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여호수아 1-24장
요절: 여호수아 1:8,9
여호수아는 모세가 준 이름인데 뜻은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다”(민13:16)란 뜻입니다. 여호수아는 24장; 658절; 18,858단어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정복하고, 무려 34번의 전쟁 중에 33번을 완승으로 이끈 믿음의 용장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400년, 광야에서 40년, 그리고 약속의 가나안에서 A.D 70년까지 있었습니다. 이집트는 세상의 모형이며, 죄의 속박 아래 노예로 사는 모습을 예표합니다. 이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상태, 죄와 슬픔을 안고 사는 자연인들의 상태 그대로입니다. 광야의 생활은 구원은 받았으나 육신적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예표합니다. 불신과 불순종으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채 주님이 주신 복을 누리지 못한 채 방황하는 것을 예표합니다. 가나안의 입성은 승리하는 영적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미리 주시고 약속하신 것을 믿음으로 어떻게 취하고 누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답을 줍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이집트와 가나안 사이에서 평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구원은 받았지만 믿음으로 주어진 영적인 복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승리를 취하지 못함으로 안식도 승리도 맛보지 못한 채 힘든 신앙 생활을 합니다. 여호수아의 주제는 어떻게 주님의 약속을 현실로 만드는가? 주님이 주신 말씀이 나의 손에 잡히며, 나의 발에 밟히고, 실제적인 나의 소유로 현재 누릴 수 있는가?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하(minister)였으며, 12명의 정탐꾼 중의 한 명이었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전투를 이끈 장군이었습니다(출17).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으면서 그 뒤를 이어받았는데 이 때 나이가 85세였다고 합니다. 그는 7년 동안 전쟁을 했고, 지파별로 유업을 분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110세에 죽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히브리어로 예수와 같은 발음이요, 같은 글자입니다. 또 헬라어로도 그 의미가 같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8에는 ‘여호수아’를 ‘예수’로 표기했는데 이는 킹 제임스의 오역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영적인 깊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반대하는 이 땅의 원수들을 정복하고 주님의 약속을 차지한 것에 반해 예수님은 우리를 대적하고 반대하는 하늘의 정사들과 권능들을 노략하시고 하나님의 약속들을 모두 차지하셨습니다. 골로새서 2:14-15, [손으로 쓴 규례들 곧 우리를 대적하고 반대하는 규례들을 지우시고 그것들을 길에서 취하사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들과 권능들을 노략하사 십자가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골2:14-15).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을 주고, 유업을 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안식과 저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을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1:3,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1:3). 여호수아가 가데스바네아에서 한 첫 번째 보고는 백성들에게 배척되고 멸시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역시 초림 때에는 자기 백성들에게 배척되고 멸시받았습니다. 광야에서 38년간의 방황기는 가나안 족속들에게는 심판의 경고와도 같았으며,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노아의 홍수 이전에 120년의 세월이 주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기간동안 가나안 족속들은 누구라도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하늘과 땅의 하나님이란 사실이 충분히 알려졌습니다(수2:11). 하나님은 전쟁을 통해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죄악 가운데 사는 민족들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십니다. Bob Jones Sr. 목사님은 “전쟁은 이 땅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고, 지옥은 저 세상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다”라고 갈파했습니다.
