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마 27:1-27:49
요절: 마 27:46
마태 복음 27장입니다. 1-10절은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에 관한 기사입니다.
여기서부터는 특히 사복음서를 유기적으로 비교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요한복음18-19장을 함께
보면 더 상세한 내용들을 볼 수 있습니다. 1-2절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재판이 역사상 가장 불의한 재판임을 보여
줍니다. 이들은 재판을 해서 유죄와 무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형이란 형을 정해 두고 재판을 하고 있습니다.
3-4절에서 가룟 유다는 자신의 ‘죄를 뉘우친 것(repented)’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성경 독자들은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의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1. 가룟
유다의 회개(?)
우리는 성경적인 회개의
의미를 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회개, 자신의 판단의 잘못이나
실수에 따른 뉘우침이 아니라 뜻을 돌이키는 경우에 쓰이는
말입니다. 정확한 정의는 출애굽기 32:14입니다. [이에 [주]께서
마음을 바꾸시고 자신의 백성에게 내리려 했던 그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출32:14).-삿2:18, 삼하24:16,시106:45,욘3:10참조.
주님은 결코 잘못이나 실수로 인한 후회(회개)는 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민수기 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후회하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은즉 어찌 그 말씀하신
것을 행하시지 아니하리요? 어찌 그 이르신 말씀을
실행하시지 아니하리요?](민23:19). -삼상15:29참조할 것.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경우에 후회하십니다. ① 주님은 땅에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창6:6).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범죄함으로 인해 계속해서 악해지고 타락했을 때 주님은
후회하셨습니다. 이는 주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에게 영적 교훈이 됩니다. 주의 영으로 거듭난 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된 성도가 계속해서
범죄하고, 육신적으로만 산다면 주님은 후회하실 것입니다.
②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삼상15:35). 이
역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모두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했던 사울 왕은
인본주의를 추구하는 왕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성경보다 인간적 기준에 따라 산다면
주님은 우리에 대해 후회하실 것입니다. ③ 앞으로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해 후회하실 것입니다(신32:36). [이는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심판하실 것임이라. 이때에
그분께서 그들의 권능이 떠나가고 갇힌 자나 남은 자가
없음을 보시고 자신의 종들로 인하여 후회하시리로다.](신32:36).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하는 우리들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은사를
주시고, 구원하신 사실에 대해서는 절대 후회가 없으신
분이십니다(롬11:29). 우리는 구약에서 주님이 후회하신 예를
통해 영적 교훈과 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회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아니라 세상의 근심이요, 자기
연민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거니와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기 때문이니라.](고후7:10).
베드로의 회개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경건한 슬픔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말씀을 기억함으로써 겪은 참된
회개였던데 반해, 가룟 유다는 자신을 바라 본(repent himself)
연민이요, 일의 계획이 틀어진 것에 대한 절망감에 따른
후회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정죄받은 것을 보고서
후회를 했습니다(3).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회개를 했는데
반해, 가룟 유다는 수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했습니다(3-4).
‘내가
범죄하였나이다“(I have sinned)라고 고백한 사람은 꼭
경건한 성도들만은 아닙니다. 파라오나 발람도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출9:27,10:16, 민22:34). 하지만 이들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아니라 단지 후회였습니다. 다윗과 탕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습니다(삼하12:13, 눅15:18,21).
참된 회개와 잘못된 회개의 결과 또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회복되어 교회의 기둥이 되었지만
가룟 유다는 목메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죄가 전혀
없으시고,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한 혼은
그가 마귀라 할지라도 죽음 외에 달리 자신의 갈 곳을 알지
못했습니다.1) 그는 목을 메달아 죽었는데, 그의
몸은 밭에 떨어져 창자가 터졌고 그의 혼은 ‘자신의 처소’인
지하의 깊은 구렁으로 들어 갔습니다(행2:25). 앞으로 그는
대환란 때 다시 자신의 처소에서 나올 것입니다(계17:8). 가룟
유다는 [내가 무죄한 피를(the innocent blood) 흘려 배반하여
넘기고 범죄하였나이다.](4)라고 고백했는데 이는 정확한
고백입니다. 성령은 이 피에 대한 증언자로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골1:14,20 엡1:7,2:13, 벧전1:2,19, 히9:14,13:12참조 할
것. 바울 사도는 이 피가 바로 하나님 자신의 피라고
증거했습니다(행20:28).
