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막1:1-16:20
요절: 막 1:1,10:45
마가복음은 성경의 41번째
책이며, 신약 성경의 두 번째 책입니다. 저자는 바나바의
조카이자 베드로의 제자인 마가입니다. 마가는 열두 사도는
아닙니다. 마가복음은 678절, 15,171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가의 집은 초대 교회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각종 행사가 잦은 그런 집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감옥에서 풀려나자 곧 바로 마가의 집으로 갔는데 거기는
성도들이 모여 함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행12:12). 마가는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단기 선교 여행을 떠났고, 도중에
돌아감으로써 바울과 바나바가 이 문제로 큰 다툼을
벌였습니다(행15:39). 후에 바울은 마가와 화해했을 뿐 아니라
그를 영접했습니다(골4:10, 딤후4:11). 바울은 마가를 유익한
사람이요, 동료 일꾼으로 인정했습니다(몬1:24). 허물과 죄로
연약한 지체일지라도 누구나 성장하여 쓰임 받을 수 있는
예를 가장 잘 보여 준 사람이 바로 마가입니다. 베드로는
마가를 각별히 아꼈는데, 그는 아들이라 칭했습니다(벧전5:13).
이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러했던 것과 같은 관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종은
말보다 행동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말씀보다 행동을 강조합니다. 마가는 마태 복음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싣지 않았는데, 종은 족보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탄생, 유년기의 성장
모습 역시 나오지 않습니다. 동방 박사들의 방문이나
천사들의 방문 역시 나오지 않습니다. 종의 탄생에 그런
관심을 보일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산상 수훈 역시
나오지 않습니다. 종은 말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순종이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는
기도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 역시 아들로서가 아니라
종으로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종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죽음으로서 자신의 임무를 마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십자가의 사건을 그런 관점에서 기술했습니다.
마가는 침례인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침례, 광야의 시험과
같은 중요 사건은 1장에서 단 13절로 요약을 하고 바로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들어갑니다.
마가복음의 또 다른
특징은 “주”(Lord)란 표현대신 선생(Master)이란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주(Lord)란 표현은 극히 드뭅니다. 마가복음 7:28,
9:24에서만 예수님을 일컬어 주님이라고 말합니다. 나머지는
대부분 구약을 인용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성령께서 두 번 주(Lord)란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막16:19-20). 마가복음에서 주님의 지상
생애동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Lord)라고 묘사하지 않았는데
이는 마가복음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6:7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기 시작하시며 부정한
영들을 제압하는 권능을 주시고](막6:7)라고 말합니다.
열두 제자를 둘씩 둘씩 보낸 이야기는 마가복음에만
나옵니다(누가복음 10:1에는 칠십명을 둘씩 보낸 이야기가
있음). 종들이 특정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둘씩 보내는
것이 당시 관례였습니다. 4:38에서 주님은 배에서 주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 뒤쪽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그들이 그분을 깨우며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매](막4:38, 마8:24). 마가는 마태와 달리 주님의 주무시는
장면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일을 하고 고단한
모습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자세하게 표현된 구절로는, 마가복음 3:7, 4:1, 6:40, 12:41, 13:3,
15:39절 등이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독특한 표현들입니다.
유념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에만 등장하는 또
한 구절은 마가복음 1:35절입니다. [새벽에 아직 날이 밝기
훨씬 전에 예수님께서 일어나 외진 곳으로 나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우리는 종이 언제 일어나야 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일어나서 주인에게 오늘 해야 할 일을
보고하고, 또 지시를 받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종이라면 이런 자세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종의
일생은 그가 무슨 말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가 무슨 일을
했느냐로 평가받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우리가 몸으로 행한 일에 대해 평가받고, 상급을
받지 이 땅에서 우리가 무슨 말을 잘했는지에 따라 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수행하던
제자들이 놀란 장면을 보십시오. 마가복음 4: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이르되,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심지어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그들은
두려워했습니다. 6:51에서는 심히 놀랐습니다. [그들에게
가사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치매 그들이 심히 놀라 어쩔
줄 모르며 이상히 여기니](6:51).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행동에 놀란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분의 말씀에 깜짝
놀라더라.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그들이 극도로 놀라며 서로 이르되,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이까? 하매](10:24-26). 제자들의 이런
반응들을 더 살펴 보고 싶은 분들은 2:2, 3:10,20, 4:1, 5:21, 6:31,
8:1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마가복음에서만 주님의 말과
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통해 어떤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오직 마가복음에만 예수님의 유년기에,
공생애 사역 전에 직업이 목수였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세와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니냐? 그의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그분으로 인하여 실족하니라.](막6:3).-마13:35에서는
목수의 아들로 나오지만, 여기서는 목수로 나온다. 총 16장
중에서 12개의 장이 And란 말로 시작됩니다. 주님은 계속
일하시고, 또 일하셨습니다. 마가복음의 행동하는 종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 가운데 하나는 "즉시"(immediately)란
말입니다(17번 나옴- 막 1:12,28,31,42; 2:8,12; 4:5,15-17,29; 5:2,30;
6:27,50; 10:52; 14:43). 또 한 단어는 곧바로(straightway)란 말입니다(19번
나옴-막1:10,18,20-21; 2:2; 3:6; 5:29,42; 6:25,45,54; 7:35; 8:10; 9:15,20,24;
11:3; 14:45; 15:1). 이것은 종의 행동 방식이요, 주인의 말에
대한 올바른 반응의 자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자세를
취하지 않고, 머뭇거린다면 그는 신실한 종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중에 느끼시는 감정들이 매우 잘 녹아 있는
성경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고, 어떻게 느꼈는지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어떻게 사역을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표정하시고, 무감각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매우
다양한 감정을 지니신 분이시며, 그것을 표현하셨습니다.
