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묵상과 경건


시험하는 자 마귀
말씀. 살전3:5, 



말씀: 살전3:5 요절: 살전3:5

오늘은 다 같이 시험하는 자 마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고 공부하겠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잘못된 영적 지식 가운데 하나는 시험하시는 하나님과 시험하는 자 마귀의 시험에 관한 것들입니다. 특히 한국의 교회와 교인들은 ‘시험에 들었다, 시험에 빠졌다’와 같은 말을 관용적으로 사용할 정도로 익숙한 말입니다. 시험에 드는 유형도 여러 가지입니다. 하지만 ‘시험’이란 말만큼 오용되고 남용되는 말도 드물 것입니다.

마귀는 시험하는 자입니다. 주님은 마귀의 정체를 시험하는 자라고 규정하십니다. 광야에서 40일간 금식을 하실 때 마귀가 주님을 찾아와 시험을 했습니다. [그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명령하여 빵이 되게 하라, 하거늘] (마4:3). 주님은 ‘마귀’ 또는 ‘사탄’이라고 해야 할 그곳에 ‘그 시험하는 자’라고 말씀하심으로 마귀의 정체에 대한 한 단면을 정확하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마귀는 시험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광야에서 주님을 세 차례나 시험하셨습니다. 40일간 주리신 주님에게 한 첫 번째 시험은 돌들을 빵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누구도 이런 시험을 받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귀는 저와 여러분에게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이런 시험을 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그 사람의 능력과 정체성에 맞게 시험합니다. 주린 사람에게는 빵으로, 목마른 자에게는 물로, 장사꾼에게는 돈으로, 주정뱅이에게는 술로, 탐미주의자들에게는 쾌락의 유희로 시험합니다. 학문에만 전념하는 사람들에게는 끊임없이 새로운 이론과 연구 결과에 대한 유혹과 시험이 있습니다. 운동 선수들에게는 새로운 기록에 대한 유혹과 시험이 있습니다. 목회자들에게는 좀 더 영적이고 신령한 권능에 대한 유혹과 시험이 있습니다. 작곡가나 화가들에게는 좀 더 풍성한 영감, 상상력, 창의성에 대한 시험과 유혹이 있습니다. 어떤 교수들이 남의 책이나 연구 결과를 베껴서 발표하였다가 망신을 당한 예들이 간간히 발표되는데 이런 모든 것들이 마귀의 시험인 것입니다.

마귀는 에덴의 여자에게 다가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시험했습니다. 창세기 3:1을 보십시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놀랍기만 합니다. [이때에 뱀은 [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들의 어떤 짐승보다 간교하더라. 그가 여자에게 이르되,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동산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니] (창3:1). 마귀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엇을 명하셨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먹지 말라 하시더냐?’이렇게 물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무엇을 먹지 말라고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 역시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미 상식적으로 알고,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마귀가 질문을 던지며 시험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무너진다는 점입니다. 마귀의 질문은 간교합니다. 여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자신이 믿고 있는 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마귀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께서 아시느니라, 하니] (창3:4~5).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시험은 의심을 던져 준 다음에 거짓을 던져 주고, 그것을 확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귀를 시험하는 자(tempter)라고 말합니다. 시험의 목적은 죄를 짓게 하는 것이며,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여러분이 그동안 배우고, 알고, 믿고 있는 바에 대해서 시험에 들고 패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주일에 예배를 드리러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서 못 나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배를 드리러 가지 않아도 되는 수많은 예외 조항을 스스로 만들어서 언제든지 빠질 준비를 갖추어 두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구제하는 일 등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서 시험에 드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고, 믿고 있는 바를 하지 못하는 것은 저 시험자 마귀가 속삭이는 속삭임에 동조한 결과입니다. 정직하고, 순수하고, 경건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성도가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왜 부정직하고 불순하고 불경건하고 불의하고 더럽게 삽니까? 저 시험자 마귀가 속삭이는 속삭임에 동조한 결과입니다. 여러분이 마귀의 속삭임에 대해서, 여러분이 지극히 상식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성경적 사실들에 대해서 단호히 NO라고 말하지 못하면 이미 시험에 든 것이며, 패배한 것입니다.

