하고, 우리를 비방하는 존재입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진리가 선포될 때 우리 마음 속에 가려진 모든 어둠이 드러나고, 마귀가 쫓겨나는 역사가 있기를 간구 드립니다.
잠깐 기도하고 말씀을 증거 하겠습니다.
마귀는 비방자요 고소자입니다. 이는 꼭 범법자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의로운 자는 의로운 대로 고소하고, 비방합니다. 마귀가 여러분을 비방하고, 고소하더라도 나의 양심이 의롭다면 두려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습니다. 주님은 비방과 험담을 당하는 성도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사람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험담을 무서워하지 말라.](사51:7). 성도들은 마귀에게 비방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방자 마귀는 밤낮으로 우리들의 생각과 행동과 말을 꼬투리 잡기 때문입니다. 원수의 행동은 무슨 짓을 해도 밉게 보이고, 그 저의와 동기가 의심스럽고, 순수해 보이지 않는 것같이 마귀는 성도들이 하는 어떤 일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마귀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비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한편으로는 너희가 비방과 고난으로 말미암아 구경거리가 되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취급받은 자들과 사귀는 자들이 되었으니](히10:33)라고 했고, 사도 베드로 역시 동일한 권면으로 우리를 위로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비방을 받으면 행복한 자로다. 이는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그들 편에서는 비방을 받으시나 너희 편에서는 영광을 받으시느니라.](벧전4:14). 죽어 있는 시체를 향해 총을 쏘거나 불화살을 날리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죽어 있는 고래는 아무리 덩치가 커도 물에 떠내려갑니다. 반면 살아 있는 물고기는 아무리 작은 피라미도 강을 가로 질러 가고, 거슬러서도 갑니다.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마귀는 살아 있는 성도, 의를 행하는 성도를 향해 고소와 비방을 일삼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이 불교 신자들이나 다른 종교인들을 향해 비방하고 욕하는 것은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약간만 잘못해도 격렬하게 비방을 받고, 욕을 얻어먹습니다. 이는 비방자 마귀가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 세상에서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영적 세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영적 세계가 이 현 세상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유일무이한 절대 주권자 하나님과 거룩한 주의 천사들, 초자연적인 존재자인 사탄과 그의 천사들인 마귀들에 대해서 우리는 정확히 알고 그에 알맞은 영적 대응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는 순간 우리는 마귀를 아버지로 섬기던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로 영적, 법적 신분이 완전히 바뀝니다. 그리스도인은 알든 알지 못하든 영적 세계에 깊이 몸담고 있는 상태입니다. 영국의 브리스톨에 있는 한 고아원은 추운 겨울에 갑자기 보일러의 기계 장치가 고장이 나 아이들이 추위에 떨게 되었습니다. 보일러를 고치고 정상 가동을 하려면 최소한 만 하루 이상이 걸리고, 다 고칠 때까지 하루 밤을 지새워야 하는데 추운 겨울 밤을 어린 아이들이 무사히 견디기란 어려웠습니다. 이 고아원 원장이 바로 기도의 용사 죠지 뮬러였습니다. 뮬러 목사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영국의 런던에 동풍이 불어와 갑자기 유례없는 봄 날씨가 도래했고, 사람들은 옷을 벗고 반팔을 입어야 했습니다. 보일러가 다 고쳐지자 예년의 추운 겨울 날씨가 다시 찾아 왔습니다. 현실 세계 이면에 있는 영적 세계와 그 세계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은 한 사람이 주님만을 믿고 기도했을 때 모든 현실의 고난은 아무런 문제없이 극복되었습니다. 보일러가 고장 난 것은 현실의 문제였지만 그것을 해결 하는데는 영적 수단이 필요했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향해 강력하게 비방하고 고소하고 험담하며 저주한다면 그 사람을 보지 말고, 그 사람 배후에 있는 마귀의 역사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적하여 싸워야 합니다.
