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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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마 26:1-75

요절: 마 26:39


마태 복음 26장입니다.
여기서부터 십자가와 부활, 승천의 가장 핵심적인 사역이
시작됩니다. 1-5절은 언제 어디라는 배경입니다. 때는 유월절
이틀 전입니다(1).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2).
주님은 수 차례에 걸쳐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반복적으로
가르쳤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믿지 않았고,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서 유대 민족과 온 인류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당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제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죽음은 영웅적인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순교자의 죽음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배반을 당해 범죄자 가운데
하나로서 죽는 수치스런 죽음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죽으셨고, 우리에게 영광을 주시기 위해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3-5절은 주님의 죽음을 모의한
자들입니다. 수제사장들, 서기관들, 백성의 장로들이 주축이
되었습니다(3).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들을 먹이고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었는데,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 섰습니다. 5절에는 이들이 명절(유월절)을 피하여
죽이기로 계획했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비밀스런 계획을
꺾으시고 구약에 기록된 대로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죽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때에 우리를 위해 희생되셨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6-13절은 옥합을 깬 여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는 주님께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일로서 사복음서 전체에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
어디에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을
말하여 기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13). 주님은
왕들의 정복 전쟁이나 통일의 업적, 위대한 발명가들의
발명품이나 과학적 발견, 유명한 창작 예술품을 만든 작가나
대가들을 기념하시거나 기억하시지 않으시지만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이 여인은 세세토록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동안 한 인간을 위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기념(memorial)은 이 여인이
유일무이합니다.


이 여자만이 2절에서
말씀한 주님의 대속적 죽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매우 귀한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 주님
머리에 부은 것은(7) 뜻 모를 맹목적인 헌신이 아니었습니다.
12절을 보면 주님은 이 여인이 무슨 마음으로, 왜 이렇게
했는지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죽으심을
장사 지내기 위해서 향유를 부었던 것입니다. 반면 제자들은
비싼 향유를 쓸데없이 허비했다고 분개했습니다(8). 9절은
이들의 가치관이 주님보다 세상에,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것에, 신본주의보다는 인본주의에 치우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 교회는 마리아의 태도보다는 제자들의
입장에 동조하는 편인지라 주와 복음을 위해서보다는
학교를 짓고, 병원을 세우고, 고아원에 기탁하는 것을 더
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이는 이 여자가 내게 선한 일을 하였기 때문이요, 또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10-11). 주님은 제자들의
탐욕을 아셨습니다. 그들의 그릇된 가치관을
질책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이
소비도 낭비도 아닌 허비로 보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허비로
보입니다. 온전한 헌신은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를
쓰는 것이며,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동료들에게 즉각적으로
강력한 비판과 욕을 먹을 수 있는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후에
다른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에 향유를 들고 나왔지만
그들은 부어 볼 기회도 얻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이미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마28:1-4). 헌신의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14-16절은 주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배반자 가룟 유다가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스가랴
11:12절 참조. [이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값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하매 그들이 은 서른 개를 달아서 내 값으로 삼으니라.
]
가룟 유다는 우상 목자로서 장차 적그리스도로 이 땅에 다시
올 것입니다. 그의 정체는 스가랴 11:15-17절에 잘 나옵니다.
가룟 유다는 이 때부터 주님을 배반하여 넘겨줄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 마가복음 14:11 -가룟
유다 conveniently · 헤롯-마가복음 6:21 · 펠릭스-행24:25  →
이들은 항상 기회를 찾았지 진리를 찾지 않았습니다.


17-20절은 이제 무교절
첫날입니다. 화요일 저녁 6:00경입니다. 누가복음 22:7절은
무교절 어린 양을 잡아야 하는 날이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함께 하실
집으로 마가의 다락방으로 정하셨습니다.