다음 구절들을 유념해서 보십시오. 1:35(외진 곳-하나님과의
시간을 가지라.), 3:5(근심하사 분노하시며), 4:38(태연자약),
6:6(이상히 여기시고), 6:30-32(은밀히 외딴 곳으로), 7:34(탄식하시며),
8:2(불쌍히), 8:12(깊이 탄식하시며), 10:14(심히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10:21(보시고 사랑하사), 11:12(시장하시더니--허기짐),
14:36(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마태복음에는
“기록되었으되”, “성취되었으니”와 같은 구약 성경의
인용이 매우 많습니다. 마태는 구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아들이요, 메시야임을 입증하는데
주력했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1:2에서 단 한번 구약을
인용했을 뿐 전혀 구약의 인용이 없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비유로 말씀하신 곳이 많이 있습니다. 반면 마가복음에는
비유가 별로 없습니다. (4번 나옴- 막4, 7, 12, 13장). 반대로
마태복음에는 주님이 기적을 일으키신 일이 별로 없습니다.
마가복음에는 20번 정도의 주님이 행하신 기적이 나옵니다.
종으로서 주님은 몸이 상하고 닳도록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주님이 ‘우리
아버지여...나의 아버지여...’로 시작하는 기도가 없습니다.
종은 기도의 인도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산상 수훈이나 어떤 훈시적인 가르침이 없습니다. 종은 법을
공포하고 방향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는 ‘다
이루었다’와 같은 선언이 없습니다. 종의 일은 결코 끝나지
않는 법입니다.
마가복음은 시작의
책입니다(1:1). 시작을 매우 강조합니다. 다음 구절들을 보면
모두 ‘시작하더라’라는 말이 들어있습니다(1:1,4:1, 5:17,20,
6:2,7,34,55, 8:11,31,32, 10:41,47, 11:15,12:1).
마가복음에서 논란이 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는 마가복음 13:32절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결코 아무도 알지 못하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며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13:32). 마태복음에는 ‘아들도’란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는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복음서의 특징을 알면 매우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15을 보십시오. [내가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인이 하는 것을
종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오히려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5).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질문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이 질문들은 우리의 마음을
깨우기에 충분한 질문들이며, 항상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할 줄로 압니다.
①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막4:40).
② [너희도 이렇게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막7:18). 막17,
21참조.
③ [이 광야 어디에서
누가 빵을 구하여 이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8:4).
제자들의 질문
④ [사람이 만일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혼(魂)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혼과 바꾸겠느냐?](8:36-37).
⑤ [그들이 극도로
놀라며 서로 이르되,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이까?](막10:26).-제자들의 질문
⑥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막12:15).
⑦ [너희가 성경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하므로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막12:24).
⑧ [네가 자고 있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막14:37).
다음은 마가복음 5장에
나온 기도 응답에 대한 주님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첫째,
부정한 영들이 주님께 간구하기 시작했습니다(10-13). 주님은
이들의 기도에 Yes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두 번째, 주민들의
기도입니다. 그들은 즉시 예수님이 그 지역을 떠나주시도록
구했습니다(17). 이 기도에 대해서도 주님은 Yes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셋째, 주님으로부터 고침 받아 제자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의 기도입니다(18-19). 이 기도에 대해서 주님은 No로
응답하셨습니다. 주님은 가장 은혜를 입은 성도, 가장
훌륭한 기도 제목(제자가되겠다는)을 가진 이 사람의 기도를
거절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언제나
Yes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유일하게 거절된 기도가 바로 신자의 기도였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저와 여러분의 기도 제목은 때로 너무나
합당함에도 불구하고 No로 응답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은 사복음서
중에서 마귀들의 활동과 권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산자가 무덤 가운데 거하면서 죽은 자 보다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탄이 자신의
수하들인 마귀들과 사람들에게 갖는 권세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잃어버린 사람들의 혼과 몸의 상태를 누구도
치유해 줄 수 없는 비참한 현실을 보게 됩니다. 동시에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마귀와 그의 수하들에 대해 갖는
강력한 힘을 볼 수 있습니다. 15절 말씀은 주님의 말씀의
권능이 임한 사람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의 정신은
온전해졌고, 몸은 회복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6:9-20절은 흔히
문제의 구절들이라 불리는 구절입니다. 배교한 신학자들
사이에 이 구절들은 본래 마가복음에 없는 구절이란 의문을
제기하면서 많은 현대 역본들에서는 이것을 괄호로
처리하거나 ‘고대의 권위있는 사본에는 없음’이란 각주를
달아 놓았습니다. NII, NASB 성경에도 그렇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구절들입니다.
마가복음 16:15절은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합니다. 16-18절은 오늘날 오순절 교회나 은사주의자들이
널리 애용하는 구절이지만 많은 오해를 빚고 있습니다.
16절-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이 구절은 침례에 의한 중생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사도행전 2:38절과 더불어 가장 사랑하는 구절이지만
하반절을 통해 침례는 구원과 상관이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16b).
17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들이 따르리니... 이 구절은 모두가 사도의 표적을
행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17,18절의 표적은 현재
성도들에게 문자적으로 성취되지 않습니다. 이런 표적들은
초대 교회 때에 사도들에게 이 표적들이 주어졌고, 대환란
때 성도들에게 주어질 표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