흔히 인본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신격을 약화시키는 대신 가룟
유다의 배반에 상당한 면죄부를 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예를 들어 가룟 유다의 행동은 예수님의 참
메시야 되심을 세상에 알리도록 하기 위한 강력한 촉구였다.
가룟 유다는 결코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닐 것이다!!
등등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의 본질을 아셨고, 그의
동기를 정확히 아시고 기록하시기를,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염려하기 때문이 아니요, 도둑이므로 돈
가방을 맡아 그 안에 든 것을 가져가기 때문이더라.](요12:6).
가룟 유다는 민족주의나 애국지사나 메시야 왕국을
조금이라도 빨리 도래시키겠다는 일념에 불타는 의(義)의
화신이 아니라 도둑이었습니다. 이런 예는 역사에도 많이
있습니다. (예/얼떨결에 독립투사가 된 사람, 영웅이 된 사람,
민주투사가 된 사람...). 주님은 가룟 유다가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26:41). 이는
마귀로 성육신하지 말아야 했다는 말씀입니다.
2.
예언의 성취
9-10절은 흔히 구약 성경의
예레미야에 본문이 없다는 이유로 성경의 정확도와
무오성에 대해 강력한 공격을 받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예레미야가 아니라 스가랴 7:7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이는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spoken)
것이 성취되었으니...]라고 했지 [기록된(written)]이라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한 내용은 스가랴가 예레미야가
말한 것을 기록한 것(렘18:1-8, 19:2,3)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11-25)
주님은 빌라도 앞에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12,14). 주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시며, 유대인의 왕이란 사실에 대해서는
지체하지 않으시고 답변하셨지만(11) 거짓 증인들의 말에는
묵묵부답이셨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억울한
것, 누명, 거짓 증거는 못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들을 다 참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과 유대인들의 시기심으로 인해 예수님이 잡혀 왔다는
사실을 알고 명절 때 죄수 한명을 사면해 주는 관례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했습니다(15-17). 당시에는
바라바라는 유명한 죄수가 있었는데(16), 빌라도는 바라바와
예수 중에 누구를 풀어 줄지 자신이 결정하지 않고
민중들에게 선택하게 함으로써 결정적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17, 21). 수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리들을
선동하여 바라바를 요구하게 했습니다. 빌라도는 아내의
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상관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지만(19), 재판을 굽게 해 버렸습니다.
21-23절을 보십시오.
빌라도는 자신의 주관이나 객관적 증거, 법대로가 아니라
오직 민중의 뜻을 쫓고 있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정치인의
모습입니다. 만약 빌라도 자신이 판결하기에 너무 어려운
재판이라면 로마로 보내어 가이사에게 재판을 청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세 번이나 민중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한번도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① [총독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이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 원하느냐? 하니 그들이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하매](21). 빌라도는 이런 질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면권은 총독인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권한을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이 그런 권한이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그분께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게는 너를
십자가에 못박을 권한도 있고 놓아줄 권한도 있음을 네가
알지 못하느냐? 하매](요19:10). 오늘날 통치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데 사용함으로 스스로 저주와 심판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빌라도는 사람들을 무서워했기
때문입니다. ② [빌라도가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는 내가 어떻게 하랴? 하니 그들이
다 그에게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하거늘](22).
이것 역시 쓸데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물을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 그리고 자신의 양심에,
그리고 법에 물어서 판단해야 합니다. 전형적인 여론 재판,
마녀 사냥식 재판을 빌라도가 자초하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질문에 유대인들은 한 목소리로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들은 얼마 전만 해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던 사람들입니다. ③ [총독이
이르되, 어찌된 일이냐,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거늘 그들이 더욱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하더라.](23). 빌라도는 다시 물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죄목이 무엇이냐? 그들은 아무 대답대신
무조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만 외쳐댑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지만, 잘못된
질문으로 그는 재판을 굽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빌라도가 그분을
놓아주려고 애를 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당신이 만일 이 사람을 놓아주면 카이사르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카이사르를 대적하여 말하는 것이니이다, 하니라.](요19:12).