21-25절은 흔히 ‘최후의
만찬’이라고 불리는 주님의 마지막 저녁 식사입니다. 이
만찬에는 가룟 유다도 참석했습니다. 21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저마다 “주여 나니이까”(22)라고
물었습니다. 이 중에 한명 요한은 “주여 그가 누구니이까?”(요13:25)라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주님을 사랑했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로써 양심의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이에 정반대되는
질문을 한 제자는 가룟 유다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선생님이여,
나니이까?
](25).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지만 가룟 유다는 단 한번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을 받습니다(롬10:9).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렇게 믿지
않았기에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십자가 상의
오른 편에 있던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습니다1)(눅23:42). 오늘날 예수님을 주님(Lord)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인류의 스승이나 선생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 자유주의들이나 인본주의자들은 바로 가룟 유다의
후예들입니다. 26-30절은 오늘날 캐톨릭과 개신교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입니다. 캐톨릭은 이 구절을 들어 개신교회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고, 제대로 실행하지 않는다고
비난합니다. 만약 캐톨릭의 말대로 문자적으로 믿는다면
제자들은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식인종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상징입니다. <요한복음
6:54,56절 참조.-유대인들은 캐톨릭 교도들처럼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알았다. 살을 먹는다는 것은
주님의 성육신을 믿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으신 주님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피를 마신다는 것은
주님의 피가 바로 하나님의 피이며(행20:28), 모든 죄를
대속하는 어린 양의 피요, 구속하는 보배로운 피란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만찬 때에 신약 교회가
실행해야 할 두 가지 규례 중에 하나인 ‘주의 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규례를 제정하신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었고, 또
하나는 주님이 죽으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31-35절은 주님께서
제자들이 흩어질 것이란 경고와 더불어 특히 베드로의
배반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스가랴 13:7절을
인용하심으로 제자들이 흩어질 것을 아셨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로 돌아가 다시 고기를 잡을 것입니다. 32절에서
주님께서 이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21:1-5). 주님은 우리의 실족함, 좌절, 패배,
주님을 부인하는 일 등을 미리 다 아십니다. 우리가
믿음에서 떨어지면 어디로 갈지도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보다 먼저 거기에 가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베드로는
이런 주님의 말씀에 경고를 받거나 두려움에 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앞에 큰소리를 쳤습니다. 33,35절은
베드로가 자신의 육신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영적인 일에 자아와 육신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몰랐습니다. 예레미야17:5,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사람을 신뢰하며 육체를 자기 무기로 삼고
마음이 [주]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으리라.
]
베드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이
말한대로 자기 마음을 신뢰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자기
마음을 신뢰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나 누구든지 지혜롭게
걷는 자는 건짐을 받으리라.
](잠28:26). 바울 사도 참조-빌3:13,14.


× ‘목사님 저는 이
교회에서 뼈를 묻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 없습니다.


× 목사님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이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했던 사람도
지금 이 자리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육신입니다.


베드로의 거침없고
자신만만한 모습은 영적 기질이 아니라 육신의 본성에 속한
아무런 쓸모 없는 것들입니다.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충성
맹세는 다른 제자들도 뒤따르게 했습니다(35b).


36-46절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겟세마네란 뜻은
Olive press란 뜻입니다. 올리브 기름은 성령의 예표입니다.
이곳은 주님께서 자신을 짜내시는 그런 곳입니다. 누가복음
22:44을 참조할 것. 주님은 제자들을 멀리 떨어 뜨려 두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38).


(1) 주님의 기도는 홀로
외로이 분투하는 기도였습니다. 제자들은 함께 깨어
있으라는 부탁에도 불구하고 졸고 있었고, 아무도 합심하여
기도해 주지 않았습니다.


(2) 주님의 기도는
복종하는 기도였습니다(39b).


(3) 주님의 기도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 한분께 드리는 기도였습니다(39-오 내
아버지여). 주님은 마리아를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나 초대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누구도 마리아나
성인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한 사람은 없습니다.


(4) 주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걱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도 주님을 죽일 수
없습니다(요7:32,45, 7:30, 8:59, 눅4:29,30, 요10:18참조). 마귀는
주님을 죽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실 뿐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주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죽기 싫어서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5)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그
죽음을 영광스러워 하셨고 기뻐하셨습니다(히12:2, 골2:15).


(6) 그렇다면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그토록 힘들고 어렵게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까?
성경을 유념해서 보십시오.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께서 주신
잔, 바로 하나님의 잔을 면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잔은 바로 죄에 대한 진노의 잔입니다(렘25:15, 사51:17,
시75:8참조).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동안 인류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쏟아 부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채찍과 못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이나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보다 죄를
정죄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쏟아 부으시는 진노의
잔을 받는 것이 괴롭고 힘드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가 되셨고(고후5:21), 우리의 저주가
되셨습니다(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대속(代贖)하셨으니 이는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는 다 저주받은 자라, 하였음이라
.](갈3:13).


주님께서 아버지의 잔을
치워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도록 굴복함으로써 결국 아버지의
잔을 받으셔야 했습니다(요18:11을 읽을 것).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네 칼을 칼집에 꽂으라. 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18:11).
주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남김없이 다 들이켰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자신의 뜻대로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뜻을 꺾고 나의 뜻과 다른 아버지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그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육신은 약합니다.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은혜로 강해지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아들아, 너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건한 자가 되고
](딤후2:1).


40-43절은 기도에 깨어있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을
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정도였지만 정작 한
시간도 깨어 기도할 수는 없었습니다. 기도 시간이면 유난히
졸음이 쏟아지고 잠이 오는 것은 육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기도를 강력하게 방해합니다. 기도 생활에
실패할 때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참으로 영은 원하되 육이 약하도다, 하시고
](41).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첫째,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주님 오실 때가
가까울수록 시험은 더 많습니다. [오직 모든 것의 끝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
(벧전4:7). 깨어 있지 않을 때 마귀의 밥이
됩니다.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對敵)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5:8).


둘째, 주님이 언제 오실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는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하고 굳게
붙잡아 회개하라. 그런즉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네게 이르리니 어느 시각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3:3).


셋째, 우리의 사역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깨어
있어 고난을 견디며 복음 전도자의 일을 행하며 네 사역을
온전히 입증하라.
](딤후4:5). 마귀는 우리가 잠자는 사이에
와서 사역을 망쳐 버립니다. 간증을 앗아가 버립니다. 특히
돈 문제, 여자 문제, 명예를 추구하는 문제 등에 있어서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지 않으면 사역은 무너지고 맙니다.