여호수아를 3부분으로 나누면 1-5장까지 요단강을 건너는 이스라엘, 6-12장까지 원수들과 싸우는 정복 전쟁, 13-24장까지는 유업의 분배입니다.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친히 말씀하셨습니다(1).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표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do give) 땅으로 가라”(2), “...내가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다 너희에게 주었나니(have given)”(4), “...내가 이 백성에게 주리라(shall give)”(6)라고 말씀하셨는데 시제가 다 다릅니다. 주님은 이미 주셨고, 주시며, 주실 것입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주님의 약속은 이미 성경에 기록된 과거형인 동시에, 현재 믿음으로 누릴 수 있는 현재의 것이며, 앞으로 누리게 될 미래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할 때, “받는 줄로 믿으라”(막11:24)고 말씀하십니다. 상속을 주는 아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 아이를 붙들고, “이것은 다 네 것이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네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미 유언장에 다 네 것으로 주었단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내가...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5) 이 약속은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믿음의 영웅들에게만 해당 사항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3:5-6을 보십시오.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마태복음 28:20,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 주님의 이름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마1:23). 여호수아는 막중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7-8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공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라, 그것을 묵상하라. 그리고 지키라.” 이것은 어느 한 때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평생동안 주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성공의 비결이 여기에 있는데 다른 곳에서 다른 것을 주님께 구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공이란 말은 성경 전체에서 이 구절에 단 한번 나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여호수아는 백성들의 관원들에게 명령했습니다(10). 관원들은 다시 백성들에게 명령합니다(11). 이것이 바른 정상적인 명령 체계입니다. 11절에 “사흘 안에 너희가 요르단 강을 건너....”라고 말합니다. 사흘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흘 후면 새로운 땅에 들어가, 새로운 시작, 새로운 삶이 있습니다. 이전 세대들과는 달리 백성들은 여호수아를 잘 따랐고 절대 순종할 것을 약속했습니다(16-18). 백성들은 자신들의 지도자인 여호수아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17). [...오직 주 당신의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시던 것같이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영적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성도들의 특권이며, 의무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을 뿐 아니라 성도들이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습니다(고후1:11,엡6:19, 살전5:25, 몬1:22).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살전5:25). 기도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위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도 등장하는 믿음의 여인 라합이 나옵니다. 믿음의 여인이라고 해서 거룩하거나 의롭게 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창녀였습니다(1). 하지만 수십만의 다른 여리고 시민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믿었습니다. 이는 아무리 더러운 죄인이라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평범하고도 위대한 진리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그는 단지 믿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행동으로 드러낼 줄 아는 살아있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히11:31,약2;25). 오늘날 신앙인이라고 거룩한 체 너스레를 떨면서도 창녀 라합만도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라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적 교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라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믿었습니다(8-11). 하나님에 대해서 들은 사람들은 너무나 많았지만, “주 너희 하나님 곧 그분께서 위로 하늘에서와 아래로 땅에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11)고 고백한 사람은 라합 한 명 뿐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받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둘째, 그녀는 죄인이었고, 정죄아래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미 여리고를 멸하시기로 정죄하셨고, 곧 철저히 멸망당할 것입니다(6:21). 여리고의 주민들이 그 사실을 알든 알지 못하든, 믿든 믿지 않든,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여리고는 분명히 망합니다. 지금 세상도 이와 같습니다. 셋째, 여리고 주민들은 회개의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죄악과 불법이 충분히 차기까지 400년이나 참으셨습니다(창15:16). 그들은 출애굽 때부터 이미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10). 