시험자 마귀는 광야에 계신 주님께 찾아왔듯이 에덴의 동산에 있는 여자에게 찾아 왔듯이 각 성도들을 직접 찾아옵니다. 그곳은 금식하며 기도하는 현장일 수도 있고, 에덴의 낙원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여러분의 침실이나 거실일 수도 있고 일하는 일터나 마켓이나 자동차 안이나 교회일 수도 있습니다. 마귀가 조용히 찾아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매주 교회에 나가서 꼭 주일 예배를 드리라고 하시더냐?’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헌금을 하라고 하시더냐?’라고 의심을 던집니다. 그 때에 여러분이 우물쭈물 대답하며 생각이 방황할 때 마귀는 즉시 거짓을 말해 주고 거기에 확신을 더해 줍니다. 마귀는 성도 개개인을 시험하기 위해 찾아 와서 이것저것 시험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인들을 찾아오는 시험자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이런 까닭에 내가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아보려고 /사람을/ 보내었노니 이는 저 시험하는 자가 어찌하든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의 수고를 헛되게 할까 염려함이라.](살전3:5). 마귀는 사도들의 사역, 즉 말씀의 사역을 헛되게 합니다. 성도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고, 뒤집어엎습니다. 거짓 교사들을 보내 거짓 교리를 전파시킵니다.

시험하는 자가 왔을 때 우리는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지니고,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아무 대비도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은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마귀의 시험은 다양합니다. [비록 지금은 필요가 있어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하여 잠시 근심하고 있으나 오히려 그 구원을 크게 기뻐하나니] (벧전1:6). 시험이 들면 근심과 염려가 찾아 듭니다. 근심은 시험이 든 결과가 내면으로, 밖으로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시험은 왜 옵니까? ‘지금은 필요가 있어’- 우리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것 같은데 주님은 그것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시험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직접 시험하시기도 하시고, 마귀를 통해 시험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욥과 같은 의인에게도 시험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통해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동방의 의인 욥에게 시험이 필요했다면 저와 여러분에게 시험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직접 시험하셨습니다. [이 일들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에게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창22:1).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지만(righteous-it comes by faith.), 시험을 통과한 후에 진정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justified-it comes by works as well as faith. 약2:21).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지만 순종을 통해 의를 인침 받고, 인정받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시험을 통해 정금같이 연단 받았습니다. 시험은 좋은 것입니다. 시험을 통해서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되고, 속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는 나의 숨은 동기와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은 시험의 와중에서도 자신의 더러움이나 불의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는 욥이 이르기를, 내가 의롭거늘 하나님께서 나에 대한 정당한 판결을 빼앗아 가셨도다.](욥34:5)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욥은 자신이 의롭고 자신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의롭다 하기 때문이요,](욥32:2b). [나는 범죄가 없이 깨끗하며 무죄하고 내 안에는 불법도 없거늘 보라, 그분께서 나를 대적할 기회들을 찾으시며 나를 자신의 원수로 여기사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내 모든 행로를 주목하신다, 하였느니라.](욥33:9~11). 그러나 그가 시험을 받은 후에 자신을 혐오할 만큼 자신의 죄악됨과 더러움을 보고 회개했습니다(욥42:6).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더라.](욥42:6).

하나님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직접 시험하셨습니다. 시험을 통해서 연단이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다 기쁨으로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이루는 줄 너희가 알기 때문이라. 오직 인내를 완전히 이루라.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완전하고 완벽하여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1:2~4). 시험은 믿음의 시련을 이루고, 인내를 이루고, 그 결과 ‘완전하고 완벽하여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시험을 주시는 이유요, 목적입니다. 또 한 가지 목적은 생명의 왕관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시험을 견디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그가 단련을 받은 뒤에 {주}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왕관을 받을 것임이라.](약1:12). 시험이 왔을 때 우리는 기뻐하고, 복을 받은 상태라는 것을 알고 환호해야 마땅합니다.

