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잠언 1:10-15
역사를 통해 우리는 교회가 세상과 타협했을 때는 어김없이 부정과 부패로 타락했으며, 영적인 쇠퇴기를 맞았고, 세상과 분리되었을 때마다 찬란한 빛을 발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교회는 본연의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었지만 세상과 연합될 때는 어떤 세상의 타락하고 부패한 집단보다 더욱 더럽고 추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성도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락의 순서는 언제나 마귀의 유혹(시험)이 오고, 거기에 타협했을 때 동화되고, 그 다음에는 완전히 일치하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나 교회사는 이를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롯이라 불렸던 롯의 일생을 보십시오. 그는 소돔의 물질문명과 풍요로움을 쳐다보았고, 그곳의 유혹에 끌렸습니다(창13:10). 그는 그곳을 향해 장막을 쳤습니다(창13:22). 여기서 타협이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돔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동화의 단계). 그 다음은 소돔의 시민들과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완전히 일치했습니다. 롯은 육신적인 성도의 일생을 가장 잘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롯이 소돔에서 평안하게 잘 먹고 잘 살았겠습니까? 물론 그는 어느 정도 재력을 모았고, 상당한 지위를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롯의 아내가 소돔에 남겨둔 재산이 불타는 것을 생각하며 곧장 달리지 못하고, 뒤를 돌아 볼 정도로 무엇인가를 소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롯은 황폐하고 영혼이 곤고(困苦)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사악한 자들의 더러운 행실로 인하여 괴로움을 받던 의로운 롯을 구해 내셨으니](벧후2:7). 세상과 타협했던 롯은 소돔 사람들의 더러운 행실로 인해서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타협의 대가는 괴로움입니다.
마귀는 타협을 중시합니다. 마귀에게 속한 세상과 사람들 역시 분리보다는 타협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타협이란 말은 갈등의 사회에서 가장 효율적인 해결책으로 통합니다. 지금은 다원화 시대요, 다양한 가치관이 공조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분명한 원칙과 기준이 없고, 다만 대화와 타협을 통한 갈등의 봉합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흔히 정치는 대화와 타협의 기술이요, 타협은 정치의 꽃이라고 합니다. 성숙한 민주 사회일수록 모든 일은 타협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타협점을 찾는 것이 사회생활이요, 인간 생활이며, 이 땅을 살아가는 지혜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타협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타협이란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타협의 하나님이 아니라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원칙과 기준의 하나님이십니다. 선명한 원칙, 분명한 기준을 성경은 ‘교리’(doctrine)이라고 합니다. 현대 역본들은 ‘교리’란 단어를 삭제하고 대신 가르침(teaching), 교훈(instruction)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마귀는 성도들에게 선명하게 제시된 기준과 원칙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습니다. 분명하고 쉬운 용어를 애매모호하게 만듦으로써 타협의 여지를 남겨 줍니다. 타협은 세상사는 방법이지 성도들의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세상은 원수지간입니다.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약4:4). 주님은 이 세상을 일컬어 악한 현 세상(갈1:4)이라고 판결을 내리셨고, 불태워 버릴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집행만 남겨둔 상태에 있는 감옥의 죄수와 같은 곳에 바로 이 세상의 처지입니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구호는 사형 집행을 남겨둔 사형수에게 복지 연금을 들라는 말이나 은퇴후 생활 보험을 들라는 말보다 더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성령과 육신 역시 원수지간입니다. [이는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기 때문이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갈5:17). 육신과 성령은 서로 대적하는 사이입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롬8:13). 성령과 육신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며, 공존의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살든지 육신 안에서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마귀는 성도들을 적당하게 육신대로 살도록 유혹하며, 타협하도록 합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빚진 것이 아니니 육신을 따라 살 것이 아니니라.](롬8:12). 우리는 이 땅에서 육신의 장막을 벗어날 때까지 육신의 정욕이 있습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무엇인가가 우리의 육신 안에 늘 상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육신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육신을 따라 살면 죽습니다. [이는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임이라.](롬8:13). 거듭난 성도라면 성령을 통해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육신에게는 기회조차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육신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롬13:14). 타협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육신과 함께 그 애착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삼손은 육신과 타협한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육신의 정욕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넘치는 힘이 있었고, 이스라엘을 지키고, 지휘하는 사사(재판관)로서 권세도 있었습니다. 삼손의 아버지, 어머니는 훌륭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로 좋은 부모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방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애정에 깊이 빠져서 적당히 타협했을 때 그의 신세는 비참한 몰골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받은 사람은 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도 거의 없습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수태고지를 받았고, 침례인 요한이 성전에서 수태고지를 받았고, 예수님이 그러한 것이 전부입니다. 