오늘날도 사람들은 대환란이나 지구 종말이나 불 심판, 지옥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렴풋이나마 듣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2천년 동안이나 심판과 지옥에 대해서 전파되었습니다. 넷째, 라합은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 준 것만이 믿음이 아닙니다. 그녀의 참된 믿음의 표출은 바로 21절입니다. [...주홍색 줄을 창에 매어 두니라](21b). 이 행위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단지 믿기만 하면 누구나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것이었습니다. 구원은 주홍색 줄을 창에 매는 것보다 더 쉽습니다. 다섯째, 라합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했습니다. 그녀는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들 모두를 구원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1)는 말씀을 몸소 보여 준 예입니다. 라합은 자신의 믿음을 가족들에게 그대로 전했고, 가족들 역시 라합의 말대로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날 아무도 밖으로 나가지 않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섯째, 그녀는 심판으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결과는 안전했습니다. 라합의 집은 성벽 위에 있었지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장소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한 장소입니다. 깊은 산 속, 높은 바위 위, 여리고 성 안이 아니라 눈에 잘 띄는 높은 성벽 위라 할지라도 약속의 말씀이 있는 그곳이 가장 안전합니다. 일곱째, 라합은 유대인과 결혼했습니다. 여리고는 무너지고, 멸망했지만 라합은 신랑을 얻었고, 기쁨을 누렸습니다. 창녀가 유대 지파의 남자와 결혼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랐습니다. 이는 죄인들이 앞으로 유다 지파의 사자인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할 것임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예표입니다. 라합은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녀의 인격이나 종교적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라합같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3장입니다. 여호수아는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3:1). 이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찍 일어나신 것과 같습니다. 종은 일찍 일어나 주인의 명을 기다려야 하며, 자신의 할 일을 주인에게 고해야 합니다. 밤 문화를 새벽 문화로 바꾸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호수아는 항상 일찍 일어났습니다(3:1, 6:12, 7:16, 8:10). 3장에는 ‘언약궤’(ark)란 말이 10번이나 나옵니다. 언약궤는 주님의 말씀, 주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4절, [그러나 너희와 그 궤 사이의 거리를 이천 큐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마땅히 가야할 길을 알게 되리니 이는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지 아니하였음이라.](4).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바로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니라.](히10:19-20).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인도함을 받는 성도들은 결코 경험 부족을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배우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여호수아도 이 길은 처음이요, 첫 경험이요, 새로운 도전입니다. 시편 32:8, [내가 너를 훈계하며 네가 가야할 길로 너를 가르치고 내 눈으로 너를 지도하리로다.] 이사야 58:11, [주께서 너를 항상 인도하사....]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며 항상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주님은 여호수아를 높이셨습니다(7). 이는 모든 권위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옴을 절감하게 합니다. 영적 권위는 교인들이 부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료 목사들이나 후배들이 부여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 권위는 온전히 위로부터 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홍해를 갈랐듯이 여호수아를 통해 요르단 강을 가르셨습니다(9-13). 백성들은 요르단 강을 마른 땅처럼 건넜습니다. 궤를 멘 자들이 요르단 강에 먼저 발을 담구었고, 발이 물가에 잠기었습니다(14). 때로 성도들은 발을 담그는 위험과 믿음이 필요합니다. 홍해는 세상의 속박으로부터의 건짐이었다면 요르단 강은 가나안의 축복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홍해가 세상으로부터의 단절과 분리라면 가나안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요, 바침입니다. 홍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은 것이라면 가나안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홍해를 통해 주님은 단번에 원수들을 멸망시켜 버렸지만 요단강을 건넘으로 원수들은 서서히 조금씩 승리해 나가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는 믿음으로 우리가 날마다 승리해야 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4장은 요단강을 무사히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그 기념으로 지파별로 요단강의 돌들을 취하여 12개의 돌로 두 곳에 무더기를 쌓았습니다. 하나는 제사장들이 강 한가운데 섰던 그 자리에 쌓았고(9), 하나는 길갈에 쌓았습니다(20). 이 기념은 교회에게 주는 기념과 유사합니다. 요단강 한 가운데 세운 것은 물 속에 돌이 묻힘으로 인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 바 된 침례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길갈에 세운 돌은 역사를 후손들에게 믿음을 주고, 주님의 행하신 일을 돌아보게 할 목적으로 세웠는데, 이는 주님오실 날까지 주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죽으심과 언약을 보여 주기 위해 행하는 성만찬과도 같은 것입니다(19-21).