어떤 교회는 하나님은 성도들을 시험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시험은 test이고 마귀의 시험은 tempt이다.’라고 그럴싸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킹 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tempt(시험)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주]께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보여 주시므로 그가 그것을 물들에 던지매 물들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규와 규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시며](출15:2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셨습니다. 성경에 능숙하지 못한 어린 신자들은 이런 부분에 헷갈려 합니다. 여러분들은 시험하려고 오는 마귀의 시험을 견뎌 이겨내야 할 뿐 아니라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시험 역시 이겨야 합니다. 시험에 빠지고, 실패하면 주님은 여러분에게 그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재시험을 보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 온 시험에는 실패했지만 후에 이삭을 드리는 시험에는 통과했습니다. 야곱은 계속되는 시험에서 자신의 육신을 의지함으로 실패했지만 요셉을 잃고, 베냐민까지 잃게 되자 그는 믿음으로 주님만을 의지하고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에는 반드시 이길 힘과 피할 길이 함께 주어집니다. 마귀가 아무리 우리를 시험해도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주님의 허락하신 범위 내에 있으며, 주님의 통제 안에 있습니다.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시험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하여금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우리의 한도를 벗어나는 시험은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시험이 와도 피할 길을 함께 내심으로 감당할 수 있게 하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죽을 것 같은 위기나 시험을 당해 보지 않는 분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모두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을 지나간 추억으로 생각하며 회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피할 길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꼭 망해서 완전히 죽을 것만 같았지만 그 때마다 예상치 못한 절묘한 해결책이 생기고, 다른 길이 열린 경험이 없는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과 마귀의 시험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마귀는 속이고, 멸하고, 죽이기 위해 시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험은 믿음의 시련이며, 인내를 이루는 것이며, 완전하고 완벽하여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함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풍성하시고 넘치시는 하나님께서 시험을 통과하게 하신 후에야 우리는 넘치도록 풍성하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고는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나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평안한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로 주님을 두려워 할 줄 알게 하시며, 선한 목자이심을 알고 전적으로 신뢰하게 하시기 위해 시험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시험하시지만 결코 악으로 시험하시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이는 하나님은 악으로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악으로-with evil)시험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니라.](약1:13). 마귀는 악으로 시험을 합니다. 주님은 악으로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악으로 시험하는 것은 악으로 유혹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악으로 누구를 시험하지 않으시며, 악으로 시험받지 않으십니다. 마귀는 악으로 시험하며, 성도들은 악으로 시험을 받습니다. 이는 우리 안에 육신의 정욕, 죄성, 옛 본성이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잠깐 시험의 종류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말에 ‘시험하다’란 말은 다양한 의미로 쓰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에는 try, tempt, prove, examine이 쓰였고, 흔히 말하는 test란 단어는 쓰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마음을 시험하시는데 이때는 주로 try(시험, 단련, 연단)란 단어가 쓰입니다. 반면 마귀가 우리를 시험할 때 시험하다는 말은 tempt(유혹, 미혹)입니다. 자기가 자신의 능력을 검증하거나 알아보기 위한 시험은 prove(입증)입니다.