넷째, 남자답게 행동하기
위해서입니다. [너희는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행동하며 마음을 강하게 하라.
](고전16:13). 술취한
사람들은 남자답지 못합니다. 그들의 행동은 절제가 없고,
무분별하고, 지혜가 없습니다. 깨어있을 때 어려운 일이나
힘든 일도 제대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영적
전쟁을 수행해야 하며, 고난을 견뎌내야 하기 때문에 항상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다섯째, 기도로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6:18참조(watching--깨어 있고...). 주님은 기도해야 할 때 잠자는
제자들을 위해 깨어 기도하셨기 때문에 이들은
실족했다가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눅22:32, 요17:9,15,20참조할
것). 주님은 지금 이 시간도 우리를 위해 계속해서 기도 해
주심으로 우리는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고, 믿음에서
떨어졌다가도 회복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잠자는 동안에 모든 불의의 속임수와 악한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바로 기도에
깨어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교훈을
남의 이야기 보듯이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성경에서 배우는
교훈들을 매우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 들여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잠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자.
](살전5:6).


47-52절은 가룟 유다의 배반
장면입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께 다가와 입을 맞춤으로
배반했습니다(49).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실행하기 위해
우리의 봉사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는 더욱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이 때 베드로의
행동은 놀랍습니다. 베드로는 칼을 잡고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귀를 잘라 버렸는데, 영적인 전쟁을 육신의 칼로
수행하려는 무모한 용기가 겁이 날 정도입니다. 우리는
총칼로 믿음의 승리, 영적 전투의 승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들어야 할 칼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엡6:18, 히4:12참조).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닙니다(고후10:5).


우리는 구약에서 모세가
베드로와 같은 실수를 했던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22-28절 참조. 영적 전쟁은 믿음의 선한
싸움이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정당화 될 수 있고, 합리화될
수 있는 유일한 전쟁이 바로 영적 전쟁이며, 이 싸움을
일컬어 “선한 싸움”이라고 합니다(딤전1:18,6:12, 딤후4:7).


예수님은 붙잡히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이루시고 계셨습니다(54,56).
이 때 제자들은 도망을 쳤습니다(56b).

57-68절은 인류 역사상 행해진 가장 불의한 재판이었습니다.
주님은 밤에 전격적으로 체포되어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려 갔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론을 내
놓은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주님을 대적할 거짓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거짓 증언에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에는
정확하게 답변하셨습니다. 63절을 보십시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3b).
주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증거하셨습니다(64).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증언이 레위기 24:16에 해당하는 죄로
정죄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주님을 따라와 일의 결말을
보고자 하인들과 함께 불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58).
베드로는 자신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주님은 스가랴 13:8을
인용해서 양떼들이 흩어질 것임을 말해 주셨고, 요한복음
18:8에서 “이들은 가게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시작하면 언제나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악인들과 함께
앉았습니다. 추운 밤이었기에 자신의 몸을 데우기 위해
불가로 갔습니다. 주님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는데, 베드로의 가슴은 추운 날씨만큼이나
냉냉했습니다. 그는 세 번에 걸쳐 주님을 부인했는데 그
강도가 점점 높아졌습니다(70,72,74). 이 때 베드로는 그의
제자라는 사람들의 주장에 그의 제자임을 부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저주하며 맹세함으로써 제자의 지위에서 스스로
사표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는 위협에 굴복했습니다. 74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즉시 수탉이 울더라](74b). 수닭의
울음 소리와 더불어 이 때 주님의 눈이 베드로와
마주쳤습니다(눅22:61). 주님의 시선과 마주친 베드로는
비로소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죄를 지은 후 말씀을 기억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베드로는
그 밤에 자신의 죄를 기억했습니다.


7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밖에 나가 몹시 슬프게 우니라
]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죄로 인해 슬퍼하는 것은 강도가
약해서는 안되며, 크고 깊은 슬픔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부인한 것으로 인해 슬피 울었던 베드로는, 다시는 그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위험 앞에서도 명백히 그를
시인하였습니다.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는, 그 반대의
은혜와 의무를 행함으로써 입증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10참조.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거니와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기
때문이니라.
](고후7:10). 가룟 유다 역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이 아닌 제사장들에게
고백하고(마27:4) 자살해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베다니에
들어오실 때부터 급격하게 믿음이 떨어졌는데, 이는 향유를
부은 여인을 비난하는 가룟 유다의 죄에 동참할 때
부터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신뢰하고 육신을
신뢰함으로써 주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깨어 기도해야
할 때 잠을 잤습니다. 칼을 잡고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침으로써 영적으로 보이고자 했습니다. 주님께서
도망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을 뒤따라와 죄인들과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고통
가운데 있을 때 몸을 따스하게 하기 위해 불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쳤습니다. 그는
제자의 자격을 잃어버렸지만 아들의 자격은 잃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21장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세 번의 질문과 답변을 통해 그가 세 번
부인함으로 잃어버렸던 제자의 자격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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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역 성경에 따르면
십자가상의 강도는 구원받지 못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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