5장입니다. 요단강을 건넌 후 이스라엘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전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동안 행하지 않았던 할례를 받았습니다(3-8). 이들은 광야에서 할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전쟁을 하기에 앞서 주님이 베푸신 큰 영적 경험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날 너희에게서 이집트의 수치를 떼 내어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의 이름을 이날까지 길갈이라 하니라.](9). 여기서 이집트의 수치란 이집트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으로 인해 광야에서 40년을 헤맨 사건을 말합니다. 그들의 불신과 광야의 방황은 온 민족들에게 하나님을 전혀 영화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옴으로 불명예스럽게 되었던 주님의 수치가 벗겨진 것입니다. 둘째,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은 어린 양의 피를 통한 구속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셋째,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하늘의 만나가 중단되었습니다(12). 땅의 열매는 반드시 땅에 묻혀야 다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잘 예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승리하기에 앞서 할례를 행하는 것과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는 죄의 몸인 육신과 이전 행실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붙드는 것이 영적 전쟁의 선결 요건이란 진리를 보여 줍니다. 그 때 주님은 주의 군대 대장으로 오셔서 여호수아를 만나주셨습니다. 지금 여리고 성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대로 주님은 만나 주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시란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전쟁에서 주님을 최고 사령관으로 두는 일! 이것은 승리를 보장받는 길입니다. 사업에서 주님을 최고 경영자로 두는 일, 교회에서 주님을 머리로 모시는 일, 가정에서 주님을 가장으로 모시는 것이 화평과 행복의 길입니다. 주님은 현재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을 채우시는 분이십니다(엡1:23-all in all). 전쟁에 나설 담력과 용기가 부족하십니까? 주님은 군대 대장이십니다. 메마른 혼을 녹일 사랑이 부족하십니까?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사업을 할 경제력이 부족하십니까?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다 자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는 즉시 땅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14). 공적 무대에서의 영광스런 승리는 사적으로 은밀히 주님께 엎드린 자에게만 찾아옵니다.
6장입니다. 주님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구체적인 세부 작전을 지시해 주셨는데, 참으로 이상한 전쟁이었습니다. 칼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포위한 채 6일 동안 한 바퀴씩 성 주변을 도는 것이었습니다(3). 일곱 명의 제사장은 양 뿔 나팔을 들고 언약궤 앞서 나갔습니다. 7일 째 되는 날은 도시를 일곱 번 돌고, 제사장들은 양 뿔 나팔을 길게 불고, 그 소리를 신호로 큰 소리를 외치면 됩니다(5).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에 철저히 순종해서 단번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전쟁은 오직 주님이 주신 승리란 사실이 만방에 공포된 사건이었습니다. 승리의 비결을 요약하면 첫째, 순종입니다. 둘째, 믿음과 인내입니다. 백성들은 아무도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대해서 7일 동안이나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믿음으로 인내했습니다. 셋째, 그들은 불가능에 대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넷째, 그들은 지도자들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이는 전임 세대들이 늘 실패했던 것 중의 하나였지만 이들은 철저히 여호수아를 따랐습니다. 주님은 승리에 도취한 백성들이 전리품에 탐닉하여 범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여리고의 모든 것들은 다 저주받은 물건이기 때문입니다(18). 주님이 완전히 멸한 여리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다시 건축할 수 없도록 저주가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26)-왕상 16:34참조. 여리고 전투에서 배울 수 있는 실제적인 영적 교훈을 찾아보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주님 앞에 철저히 얼굴을 바닥에 대고,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쟁에 승리하는데는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같이 움직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아무도 혼자서 적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성도들의 연합은 매우 중요합니다. 전쟁에 승리하려면 주님이 제시하신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어리석은 방법이 인간의 지혜를 멸합니다. 1세대들은 여리고의 높은 성과 강한 군대를 보았지만 2세대들은 주님을 바라보았기에 승리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고정되는가?에 따라 승패가 결정납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라합은 구원받았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경우에도 안전합니다.