우리는 매일 시험을 받으며 삽니다. 마귀가 살아 있고, 내 육신 안에 죄와 욕심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짓는 죄는 결코 마귀의 책임만은 아닙니다. 마귀의 유혹(시험)과 나의 욕심의 합작품입니다. 욕심이 있으면 유혹에 이끌립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 없을 때 시험하는 자가 아무리 시험을 해도 반응이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있은 상태에서는 어떤 시험도 유혹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묻혀서 장사지낸 무덤 앞에서 유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마귀 역시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다면 시험은 필수적입니다. 정욕은 하나지만 드러나는 방식은 다릅니다. 자동차 마니아는 좋은 차만 보면 유혹을 받습니다. 골동품 수집가들은 오래된 고서화나 진귀한 물품들을 보면 유혹을 받습니다. 술꾼들은 좋은 술이라면 어쩔 줄을 모릅니다. 칼잡이들은 좋은 칼을 소장하고 싶어 합니다. 여자들은 보석과 화장품 등 자신을 예쁘게 꾸밀 수 있는 것에 유혹을 받습니다. 남자들은 주로 명예나 권세, 부에 유혹을 받습니다. 형태는 다르게 나타나지만 뿌리는 ‘육신의 정욕, 자아’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① 자신의 욕심 때문에 마귀의 시험에 빠집니다. [오직 사람마다 자기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을 받을 때에 시험을 받나니](약1:14). 욕심에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심에 이끌린 시험은 백해무익(百害無益)합니다. 시간과 정열을 소비하며, 간증을 잃어버리며, 마음의 평안과 기쁨이 소멸됩니다. 자기 안에 있는 욕심으로 인해 시험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간이 그러했고, 게하시가 그러했습니다. 눈 먼 돈에 탐욕을 부리다가 이들은 저주를 받아 돌에 맞아 죽었고, 게하시는 문둥병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욕심에 이끌려 유혹을 받을 때에 시험을 받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자주 빠지는 시험 역시 마음속에 있는 욕심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욕심은 자신이 인정받고 싶은데서 출발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 특히 가까운 지인(知人)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욕심은 유교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강하게 작동합니다. 이런 사람은 신앙심 조차도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인정받으려면 주님께 인정받아야 합니다. [이는 자기를 추천하는 자가 인정받지 아니하고 오직 {주}께서 추천하시는 자가 인정받기 때문이라.](고후10:18). 돈 욕심이 많은 사람, 명예욕이 강한 사람, 공부 욕심이 많은 사람... 등 욕심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납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성취가 아닙니다. 돈을 벌어서 어떻게 사용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성취입니다.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성취가 아닙니다. 몇몇 한국 부모들은 워낙에 무식한지라 자기 자식이 좋은 대학을 간 것이 성취요, 성공인 줄 압니다. 좋은 대학은 성취를 이루기 위해 나가는 한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이 좋은 대학에 입학하면 자신이 할 일을 다 이룬 것 같이 기뻐하고, 그 아이는 자신이 뭔가를 성취한 것처럼 자랑스럽게 교만을 떠는데 미국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학에 들어가는 우수한 성적이 성취가 아니라, 그 우수한 학업 성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서 무슨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것인가는 나중 문제입니다. 전혀 대학을 가지 않고도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학생 시절 내내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을 나온 후에도 자기가 먹고 사는 일 외에는 전혀 성취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저는 교회에서나 밖에서나 꼭 자식 교육 문제 이야기만 나오면 거품을 물며 덤벼드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들은 대부분 학교에서 공부를 제대로 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거나 공부를 잘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공부를 제대로 열심히 해 본 부모들은 결코 학교 공부에 큰 기대를 걸지 않으며, 거기에 기대 수치를 높이지 않습니다. 학교 교육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저 하늘에서 ‘너는 어느 대학 출신이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성취를 이루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는 것이 진정한 성취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인정받습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무디 목사님은 초등학교 졸업자였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어떤 사람보다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입니다. 스펄젼 목사 역시 대학 부근에도 못 갔지만 그만한 위대한 성취를 이룬 인물이 드뭅니다. 쟌 번연을 보십시오. 12년간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했지만 그는 60여권의 책을 저술했고, 그 중에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이란 책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대부분 빈민층에 저소득 생활자들이었지만 세계 선교의 불을 지핀 위대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명문대 출신의 귀족들이나 거부들보다 주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았고, 복된 생애를 누렸습니다. 주님께 인정받으려고 사는 사람들은 결코 자기 안에 있는 욕심으로 인해 시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이 인정을 받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왕국이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喜樂)이기 때문이라. 이러한 것들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며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느니라.] (롬14:17~18).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물질의 탐욕은 시험에 빠지게 하지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결코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부족을 채워주고, 영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들은 인정을 받습니다.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이는 그들이 너희 편에서의 부족한 것을 채워 주었음이요, 또 나와 너희의 영을 시원하게 하였음이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러한 사람들을 인정하라.](고전16:17-18).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와 같은 사람들은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었지만 역사상 어떤 위인보다 더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성경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런 자들을 인정하라는 명령이 주어진 본입니다. 우리는 나폴레옹이나 징기스칸, 알렉산더를 존경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스데바나와 브드나도는 존경해야 합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이 존경을 받는가? 어떤 부류의 사람을 인정하는가? 는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존경받는 것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 교회 내에서도 존경받는다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교회에서도 인정받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무익한 마귀의 시험에는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마6:13a)라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참으로 영은 원하되 육이 약하도다, 하시고](마26:41). 시험에 빠지는 일은 마치 새가 그물에 걸린 것처럼, 짐승이 올무에 걸린 것처럼 힘들고 괴롭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을 기뻐하고 견디되, 마귀의 시험에는 단호히 배척하고 이겨야 하며,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빠져드는 시험은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침을 받아 회개해야 합니다.