마귀는 저와 여러분을 향해 비방이란 불붙은 화살을 날립니다. 성도의 무기가 칼이라면(성령의 검-엡6:17,히4:12) 마귀의 무기는 불화살입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취하며 이것으로 능히 저 사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끄고](엡6:16). 마귀는 멀리서 불화살을 날립니다. 온 몸을 불태우고, 곁에 있는 것에 옮겨 붙게 합니다. 가족을 불태우고, 온 교회를 불태우려 합니다. 이런 성경적인 대표적인 예는 욥기에 가장 잘 나옵니다.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인 중의 의인이었습니다.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에서 오느냐? 하시니 사탄이 [주]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에서 여기저기 다니고 또 그 안에서 위아래로 거닐다가 왔나이다, 하매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깊이 살펴보았느냐? 그와 같이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가 땅에 없느니라, 하시니] (욥1:7~8). 그러나 사탄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반론을 펼칩니다. 그의 반론은 이성적이며, 논리적이며, 설득적입니다. [이에 사탄이 [주]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를 사방에서 울타리로 두르지 아니하셨나이까? 주께서 그의 손이 하는 일에 복을 주시니 땅에서 그의 재산이 불어났나이다.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내미사 그의 모든 소유를 치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주의 얼굴 앞에서 주를 저주하리이다, 하매] (욥1:9~11).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욥이 부자가 된 것은 욥이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된 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입니다. 욥의 부유함 뒤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신 손길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주님이 욥과 욥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를 사방에서 울타리로 두르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사탄아, 아니다. 욥은 자기 힘으로 부자가 된 것이지 내가 도와 줘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라고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탄의 반론에 수긍하셨을 뿐 아니라 인정하셨습니다. 사탄은 또 한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주께서 그의 손이 하는 일에 복을 주시니 땅에서 그의 재산이 불어났나이다]. 이 역시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올해는 운이 좋아서, 경기가 잘 풀려서, 수요가 많아서 등의 여러 가지 요인을 제시하지만 여러분이 일해서 재산이 늘어난 뒤에는 주님께서 여러분의 손이 하늘에 복을 주신 덕분이란 사실입니다. 우리가 현재 건강하고, 안전하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방에서 우리를 울타리로 두르신 결과요, 주님께서 우리가 손으로 하는 일에 복을 주셨다는 점을 아시고, 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베푸신 은혜와 복을 정확히 지적했습니다. 문제는 마귀가 그 점을 들어서 고소하고 비방하는 것입니다. 욥처럼 신앙생활을 잘하면 주님이 복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비방합니다. 마귀는 시험해 보자고 합니다. 이것이 현실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영적 세계입니다. 영적 세계에서 마귀는 끊임없이 성도들을 고소하고 비방할 거리를 찾아냅니다. 신실한 성도에게는 그 신실함이 주님이 주신 은총 때문이라고 비방하고 고소합니다. 타락한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배반하고 져버린 인간이라고 고소합니다. 마귀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깊이 살펴보았느냐? 그와 같이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가 땅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움직여 그를 치게 하고 까닭 없이 그를 멸하게 하려 하였으되 그가 여전히 자기의 순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도다, 하시니] (욥2:3). 주님은 욥이 무사히 시험을 통과하자 사탄에게 “네가 나를 움직여 그를 치게 하고 까닭 없이 그를 멸하게 하려 하였으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마귀가 욥과 그의 가족들, 재산을 쳤지만 주님께서는 친히 치셨다고 말합니다. 이 일은 ‘까닭 없이’ 일어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한 번 더 시험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사탄이 [주]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참으로 사람이 자기의 모든 소유로 자기 생명을 바꾸리이다.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내미사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주의 얼굴 앞에서 주를 저주하리이다, 하매] (욥2:4~5). 우스 땅의 의인이요, 막강한 힘을 가졌던 부자요, 족장이었던 욥은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자신에 대해 오가는 이야기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지만 마귀의 존재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마귀는 욥에 관한한 예언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의 예상은 연거푸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욥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대해 무지했기에 자신에게 닥쳐오는 이런 일들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경우에 우리는 욥과 같이 일방적으로 마귀가 쏘아대는 불화살에 맞고 비틀거리는 예가 허다합니다. 마귀의 참소로 인해 빚어지는 비극은 현실에서 너무나 많습니다.