7장입니다. 여리고에서 대승을 거둔 여호수아는 곧 바로 아이(Ai) 성으로 진격했습니다. 정탐꾼을 보내서 보고를 받은 결과 3,000명이면 족하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조언이 아니었습니다. 8:1에서 하나님은 모두 다 올라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사자는 토기를 잡는데도 전력을 다하는 법입니다. 여호수아는 승리 후에 약간 방심을 했습니다. 주께 조언을 구하기 보다 정탐꾼의 보고에 귀 기울였고, 자기 백성들 안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제대로 살피지 못했습니다(1). 백성 가운데는 여리고에서 저주받은 물건을 감춘 아간이 있었고, 그로 인해 주님의 진노가 불타고 있었지만 여호수아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전쟁을 벌였다가 그날 36명이 죽었고, 다 도망치는 패배를 당했습니다(4-5). 이는 우리가 언제 가장 위험하고 패배하기 쉬운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입니다. 기도의 부족, 자기 성찰의 부족, 주의 조언을 구하지 않음, 인내하지 않음, 지나친 자신감, 숨겨진 죄악 이런 것들이 패배를 불러옵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녹아 났습니다.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언약궤 앞에서 종일토록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성도의 자세입니다. 여호수아는 주님의 영광이 떨어지고 훼손되는 것을 걱정했습니다(7-9). 주님은 그들 가운데 숨겨진 죄악을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32:23, [보라 너희가 주께 범죄하였으니 너희 죄가 너희를 찾아 낼 줄을 분명히 알지니라.](민32:23). 아간은 “보고, 탐내어, 취하였다”(21)고 고백합니다. 이는 범죄의 일반적인 pattern입니다. 이브도 그러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울, 게하시도 그러했습니다. 아간은 돌에 맞아 죽었는데, 그 죽은 골짜기가 바로 아골 골짜기입니다(26). 아간은 교회의 누룩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 줍니다. 교회 내에 숨어든 거짓 형제, 거짓 교사, 거짓 사역자들로 인해 성령의 역사는 중단되고, 무성한 잡초만이 자라납니다.
8장입니다. 주님은 아이성을 주셨습니다. 매복 작전을 지시하셨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12,000명을 죽이고(25), 아이 성의 왕은 교수형에 처했습니다(29). 전쟁이 끝난 후 에발 산에 모세가 명한대로 율법을 기록한 돌을 세우고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드렸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희생물을 드리는 일은 전쟁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때로 일에 매여 예배를 게을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객이 전도 된 꼴입니다. 영적 우선 순위를 분명히 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9장입니다. 기브온 족속들이 여리고와 아이 성이 멸망당한 것을 보고 꾀를 내어 교묘히 행했습니다(4,5). 그들은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기 위해 변장했고, 낡은 부대와 낡고 찍어진 꿰맨 포도즙 가죽 부대, 낡아서 기운 신, 낡은 옷을 입고 멀리서 온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이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실수를 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주의 입에서 조언을 구하지 아니하고](9:14). 매사에 주님께 물어 보고 답을 얻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귀는 늘 속임수로 다가옵니다. 때로는 속이기 위해 빛의 천사로 옵니다(고후11:4). 지혜가 부족할 때는 언제나 주님께 구하십시오(약1:5). 늘 깨어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십시오. 여호수아 같은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도 주께 조언을 구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과 그들의 말에 따라 판단했을 때 속았다면 저와 여러분이 얼마나 자주 속임을 당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10장입니다. 아모리 족속의 다섯 왕이 연합해서 기브온을 치러 왔습니다. 여호수아는 군대를 이끌고 밤새도록 올라 가 그들 앞에 이르렀는데, 주님께서 친히 싸우셨습니다. 10-11,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무찌르시고 그들을 기브온에서 크게 살육하사 죽이시며...주께서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하늘에서 큰 돌들을 내리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칼로 죽인 자보다 우박으로 죽은 자가 더 많았더라.](10-11). 이들의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치러 오는 장면은 대환란 때 온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러 모이는 것을 예표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친히 개입하셔서 모두 멸하실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주께 아뢰고 백성들 앞에서 외쳤습니다. [해야, 너는 기브온 위에 멈추어 서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12). 이 일은 역사적으로 실제 있었던 일이며, 야셀의 책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의 하루 동안”(13)은 후에 과학적 발견에 따르면 23시간 20분이라고 합니다. 다섯 왕의 운명을 보십시오. 24-25절, [...가까이 와서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 하니 그들이 가까이 와서 그들의 목을 밟으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이는 너희와 싸우는 모든 원수에게 주께서 이와 같이 하실 것임이라.] 이는 앞으로 남아 있는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원수들의 운명을 역사적으로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여세를 몰아 립나와 그 왕을 치고, 라기스를 빼았고, 게셀 왕 홀메을 쳐 모두 죽이고, 에글론을 쳐서 모든 혼을 진멸하고, 헤브론으로 올라가서 그 왕과 도시들과 백성들을 모조리 죽였으며, 드빌로 가서 그 왕과 도시들과 모든 백성들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죽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주님의 명령대로 철저하게 이 족속들을 심판했고, 조금도 인정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40절, [이와같이 여호수아가 산지와 남쪽과 골짜기와 샘들이 있는 모든 지방과 그 모든 왕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숨쉬는 자는 다 진멸하였으니 곧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40). 이 전쟁은 주님이 앞서 나가시며 싸운 전쟁이므로 한 날에 한 번에 다 빼앗았습니다(42).
