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개론 -사사기
말씀: 사사기 1-21장
요절: 사사기 17:6
사사기는 21장, 6118절, 18,976단어로 되어 있으며, 여호수아와 극적으로 상반되는 책입니다. 사사란 뜻은 재판관인데, 이들은 사법부의 수장으로서의 역할보다는 군사적인 장군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이는 의로운 재판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심판자로서 인간들의 행위의 잘잘못에 대한 판결만 내리시는 재판관이 아니라 행악자들을 친히 처단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구출하시는 구원의 대장으로서의 심판관이심을 예표하는 성경적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시대 상황을 주님은 4번이나 동일한 말씀을 통해 반복하셨습니다(17:6, 18:1, 19:1, 21:25). 사사기는 참으로 신앙의 암흑기에 해당하는 책입니다. 스데반은 구약의 유구한 역사를 설교하면서 사사기 전체의 내용을 단 한줄로 요약했는데, [그 뒤에 대언자 사무엘 때까지 약 사백 오십년 동안 그들에게 재판관들을 주셨느니라.](행13:20)고 말합니다. 이 때 재판관으로 활약했던 사람이 약 12명입니다. 그 중에 믿음장에 이름이 오른 재판관이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히11:31) 4명입니다.
사사기 전체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음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과 주의 말씀에 무관심에서 출발합니다(apathy). 그들은 주님이 엄히 명하신 말씀들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2:2). 말씀에서 떠나면 곧 바로 배교가 이어집니다(apostasy). 그들은 바알을 섬겼고 그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2:13). 결국 그들은 무정부 상태의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anarchy)-21:25.
여호수아가 승리의 책이라면 사사기는 패배로 점철된 책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자유가, 사사기에는 이스라엘의 포로된 기록이 주를 이룹니다. 여호수아에서는 백성들의 믿음이 사사기에서는 백성들의 불신이, 여호수아에서는 백성들의 순종이 있는 반면 사사기에는 백성들의 불순종이, 여호수아에서는 주님께서 충성을 맹세하지만 사사기에는 주님으로부터 배교를 합니다. 여호수아에는 기쁨이 있는 반면 사사기에는 슬픔과 고통이 따릅니다. 여호수아에는 이스라엘의 강성함이 사사기에는 이스라엘의 연약함이, 여호수아에는 민족의 하나됨이 사사기에는 지파별 분열이 나옵니다. 여호수아에는 강력한 영적 지도자가 있었지만 사사기에는 그런 영적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여호수아에는 죄에 대해 철저한 심판이 집행되었지만 사사기에는 죄에 대해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여호수아를 통해 반복적으로 경고의 말씀을 주셨지만,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남은 족속들과 타협했고, 그들과 섞였고, 결국 그들에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사사기에는 7번의 배도와 7번의 포로됨(종살이), 일곱 번의 구출, 다섯 번의 내전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남은 족속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그 땅을 정복하도록 명령하셨지만 이들이 거부함으로써 이방 민족들이 그 땅에 그대로 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남은 족속들을 이용해 이스라엘을 징계하셨고(2:3, 20-21),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여부를 입증하셨으며(2:22), 이스라엘에게 전쟁의 경험을 주셨고(3:2), 땅의 황폐함을 막으셨습니다(신7:20-24). 하나님을 믿고 정복하고 승리하는 인생대신에 스스로 적들과 어울리고, 섞여서 살기를 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님은 그대로 그 길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누구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영광스런 자유와 승리를 포기한 채 세상과 더불어 살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사사기에 기록된 신앙 여정을 걷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사기를 통해서 영적 전쟁의 승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는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조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7에서 말한 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며](고전1:27)란 말씀의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 3:31, 4:21, 7:20, 9:53, 15:15