대언자 미가야는 아합 왕에게 하늘에서 벌어진 신탁 회의 한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대언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이르시되, 너는 그를 설득하겠고 또 이기리라. 나가서 그와 같이 하라, 하셨사오니 그러므로, 보소서, 이제 [주]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대언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주]께서 왕에 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하니라.](왕상22:22-23). 아합은 현실에서 적을 맞아 싸울 전략과 전술만 생각했지 저 위에 계신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아합은 하나님이 금지하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평범한 영적 진리를 간과한 채 살았습니다. 이는 오늘날 무신론자들이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우상 숭배자들의 공통점입니다. 성도들 역시 이런 관점이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 뒤에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고 마귀의 간섭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항상 영적 세계를 먼저 보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병이 났을 때 주님은 그 병이 마귀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꾸짖으셨습니다. [그분께서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시고 열병을 꾸짖으시니 병이 떠나고 즉시 그녀가 일어나 그들을 섬기니라.](눅4:39). 주님께서 열병을 꾸짖으신 것은 마귀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셨을 때 주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매우 고요하게 되거늘](마8:26). 이는 바람과 바다의 이면에 역사하는 마귀를 꾸짖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마귀들을 위엄과 권위로 꾸짖으시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함께 달려오는 것을 보시고 그 불결한 영을 꾸짖어 이르시되, 너 말 못하고 귀먹은 영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막9:25). 만약 마귀의 역사를 분별하지 못한다면 막연히 기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초지일관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셨으며, 그들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영적인 분별력, 통찰력이 요구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마귀를 멸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자녀들은 살과 피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에 참여하셨으니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히2:14).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이는 마귀가 처음부터 범죄하기 때문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마귀의 일들을 멸하려 하시는 것이라.](요일3:8). 주님은 복음을 전하시면서 끊임없이 마귀들과 싸우셨고, 십자가를 통해 마귀를 멸하시고 마귀의 일들을 멸하셨습니다. 성도들이 마귀의 비방과 고소에 시달리면서 싸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마귀의 종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을 통해 마귀의 일들을 멸하는 진정한 퇴마사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구원받는 순간 저주는 걷어지고, 하늘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으로 복을 받았기 때문에 아무도 저주 할 수 없습니다. 저주를 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성도들이 스스로 저주를 받도록 유도합니다. 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이들을 누가 저주한다고 저주가 임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여자를 저주받게 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죄를 범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죄에 대해 심판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성도들을 향해 마귀가 벌이는 주된 작전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민족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멸망에 빠뜨리고, 심판받게 하는 방법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자들을 누가 저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지니 이는 그들이 복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니라.](민22:12). 주님은 발락이 발람을 사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이방인 대언자 발람을 사용해서 기가 막힌 계략을 사용했습니다. 발람은 이미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이스라엘을 저주할 방법이 없음을 알고 스스로 저주를 받게 하는 계략을 내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여자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을 신전 제사에 초청해서 같이 먹고, 우상에게 절하게 하고, 신전 창녀들이 그들에게 성적 써비스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죄를 미워하시고, 진노하시며, 질투하시는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심판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압의 왕이 시팀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성대한 신전 제사를 베풀었고, 그들에게 먹을 것과 여자를 제공했으니 광야를 여행하던 이스라엘 남자들은 모두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시팀에 머무르더니 백성이 모압의 딸들과 행음(行淫)하기 시작하니라. 그 여인들이 자기 신들에게 희생물을 드릴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니라. 이스라엘이 스스로 바알브올에게 연합하므로 [주]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향해 /불같이/ 타오르니라.](민25:1~3). 이것이 마귀의 올무요, 계략입니다. 이 날 이스라엘이 죽은 수는 이만 사천 명이었습니다. [그 재앙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더라.] (민25:9). 발람은 자기 입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저주의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일의 숨은 영적 실체를 간파하지 못하고 그대로 그물에 걸려들듯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이는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나의 자식이 못된 짓을 했다는 사실을 일러 주고, 비방하면 나는 자식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들이 저지른 비행들을 남의 입을 통해 내가 알게 될 때 아들을 두둔하는 부모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지만 사정없이 징계하고 패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몇몇 정신없는 부모들은 그런 말을 들어도 애들 기죽인다면 그냥 두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마귀의 수법입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와서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가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보았다고 일러 주면 어떻게 됩니까? 사실 확인을 하기도 전에 이미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난리가 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방자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비방자 마귀는 자신이 손도 대지 않고도 훌륭하게 자신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데, 고소와 비방을 통해서입니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 가서 즉시 이 사실을 알려 주며, 그들이 멸망당하는 모습을 느긋하게 봅니다. 