② 현재 상태에 만족하지 못할 때 마귀의 시험에 빠집니다. 마귀는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제시하며 유혹합니다. 이는 에덴의 여자가 받았던 시험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께서 아시느니라, 하니](창3:5). 좀 나은 연봉, 좀 더 나은 환경, 좀 더 인정받는 분야, 좀 더 넓은 집, 좀 더 높은 학위, 좀 더 큰 교회 등등, ‘좀 더’란 말은 마귀가 육신의 정욕을 자극하는 무기이며, 단골 메뉴입니다. 그러다 보면 ‘좀 더 좋은 아내/남편’까지 나옵니다. 마귀는 주님이 주신 것을 불만족하도록 시험하며, 좀 더 욕심을 부리도록 시험합니다. 주님이 주신 것들에 대해서 불평할 때 마귀는 즉시 시험자가 되어서 시험하러 옵니다. 만족하지 못하면 마귀의 시험은 즉시 찾아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 이는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대로 만족하기를 배웠음이라.](빌4:11). 자신의 현재 상태에 만족하십시오. 못난 인물이면 그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현재의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에게 만족하십시오. 탐심을 통해 죄악이 오고, 마귀의 시험이 들어옵니다. [너희 행실을 탐욕이 없게 하고 너희가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 이는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라.](히13:5).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가장 하기 힘든 설교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기 위해서 뭔가를 추구하는 이 시대에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라는 말은 삶의 의욕을 접으라는 말과도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명령입니다. 만족할 때 감사와 찬양이 있지만 불만족할 때는 불평과 투덜거림만 나옵니다.

③ 부유하게 되고자 할 때 마귀의 시험에 빠집니다. 오늘날 마귀가 가장 쉽게 시험하는 것이 ‘부자가 되라’는 속삭임입니다. ‘부자 아빠가 되는 법’이란 책은 전 세계의 best seller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족함이 있는 경건은 큰 이득이 되나니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아니하였은즉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라.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 그러나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6:6~9). 자신의 소유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시험과 올무에 걸린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이지만 이것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스스로 파멸과 멸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침례인 요한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이 부분을 설교했습니다. [군사들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아무도 폭행하지 말고 아무도 거짓으로 고소하지 말며 너희가 받는 급료(給料)로 만족하라, 하니라.](눅3:14). 로마의 식민지 상태에서 유대인 군사들이 받는 월급은 생활고를 해결하기도 벅찬 수준입니다. 어느 사회나 사병들의 월급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미국처럼 직업 군인 제도 아래 근무하는 군인들은 급료로 충분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군인들의 월급은 박봉입니다. 하지만 침례인 요한은 그런 군인들을 향해 ‘너희가 받는 급료로 만족하라’ 했습니다. 만족함이 없으면 시험에 들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급히 부자가 되려 하는 자는 악한 눈을 가졌나니 그는 궁핍이 자기 위에 임할 줄을 깊이 생각하지도 못하느니라.](잠28:22).

