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혼란의 창시자 마귀
말씀. 고전14:33


오늘은 다 같이 혼란의 창시자 마귀에 대해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우주는 정교하고도 오묘한 질서 속에서 운행되고 있습니다. 천체 물리학자들이나 무한 광대한 우주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혼돈스러워 보이는 우주가 놀랍도록 정교하며, 신비한 질서 속에 운행되고 있음에 놀랍니다. 아무리 작은 미생물이나 길가의 풀 잎 한 개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어떤 사람의 정교한 설계로도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질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처럼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이시기 때문이라.](고전14:33). 질서와 조화는 주님의 성품이요, 능력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혼란, 혼동을 불러일으키는 혼란의 창시자입니다. 혼란과 혼동, 무질서와 부조화는 마귀의 성품이요, 마귀의 역사입니다.

우리 주변의 일이 무질서와 부조화로 가득하다면 먼저 헝클어진 일을 바로 잡기 전에 내 마음 속에 질서와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마음속이 질서와 조화, 화평으로 가득하다면 무질서한 일, 혼란스러운 사건을 바로 잡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불안하고, 혼란스럽다면 어떤 일도 혼란스럽고, 혼동이 오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혼들의 마음은 무엇이든지 혼란과 혼동으로 가득합니다. 누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 시키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혼잡 시켜 버리신다’라고 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성령 충만하고 말씀을 믿는 믿음의 소유자들은 결코 마음에 혼란이 없고, 화평과 질서가 있게 마련입니다. 마귀는 마음 속에 혼란을 주고, 일을 혼잡스럽게 만들어 버립니다.

누구나 성령을 소멸할 때 혼란과 혼동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안에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을 거역함으로 성령을 근심케 하고, 주님께 불순종함으로 성령을 슬프시게 하며, 육신으로 믿음을 대체하여 성령을 억누르고, 말씀을 소홀히 함으로써 성령을 거역할 때 평안과 기쁨은 사라지고 근심과 혼동, 혼란이 마음 속을 지배하게 됩니다. 마귀는 혼란의 영입니다. 혼동케 합니다. 사울 왕을 보십시오. 그는 마귀 들렸을 때 마음 속이 불안하고 번민에 찼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보다 다윗을 잡아 죽이는 일이 먼저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후로 그의 행로는 혼동의 연속이며, 실수 연발이었습니다. 하는 일마다 자충수요,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마음의 평안이 없고, 질서가 없었습니다. 마음이 불안과 무질서와 혼동으로 가득했던 사울이 아들 요나단에게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이에 사울의 분노가 요나단을 향해 /불같이/ 타오르매 그가 요나단에게 이르되, 사악하고 반역하는 계집의 아들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게 혼란을 가져오고 또 네 어머니를 벌거벗기는 혼란을 가져오는 줄 어찌 내가 알지 못하랴?](삼상20:30). 요나단의 마음은 조금도 혼란이 없었습니다. 혼란을 가져왔던 사람은 요나단이 아니라 사울 자신이었습니다. 사울은 악한 영에게 사로 잡혀 건전한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사울이 혼동에 빠진 것은 성령을 소멸하고 악한 영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신뢰할 때 혼동에 빠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쉽게 마귀에게 속는 부분이 자신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육신을 자극하고, 자아를 높이고, 자신을 신뢰하게 함으로 혼란을 조장합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감이 성공의 필수 요건이요, 사회 생활을 영위하는데 매우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감(自信感)은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이나 이외의 변수가 등장하면 한 순간에 무너지고 혼란과 혼동에 빠지게 됩니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갖게 함으로 교만을 부추기고 한 순간에 그것을 무너뜨림으로써 정신적 공황을 유발하며 극심한 우울증에 걸리게 하기도 하고 실의(失意)에 빠져서 방황하게 하며, 자살에 이르게 하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자신감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主信感]이 넘쳐야 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넘칠 때 자신의 연약함, 무지, 무능력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는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뻐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자이기 때문이라. 비록 내가 육체를 신뢰할 만도 하지만 /그리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어떤 사람이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 자기에게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빌3:3-4). 사도 바울은 자신감이 넘칠만한 사람이었지만 육체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이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훈련과 시련의 대부분은 이 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우리 속에 사형 선고를 받았느니라.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1:9).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될 때 마음은 혼동이 없고 질서와 조화 속에 평안히 거하게 됩니다.