1장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 이제 남은 땅을 정복해야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께 그 문제에 대해서 물었습니다(1). 주님은 유다가 먼저 올라가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 그러나, 유다는 주님의 도움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던지 시므온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3). “나를 도와주면 다음에 나도 너를 도와주겠다”는 동역의 마음이었지만 사실은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불신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연전연승했지만 완전한 승리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19절, [주께서 유다와 함께 하시므로 그가 산의 거주민들을 쫓아내었으나 꼴짜기의 거주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쫓아내지 못하였더라.](19). 그러나,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여호수아는 전에 동일한 문제로 이들과 전쟁을 무서워했던 요셉 지파에게 [...비록 가나안 족속이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그들을 쫓아내어야 할 것임이니라,하니라.](수18:18b)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유다 지파는 승리했지만 불완전한 승리였습니다. 베냐민 지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21). 요셉의 집도 벧엘로 치러 올라 갈 때 주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승리 역시 불완전했습니다(23-26). 므낫세 지파는 가나안 족속들을 그냥 두고 조공을 받았습니다(28). 에브라임도 가나안 족속을 쫓아 내지 않았습니다(29). 어느 족속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조공을 받는 것으로 대신 해 버렸습니다(30,33). 그러나, 단 지파는 오히려 산지로 쫓겨나는 일이 발생했고, 요셉 지파의 도움으로 겨우 그들을 조공 바치는 자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34-35). 이렇게 주님의 말씀에 대한 무관심과 불신, 불순종으로 사사기의 서막이 열렸습니다. 사사기 1장은 오늘날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지 못한 채 적당하게 타협적인 신앙 생활을 하면서 그것을 죄가 아닌 지혜라고 여기는 오늘날 신자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육신과 성령은 절대 타협할 수 없습니다. 조공을 바치게 하는 것이 승리가 아닙니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미워해야 합니다.
2장입니다. 2:1에서 주의 천사는 사사기에만 20회나 등장하는데, 성육신 하시기 전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항상 먼저 나아가셔서 전쟁을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언제나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 성도들은 누구나 믿음으로 영적 전쟁을 수행하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만 가지고 나아간다면 주님이 주시는 승리를 항상 쟁취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강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2-3). 백성들은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길갈은 승리의 장소(winning)지만 보김은 울음(weeping) 의 장소였습니다.
10절, [그 세대도 다 자기 조상들에게로
합쳐지고 그들 뒤에 다른 세대가 일어났으나 이들은 주를 알지 못하며 또한 주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들도 알지 못하였더라.](10). 첫 세대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데 실패했습니다(신6:1-15). 남은 고사하고 자기 자녀들의 혼을 이겨오는데 실패하는 일은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11-14은 이스라엘의 배교입니다. 그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고, 주위 백성들의 풍습대로 쫓아갔습니다. 배교의 결과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복되신 저주와 심판입니다(15). 16-19절은 사사기 내내 반복되는 pattern입니다. 힘들면 주님을 찾고, 살만하면 배교하는 반복적인 싸이클을 그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본성입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재판관을 보내주셨지만 재판관들 개인들과 함께 하셨지(2:18), 결코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시지 않으셨음에 주목하십시오. 남은 백성들을 통해 주님은 이스라엘을 주의 길을 지키는지 시험하시고(2:22, 3:4), 전쟁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전쟁을 가르치고자 하심이었습니다(삿3:4).
3장입니다. 타협, 우상 숭배자들과의 결혼, 우상 숭배로 이어진 이스라엘의 배교로 인해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리다사다임을 8년 동안 섬겼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위해 최초의 사사인 갈렙의 사위 옷니엘을 일으켰습니다(9). 주님은 옷니엘과 함께 하셨고 40년 동안 그 땅은 안식을 얻었습니다. 옷니엘이 죽자 이스라엘은 다시 배교했고 18년동안 모압 왕 에글론을 섬겨야 했습니다(14). 이때 다시 주님을 찾았고, 주님은 베냐민 족속의 에후를 보내 주셨습니다. 에후는 왼손잡이였는데 에글론을 암살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켜 적들을 모압의 병사 만명을 죽임으로 이스라엘은 다시 80년 동안 평안을 얻었습니다(30). 에후 다음에는 삼갈이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명을 죽였고, 이스라엘을 블레셋 손에서 구원했습니다(31).