유대인들은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
카이사르를 자기 왕으로 선택했습니다. 이는 신명기 17:15절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드시 [주] 네
하나님께서 택하실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지니 곧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요, 네
형제가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지니라.](신17:15).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지만 결국 자기 백성들에게 배척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빌라도는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넘겨주고 말았습니다(26). 빌라도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던지
자신의 손을 씻으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전적으로
유대인들의 책임으로 돌렸습니다(24). 이 때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이에 온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의
피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아오리이다, 하니라.](25).
이 말은 매우 무서운 말입니다. 실제로 이들은 주후 70년경부터
대환란 때까지 끊임없이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4.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심(26-61)
주님은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26). 이는 주님이 미리 말씀하신 대로입니다(마20:19).
이사야가 이미 700년 전에 예언한 대로입니다. [그러나
그가 찔림은 우리의 범죄들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불법들로 인함이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사53:5).
28-30절은 그들이 주님을 조롱한 내용입니다. 옷을 벗기고
주홍색 옷을 입히고, 머리에는 가시로 왕관을 만들어 씌우고,
오른 손에는 갈대를 쥐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조롱하며 무릎을 꿇고 ‘만세, 유대인들의 왕이여!’라고
외쳤습니다. 주님은 이런 조롱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내어 주고 머리털을 뽑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어 주며 수치와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도다.](사50:6)란 말씀을 성취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끌려가셨습니다. 골고다는 히브리어 ‘해골의
장소’란 뜻입니다. 그런데 당시 관습과 법에 따르면 죄수가
반드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끌고가는 군사들도 예수님이 억울하게 죄없이 죽는
희생양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에게 억지로 지워 버렸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올라 왔다 영문도 모른채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습니다. 이 사람은 시골에서 와서
지나가다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에서 와서 지나가매
그들이 그에게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고](막15:21).
누가복음에는 시골에서 오고 있다가 잡혀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에 따라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눅23:26).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른 사람은 제자들도 아니었고, 주를
헌신적으로 섬기던 여인들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병을 고침받고, 심지어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나 과부의
아들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주님을 도왔던 사람은 바로 시골에서 올라와 지나가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습니다.
34절은 십자가의 고통을
약간이나마 덜어 주기 위해 베푸는 의식이었습니다.
쓸개즙을 섞은 식초는 일종의 마취제의 효과를 냅니다.
주님은 마취제나 약물이나 술 기운의 도움없이 온 몸으로
고통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벌거
벗기운채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오늘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조각이나 성화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것은 시편 22:18절의 예언에 따른 것입니다.
3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거기에 앉아 그분을 지켜보고](36). 이들은 주님의
재판에서부터 ‘주님의 머리 위에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왕
예수’라고 쓴 죄명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와는 철저히 무관심하고, 분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야기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면 이들보다 더 잘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만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성경에대해, 예수에 대해, 노아의 방주에 대해서
줄줄 꾈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사실 주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십자가 앞에 앉아서 주님을
지켜 보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39절에는
‘십자가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신학을 선호했지만 예수를 무시하고 조롱합니다. 그들은
죽은 율법주의와 전통을 생명의 말씀과 믿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제시한
구원 방법보다 자신들의 의를 더 신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교리와 십자가의 신학, 십자가의 대속과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쳐다보며 조롱하며 지나갑니다.
이들의 조롱하는 말을 보십시오. 39-44절입니다. 예수님의
좌우 편에 함께 못 박혔던 강도들조차 주님을 욕했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40).
이것은 주님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세 번이나 들었던
말입니다. 42절,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면...](42). 역시
동일한 말입니다. 마귀는 끝까지 주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연민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9:25,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그분의 이모요,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와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서 있더라.](요19:25).
이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으로 인해 슬픔과 비탄에
잠겼습니다. 이들은 십자가 곁에 서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는 현장에서 그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했습니다. 비록 그 때 십자가의 구속적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다 들었습니다. 이들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 강림에 모두 동참하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고, 그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54절을 보면 여기에는 백부장도 있었습니다. 큰
믿음의 소유자로 칭찬을 받았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진실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54b)였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곁에 섰던 사람들이 누렸던 특권입니다.
45절로 돌아갑니다. [이제
여섯 시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어 아홉 시까지 계속되더니](45).