사람의 모든 문제는 자아(自我)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혼란의 원흉은 자아(自我)에서 기인됩니다. 마귀는 자아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혼란을 조장하고, 혼동 속에 빠뜨립니다. 마귀가 혼란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높이고 보호하려는 강한 본성 때문입니다. 자기를 죽기까지 미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자존심이란 자아를 높이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상했다는 것은 내가 내 자신을 높이는 것만큼 남이 나를 높여 주지 않았다는데 대한 분노와 불만의 표출입니다. 질투란 자아가 사랑과 관심의 대상에서 밀려나는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경쟁이란 자아를 남보다 앞 세우려는 마음입니다. 분노란 자아가 당하는 손상, 손해에 대한 반응입니다. 간음이란 자아의 욕정을 무엇보다 앞세워 행하는 것입니다. 비겁함이란 자아의 연약함을 보호하고 감추고, 숨기려는 행위입니다. 자신감이란 자아를 믿는 마음입니다. 자기 영광이란 자기를 떨치고 싶은 욕구입니다. 죄의 종류는 많고 많지만 모든 죄는 자아(자기)가 활동하고 있으며 주체가 되고 있습니다. 자아가 활동하는 곳에 마귀의 역사가 있고, 혼란과 다툼과 소란이 있습니다. 반면 자아가 부인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면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자아를 남보다 더 낮추고,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낮아지는 것을 합당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인내란 자아가 당하는 고난과 곤욕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절제란 자기의 욕구를 꺾어 버리는 것입니다. 화평이란 자아의 손실에 대해 무관심한 것입니다. 온유함이란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충성이란 자신의 이익을 도외시하고 상대의 유익에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모든 열매는 자아가 부인되고, 못 박힌 그 자리에서 맺힙니다. 자아가 있는 곳에는 분냄, 다툼, 시기, 성냄, 혼란과 같은 마귀의 역사가 있지만 자아가 죽은 곳에는 성령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시골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 자신이 잘 낫다고 믿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자신이 어딘가 나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진 것이 많은 삶이나 인물이 잘난 사람들은 그렇지 않는 사람에 비해 우월 의식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의식적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은 자연스럽지도 않을 뿐 아니라 결코 자신을 낮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살던, 얼마나 배웠건, 얼마나 벌었건, 얼마나 가졌건 간에 어떤 형편없는 죄인보다 결코 낫지 않으며 높지 않는 똑같은 사람이란 사실을 마음 깊은 곳에서 인식하고 그렇게 여겨야 합니다. 화단에서 자라는 잡초건 들판에서 자라는 잡초건 많이 자라난 잡초건 이제 겨우 싹이 튼 잡초건 잡초란 점에는 매 한가지요, 뽑혀서 버려져야 할 존재란 점에서는 똑같듯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다 똑같은 죄인이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결코 지식이 많고 적음이나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에게서 주님의 은혜를 제해 버린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얕보고 경시하는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점이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은혜 밖에서 자신을 볼 때에, 여러분이 욕하고 비난하는 어떤 사람들과의 차이점을 전혀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은혜가 당신에게 그들과 다른 점이 있게 하지 않았다면, 여러분과 다른 죄인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나는 그와 똑같은 죄인입니다." 오직 은혜가 "주여, 당신이 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외에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자아를 신뢰하거나 높이지 마십시오. 자아가 있는 곳에 마귀가 있고, 그곳에 혼란과 혼동이 야기됩니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사람을 신뢰하며 육체를 자기 무기로 삼고 마음이 [주]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으리라.](렘17:5).