이는 실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끝맺음을 한 사람이 바로 삼손입니다. 물론 최후의 순간에 돌아왔지만 그의 말년은 눈이 뽑히고, 머리가 밀린 채 소처럼 맷돌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가자로 데리고 내려가 놋 족쇄로 결박하니 그가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니라.] (삿16:21). 삼손의 어린 시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그 여인이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주]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에 있는 단의 진영에서 [주]의 영께서 때때로 그를 감동시키기 시작하셨더라.] (삿13:24~25). 이 모습은 영락없는 사무엘과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 모습을 합쳐 놓은 그런 모습입니다. 주님이 복을 주셨고,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위대한 이스라엘의 재판관으로 살 수 있는 모든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여호수아나 사무엘을 능가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자질과 복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눈을 떴을 때 저항 한번 하지 않고 타협했습니다. [삼손이 딤낫에 내려가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 가운데 한 여자를 보고 올라와 자기 부모에게 고하여 이르되, 내가 딤낫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 가운데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그런즉 이제 그녀를 취하여 내 아내로 주소서, 하니] (삿14:1~2). 청년의 때에 그는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을 삼간 것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정욕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오늘날 교회 내의 청년 남녀들이 불신자와 결혼하면서 타협합니다. 결혼 문제를 보면 그 사람의 인생관, 신앙관을 다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침례가 순종의 표시라면 불신자와의 결혼은 불순종과 반역을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전도하면 되잖아요. 믿지는 않지만 좋은 사람이예요. 성격이 맞아요, 인물이 좋아요, 저를 사랑하면 언젠가는 믿겠지요...’라며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덤빕니다. 쉽게 타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령으로 살았던 사람, 성령으로 일을 시작했다 하더라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말려들어 타협하면 얼마나 비참한 신세가 되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바로 삼손입니다.
나와 세상의 관계 역시 타협,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원수 관계입니다. “세상에 살다 보니 어쩔 수 없다”고 타협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살다보니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여자들은 인물만 좋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능력만 있으면, 학력만 있으면, 뒤를 돌봐줄 사람만 있으면...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분은 제게 “아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지론을 펼쳤습니다. 저도 “그렇지요. 아이는 태의 열매요, 주님의 상속이며, 보상입니다”-[보라, 자식들은 [주]의 유산이요, 태의 열매는 그분의 보상이로다.](시127:3)-라고 맞장구를 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분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능력만 되면 말이지요”하고 조건을 달았습니다. ‘능력만 되면, 돈만 있으면’ 등과 같은 말은 불신자들의 철학이며, 믿음입니다. 그런데 세상적인 가치관을 지닌 육신적인 성도들은 그들과 동일한 철학과 믿음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동일한 입술의 열매를 맺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능력만 되면>이 아니고, <믿음만 있으면>이지요”라고 고쳐 주었습니다. ‘능력만 있으면, 돈만 있으면, 배운 것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은 마귀의 가르침이요, 세상의 가르침이지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다 못해 인물이라도 있으면...’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겨자 씨 만한 믿음만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만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에게 이르기를,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겨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애는 셋이 아니라 열을 낳아 키우는 것도 문제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돈으로 아이를 키우는 줄 알다보니 둘만 넘어도 두려워하고, 힘들어 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교회도 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돈만 있으면, 돈이 있어야’ 효도도 하고, 영적인 일도 하고, 자식도 키우고, 자신의 꿈도 펼치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세상과 타협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돈으로,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라면 별로 가치가 없는 일들이요, 썩을 것들이요, 주님 눈에 가증한 일들이며, 마귀적이며,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는 일들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믿을 때 세상과 육신을 통해 타협을 제안해 오는 마귀를 단호히 물리 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만일 믿을 수 있거든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 하시니](막9:23). 믿음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 - 가능합니다. 학업- 가능합니다. 영적 부흥- 가능합니다. 내 자신의 변화- 가능합니다.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믿음은 여러분에게 돈을 주지 않아도 여러분이 돈으로 얻고자 하는 행복, 만족, 기쁨, 평안, 여유로움, 우애, 사랑 등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크고 멋진 집은 주지 않아도 평안하고 달콤한 가정은 줍니다. 멋진 상아 침대는 주지 않아도 달고 깊은 잠은 줍니다. 멋진 여자는 주지 않아도 덕(德)있고, 현숙하며, 지혜로운 아내를 줍니다. 믿음으로 불가능한 일이 있습니까? 결단코 없습니다.