4장입니다. 에후가 죽자 이스라엘은 다시 배교에 빠져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야빈 왕에게 심하게 학대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900여대의 철병거가 있었는데, 이 무기는 그 당시 부족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위협적인 무기였고, 이스라엘이 늘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이때 주님은 여자 대언자 드보라를 세우셨습니다. 드보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 바락을 불러 야빈왕의 군대대장이었던 시스라와 철병거 900대를 지닌 그들의 군대를 대파했습니다. 시스라는 걸어서 도망하여 헤벨의 집에 몸을 피해 잠이 들었다가, 헤벨의 아내 야엘에게 관자놀이에 말뚝이 박혀 죽었습니다(4:21).
5장입니다. 5장은 드보라의 찬양시입니다. 어떻게 철병거를 지닌 시스라의 군대를 물리쳤는지 잘 나옵니다. 철병거를 가지고 돌진할 때 주님은 그들에게 물을 보내셔서 철병거가 꼼짝 못하게 하셨습니다(5:4-5, 21). 그리고, 하늘의 천사들이 이 전쟁에 직접 개입했습니다(20). [그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별들이 자기들의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20). 이 땅의 전쟁에 외계의 군대들이 개입하는 일은 요한계시록에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의 영적 싸움 역시 성령께서 늘 앞장서신다는 점을 잘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당시 사회적 상황은 너무나 불안정하고 끔찍하여 사람들이 대로를 다니지 못할 정도였습니다(6-7). 영적 기준과 신앙이 무너지면 사회적 도덕성 역시 무너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어느 가정이나, 어느 사회나 나라도 영적 기강이 무너지면 필히 도덕은 붕괴되고, 그 사회는 불안정하게 됩니다. 전쟁 중에서도 12지파가 일치 단결하지 못했습니다. 르우벤은 분열했고, 길르앗은 요단강 건너편에서 건너오지 않았으며, 단 지파는 배에서 내리지 않은 채 항만에 머물렀습니다(16-17). 영적 배교는 교회 내에도 분열을 가져옵니다. 철병거를 모는 군대 대장 시스라와 헤벨의 아내 야엘을 비교해 보십시오. 주의 원수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연약한 여인에게 관자놀이를 관통당해 죽습니다(24-27). 주님을 사랑하는 자, 주님 편에 서서 싸우는 자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6장입니다. 4번째 배교입니다. 이번에는 미디안 족속들에게 당했고, 집과 땅을 다 빼앗기고 산에 구멍과 굴과 요새를 만들었습니다. 3절, [이스라엘이 씨를 뿌릴 때면 미디안 족속이 올라오고 또 아말렉 족속과 동방 자손이 그들을 치러 올라와서] 배교한 이스라엘은 무엇을 해도 기록된 말씀대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호세아 8:7, [이는 그들이 바람을 심었은즉 회오리 바람을 거둘 것임이라. 그 심은 것이 줄기가 없은즉 이삭이 양식을 내지 못할 것이요, 혹시 낸다 할지라도 타국인들이 삼키리라.], 이는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라디아서 6:7, [속지말라. 하나님은 조롱을 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임이라.] 이 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울부짖으며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6,7). 주님은 한 대언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시고 책망하셨습니다(8-10). 역사가 반복되는 것은 역사를 통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동일한 죄에 빠지고, 다시 회개하기를 반복하는 것은 의를 통해 훈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른 교리로 배우고, 책망을 받은 다음에는 바로잡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말씀에 거하며 의로 교육을 받아야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딤후3:16). 주님은 기드온을 세우셨습니다. 12절, [주의 천사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강한 용사여,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12). 기드온은 소출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타작 마당에서 타작을 하지 못하고, 포도즙 틀에서 몰래 타작을 하는 판국에 강한 용사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는 말 같습니다. 거기다 용사는 고사하고 농부에 불과합니다. 이는 일부 어부에 불과했던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신 것처럼, 주님께서 부르시고 택하심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주님이 주신 일련의 역사를 보십시오. 12절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는도다.” 14절 - “내가 너를 보내지 아니하였느냐?” 16절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기드온에게 주신 이 약속들은 모든 성도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졌습니다. 기드온은 표적을 요구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날 만난 하나님을 ‘여호와샬롬’이라 불렀습니다(24). 기드온이 받은 사명은 첫째 네 아버지 집에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고, 제단 옆의 작은 숲을 베어낼 것(25), 둘째 베어낸 작은 숲의 나무로 번제 헌물을 드릴 것(26)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이 일을 차마 낮에 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밤에 자기 종 열 명을 데리고 했습니다(27). 우리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공개적으로 우리의 입장을 밝히고,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숨어서 남몰래 믿는 것은 증거의 능력이 없습니다. 기드온은 먼저 가족들에게 자신의 신앙적 입장을 분명히 밝혔고, 다음으로 그 도시로 그 소문이 퍼졌습니다.