우상을 신뢰할 때 혼동에 빠집니다. 모든 우상 숭배는 마귀의 역사이며, 마귀의 영에게 이끌림을 받은 결과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우상을 던져 줌으로써 그들을 혼동에 빠뜨립니다. [보라, 그들은 다 헛것이며 그들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니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들은 바람이요, 혼동일 뿐이니라.](사41:29). 우상들은 그 자체가 혼동입니다. 혼동인 우상을 신뢰할 때 혼동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또 모두 당황하며 다 같이 혼동에 빠질 것이로되](사45:16). 여러분의 마음에 혼동이 왔다면 여러분은 먼저 자신이 누구를 신뢰하는가? 무엇을 신뢰하는가? 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음속에 우상을 세워두었다면 혼동이 찾아 올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금, 은, 나무로 깎아 만들고 녹여서 만든 우상에게는 절하지 않더라도 마음 속에 세워둔 우상으로 인해 혼란을 겪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 앞에 나와서 헌물을 드리고 기도를 하면서도 그들 마음 속에 우상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나왔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었으니 과연 그들이 내게 물을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의 집에서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고 대언자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 나 [주]가 그의 우상들의 많은 수효대로 응답하리니 이것은 이스라엘의 집이 다 자기 우상들로 말미암아 나와 사이가 멀어졌으므로 내가 그들의 마음 상태대로 그들을 취하고자 함이라.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의 집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회개하고 너희 자신을 돌이켜 우상들을 떠나라. 너희 얼굴을 돌려 너희의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이는 이스라엘의 집과 이스라엘에 머무는 타국인 중에 자기 자신을 분리하여 나를 떠나고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고 나에 관하여 묻고자 대언자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는 나 [주]가 친히 응답할 것임이라.](겔14:3-7). 마음 속에 세워둔 자기 우상들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환히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 우상이란 자기가 신으로 섬기는 것들입니다. 자기 우상들은 하나님과 사이를 멀어지게 합니다. 자기 우상들은 세워진 우상의 수효대로 주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자기 우상은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은 그들이 마음 상태대로 취하시기 때문입니다. 혼란은 여기서 도래합니다. 이들은 어떤 우상을 어디에 세웠습니까?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라고 합니다. ‘자기 우상들’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이런 우상은 산당이나 동굴 속이나 사원에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세워져 있습니다. 자기 우상은 남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마음 속에 불러들이고,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 굳게 자리 잡은 자기 우상은 세속화입니다. ‘세상을 구원한다, 세상을 변화시킨다,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는 거창한 구호를 외칩니다. 주님도 포기한 세상을 교회가 어떻게 구원합니까? 주님을 믿고 예배를 드리며 매주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 자신도 변화되지 않고 있으면서 누가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말입니까? 주님은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셨는데,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논리입니까? 주님이 말씀하신 ‘거룩함과 의’를 포기한 사랑이야 말로 세상과 급격히 동화되고 하나 되어가는 것이며, 세속화의 우상이 교회 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자기 우상은 단연 탐욕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 어떤 사람은 교육, 어떤 사람은 명예, 어떤 사람은 권세 등 다양한 형태를 띠지만 결국 탐욕으로 요약됩니다. 목사들에게는 교세 확장의 탐욕이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에게는 신기록, 금메달에 대한 탐욕이 있습니다. 학자들에게는 신개발, 탁월한 연구 업적 등의 탐욕이 있습니다. 부모들에게는 더 똑똑한 자식에 대한 탐욕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목표로 설정했을 때는 능력의 범위 내에서 합법적이고 가능한 수단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탐욕이 되는 순간 불법과 탈법, 편법이라도 상관없게 되는데 이 순간 ‘자기 우상’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세워두는 자기 우상들의 정체를 정확히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肢體)들을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골3:5). 사람들의 마음속에 탐욕이란 우상이 세워지는 순간 하나님도 자기 우상을 위한 수단이 되고, 도구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자신의 믿음과 교회 생활 역시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세워둔 자기 우상을 위한 것이 되고 맙니다. 어떤 이는 가족이 우상입니다. 어떤 이는 자식이 우상입니다.