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23




말씀: 눅 1:1-24:53

요절: 눅 2:11


누가복음은 성경의 42번째
책이며, 신약 성경의 3번째 책입니다. 누가 복음은 가장 긴
복음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책입니다.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사람의 아들로서
완전한 인간의 표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마태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출발점으로 마리아의 계보를 올라가
인류의 첫 사람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 아버지를
원조(元朝)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2권의 성경을 썼습니다. 두 권 모두 수신인은
데오빌라입니다. 누가의 직업은 의사였습니다. 누가는 흔히
신학자들 사이에 이방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성경적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맡겨졌다면
누가는 유대인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둘다 장문의 성경이기에 신약 성경의 25%를
차지합니다. 누가복음은 여인들의 복음서라 일컬어질
정도로 여인들의 두드러진 기사가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1장에는 엘리사벳이란 걸출한 믿음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분은 침례인 요한의 어머니였습니다. 1-2장에 걸쳐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나옵니다. 마리아 역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2:36-38절에는 ‘안나’라는 여인이
나오는데 결혼한지 7년만에 과부가 되어 84년을 홀로 지내며
기도와 금식을 하며 성전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10:38-42절은 예수님과 각별한 친분을가졌던
마리아와 마르다가 나옵니다. 7:11-15절은 나인성 과부의
이야기, 7:37에는 회개한 여자 죄인의 이야기로서 옥합을
깨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8:2-3에는
주님의 사역에 물질로 도운 여인들의 이야기, 23:27에는
예루살렘에 따라온 여인들, 10:38-41 정신없이 바쁜 마르다의
기사, 10:39-42절의 마리아의 이야기, 24:10절의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기사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다른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는 4편의 찬송시가
있습니다. 이는 시인 동시에 노래입니다.


· 마리아의 찬송시(눅1:46-55)


· 침례인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찬송시(눅1:68-79)


· 경건한 시므온의 찬송시(눅2:29-32)


· 천사들의 찬송시(눅2:14).


이제 조금 더 내용을
들어가 보겠습니다. 누가 복음은 1,151 구절, 25,944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다음 4 부분으로 뚜렷이 구분됩니다.


1) 예수님의 유년기(1:5-4:13)
-2:10,11절을 읽을 것


2) 갈릴리 사역(4:14-9:50)-
4:14절을 읽어 볼 것


3) 예루살렘으로의 여정(9:51-19:40)-9:51절을
읽어 볼 것. 주님은 이 때에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13:22, 17:11, 18:31, 19:11, 28,37절입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행해진 표적은 다섯 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4) 십자가와 부활(19:41-24:53)-20:14절을
읽어 볼 것.


누가복음의 기록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람이심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추적할 때 첫 사람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
간 것입니다. 저자 누가는 마가와 마찬가지로 12사도가
아니었습니다. 누가에 대한 언급은 매우 적습니다. 그는
사랑받는 의사였습니다. [사랑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인사하느니라.
](골4:14). 누가는 평생
바울과 동행했던 동료였습니다. 바울이 죽기 직전에 쓴
마지막 서신인 디모데후서에 그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오직
누가만 나와 함께 있기 때문이라. 마가를 데리고 함께 오라.
이는 그가 나의 사역에 유익하기 때문이라.
](딤후4:11).
바울의 동료들이 다 바울을 떠났을 때, 끝까지 바울 곁에서
그를 지켜 주었던 사람이 바로 누가였습니다. 누가는
의사로서 병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장면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때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보기 위해 목자들이 온 장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유년 시절에 대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 열두 살 되셨을 때에 그들이 이
명절의 관례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눅2:42). 주님은
이 때 성전에서 박사들과 함께 성경에 대해 토론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셨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바로 그곳임을
밝히셨습니다. 주님이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 최초의
사건입니다.


마태 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유대인의 왕의 탄생으로 기술한 반면
누가복음에는 세상 사람들을 위한 구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눅2:10-12). [이 날 다윗의 도시에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2:11). 예수님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죽음 역시 철저히 사람되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때에 백부장이 일어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이분은 확실히 의로운
사람이었도다
, 하고
](눅23:47).


누가복음에 기록된 비유들
역시 철저히 이런 주제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비유가 철저히 하늘의 왕국에 관한 주제라면 누가복음은 ‘어떤
사람이...
’라고 시작합니다.


· 빚진 자의 탕감에 대한
비유(눅7:41)- 어떤 사람에게...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30)-
어떤 사람이...


· 포도원 비유(눅13:6) -어떤
사람이...


· 하늘 왕국의 비유(눅13:19)
- 어떤 사람이...


· 만찬 비유(눅14:16)- 어떤
사람이...


· 잃어버린 양에 관한
비유(눅15:4) -어떤 사람이...


· 탕자의 비유(눅15:11) -어떤
사람이...


· 포도원의 비유(눅20:19)-
어떤 사람이...