우리는 ‘돈만 있으면, 능력만 있으면’ 이란 말이 거의 동의어로 쓰이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돈과 능력을 마음 속 깊은 곳에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들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역시 어느덧 그런 부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면 이미 마귀의 타협을 받아들인 상태입니다. 실제 돈과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엄청 많아 보여도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참된 비결의 소유자들입니다. 비결이 무엇입니까?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주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며, 우리를 도우시고, 강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그리스도가 능력이요, 그리스도가 지혜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며,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에게는 이것이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 하시니라.](마19:26). [그분께서 이르시되,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들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니라, 하시니라.](눅18:27).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느니라.](눅1:37). 성도들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요, 그리스도를 통해 쟁취하는 사람들입니다.
‘돈만 있으면, 배운 것만 있으면, 능력만 있으면’ 하며 그런 것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런 것이 없어도 그런 것들을 다 가진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늘과 땅이 없어져도 변할 수 없고, 흔들릴 수 없는 기도의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21:22). 영국의 죠지 뮬러 목사님이 3,000명의 고아를 키운다는 소식은 영국 전역에 다 알려진 유명한 일이었습니다. 런던에서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기업인들이 뮬러 목사를 초청해 식사를 대접하고, 후원회를 결성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뮬러 목사님은 식사가 끝난 후에 그들의 제안을 다음과 같이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저에게는 필요할 때마다 언제라도 늘 후원해 주시는 분이 따로 한 분 계십니다.” 그러자 함께 모인 기독 실업가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대체 뮬러 목사님의 후원자는 얼마나 큰 기업체를 운영하는 분이기에 한 명이 3,000명의 고아들을 후원한다는 말인가 생각했습니다. 죠지 뮬러는 항상 자기를 도우시는 든든한 후원자이신 하나님께서 필요를 아뢸 때 마다 어떻게 응답하셨는가를 대해서 증거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4).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구하지 아니하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리라.](요16:23). 이제 여러분은 세상과 타협을 하지 않아도 성경대로 살 수 있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과 타협을 하면 그 순간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과 능력은 거절한다는 수취 거부 표지를 세워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마귀는 타협을 제시합니다. 어느 부인이 교회에 안 다니는 남편이 자꾸만 댄스홀에 가자고 졸라서 몇 년간 계속 거절하다가 너무 남편을 무시하는 것 같아 한번만 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댄스홀에 가서 아주 재미있게 춤을 즐겼습니다. 그러고 난 후 남편에게 "오늘은 내가 댄스홀에 같이 가 주었으니까 다음 주에는 나하고 교회에 같이 가요!" 그랬더니 남편이 말하기를 "여보! 웃기지 말어. 오늘 보니까 당신 신앙이 엉터리던데, 뭘... 오늘까지도 당신이 댄스홀에 가는 걸 거절했으면 '이 사람은 정말 어쩔 수 없구나'하고 다음 주부터 내가 교회로 갈까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까 아주 엉터리야!" 라고 하더랍니다. 마귀는 성도들을 공격할 때 얼굴에 붉은 물감을 칠하고, 검은 망토를 쓰고, 손에는 창을 들고, 뿔이 달린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마귀는 빛의 천사의 모습으로 옵니다. [이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니 이는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이라.](고후11:14). 