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의 꿈과 야망이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마음속에 세워 두고 나아오는 성도들을 향해 [나 [주]가 그의 우상들의 많은 수효대로 응답하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을 때 혼동에 빠지게 됩니다. 죄는 모든 질서와 조화를 파괴합니다. 죄는 혼동의 원인입니다. 누구든지 죄를 범하면 죄의 종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니라.](요8:34). 죄를 범하게 되면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사라집니다. 죄는 지혜를 사라지게 하는 대신 마음에 완악함, 고집만을 증가시킴으로 혼란에 혼란을 불러 옵니다. [우리가 우리의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의 혼동이 우리를 덮겠사오니 이는 우리 곧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우리의 어린 시절부터 이 날에 이르기까지 [주]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주] 우리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렘3:25).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혼동이 자신들을 덮는 경험을 했습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 역시 혼동이 자신을 덮는 경험을 했습니다. 바벨을 쌓았을 때 인류는 혼동을 경험했습니다.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을 때 누구라도 혼동이 자신을 덮는 비참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다니지만 스스로 혼동에 빠지고 혼란을 체험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는 대신 신문만 읽고, 잡지와 소설만 읽을 때 수치와 혼동은 필연적입니다. 말씀을 보는 대신 T.V만 보는 성도들은 영적 혼동에 빠진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질서 정연하고 조화롭고 평화로운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혼란스런 모습은 그 교회가 주님의 음성에 불순종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스라엘의 국가적 혼란이 위정자들의 정치력이나 외교력, 군사력의 문제가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주님께 범죄하고, 그 목소리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한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평안하고 조용한 믿음 생활과 사회 활동을 위해 정치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왕들과 권위를 가진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것은 우리가 모든 경건함과 정직함 가운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자 함이라. 이것이 하나님 곧 우리 구원자의 눈앞에서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딤전2:2~3). 이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혼란이 올 때 우리는 조용하게 살기 힘듭니다. 테러, 전쟁, 유가의 상승, 주식의 폭락 등 사회 경제의 전 분야에 혼란이 오는 것은 이들이 성도들이 주님의 음성에 순종해서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질서 대신 혼동을 조화대신 파괴를 일삼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분열과 반목, 불화가 일어나고 집에서는 집대로 조용할 날이 없다면 이것이 혼란의 창시자요, 불화의 씨를 뿌리는 마귀의 사역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며, 경건함과 거룩함을 고백하며 믿음으로 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치 중에 눕겠고, 혼동이 우리를 덮고 맙니다. [우리가 우리의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의 혼동이 우리를 덮겠사오니 이는 우리 곧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우리의 어린 시절부터 이 날에 이르기까지 [주]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주] 우리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렘3:25).

주님의 말씀을 버린 도시, 언약을 깨뜨린 도시를 ‘혼동의 도시’(the city of confusion)라고 부릅니다. [혼동에 빠진 도시가 무너져 내리고 집마다 문이 닫히므로 들어가는 자가 아무도 없도다.] (사24:10). 왜 혼동의 도시라 부르는지 그 위의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또 땅이 자기 거주민들 밑에서 더러워지리니 이는 그들이 법들을 범하고 규례를 바꾸며 영존하는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사24:5). 성경에서 땅이 더러워지는 토양 오염은 기름이나 화학 약품이나 하수구의 처리 시설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미 약 3500년 전에 토양 오염에 대해서 기록해 두셨는데, “땅이 자기 거주민들 밑에서 더러워지리니”라고 합니다. 토양 오염의 주범은 그 땅에서는 인간입니다. 인간이 없으면 땅은 안식을 얻고 회복됩니다. 사람이 흘리는 무죄한 피로 인해 땅은 더러워집니다. 주님이 주신 율법, 규례, 언약을 범하고 바꾸고 깨뜨리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를 ‘혼동의 도시’라고 부르며, 그 도시는 무너져 내립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사마리아가 그러했고, 예루살렘이 그러했고, 앞으로 로마가 그러할 것이며, 문자적으로 세워질 바빌론이 그러할 것입니다. 마귀는 파멸자입니다. 영적 혼미함은 폭력과 전쟁의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모두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마귀는 혼란의 창시자인데 혼란은 곧 기준의 상실, 기준의 파괴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절대 기준이 되는 잣대를 굳게 붙들고 있다면 결코 혼란과 혼동에 빠지지 않습니다. 왜 사회적 혼란이 옵니까? 