누가는 인간으로서,
사랑과 연민과 동정, 긍휼이 많으신 주님을 통해 바른
인간상의 표본을 제시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모습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가 복음은 예수님이 병자와
약한 자와 소외된 자들, 죄인들을 부르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었음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5:29, 7:29, 7:37, 18:9,
19:7, 23:39을 참조할 것. 주님은 죄인들을 정죄하신 것이
아니라 불러서 회개케 하시고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주님은 병든 자, 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께서
그 여인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눅7:13).
13:11에서도 8년동안 병을 앓았던 여자를 부르셔서 고쳐
주셨는데,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눅13:11-12). 19:41절과
23:28에서는 주님께서 파멸당할 예루살렘을 향해 우셨습니다.
주님의 비유에는 죄인들을 향한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눅10:33, 15:20). 이런
마음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까지 그대로 이어져서
십자가 우편에 있던 강도가 자신을 욕하다가 회개했을 때
그를 향해 구원을 선포하심으로 끝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43). 이
기사는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가장 감동적인
기사입니다.


이런 예는 주의
만찬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독자라면 결코 놓치지 않을 한 단어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니라.
](마26:28,막14:24)라고
기록하지만 누가는 [..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그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라.
](눅22:20).
‘많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너희를 위하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원수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눅6:27,35). 주님은 여기서
구체적인 행동 수칙까지 말씀하셨는데, 그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 방법이 그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분께서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와 악한
자에게 인자하시기 때문이니라.
](눅6:35).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개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10장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율법사들이나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더 진정한 종교의
본질적인 면을 지니고 있는 사마리아인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13장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은
이방인들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동일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
](눅13:3,5). 누가복음은 유대인들의
민족적 종교적, 영적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이방인들과의
경계를 두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열 사람의
문둥병자를 고치신 주님의 은혜와 긍휼의 기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고침받은 열 사람 가운데 주님께 돌아와 감사를
표시한 사람은 단 한명 뿐이었습니다. 그 한 명은 다름아닌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분의 발 앞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감사를 드리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더라.
](눅17:16).
사마리아인들은 타국인들로 분류되었지만(17:18), 주님은
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이런 일련의
기사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심으로 율법의 본질이 형식이 아니라 그 내용과
정신에 있음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이런 행위는 당시
사회에서는 반율법주의로 낙인찍혀 큰 위험이 따르는
행동이었습니다. 안식일에 관련해 유대인들을 분노케 한 몇
가지 기사를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6:5,6-10, 13:14-14, 14:1-6
참조할 것. 당시에 이런 안식일 논쟁은 심각하고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켰지만 주님은 그들을 위선자로
판단하시고 정죄하셨습니다.


복음 전도 방식 역시
철저히 병자와 약자, 이방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0:5에는 [...너희는
이방인들의 길로도 들어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어떤
도시로도 들어가지 말며
](마10:5)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9:2,6에는 어디든지 가도록 하셨습니다(everywhere란
말에 주목할 것). 누가복음은 바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복음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2:32에서도 분명하게
나옵니다. [이방인들을 밝히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매
](눅2:32). 마태복음은
하늘의 왕국이란 표현이 주를 이룹니다. 대신 누가복음에는
하늘의 왕국이란 말은 아예 나오지 않고, 하나님의 왕국이란
표현이 주를 이룹니다.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여섯 가지의 기적들이 있습니다. 이
기적들은 모두 완전하신 사람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이 이적들은 너무나 인간적인
측면에서 행하신 이적들입니다.


· 베드로에게 고기를 잡게
하심(눅5:4-11)


·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심(7:11-18)


· 병약한 영에 사로잡힌
여자를 고치심(눅13:11-17)


· 수종들린 남자를 고치심(눅14:1-6)


· 열명의 나환자를 고치심(눅17:11-19)


·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고치심(눅22:50-51)


다음은 누가복음에서만
나오는 10가지 비유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 두 명의 빚진 자(더 많이
빚진 자와 적게 빚진 자)의 비유(7:41-43)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30-37)


· 끈질기게 조르는 친구의
비유-기도에 관하여(11:5-8)


·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2:16-21)


· 열매없는 무화과의 비유(13:6-9)


· 잃어버린 은화(15:8-10)


· 잃어버린 아들(15:11-32)


· 불의한 청지기(16:1-12)


· 불의한 재판관(18:1-8)


· 바리새인과 세리(18:9-14)


누가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하심에 관한
것입니다. 다음 기사는 누가만이 기록한 것입니다.