11-12장을 보십시오. 하솔 왕 야빈이 연합군을 만들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메롬 물가에 함께 진을 쳤습니다(5).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들을 넘겨 주셨고, 여호수아는 이들을 치고 병거들을 불태우고, 말 뒷발의 힘줄을 끊어 버렸습니다. 이번에는 하솔 이외의 도시는 불태우지 않았는데, 이 도시는 후에 이스라엘에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 되기 때문입니다(13). 11:16-23까지 남은 족속들을 모두 정복하고, 멸절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아낙 자손이 하나도 없게 했습니다(22). 이로써 전쟁은 끝나고 땅을 분배했습니다(23). 12장은 정복했던 땅의 왕과 족속들의 이름을 모두 정리했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죽은 왕들은 모두 31명이었고, 그 족속들 역시 다 죽었습니다(24).
13장입니다. 정복 전쟁이 일단락 되었지만 아직 차지해야 할 땅은 많이 남았습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이 많아 늙었으나 소유할 땅이 심히 많이 남아 있도다.](1). 아직도 차지할 땅이 많이 남아 있음을 주장하고 계속해서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기꺼이 싸움에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로서는 비극적인 일입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늙었고, 누군가 이 일을 해야 했습니다. 2-7절은 주님께서 아직 남아 있는 땅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홉 지파와 므낫세 지판 반(half)에게 이땅을 제비 뽑아 상속으로 주고 각자 그 땅을 차지하도록 했습니다. 8-33절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나셋 지파의 반이 받은 상속에 대한 말씀을 다시 진술되었습니다.
14장은 갈렙의 개척 정신을 잘 보여주는 위대한 장입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와 더불어 다른 영을 지닌 사람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의 신앙을 보여 주는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민14:24, 32;12, 신1:36, 수14:8-9, 14- “온전히 주를 따랐더라.” 갈렙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예표입니다(요일2:13-14, 5:4). 갈렙은 모세가 보낸 12명의 정탐꾼 중 한 명이었으며, 백성들에게 가나안 입성을 독려한 믿음의 용장이었습니다. 민수기 13:30, 14:7-9절은 갈렙이 어떤 믿음의 소유자였는지 보여 줍니다. 그런 그가 40년을 불신과 불평과 원망을 일삼는 백성들과 함께 광야를 돌아야 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는 매일 동료들이 죽는 것과, 눈앞의 놓인 상속을 불신과 두려움으로 인해 놓쳐 버리는 형제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갈렙은 모세를 사랑했지만 백성들 사이에서 모세를 불평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에서 몇 안되는 갈렙들이 당하는 고통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불신과 불평, 세상과의 타협, 목회자를 비평하고, 형제들과 다투는 교회 생활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 남을 수 있습니까? 갈렙의 마음은 항상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있었습니다. 특별히 모세가 유업으로 주겠다고 한 그 땅(수14:9-12)에 소망이 있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신자들이 어떻게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골3:1-4). 14:6-9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이 받을 축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세가 미리 약속한 것입니다(6,9).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해 줍니다. 갈렙은 85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40세의 기력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10-11). 그는 결코 육신의 힘을 신뢰해서 싸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싸워 거인들의 땅을 차지하겠다는 것입니다(12). 불신자들은 거인들과 크고 견고한 성(城)을 바라보았지만, 갈렙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불신은 상식과 경험을 의지하지만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의지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15장은 유다 지파의 몫입니다. 갈렙의 조카 옷니엘이 갈렙을 도와 기럇세벨을 빼앗았습니다. 딸 악사 역시 믿음의 여식답게 아버지에게 복을 구하고, 샘을 구했습니다. 옷니엘은 이스라엘 최초의 사사가 됩니다. 