기준이 되는 법과 권위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믿음과 실행의 최종 권위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마음으로부터 절대 복종하고 철저히 순종하는 그런 최종 권위가 있습니까? 그것이 없다면 이미 여러분은 혼동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인 킹 제임스 성경이란 최종 권위가 없는 교회는 혼동의 교회요, 최종 권위가 없는 가정은 혼동의 가정이며, 그런 성도는 혼동의 성도들입니다. 저는 예전에 어느 시계점에 들어 간 적이 있습니다. 벽에는 다양한 디자인의 많은 시계가 걸려 있었고, 진열장에도 엄청나게 많은 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열장에 시계들의 시각이 제 멋대로였습니다. 시계는 많은데 정확한 시각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많은 시계를 보면서도 주인에게 지금 정확히 몇 시인지를 물어 보아야 했습니다. 주인에게 왜 모든 시계를 정확하게 똑같이 맞추어 놓지 않는지를 물었는데 대답을 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유를 알았는데 모두 똑같이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어 두면 얼마 가지 않아서 어떤 시계는 약간 빨리 가고, 어떤 시계는 약간 늦게 가므로 시계마다 시각이 달라져서 손님들에게 좋은 시계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되며, 조금도 틀리지 않는 정확한 시계라며 속여 팔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계가 아무리 많아도 절대 기준의 시계가 없으면 혼란만 가중되는 것처럼 성경이 많아도 기준 성경이 있어야 하며, 기준이 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 속에 말씀의 기준이 없는 사람이 혼란과 혼동에 빠지며, 갈등과 고민에 빠집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 속 고뇌로 인해 오랫동안 기도를 하고, 때로 기도를 부탁하는데 그것은 신령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기준이 없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것을 고민하는데 남들이 볼 때는 그것이 영적으로 비치는 것 뿐입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육신의 정욕으로 인해 고뇌가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어떤 일에 대한 debate가 생긴 자체가 이미 기준이 흔들리고, 가치관이 무너지고, 말씀의 권위가 퇴색되었으며 기준을 잃었다는 증거입니다. 다니엘은 왕이 내린 음식을 먹는 문제로 고민하고 기도한 후에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왕명으로 기도 금지령이 내렸을 때도 그는 고민할 필요도, 고뇌하며 기도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금 신상에게 절하는 문제로 조금이라도 갈등하며, 기도로 주님의 뜻을 구했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 문제로 몇 날 몇 일을 고뇌하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 속에 성경적 기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마음 속에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어기려고 하다 보니 혼란이 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말씀대로 믿고 원칙에 타협하지 않는 성도의 생각은 단순하고, 삶은 투명하며, 정직합니다. 반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주님을 따르라는 명을 받았던 부자 청년은 고뇌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으로 따르지 못했던 사람들은 다 고뇌하며 혼란에 빠졌던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안에 말씀이란 기준이 없고 자신, 세상, 가족 등이 기준이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기준을 흔들어 놓고, 표준을 새로 정립하게 합니다. 말씀이 기준이 아니라 자신이 기준인 사람들, 세상이 기준인 사람들은 마귀의 혼란에 밥이 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분노를 일으킬 때 혼동이 일어납니다. 주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질투를 일으키고, 주님의 분노를 일으켰을 때 그 일로 자신들의 얼굴에 혼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은 나무를 모으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여인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과자를 만들어 하늘의 여왕에게 바치고 다른 신들에게 음료 헌물을 부음으로 나의 분노를 일으키느니라. [주]가 말하노라. 그들이 /과연/ 나의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냐? 그들 스스로가 자기 얼굴에 혼동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냐?] (렘7:19). 강하신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분노하게 만드는 자들은 이미 자기 얼굴에 스스로 혼동이 일어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며 헌물을 드렸는데 이와 같은 동일한 일이 현재 일어나고 있습니다. 캐톨릭은 마리아를 ‘성모 마리아, 하늘의 여왕’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하늘의 여왕 마리아를 숭배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일이며, 스스로 자기 얼굴에 혼동이 일어나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캐톨릭 교회에 마음이 간다, 끌린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유는 많지만 핵심은 그들의 얼굴에 혼동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주의 사역자들을 핍박할 때 혼동이 일어납니다. [그러하오나 [주]는 강하고 두려운 분 같으사 나와 함께 계시므로 나를 핍박하는 자들이 걸려 넘어져 이기지 못하고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리니 이는 그들이 형통하지 못할 것임이니이다. 