요셉은 한 때 형들이 하는 나쁜 짓을 모두 아버지 야곱에게 고소하는 일을 했습니다. [야곱의 세대들은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가 되어 자기 형들과 함께 양을 먹이더라. 이 소년이 자기 아버지의 아내인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함께 있을 때에 이들의 나쁜 행실을 자기 아버지에게 보고하니라.](창37:2).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점하면서 편애를 받으면서 자라났기 때문에 그는 형제애나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이나 넓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귀는 형제들의 시기심을 이용해서 그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통해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귀의 공격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귀의 공격을 허락하심으로 말씀을 보내 요셉을 단련하셨습니다. 이기심, 형제들을 고소하는 비방자 요셉, 편애로 말미암아 자아 중심적인 요셉을 죽음의 고통과 종으로서 고통과, 죄수로서의 혹독한 시련과 단련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원수들인 형제들에게 나타내 보일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 모세는 이만사천명이 죽는 바알브올의 사건의 이면에 숨어 있는 영적 실체를 정확히 알아보았습니다.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브올의 사건에서 [주]께 범법하게 하여 [주]의 회중 가운데 재앙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민31:16). 발람이 꾀를 내어서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법하게 하였고, 주의 회중 가운데 재앙이 일어나게 하였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일은 후에 미가의 증언으로 더욱 확실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오 내 백성아, /너는/ 시팀에서 길갈에 이르는 동안 모압 왕 발락이 의논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이제 기억할지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주]의 의(義)를 알게 하려 함이니라.](미6:5). 모압 왕 발락의 물음에 발람이 대답해 준 것이 바로 바알브올의 사건입니다. 요한 계시록 2:14에 [그러나 네게 몇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이는 거기에 발람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네게 있기 때문이로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하고 또 음행하게 하였느니라.](계2:14)고 말합니다. 발람의 교리는 우상 숭배의 교리입니다. 발람은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멸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상에게 희생물로 드린 것을 먹게 하고, 음행하게 하면 하나님이 복 주신 백성이라도 하나님의 진노에 죽게 된다는 진리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아들이요, 복을 준 백성이라도 죄를 범하면 심판하시는 하나님, 징계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 점은 마귀가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고 이용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저주를 받는 것은 대부분 발람의 계략에 걸려 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우상 숭배와 행음에 빠지게 했듯이 마귀는 여러분의 가족, 친지, 친구, 직장 동료들을 가르쳐서 우상 숭배와 행음에 빠지게 합니다. 그들은 우리 앞에 오락, 취미, 쾌락, 성공, 명성, 야망 등 다양한 걸림돌을 둡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발람들은 우리를 술집으로 데려 가기도 하고, 같이 여행을 가기도 하고, 같이 밤낚시를 가기도 하고, 멀리 라스베이거스로 가자고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표를 사 들고 와서 주기도 합니다. 돈 놀이가 아니라 재미로 치는 포커니까 같이 치자고 합니다. 마귀는 여러분과 안면이 있고,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수법을 가르쳐 주고, 여러분 앞에 놓아둡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걸려들어 스스로 저주받을 짓을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짓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스스로 불러 옵니다.
발람이 이스라엘 앞에 둔 우상 숭배와 음행은 현대인들이 스스로 주님의 심판과 저주를 불러들이는 가장 큰 범죄입니다. 신실한 성경 신자들도 자식, 교육, 돈 앞에서는 넙죽 엎드려 절하고 맙니다. 저는 직장 문제로 인해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가 없는 곳으로 미련 없이 이사하는 성도들을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어떤 자매는 믿지 않는 남자와 결혼해서 사는 것도 보았습니다. 자기를 먹여 줄 사람하고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살며 궁색하게 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작은 문제로 인해 교회를 떠났다가 영혼의 황폐함을 경험하며, 영적 고갈이 들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를 정하지 않고 이리 저리 뜨내기 같은 부초(浮草)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마귀는 이런 자들의 양심에 고소하고 비방하고 정죄할 때 그들은 이길 힘이 없습니다. 스스로 변명하거나 합리화하는 수 외에 한 가지 유일한 방법은 회개하는 것뿐입니다.
마귀는 자식 교육이란 우상을 세워두고 성도를 거기에 초청합니다. 성도들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학교를 찾아 집을 옮겨 다니고, 과외를 시키고, 직장을 옮겨 다니게 합니다. 저는 얼마 전에 쎄리토스 지역에서 공부 잘하기로 유명한 한 학생이 U.C 계열의 대학에 가지 않고 가까운 Cal State를 간 학생을 만났습니다. 공부 잘하기로 학교와 학부모들 사이에 소문난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동부든 이곳이든 어느 대학이고 모두 합격할 수 있는 수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단지 지금 다니는 교회에 자기 아버지와 함께 더 충실히 봉사하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학교를 가까운 곳으로 정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워서 지금 다니는 교회를 물었더니 “여호와의 증인”이었습니다. 저는 그 학생이나 그 부모가 “교육의 우상” 하나만은 확실히 떨쳐 내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반면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인들의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좀 더 나은 학군, 나은 학교를 보내는 것이 꿈이요, 목표입니다. 시험 한 과목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교회를 빠질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 교육이란 것이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버드나 예일이나 프린스턴이나 버클리를 가는 것을 기뻐하십니까? 그런 대학을 나온다고 좀 더 영적인 사람이 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됩니까? 이생의 자랑만 늘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眼目)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 다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났음이라.](요일2:16). 많은 신자들이 입시철이 다가오면 철야 기도회를 하고, 새벽 기도를 하는 등 요란을 떨지만 주님은 “인생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났다”고 응답하십니다. 그런 것을 추구하고 경쟁하는 자체가 우상 숭배입니다. “나의 아이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땅이 아니라 하늘,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추구하며 선하고 순수한 양심으로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열망하며 소원한다.”는 소원을 가진 부모가 아니라면 마귀의 비방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며, 마귀가 놓는 올무에 빠져 스스로 저주와 재앙을 불러 오고 말 것입니다.