생각해 보십시오. 협상의 명수는 결코 불쾌한 얼굴을 하지 않았습니다. 시험하고, 유혹하고, 속이는 자는 결코 상대방에게 의심의 여지를 줄 말과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자신들이 마귀 들렸다거나 억눌림을 당하거나 지독하게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눈치조차 채지 못한 채 그냥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입니다. ‘한번만, 이번만, 다음부터는....’이라고 말하는 것은 타협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마귀는 믿는 성도들에게 죄와 세상과 육신과 타협할 것을 권고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한 원칙을 제시하시며 비타협, 비동조, 비일치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뒤로 물러가면 내 혼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에 이를 자들이 아니요, 오직 믿어서 혼의 구원에 이를 자들이니라.](히10:38-39). 이것은 타협하는 성도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야 할 성도들이 뒤로 물러나는 것이 타협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뒤로 물러갔던 어떤 부자 청년을 보십시오. 아버지를 장사 지낸 후에 따르겠다는 사람(눅9:59), 가족들과 먼저 작별을 고한 후에 따르겠다는 사람(눅9:61)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세상과 타협했던 사람들은 누구도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9:62). 우리는 조금도 물러나거나 뒤를 돌아보거나 곁눈질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이것은 타협을 엄히 금하신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귀들의 수하인 죄인들은 우리를 향해 연합, 동조, 타협, 일치를 강요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여러번 그리스도인들의 3비(非) 원칙을 말씀드렸습니다. 비타협, 비동조, 비일치- 3 비(非) 원칙입니다. 잠언 1:10-15절입니다. [내 아들아, 죄인들이 너를 꾈지라도 너는 동의하지 말라.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숨어서 기다리다가 피를 흘리자. 우리가 무죄한 자들을 까닭 없이 몰래 숨어서 기다리다가 무덤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구덩이로 내려가는 자들같이 통째로 삼키자. 우리가 모든 귀한 재물을 얻으며 노략물로 우리의 집들을 채우리니 너의 제비를 우리 가운데서 뽑고 우리가 다 같이 돈주머니를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내 아들아, 너는 그들과 함께 그 길로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들의 길에서 떠나라.] (잠1:10~15). 죄인들은 ‘우리가 **를 하자..하자(Let us)’로 나갑니다. 반면 성경은 ‘동의하지 말라(비동조). 그들과 함께 그길로 다니지 말라(비타협). 그들의 길에서 떠나라(분리, 비일치)’고 합니다.
출애굽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모세와 적그리스도의 모형인 파라오가 나옵니다. 파라오는 모세에게 4번에 걸쳐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가 한 타협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첫째, 가서 하나님을 섬기라.(출8:25) 단 이 땅에서, 너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라. 세상을 버리지 말고, 세상과 친구가 되라. 세상과 함께 하라(약4:1-4).
둘째, 세상을 떠나라. 그러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출8:28). 신자가 되더라도 너무 광신자는 되지 말라. 믿더라도 술, 담배 다 끊고 친구들 안 만나고 그런 짓은 하지 말라. 교회는 나가더라도 T.V, 라디오, 신문, 잡지, 영화관에서 발길을 돌리지 말라.
셋째, 정녕 세상을 떠나야 한다면 완전히 떠나지는 말고 어린 것들은 남겨 두라. 너희들만 가라(출10:11).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교회에 데려가서 세뇌 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 그들이 커서 스스로 결정하도록 자유를 주라. 애들이 설교를 어찌 이해하겠는가? 그냥 여기서 놀게 두라.
넷째, 모두 떠나야 한다면 너희 소유는 남겨 두고 가라(출10:24). 완전히 단절하지는 말자. 몸이 떠나도 마음은 이곳에 있도록 하라.
마귀는 출애굽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타협책을 제시함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타협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불완전한 순종을 유도합니다. 타협은 불완전한 믿음, 불완전한 헌신을 만듭니다.