빛의 근원이시고, 빛을 지으신 분이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얼굴을 숨기셨습니다. 주님은 죄가
되셨고, 저주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계셨습니다. 어둠은 심판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부터 3시간은 죄의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하는 때입니다. 대낮에 닥친 이 흑암은
인간들이 하고 있는 이 일이 어둠의 일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영적 상태가 완전히 어두운
상태라는 것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보여 주신
것입니다. 빛 되신 주님이 죽으심으로써 이 세상은 어둠이
되었음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세상은 이제 완전히 마귀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교회사 2000년은 낮이 아니라 밤이
되었습니다. 의(義)의 태양이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어둠은 계속될 것입니다.
46절, [아홉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것은 곧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46).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친교가 단절되어 본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 순간은 분명 교제가 단절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교회는 다니지만 한 번도 십자가를 체험해 보지
못한 거짓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가운데 늘 의문으로 남아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동안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매달려 계시는 중에 마지막 남은
육신의 힘을 다해 외쳤습니다. 이는 마치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는 것과 같은 음성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몸의
상태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마디에서 어그러졌으며 내 심장은
밀초같이 되어 내장 한가운데서 녹았나이다.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족각 같고 내 혀가 내 턱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티끌 속에 두셨나이다.](시22:13-15). 십자가는
인간이 고안해 낸 형벌 중에 고통을 가장 극심하게 오랫동안
느끼게 하는 형벌이었습니다. 인간이 의지로는 견딜 수 없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주님은 다시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시되 - 이 구절은
시편 22편의 조명 없이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가운데 예수님은 시편
22:1을 외치셨습니다. 이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시편 22장이
메시아의 수난장이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서 십자가 아래 둘러 서 있는 그들의 귀에 강력한
한 마디의 설교는 시편 22:1이었습니다. 시편 22편은 십자가의
사건을 완벽하게 그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침부터 와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피를 본 민중들,
광기와 흥분으로 미쳐 있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과 많은
백성들은 지금 무슨 말을 해도 들어오지 않을 상황입니다.
하지만 12시부터 3시간 동안 온 세상을 덮는 어둠으로 인해
십자가 아래 있는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것처럼 느낄 시점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때가
아홉 시쯤이었다고 기록합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의
입에서 다윗이 예언한 시편 22:1이 자신들이 못박은 예수의
입에서 터져 나올 때 ‘이 분이 성경의 예언된 메시아로구나!’
깨달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직전까지 말씀을 선포하고 자기를 증언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22편은 너무나 유명하고 쉬워서
누구나 그것을 듣는 자들이 쉽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히브리어로만 말씀하심으로 성경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읽어 주셨습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어릴
때부터 회당에서 읽고 듣던 성경의 본문을 그대로 외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해석을 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담긴 사상이나 메시지를 외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사용하셨습니다.
광야에서나 3년 반의 사역 기간동안이나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직전까지 예수님이 온전히 의지했던 한 가지는
바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나의 울부짖는 말을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지금
십자가에서),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올리브산에서
하신 기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나이다.](시22:1,2).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옵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죽어 가시는 분이 고통
가운데 성경을 선포하셨다면 멀쩡한 육신을 가진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시되] 마태는 계속해서 예수란 이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가 누구입니까?
마태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첫 장부터 정확하게 밝혔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임이라,
하니라](마1:21).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 말은 히브리어2)입니다. 당시에는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가 공용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늘 읽고 암송하는 성경의 기록된 언어가
히브리어였기에 히브리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기자는
의도적으로 그것을 기록하고 나서 의미를 해석해
두었습니다. ‘엘리’는 나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 말의
해석이 필요하지만 십자가 아래에서 그분을 못박는 자들은
해석이 필요치 않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흔한 성경의
관용구였습니다. 엘로힘, 엘리야, 다니엘, 요엘, 엘리사, ...엘(El)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지칭하는 히브리어입니다. 엘리, 엘리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을 외치시는 것입니다. 온 힘을
다해 외치는 예수의 외침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거기 서 있던 사람들 중의 몇사람이 이것을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47).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는가 보자, 하더라](49, 막15:36).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며 복음을 증거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고통 가운데서 살려 달라고 엘리야를 부르는 줄로
들었습니다. 아무리 진리의 말씀이라도 들을 귀가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십자가 위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귀에 익은 성경 구절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이 주님과 그렇게 멀리
있었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져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의 영적 상태는 완전한 어두움 그 자체였습니다.