미국의 의대를 졸업해서 의사가 된 형제가 있습니다. 부모의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의사 자격증을 따자마자 의료 선교사로 떠나 버렸습니다. 그 학생이 의대를 간 유일한 이유는 의료 선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신자였지만 그 아버지는 불신자였습니다. 이것은 라디오 코리아의 간증 시간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제가 그 아버지를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사람들 앞에서 자랑거리는 결코 인생의 본질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복음을 영접하고 구원받았습니다. 아들과 아내를 이해할 수 없어서 비방하던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교육이란 우상을 혁파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결코 교육이란 우상을 극복하지 못한 채 마귀의 비방을 받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발람의 계략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를 여행하는 이스라엘 앞에 발람이 놓은 우상 숭배와 음행의 잔치에 기꺼이 응했던 백성들처럼 많은 교인들이 동일한 죄에 자발적으로 빠지고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 옆에 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처음 신자가 되었을 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가까이 가면 갈수록 마귀 역시 당신에게 가까이 올 것입니다.’ 그는 갓 거듭난 성도로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전혀 몰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말의 의미를 잘 알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20세기 순회 설교자의 회고록이란 책을 통해 40년 이상 사역하면서 느꼈던 체험을 글로 썼는데, 자신이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비열하고, 사악하고, 더럽고, 추잡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 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비열함은 세상 사람들을 능가할 때가 많습니다. 학교 수업 시간이나 직장 출근 시간에도 결코 늦을 수 없을 사람들이 예배 시간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어길 수 있는지 저는 상상이 가지 않지만 엄연한 현실입니다. 상관이나 손윗사람들이 하는 명령에도 쉽게 거부하지 못할 사람들이 주님의 명령인 예배와 기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어깁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믿지만 몸은 여전히 마귀의 명령에 순종해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수두룩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도우시는 것처럼 마귀는 성도들 곁에서 비방하고 고소하며 대적합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주]의 천사 앞에 서 있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對敵)하는 것을 그분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3:1). 사탄은 끊임없이 성도들을 대적하고, 그 앞에 걸림돌을 두어 멸망하게 하려고 합니다.
누구나 고소를 받고, 비방을 받으면 힘이 빠지고 낙담하여 쓰러지기 쉽습니다. 마귀는 본격적인 공격에 앞서서 성도들을 비방함으로써 기선을 제압합니다. 마귀의 예표인 산헤립을 보십시오. 그는 유다의 성읍을 포위한 채 본격적인 공격에 앞서서 총대장 랍사게를 보내 하나님과 유대 왕 히스기야를 맹렬히 비방했습니다. [한편 산헤립의 신하들도 [주] 하나님과 그분의 종 히스기야를 더욱 비방하니라. 산헤립이 또 편지를 써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욕하고 비방하여 이르기를, 다른 땅의 민족들의 신들이 자기 백성을 내 손에서 건져 내지 못한 것같이 히스기야의 하나님도 자기 백성을 내 손에서 건져 내지 못하리라, 하고](대하32:16-17).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비방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비방을 통해 상대의 심리를 꺾어 놓으면 전쟁은 한결 쉬워집니다. 사기를 꺾어 버리면 기강이 무너지고, 탈영병이 속출합니다. 그들의 비방이 얼마나 가열차게 진행되었는지 보십시오. [그들이 예루살렘의 하나님 비방하기를 마치 땅의 백성들의 신들 곧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들을 비방하듯 하였더라.](대하32:19). 그들은 하나님을 우상의 하나처럼 비방했고, 사람들이 만든 신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했습니다. 백성들은 이들의 비방에 간담이 녹아 났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비방하는 이들에게 의로운 분노를 일으키며 맞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왜 비방을 했습니까? 간단하게 점령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유대인들의 말로 크게 소리질러 성벽 위에 있는 예루살렘 백성을 놀라게 하고 괴롭게 하여 그 도시를 점령하려 하였는데] (대하32:18). 비방하는 소리를 그대로 듣고 있으면 힘이 빠지고, 결국 마귀의 밥이 되고 맙니다. 단호하게 맞서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랍사게의 비방을 전술적 차원에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마귀의 비방이요, 모독이란 사실을 깨닫고 영적으로 대처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영적 전투의 교과서와 같습니다. 그는 대언자 이사야에게 영적 전투를 수행해 줄 것을 요청했고, 자신 역시 기도로써 영적 전투를 수행했습니다. [랍사게가 자기 주 아시리아 왕의 보냄을 받고 와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꾸짖었으니 주 당신의 하나님께서 그의 말들을 들으셨을 것이라. 주 당신의 하나님께서 그 들으신 말들을 꾸짖으실 터이니 그러므로 당신은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하여 당신의 기도를 올리소서, 하더이다, 하니라.] (왕하19:4). [[주]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주]여, 눈을 여시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꾸짖으려고 보낸 말들을 들으시옵소서.] (왕하19:16). 히스기야는 현실에 부딪힌 문제를 육신적으로, 현실적으로 해결하려 하는대신 영적으로 해결했습니다. 마귀가 벌이는 짓들을 정확히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맡겼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이스라엘 군대를 모독했을 때 모든 백성들이 낙담했지만 홀로 일어섰습니다. [다윗이 자기 옆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저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에게서 이 수치를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느냐? 