④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마귀의 시험에 빠집니다. 말씀은 마음의 밭에 깊이 뿌리 내려야 성장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바위 위에 있는 자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시만 믿다가 시험의 때에 배교하는 자들이요,](눅8:13). 평소에는 교회를 잘 다니고, 믿음이 있어 보이지만 시험의 때가 되면 배교해 버립니다. 마음속에 간직된 하나님의 말씀은 낱 알갱이로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은 개념이나 아이디어, 사상으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말씀은 믿음을 통해서 사랑 안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 속에 거하게 하옵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엡3:17).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과 사랑과 결합되지 않으면 뿌리가 없는 나무처럼 곧 시들고 맙니다. 자신은 물론이고 아무 사람의 덕도 세우지 못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 안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세움을 받아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넘치도록 감사를 드리라.](골2:7). 말씀을 나의 지성과 경험 위에 두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전통, 철학, 과학 위에서는 자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립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간직된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면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양분을 끊임없이 공급받을 수 있으며, 자연스럽게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입니다. 생명의 현상을 노력과 애씀으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헌신적이고 열성적인 성도들이 겪는 많은 시험은 주님 안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자연스럽게 받아야 할 주님의 힘과 능력, 지혜와 같은 생명의 결과를 인간적인 힘과 노력으로 대신하려는데서 발생합니다. 종교적 열심은 자기 의를 쌓을 뿐 시험의 때에는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⑤ 부부 간에 의무를 다하지 못할 때 마귀의 시험에 빠집니다. [너희는 서로를 속여 권리를 빼앗지 말라. 다만 너희가 금식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동의를 구해 얼마 동안은 그리하되 다시 서로 합하라. 이것은 너희가 참지 못하므로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7:5). 정상적인 성인 남자와 여자들은 모두 성욕이 있습니다. 결혼한 남자와 여자가 금식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합의상 잠시 떨어져 있는 것 외에 다른 이유로 떨어져 지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성적인 범죄로부터 자신을 지키는데 있습니다. 결혼의 고상한 목적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결혼의 1차적 목적은 정욕으로부터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마귀의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정상적인 부부 관계의 파괴와 상호 의무의 소홀로 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시험에 빠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젊은 여자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결혼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노처녀가 다 되도록 시집가지 않고 교회에 나타나면 여러 사람을 시험에 빠지게 합니다. 노처녀들, 과부들이 많은 교회치고 영적으로 건강한 교회가 드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둘에 대한 명령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젊은 여자들이 결혼해서 자녀들을 낳고 가정을 지키고 대적(對敵)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딤전5:14). [그러나 그들이 억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게 하라. 이는 불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라.](고전7:9).

⑥ 기도하지 않을 때 마귀의 시험에 빠집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참으로 영은 원하되 육이 약하도다, 하시고](막14:38). 기도하지 않고도 시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귀는 성도가 기도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어떤 명령보다도 기도하라는 명령이 많고,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이 기도임을 말씀해 줍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해야 하는 이유로 ‘시험에 빠지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이런 명령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기도하는 대신 잠을 잤습니다. 그 때 주님은 잠자는 제자들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빠지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눅22:46). 시험에 든 후에 시험에서 깨어나는 것보다 시험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8), [항상 기도하고 기도 중에 감사를 드리며 깨어 있으라.](골4:2)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마귀가 주는 시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을 피하고 사람의 아들 앞에 서기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21:36). 여기서 ‘이 모든 일을 피하고’란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믿음으로 이겨야 할 일, 극복해야 할 일이 있는 반면 피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모든 일을 다 이기고, 승리하면 좋겠지만 깨어 기도함으로 피해야 할 일은 피하는 것은 더욱 좋습니다. 기도는 시험을 이기는 승리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불필요한 모든 시험을 피하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많은 시험은 아예 당하지 않아도 될 만한, 미리 피할 수 있는 것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음으로써 마귀의 시험에 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가 피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배운 교리를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는 형제들을 피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를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실족하게 하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피하라.](롬16:17). 뜨겁게 형제애로 사랑하고, 짐을 서로 나누어지고, 보살펴 주어야 할 형제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상대하지 말고 피해야 할 형제들이 있습니다.