갈렙의 믿음은 가족들의 믿음을 세웠고, 모두 복을 얻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명문 가정이며, 뼈대있는 가정입니다. 갈렙은 결코 좋은 가문의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 어머니와 이방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고, 그의 이름 갈렙이란 뜻은 여호수아나 다니엘, 베드로와 같은 좋은 뜻을 지닌 이름이 아니라 우리말로 개똥이 정도에 해당하는 천한 이름이었습니다. 갈렙은 ‘개’란 뜻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온 그의 가문이야말로 성경의 어떤 명문 가문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갈렙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사악한 자를 이기고, 원수들을 무찌르며, 세상을 이기며 복음의 영역을 점점 확장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모든 것을 상속받으리니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계21:7).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첫째, 갈렙처럼 온전히 주를 따라야 합니다. 둘째, 갈렙처럼 주님이 주신 약속을 믿고 그것을 구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의 마음을 항상 저 위에 두어야 합니다. 넷째, 갈렙처럼 적을 바라보지 말고 승리를 주시는 주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57,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6장은 에프라임 지파의 유업입니다. 17장은 므낫세 지파가 받은 유업입니다. 에프라임과 므낫세는 모두 요셉의 아들들인데 두 지파로 형성되었습니다. 므낫세 지파는 여호수아에게 유업을 한 몫만 주었다고 불평했습니다(14). 여호수아는 산지의 나무를 베어내고 개간하도록 명령했습니다(15). 그러나 이들은 갈렙과 같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골짜기에 거하는 가나안 족속들의 철병거를 무서워했습니다. 불신에 빠질 때 주님의 능력은 보이지 않고, 철병거만 눈에 들어오는 법입니다. 18절, [그 산도 네것이 되리니 그 까닭은 네가 베어 내어야 하기 때문이니라. 그러면 산에서 나간 곳이 다 네 것이 되리니 이는 비록 가나안 족속이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그들을 쫓아내어야 할 것임이니라, 하니라.](18). 18-19장은 다른 지파들의 유업입니다. 7지파는 아직 상속을 받지 못했습니다. 18:3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주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소유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늦추겠느냐?](3). 이들은 믿음으로 땅을 차지하는데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11-28은 베냐민 지파, 19:1-9은 시므온 지파, 10-16은 스불론 지파, 17-23은 잇사갈 지파, 24-31은 아셀 지파, 32-39은 납달리 지파, 40-48은 단지파의 유업입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수아가 도시를 상속받았습니다(49-51). 이제 모든 상속 문제는 다 매듭지었습니다. 20장은 모세 오경에 명한대로 도피성을 정했습니다. 총 여섯 곳인데 게데스, 세겜, 헤브론(기럇아르바), 베셀, 길르앗의 라못, 바산의 골란으로 지정했습니다(7-8). 이는 알지 못하고 살인한 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도피성은 아담의 죄에 직접 연루되지 않은 채 죽게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주님을 예표합니다. 21장입니다. 레위 지파는 땅을 상속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각 지파별로 레위 자손들이 살 수 있는 도시를 주었는데 총 48개 도시입니다. 레위 지파는 12개 지파 전역에 도시를 얻어서 살면서 예배와 성전 직무를 수행하며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방지하고, 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직무를 맡았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모든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고(43), 안식을 주셨고(44), 승리를 주셨습니다(44). 주님의 모든 말씀이 남김없이 이루어졌습니다(45). 성도가 믿을 때 주님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22장입니다. 요르단 강 건너편에 자리잡은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판의 반을 불러 신앙을 잘 지키고, 해야 할 일에 대한 지침을 준 뒤 돌아가게 했습니다. 그들은 돌아가서 제단을 하나 쌓았는데 이 제단은 번제 헌물을 드리기 위한 제단이 아니라 증거를 위한 제단이었습니다(28-29). 2개 지파의 반이 강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후에 민족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기 위하여 세운 단이었습니다.