그들의 혼동은 영존하여 결코 잊혀지지 아니하리이다.] (렘20:11). 어느 시대에나 의의 일꾼들은 박해와 모욕을 받았고, 그들의 사역은 오해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의 대언자들, 주의 제사장들을 핍박하는 자들이 형통한 일은 결코 없습니다. 마귀는 거짓 대언자를 일으키고, 거짓 교사들을 세워서 주님의 사역자들을 대적하고 방해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의 혼동은 영존하며 결코 잊혀 지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를 핍박하는 자들은 결코 예레미야를 이기지 못했으며, 그들은 넘어지고 부끄러움을 당하며, 혼동은 영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교회와 목사를 비방하는데 매우 담대하고 거침없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목사가 일을 하면 ‘저 사람은 목사인지 자기 사업하는 business man인지 구분이 안 간다.’며 욕을 합니다. 목사가 목회에 전념을 해야지 자기 먹고 사는 일이나 돈 버는 일에나 신경을 쓰고 있으니 한심하다고 비난합니다. 반면 full time으로 사역을 하면 ‘목사도 웬만하면 자기 일을 하면서 목회해야 민폐를 끼치지 않고,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고 비아냥거립니다. 이곳 LA 지역의 교회 성도들은 순수한 양무리라기 보다는 개떼들, 늑대들, 뱀들이 대부분인지라 이런 교회의 회원들을 통솔하려면 여우보다 교활하고 사자보다 힘이 세고, 독수리보다 무서운 눈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담임 목사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욕을 먹어도 신경 쓰지 않고, 절대 주님의 양떼라고 생각하지 말고 짐승들이라고 생각하고 목회를 하는 것이 성공비결이란 생각이 많이 듭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리더쉽이 요구되는 교회들이 대부분입니다. 개떼들을 양떼 인도하듯이 해서는 안 됩니다. 얼마전 타계한 잭 하일스 목사님은 미국에서 제일 큰 교회를 사역했는데, ‘내가 독재자가 되는 이유는 교회 내의 많은 독재자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조직체로서의 단체를 이끄는 리더의 모습이지 결코 성경적 교회의 모습은 아닙니다. 왜 그렇게 목사 욕하는 사람들이 많고 대드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들은 건전한 비판이라고 말할지 몰라도 혼동의 결과입니다. 주님의 사역자들을 비방하는 사람들 가운데 건전한 생각의 영을 지닌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들의 말과 생각은 혼란의 창시자가 심어준 그대로 혼동 가운데 나오는 것들입니다. [내 혼을 찾는 자들이 당황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시며 나를 해하려고 꾀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혼란에 빠지게 하소서.](시35:4),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함께 혼란에 빠지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스스로 뽐내는 자들이 수치와 불명예로 옷 입게 하소서.](시35:26). 사역자들은 때로 저주의 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이들을 혼란의 창시자 마귀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세상을 신뢰할 때 혼동이 옵니다. [그러므로 파라오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이집트의 그늘을 신뢰함이 너희의 혼동이 되리니](사30:3). 성경에서 이집트는 세상의 예표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신뢰할 때 그것은 그들의 혼동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신뢰하는 성도들은 혼동에 빠집니다. 육신적인 성도들이 주로 하소연하는 고민 가운데 하나는 신앙을 가진 후로 세상에서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신앙을 성공과 출세의 밑거름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이 변화되고, 주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그대로 있고 주님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그런 고뇌를 토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을 신뢰할 때 주님은 혼란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내어 주십니다. [오 [주]여, 내가 주를 신뢰하오니 나로 하여금 결코 혼란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시71:1). 그러나 악한 현 세상을 사랑하고 신뢰할 때 혼동은 필연적입니다.

마음이 혼란하면 모든 일은 다 혼란스럽고, 혼잡스럽습니다. 혼동이 몰려오면 일의 우선순위가 헝클어지고, 점점 더 복잡한 미로 속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욥은 마귀의 시험으로 인해 자신이 혼란스러워졌음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사악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머리를 들지 아니하리이다. 나는 혼란으로 가득하오니 그런즉 주는 내 고난을 보소서.](욥10:15). 마귀는 성도들의 마음 속에 혼란을 가득 채웁니다. 질서와 평안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혼란과 불안은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는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기 때문이라.](약3:16). 혼란의 창시자 마귀는 성도들 안에 시기와 다툼을 통해 혼란을 창조합니다. 성령의 사역이든 마귀의 사역이든 필수적인 것은 우리의 의지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에 순종해서 성령과 연합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고, 평안을 얻지만 마귀와 연합하면 혼란과 불안으로 사망의 열매를 맺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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