둘째, 음행은 피해야 할 죄입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행하는 모든 죄는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짓느니라.](고전6:18). 요셉은 정욕과 맞붙어 싸운 것이 아니라 피했습니다. 음행은 피해야 할 죄입니다. 근처에 가면 안 되며, 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도 자기 옷을 태우지 아니할 수 있겠느냐?](잠6:27).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젊은이들은 결혼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둘지니라.](고전7:2). 독신의 은사가 없는 한 결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젊은이들이 많은 시간을 연애질을 하면서 어두운 영화관, 술집, 나이트클럽, 인터넷 등에 빠져서 정욕을 불태우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청년의 정욕은 피해야 하는데 그 피난처가 결혼입니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2:22).

셋째, 우상 숭배를 피해야 합니다. [그런즉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를 피하라.](고전10:14). 우상 숭배는 피해야 할 죄입니다. 단체적으로 움직일 때 거기서 빠져 나오는 것이 상책입니다. 술과 향락으로 도배되는 놀이 모임, 친목회, 잔치 등은 참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 가서 홀로 빛과 소금이 되겠다고 시건방진 생각을 하지 말고 아예 발을 금하여 가지 말고, 앉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속되고 헛된 말장난과 과학의 반론을 피해야 합니다. [오 디모데야, 속되고 헛된 말장난과 거짓되이 과학이라 불리는 것의 반론들을 피하며 네게 맡긴 것들을 지키라.](딤전6:20). 속되고 헛된 말장난은 주로 철학입니다. 전통, 문화, 문학, 예술, 철학이라고 하는 것들은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이며, 인본주의입니다. [오직 /너는/ 속되고 헛된 말장난들을 피하라. 그것들은 점점 더 경건치 아니함으로 나아가느니라.](딤후2:16). 어리 석은 변론, 족보 등에 대해서 따지는 것 역시 피해야 할 죄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와 논쟁과 율법에 관한 다툼들은 피하라. 그 까닭은 이것들이 무익하고 헛되기 때문이니라.](딛3:9). 여러분이 성경의 족보와 연대기 연구에 빠지기 시작하면 미로 속에만 헤매다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은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고 있지만 모든 연대기를 다 기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이런 부분을 통해 시험에 빠지게 합니다. 그리고 과학의 반론을 피하십시오. 이런 것들은 성도들을 시험하기 위해 마귀가 동원하는 무기들입니다. 과학적으로 따지는 사람들 앞에서 논쟁을 벌이는 것만큼 무익한 일이 없습니다. 과학의 반론을 펼치면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다섯째,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들을 피하십시오. [오직 /너는/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들을 피하라. 너도 알거니와 그것들은 다툼을 일으키느니라.](딤후2:23). 때로 복음을 논리적으로 변증해서 상대방을 꺾어서 믿게 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똑똑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음, 하나님의 연약함, 성령의 확신보다는 논리, 이성, 지식, 신학으로 무장해서 듣는 이를 묵사발 내 버리겠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마귀의 시험 속에 빠진 것입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사람의 지혜의 유혹하는 말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과 권능을 실증(實證)함으로 한 것이니 이것은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있게 하려 함이라.] (고전2:4~5).

깨어 기도함으로써 이런 모든 것에서 피할 수 있습니다. 피해야 할 것들에 깊이 연루되어 시간을 낭비하고 같이 시험에 드는 성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어떤 시험도 이길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그런 시험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시고 완전하게 하시며, 생명의 왕관을 주십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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