· 구유에서 태어나신 주님(2:7)


· 어린 양을 헌물로
드리지 못하고 비둘기를 드리심(2:24)


·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심(4:18)


· 사람들의 구제 헌금을
받으심(8:1-3)


· 가난한 자들을 잔치에
부르심(14:13,21)


· 거지 나사로(16:20)


· 삭개오는 가난한
자들에게 물질을 나누어 줌(19:8)


마태복음의 산상 수훈과
누가복음의 평지 설교는 내용이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른
복음입니다. 마태복음 5-7장에 제시된 산상 수훈은 메시야
왕국의 왕으로서의 통치 규범과 구약에서의 율법과의
대조를 통해 율법과 선지서들을 완성하고 권위를 드러내고
있는 반면, 누가복음에서 평지 설교는 그런 배경이 전혀
없이 인류의 구주로서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3에서는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5:3)라고 하는데 반해, 누가복음 6:20에서는
단지 [너희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왕국이
너희 것임이요,
](눅6:20)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5:6)라고
말하는데 비해 누가는 [지금 굶주리는 너희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눅6:21)라고 말합니다. 누가
복음에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가 특별함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오직 누가복음에만
십자가를 앞둔 주님의 기도가 처절한 고뇌를 담고 있는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큰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지더라.
](눅22:44).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또
한 가지의 아름다운 기사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되돌리신
주님의 이야기입니다(눅24:13-35). 그들은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낙향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향으로 가면서 이 일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가까이 오셔서
동행했습니다(24:15).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무지요 눈먼 상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고 나서야 눈이
열렸습니다(눅24:31). 주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쳐다 보라고
말씀하신 대신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셔서 믿음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믿음이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생긴다는 평범한 진리(롬10:17)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십자가의 사건에서부터
자세히 알았고, 부활의 증인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24:25).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과 행동에 능력있는 대언자란 사실을 직접 체험했고
증언하였습니다(24:19).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믿었습니다(24:21).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이들은 슬펐습니다(24:17).
그들은 함께 걸으며 하는 이야기는 얼마나 슬픔이 깊이
묻어났던지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걸으면서 서로 주고받는 대화가 무엇이기에 슬퍼하느냐?
](24:17)고
물으실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 그것도
자신들과 안면이 있고 친분이 깊은 여인들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여자들의 말에 놀라기만 했습니다. 놀람은 믿음이 아닙니다(24:22).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들은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까? 27절의
말씀대로 성경 기록들을 풀어 주실 때, 그 말씀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들은 고백하기를, [그들이 서로 이르되,
그분께서 길에서 우리와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
기록들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24:32) 예루살렘을 향해 발길을 돌려
주님의 부활을 증언했습니다(24:35). 우리는 어떻게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가를 이 사건을 통해 자세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을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놀라운
관심과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누가복음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사건은 십자가 우편의 강도입니다.
누가복음 23:39-43절에 나오는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는 누구나
마지막 순간까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복음의 위대한 진리를
가장 잘 보여 주는 동시에 주님의 사랑의 범위에는 한계가
없음을 나타내는 가장 아름다운 기사입니다. [매달린
범죄자 중의 하나는 그분을 욕하며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이거든 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다른
하나는 되받아서 그를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마땅한 보응(報應)을 받는 것이니 참으로
공정하거니와 이 사람은 아무 잘못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고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39-43).
여기서 두 명의 강도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분명 얼마전까지 감방의 동료요,
태어난 날은 다르지만 죽을 때는 같이 죽는 쌍둥이
사형수들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5:32에서 그들은 함께 주님을
욕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니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그분을 욕하더라.
](막15:32).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 명의 강도는 마음이 바뀌고,
회개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못박힌 예수를 향해, ‘주여’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가장 위대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구원을 주는 고백입니다(롬10:9,13). 이 강도의 이런 변화는
옆에서 끝까지 욕하는 동료를 향해 책망하고, 자신들의
죽음은 마땅한 보응의 죽음이란 담담한 죄의 고백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 마지막 대화를 통해 왼편에 있는
강도에게는 다시 한번 마지막 복음이 전해졌고, 구원의
간증이 전해졌습니다. 주님은 회개하는 죄인을
구원하심으로 동일한 죄에 빠진 동료 죄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십니다.


누가복음에서의 또 하나의
매력적인 기사는 종의 자세에 관한 것입니다. 이 기사는
저의 친구(김태진, 전주 킹제임스 성경 침례 교회 형제)가
설교학 시간에 설교를 하기까지 그다지 저에게 깊이 와 닿지
않는 구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의 설교 후에 저는
성경에서 가장 사랑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전도 여행을 다녀와서 형제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간증 형식으로 자기 자랑을 하자, 곧 바로
강단에 올라가 이 본문을 펴서 읽었는데, 어찌나
충격적이었던지 여러 형제들이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가축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으면 /과연/ 누가 그 종이 밭에서 돌아올 때에 즉시 그에게
이르기를, 와서 앉아 음식을 먹으라, 하겠느냐? 도리어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저녁을 먹도록 준비하고 또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나를 섬기며 너는 그 뒤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아니하겠느냐? 종이 명령받은 일을 했다고
해서 그가 그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노라.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그 일들을 다 행한
뒤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니이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이다,
할지니라.
](눅17:7-10).


우리는 다만 우리가 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 않았다면 불순종한 종이요,
사악한 종이지만 했다고 해서 주님 앞에 자랑할 것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종의 직분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런 종의 도를 마음에 깊이 새긴 성도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I'm sorry라고 하실 일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마찬 가지로 주님이 우리에게 Thank you라고
하실 일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에게 Thank you, I greatly
appreciate you...이런 말을 듣고 싶겠지만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우리 모두 명령받은 일을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니이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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