이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에게 도전하려 하느냐? 하니](삼상17:26). 비방하는 대적자 마귀를 상대로 싸우는 본을 보여준 예가 바로 다윗입니다. 백성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골리앗은 적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는 모독하는 입을 가지고 하나님의 군대를 대적했지만 맞서 대적하는 다윗에게는 이길 수 없었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는 행위들을 보고 있다가 비성경적이고, 비양심적이고, 비윤리적일 때 여차 없이 비방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왜 저 모양이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왜 저러냐?고 비방합니다. 마귀가 비방하는 것은 우리가 목적하는 일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고, 도중에 포기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런 때에 좌절하고 낙담하는 대신 더욱 주님을 두려워함으로 걸어야 합니다. [내가 또 이르되, 너희가 행하는 바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원수 이교도들이 비방하므로 너희가 마땅히 우리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걸어야 할 것이 아니냐?](느5:9).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비성경적으로 행하는 일들이 원수 이교도들의 비방거리가 됨으로써 바른 행위를 하도록 권면했습니다. 우리는 원수들에게 비방거리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율법대로 살지 않았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어김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도다, 함과 같으니라.](롬2:23-24). 원수들은 우리를 비방하고, 모독할 거리를 부지런히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안가면 불신자들은 평소에는 가만히 있지만 반드시 언제가는 이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친구는 교회도 안 가는 친구니 신경 쓰지 말게!”, “그 친구 무늬만 기독교인이지, 날라리야!” 불신자들이 여러분을 향해 하는 소리입니다.
마귀가 비방하는 것은 주를 향해 결단한 일들을 도중에 포기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할 때 많은 비방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느헤미야가 작정한 성벽 재건을 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비방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를 고용한 목적은 나를 두렵게 하고 그렇게 하여 범죄하게 하며 또 악한 소문을 내려고 일을 만들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느니라.](느6:13). 마귀의 비방은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비방의 화살은 지도자나 목자에게 집중됩니다. 이는 이들을 쓰러뜨리면 모든 일을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자는 늘 비방의 표적입니다. 목자의 아내, 목자의 자식들 모두 비방의 사정 거리 내에 있습니다. 마귀는 몇몇 성도들의 비방하는 입을 통해 지역 교회를 공격합니다. 한국 교회 교인들은 유난히 목회자의 가족들에 대해서 말이 많습니다. 목회자 사모들 가운데 신경성 위장병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도 수두룩 합니다. 마귀의 비방, 모독, 고소가 빗발치는 화살처럼 날아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는 모세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세운 이스라엘의 목자였습니다. 누가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를 비방할 수 있을까 싶지만 실상은 오늘날 지역 교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과 동일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모세가 이디오피아 여인과 결혼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결혼한 그 이디오피아 여인으로 인하여 모세를 비방하니라.](민12:1). 모세의 아내가 비방거리에 올랐고, 그 문제는 곧 바로 모세를 비방하는 소재가 되었습니다. 모세를 비방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누이 미리암이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의 제사장 딸이었던 십보라와 결혼했다가 후에 재혼했는데 하필이면 같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디오피아 여인이었습니다. 이는 이방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하지만 이런 영적인 진리와 상관없이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비방자 마귀의 도구요, 대리자로 쓰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마귀는 미리암과 아론의 영적 질투심을 자극했고, 모세를 고소하고 비방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시기심은 마귀가 이용하기에 가장 좋은 무기입니다. 그들의 비방의 목적은 모세의 영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오직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시지 아니하였느냐? 하매 [주]께서 이 말을 들으시니라.](민12:2). 주님은 우리의 기도 소리, 신음 소리 하나까지 다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불평과 대적하는 음성, 비방하는 음성 역시 다 들으십니다. 주님은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하는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비방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고 비평하고, 욕하고, 깎아 내리고, 비방하지만 비방할 때 마다 우리는 마귀의 편에 섰음을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에게 이야기했지만 그 답변은 모세가 아닌 하나님께 들어야 했습니다. [그와는 내가 입에서 입으로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또 그는 [주]의 모습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민12:8). 여러분들이 누구를 비방할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비방하는 음성, 고소하는 음성, 불평하는 음성에 직접 응답하십니다. 저희 교회는 3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목자를 비방하는 일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목자인 저보다 가족들이 비방과 저주를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까닭 없는 저주는 떠도는 새와 날아가는 제비처럼 임하지 아니하느니라.](잠26:2)는 말씀을 붙들고 상처를 견뎠습니다. 