이제 그 말씀하신
말씀들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 “사람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부르는 것이 참된 말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자신의 심중의 말을 가감 없이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상의 유명인사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들을 모아 놓은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한마디씩하고 죽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죄를
짊어진 채 지옥을 향해 가면서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순간 아들로서
아버지를 찾은 것이 아니라 죄를 짊어진 어린 양으로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아버지로서 아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운 하나님으로서 세상 죄를 심판하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란 사실에 변함이 없었으며,
예수님은 그 사실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조그마한 고난과 영적인 어둠이 찾아와도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의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총을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분의 긍휼은 영원토록 깨끗이
사라졌는가? 그분의 약속도 영원히 끊어진 것인가?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그분께서 진노하사
자신의 긍휼을 닫으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시77:7-9).
우리는 이런 의심과 불신 가운데 시달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그럴 때마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를 외쳤던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내가 비록 죄 가운데 살며 뒹군다해도 아무도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정죄 받고 저주받지 않았습니다. 내
몸이 비록 약하고 쇠하다 할지라도 예수님처럼 물같이
쏟아지지는 않았습니다. 흑암의 깊음이 나를 둘러싸고, 나를
도울 자가 아무도 없을 때, 사방에 원수들이 진을 칠 때 내가
부르짖을 수 있는 한 분이 계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나도 나를 어떻게 주체할 수 없을 때
십자가에 못 박힌 채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기도하신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거부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거부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모두로부터
거부되고 멸시받는 저주의 형벌이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고 선언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요17:21)라고
말씀하심으로 언제나 아버지와 완전한 연합과 친교 가운데
거하고 계셨던 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지금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유를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이유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떨어져서 외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선하시며 의로우시며 거룩하신 분이란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절규를
하셨을까요?
①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실
때나 십자가형의 언도를 받을 때나, 제자들이 도망가고,
사람들이 조롱할 때나,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도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잠잠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로 인해 심판이 가해질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치셨습니다. 오직 죄만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원인이며,
이유라는 사실을 주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비록
아들이실 지라도 죄를 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어찌하여”에 대한 답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로 인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절감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별
생각 없이 짓는 죄, 고의적으로 짓는 죄, 무지해서 짓는 죄,
이 모든 것들이 그것들을 담당하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런
절규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답변하실 사항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 답변해야 할
사항입니다. 바로 나의 죄로 인해
주님은 버림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②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울부짖음은 저와 여러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었습니다. 사실 십자가 위에 있어야
할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요, 이 고통을
받아야 할 사람 역시 예수님이 아니라 죄와 허물 가운데
살아온 저와 여러분이어야 했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은 악을 차마 보지 못하며 죄를 철저히 증오하시는
분이시기에 그 죄를 담당한 예수님을 버리심으로 죄를
미워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아직도 죄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십자가에서 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죄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란 사실에
두려움이 없다면 다시 한번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를
묵상해 보십시오.
③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왔나이다.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이 이것이니 곧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오니 참으로 주의 법이 내
마음속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7-8).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상태에서도 성경의 모든 기록들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유일한 기쁨은 주의 뜻을
행하는 것이셨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고, 병을 고쳐주고, 말씀을 가르치는 것만이 주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고, 마귀를 쫓아 내주며,
죄 사함을 선포하는 일만 하게 하신다면 얼마든지 “주여,
저는 그런 일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쁩니다.” 고백할
것입니다. 그런 것 싫어하는 그리스도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오니...” 고백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거부되고,
멸시와 조롱을 받고, 수치를 당하며, 십자가에 달린 채 극한
고통과 저주를 받으며, 하나님께 버림받는 그 일까지를
말합니다. 시편에 기록하기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고백할 만큼 철저하게 죄와 저주가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
이 세상의 누구도 주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홀로 십자가의 저주를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죄와 저주가 되신 주님은 우리의 의가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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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룟 유다는 ‘마귀’라고
불렸다(요6:70). 가룟 유다는 멸망의 아들(요17:12, 살후2:3)로
불렸다. 그는 자기 자신의 처소(행1:25)로 갔고, 바닥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왔다가 다시 멸망으로 들어간다(계17:8).
2) 하나님은 구약을
히브리어로 신약을 헬라어로 기록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각각 다른 언어로 된 성경은 성경을 성경으로
조명받고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동일한 언어로 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어입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신약과 구약을 하나의 언어로 관통함으로 계시와 조명을
받기에 가장 용이한 성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