아브라함은 언제 죄를 범했습니까? 아내를 통해 들어오는 불신의 음성에 타협했을 때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자신의 나이가 많고, 아들을 낳을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있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믿음 대신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타협안을 제안했는데, 자기 여종 중의 하나인 이집트 여자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고, 자신의 힘으로 아들을 만들어 보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이때에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하더라. 사래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이집트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더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이제 보소서, [주]께서 나를 막으사 수태하지 못하게 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하녀에게 들어가소서. 내가 혹시 그녀로 말미암아 아이를 얻을까 하나이다,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자기 하녀 이집트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주어 그의 아내가 되게 한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 지 십 년이 지난 후였더라.] (창16:1~3).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인내로 기다리는 대신 아내가 제시한 인간적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아내 사라의 말을 듣고 하갈을 취한 것은 주님의 말씀에 믿음과 순종대신 타협의 산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기다리는데 실패하는 사람들은 타협합니다. 마귀는 믿음으로 인내하는 대신, 할 수 있을 때 자신의 힘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와 아브라함의 실수를 반복합니다. 마귀는 매혹적이고 그럴듯한 타협안을 제시하고, 합리화하도록 합니다.
롯을 보십시오. 롯은 자기 집에 찾아온 천사들을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롯의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동성연애자들이요, 롯의 집에 들어온 남자들을 성추행하려고 왔습니다. 그는 동네 사람들의 죄악을 지적하거나 꾸짖는 대신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이제, 보라, 내게 남자를 알지 않은 두 딸이 있노라. 원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남자들은 내 지붕 그늘 아래로 들어왔은즉 그들에게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하매](창19:8). 그의 이런 타협안이 먹혀들었습니까? 씨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타협은 지혜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올무가 됩니다. 마귀는 원칙에서 물러나라고 유혹합니다. 선한 양심을 잠시 접어 두라고 합니다. 먼저 자신을 생각하고, 가족을 생각하고, 현실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을 다 생각하다 보면 믿음은 아침 햇살의 물안개처럼 사라지고, 마음속에 있던 말씀은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이 허공에 날아 가 버립니다. 여러분은 마귀와 거래할 수 없으며, 세상과 거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상거래를 하며 이익을 남기는 장사꾼들이 아니라 전쟁을 치르는 군사들입니다. [(이는 우리의 전쟁 무기가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을 통하여 요새들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라.)](고후10:4), [전쟁을 치르는 자는 아무도 이 /세상/ 삶의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 이것은 자기를 군사로 택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4). 지금 여러분은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전장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마귀의 모형 가운데 또 한 명은 느부갓네살입니다. 그의 타협안을 보십시오.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형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한다 함이 사실이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코넷과 피리와 하프와 트럼본과 비파와 줄 달린 타악기와 온갖 음악 소리를 들을 때에 너희가 엎드려서 내가 만든 금 형상에게 경배하면 좋으려니와 만일 너희가 경배하지 아니하면 너희를 그 즉시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 한가운데 던져 넣으리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하나님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단3:14~15). 느부갓네살은 참 경배의 대상이 자신임을 선포했지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하나님이심을 온 몸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타협을 하면 육신의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마귀는 목숨을 위협하며 그들에게 절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무엇을 선택했습니까? 고민하거나 갈등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마음 속에 성경적 기준이 똑 바로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기준과 원칙이 마음 속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문제 앞에서 고민하지 않습니다.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타협의 출발점에 선 것입니다. 타협안이 들어왔을 때 하나님의 종들이 취한 태도를 보십시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께 대답하기를 염려하지 아니하나이다. 오 왕이여, 그렇게 한다 하여도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또한 그분께서 우리를 왕의 손에서 건져 내시리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오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형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할 줄을 왕은 아옵소서.] (단3:16~18).