그들이 지금 다 어디에 있습니까? 비방을 받던 저와 가족들은 아직 이 자리에 있지만 그들은 모두 흩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저를 비방했지만 나중에는 자기들끼리 서로 비방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모든 죄악을 서로 폭로하며 욕했습니다. 결국 상처를 입을 대로 입은 사람은 저가 아니라 비방을 일삼던 당사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모두 마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비방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부패시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비방하고 또 이성이 없는 짐승들같이 무엇이든지 본능으로만 알며 그것들로 인하여 스스로를 부패시키느니라.](유1:10).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비방했던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주님이 병을 고치고, 마귀 들린 자들을 쫓아내는 것을 보면 ‘마귀의 왕 바알세붑을 힘입어서 하는 것’이라고 비방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악령의 역사라고 비방했습니다. 그들은 고소거리를 찾아 눈을 번득였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분을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려 하시는가 지켜보거늘](눅6:7).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훌륭한 고소거리가 생깁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와 생명의 말씀에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책잡을 것을 찾았습니다. [그분을 기다리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책잡아 그분을 고소하고자 하더라.](눅11:54). 이것이 마귀의 역사입니다. 마귀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고소하고 비방할 거리를 찾아 나섭니다. 어느 교회가 부흥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주변 교회들에서는 축하해 주는 대신 목사의 학력, 경력 등 뒷조사를 시작합니다. 유언비어를 흘리고, 험담, 괴담은 토네이도처럼 성도들 사이에 번져 나갑니다. 예수님을 고소하던 무리들이 단 한 가지라도 사실에 근거해서 고소한 것이 있습니까? 단 하나도 사실이 없습니다. [그들의 온 무리가 일어나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소하기 시작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자를 보매 /우리/ 민족을 그릇되게 하고 카이사르에게 공세 내는 것을 금하며 스스로 그리스도 곧 왕이라 하더이다, 하매] (눅23:1~2). 주님은 자신을 고소하는 무리들과 맞서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대신 마귀들과 싸우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의 영적 배후를 정확히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는 너희가 나를 치려고 손을 내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시간이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눅22:53). 로마의 병사들, 바리새인들, 무리들의 함성 이 모든 것이 어둠의 권세가 임한 결과란 사실을 정확히 아셨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 일 역시 베드로의 연약한 육신을 틈타 공격하는 마귀의 짓임을 아셨습니다.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나와서 현관으로 들어가니 다른 하녀가 그를 보고 거기 있던 자들에게 이르되, 이 자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그가 또 맹세하고 부인하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뒤에 곁에 서 있던 자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확실히 그들과 한 패라. 이는 네 말투가 너를 드러내어 보여 주기 때문이라, 하거늘 그때에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기 시작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매 즉시 수탉이 울더라.] (마26:70~74). 베드로는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했습니다. 맹세하며 부인했고, 저주하여 맹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의 뒤에는 마귀가 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주}께서 이르시되,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갖기 원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뒤에 네 형제들을 굳세게 하라, 하시니](눅22:31-32). 주님께서는 마귀가 베드로와 제자들을 통해서 자신에게 할 일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미리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죄에 대해 책망하지 않으시고, 새롭게 제자로 받으시고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정체와 하는 짓을 알지 못할 때 사람을 원망하고 사람과 싸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싸워서는 아무 소득도 없습니다. 그런 때에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을 모독하고 비방했던 시므이를 보십시오. [시므이가 저주하며 이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리는 자여, 너 벨리알의 사람이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 집의 모든 피를 [주]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대신하여 네가 통치하였으나 [주]께서 왕국을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주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리는 자이므로 화를 당하느니라, 하니라.] (삼하16:7~8). 다윗을 벨리알의 사람이라고 저주했습니다. 살인자로 몰아 비방했습니다. 그의 비방은 정도가 좀 심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너는 신들을 욕하지 말며 네 백성의 치리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출22:28)고 말합니다. 흔히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배교했다, 마귀의 자식이란 말을 거침없이 쓰는 경우가 있는데 시므이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가 그의 맞은편에서 산비탈로 따라가며 그를 저주하고 그를 향해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 (삼하16:13). 다윗의 왕좌에 앉으실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인 다윗을 향해 마귀의 사역자인 시므이는 저주하며 비방했습니다. 