23장은 여호수아의 유훈 설교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고 늙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까지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위해 노심초사하며 신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는 눈을 감기 전에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재판관, 관원들을 모아 놓고 설교를 했습니다. 먼저 과거 하나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기억하게 했습니다. 다음은 미래에 대해서 말했습니다(5). 하나님의 일꾼들은 바뀌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할 일은 첫째, 모세의 율법을 지켜 행하고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6). 이는 신약이나 구약을 구분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말씀에서 떠나는 순간 누구도 죄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14절에 다시 한번 말씀에 대한 강조가 있습니다. 신앙은 바로 말씀에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분리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민족들과 섞이거나 결혼하거나 그들의 신에 절하지 말고 그들을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7). 분리는 성경적 명령이며, 그리스도인의 표징이어야 합니다. 특히 세상과 일치하거나 친구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관습을 따라 가거나,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도 매우 심각한 죄악입니다. 셋째, 오직 주 너희 하나님을 굳게 붙들라(8). 밀착하라(cleave unto the LORD).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밀접한 친교는 성령의 열매를 더 풍성하게 맺게 합니다. 넷째, 스스로 매우 조심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11). 이는 성경 전체의 가장 크고 위대한 계명이며, 인간의 본질적 존재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선한 것이 모두 임했듯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징계와 저주 역시 정확하게 임합니다. 문제는 전적으로 백성들의 마음입니다.
24장입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모아 두고(2) 간곡한 권면을 했습니다. 1-13절은 지난 날 주님이 어떻게 선하게 대해 주셨으며,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가?를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14절, [그러므로 이제 주를 두려워하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그분을 섬길지니라. 너희 조상들이 강 저편과 이집트에서 섬기던 다른 신들을 제거하고 너희는 주를 섬기라.](14).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결단을 요구하며, 본을 보였습니다. 15절, [만일 주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혹은 너희가 지금 거하는 땅의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이 날 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 집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주를 섬기겠노라.](15). 이 요구에 백성들은 한 마음으로 주를 섬길 것을 약속했습니다. 16, 18, 21, 24에서 주를 섬기고 순종할 것을 맹약하였으므로 세겜에서 언약을 세웠습니다(25). 마지막 죽기까지 백성들을 훈육하고, 그들의 신앙 고백을 받는 그의 모습은 마치 철없는 자녀들을 두고 떠나는 아버지의 훈시와 같습니다. 불행한 것은 여호수아가 자신과 같은 이스라엘의 목자를 세우지 못한 채 죽었던 것입니다(29). 이는 민족적으로 큰 불행입니다. 주님은 기도의 응답으로 항상 사람을 세우시고, 목자를 주십니다. 여호수아는 후계자를 세우지 못함으로써 그의 당대와 동시대의 사람들까지만 신앙이 유지되었습니다(31). 우리는 항상 우리를 인도할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이 땅에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를 목자요 교사로 세워 주시기를 늘 구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여호수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함을 받고, 그분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서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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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이 말씀은 한국어 성경으로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란 의미이다. 앞의 구절이 두 번 수식한다. 결코 내가 믿을 때 나의 가족이 나의 믿음으로 덩달아 구원받는 다는 말씀이 아니다. 내가 구원받고, 내가 구원받은 믿음이 가족에게 전달될 때 가족도 구원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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