오늘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목숨까지 위협하지 않더라도 상사의 눈치, 동료들의 따돌림, 친구나 친지들의 질시, 돈 문제, 직장 문제, 교육 문제 등 조그마한 것들의 손해나 손실이 예상되어도 쉽게 굴복하고 타협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집사님은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을 했습니다. 비디오테이프 사업을 하자면 손님들이 찾는 테이프를 구비해 두어야 합니다. 성인물, 폭력물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때로 정품을 복사해서 주기도 하는데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그는 그 사업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마음 속에는 옳지 못하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알면서도 돈 때문에 타협을 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식당을 하면서 알코올을 취급합니다. 술 광고는 대부분 벌거벗은 여자들이요, 그런 포스터를 벽마다 붙여 놓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인 줄 알면서 합니다. 먹고 사는 일이라면 불법도 용인할 수 있고, 돈이라면 작은 양심의 가책은 무시하며 삽니다. 사업 관계상 접대 문제로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다고 고뇌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고민도 아닌 고민을 토로하며 기도를 부탁하고 고뇌하고 번민하는 성도들이 이외로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느 정도는 세상 기준에 맞추어서 살아야 한다는 마귀의 타협책에 굴복한 결과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빛이 없는 등이요, 맛이 없는 소금처럼 되어 버린 것은 이들이 마귀가 제시한 타협에 굴복하여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타협안(妥協案)에 손을 맞잡은 사람들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나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하니 가증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이요, 모든 선한 일에 버림받은 자들이니라.](딛1:16). [그분을 아노라 말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2:4).
성경의 하나님은 타협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와도 deal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주(Lord)로서 명령을 내리시고,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주인이 종과 거래하는 법은 없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명령할 뿐입니다. 종은 순종할 뿐입니다. 성도란 상황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비행기 조종 훈련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비행기 조종사들은 착시(錯視)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계기 조종 훈련을 합니다. 자기 느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계기만 의지하는 훈련입니다. 느낌상 위쪽이 하늘이고 아래쪽이 땅인데, 계기를 보면 정 반대입니다. 그 때는 자신의 눈이나 느낌을 단호하게 꺾고 계기판만을 믿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상황과 현실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로 나갈 때 감정과 현실과 상황을 믿지 말고 말씀만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말씀이 기준이 없고, 말씀을 따라 가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그는 언제나 마귀와 타협하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타협의 위험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만일 [주]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혹은 너희가 지금 거하는 땅의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이 날 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 집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주]를 섬기겠노라, 하니](수24:15). 양 다리 신앙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타협하는 사람들은 ‘내게 강요는 하지마. 내게 선택을 강요 하지마’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선택을 강요하시며, 바른 의지적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아시리아에 점령당한 사마리아의 사정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그들이 [주]도 두려워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민족들을 사로잡아 왔든지 그 민족들의 풍속대로 자기 신들도 섬겼더라. 이 날까지 그들이 예전의 풍속대로 행하여 [주]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또 [주]께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신 야곱의 자손에게 명령하신 그들의 법규와 규례와 율법과 명령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니라.](왕하17:33-34). 다신 숭배는 타협의 산물입니다. 진리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것이지, 이것 저것 모두 아우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믿음은 의지적 결단이요, 선택입니다. 여러분은 타협이 아니라 분리를 택하고, 분명한 성경적 결단을 통해 살아야 합니다.
마귀의 타협에 응하는 사람은 편하게 살아 보려고 하지만 타협 이전보다 더욱 악하게 되며, 힘들게 되고, 결국 망하게 됩니다. 타협의 결과를 보십시오. [만일 그들이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통하여 세상의 오염에서 벗어난 뒤에 다시 그 안에 말려들어 지게 되면 그들의 나중 결과가 처음보다 더 나쁘리니 이는 의의 길을 안 뒤에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명령에서 돌아서는 것보다 차라리 그것을 알지 못한 것이 그들에게 더 나았을 것임이라. 그러나 참된 잠언(箴言)의 /말씀/과 같이, 개는 자기가 토한 것으로 되돌아가고 씻겨진 돼지는 진창 속에서 뒹군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벧후2:20~22). 타협을 이긴 성도는 의롭고 거룩하고 영광스런 승리를 체험하지만 타협에 굴복한 성도는 처음보다 더 나쁘게 되어 버립니다. 타협은 마음속에 하나님을 몰아내는 것이며, 성령을 무시하는 것이며, 말씀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타협자들은 자기 생각, 자기 철학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나름대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양한 타협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타협의 결과는 모두 멸망이요, 실패였습니다. 반면 타협을 거부한 사람들은 모두 승리했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