존경을 받아야 할 왕이 벨리알의 자식이란 소리를 들으며 비방을 받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이 장면에서 분개했습니다. 당장 가서 시므이를 쳐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에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이르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원하건대 나로 하여금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매](삼하16:9). 그러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다윗은 이 문제를 시므이에게 고정하지 않고 영적으로 규정했습니다. 다윗은 이 문제를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문제로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상황임을 인식하고 모든 것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주]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말씀하셨음이니,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자기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보라, 내 몸에서 난 내 아들도 내 생명을 찾으려 하거늘 하물며 이제 이 베냐민 족속이랴? [주]께서 그에게 명하셨으니 그로 하여금 저주하게 내버려 두라. 혹시 [주]께서 내 고통을 보시리니 이 날 그의 저주로 인해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시리라, 하니라.](삼하16:10~12).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황당한 경우를 당할 때 주님의 허락하신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불평하기 쉽습니다.
참소하는 마귀의 비방을 잠재우려면 우리는 각별히 마귀의 활동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비난받지 않도록 애를 썼습니다. [이 사역이 비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우리가/ 어떤 일에서도 실족거리를 주지 아니하고](고후6:3). 우리 역시 마귀가 우리를 비난하지 못하도록 몇 가지 사항은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어김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2:23~24). 마귀는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며, 하나님께 고소합니다. 이 부분에 비방을 받으면 양심에 깨끗함과 담대함이 없어집니다. 믿음의 순수함이 사라집니다. 위선자란 고소에 시달리게 됩니다.
둘째, 종들은 자기 주인을 존경해야 합니다.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다 자기 주인들을 매우 존경할 자로 여길지니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교리가 모독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딤전6:1). 그렇지 않으면 종업원이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성경의 교리가 모독을 받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채용했는데 엉망이야! 그리스도인이라면 성실하고 정직할 줄 알았더니 개판이야! 이런 말은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순수하고 건전한 가르침인 성경의 말씀을 모독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면접 시험에서 “기독교인”이란 점 하나가 advantage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는 것이 부담스러운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뭔가 나은 점은 없고 종교를 핑계로 권리만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어떤 회사의 직원이 되면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할 뿐 아니라 복종을 실천해야 하며, 주인을 존경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방자 마귀의 격렬한 비방을 받습니다.
셋째,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신중하며 정숙하고 가정을 지키며 선하고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독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딛2:5). 세상 사람들은 성경의 내용이나 교리에 큰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보고 판단합니다. 성도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불신자는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불신자들이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도들의 가정생활, 특히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말투, 태도 등입니다. 그리스도인 아내의 행실은 곧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척도가 됩니다. 자매들은 이 점을 각별히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 남편에게 불순종하고 반역하는 아내들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모독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넷째, 성도들이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고 대할 때 하나님의 이름은 모독을 받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겼도다. 부자들은 너희를 학대하고 재판석 앞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를 부를 때 쓰는 그 귀한 이름을 모독하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성경에 따라,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왕가의 법을 성취하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의 외모에 관심을 두면 죄를 범하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확정하리라.] (약2:6~9).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대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외모로 사람을 대합니다. 상대가 지위가 있던가? 돈이 있던가? 집안 배경이 있던가?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으면 대우를 받지만 그렇지 못하면 대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약 교회 내에서도 동일한 잣대로 사람을 대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마귀의 비난거리가 됩니다. 참소할 것을 찾아 밤낮 하나님께 우리를 비방하는 마귀에게 건수를 제공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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