기드온은 전쟁을 하러 나가기에 앞서 주님께 두 가지 표적을 구했습니다(37-40). 이미 주님께서 분명히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몇 번이나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보다 눈에 보이는 표적을 원합니다. 그는 강한 용사라기 보다는 겁쟁이 신자였습니다. 모인 병사들이 32,000명이었는데, “누구든지 두렵고 무서운 자는 돌아가라”했더니 22,000명이 떠나 버렸습니다. 남은 만명 가운데 다시 물가로 데려가 물을 핥아먹는 자 300명만 추려내어 전쟁에 나갔습니다. 물을 손으로 집어서 핥아서 먹는다는 것은 항상 원수들을 직시하며, 깨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군사된 자세가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하지만 아직도 기드온은 무서워했습니다(10). 그래서, 적들의 말을 통해 한번 더 승리에 대한 확신을 주셨습니다(13-14).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를 세 무리로 나누어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등불을 오른 손에 나팔을 들고 불면서 외침으로 전쟁을 했습니다(20). 하나님은 가장 천한 것들을 들어서 사용하심으로 인간들의 지혜와 교만을 꺾어 버리십니다.
8장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전쟁하러 나가며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자신들이 무공을 세우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이 때 그는 매우 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행한 것과 비교가 되겠느냐?](2-3). 이 부분은 기드온이 얼마나 겸손한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자신의 공로를 낮추고, 상대를 높여 주었습니다. 잠언15:1, [부드러운 대답은 진노를 돌이키게 하거니와 가혹한 말들은 분노를 일으키느니라.] 4-21절은 계속 미디안 왕들을 추격하여 전쟁을 끝장내는 장면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어 다스려 달라는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23절,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내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주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23).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잘못을 했는데 백성들에게 금 귀고리를 취하여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도시 오브라에 둔 것입니다(27). 사탄은 칼로 이스라엘을 침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금귀고리를 통해 침투한다는 사실을 잊은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는 이유는 원수들의 칼이 아니라 원수들이 세운 우상과 신상 때문입니다. 바알의 제단을 무너뜨린 기드온이 자신을 위해 에봇을 만든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9장입니다. 기드온이 죽자 말자 이스라엘은 다시 우상 숭배로 돌아갔습니다. [기드온이 죽으매 곧바로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서 바알들을 따라 음행의 길을 가고 또 바아베릿을 자기 신으로 삼고 사방의 모든 원수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주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8:33-34). 이것이 다섯 번째 배교입니다. 기드온은 많은 아내와 첩을 두고 자식을 칠십 명이나 두었는데, 그 중에 아비멜렉이란 아들이 나머지 칠십명을 한 돌 위에서 다 죽여 버리고 왕이 되었습니다. 막내 아들 요담만 겨우 숨어서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그는 3년을 통치했으나 주님은 그를 어떻게 심판했습니까? 23절, [하나님께서 아비멜레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23). 53절, [어떤 여인이 맷돌 한 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매](53) 주님은 그가 행한 악을 철저히 심판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악한 영을 보내신 것은 성도들이 좀처럼 인식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무엘상 16:14, [그러나 주의 영께서 사울을 떠나고 주께로부터 온 악한 영이 그를 괴롭게 하므로], 삼상19:10 [그 다음날 하나님께로부터 온 악한 영이 사울 위에 임하매 그가 자기 집 한 가운데서 대언을 하더라.], 왕상 22:23, [그러므로 보소서, 이제 주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대언자의 입에 넣으셨고...] 하나님께 속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사야 19:14, [주께서 이집트 한 가운데서 비뚤어진 영으로 섞으셨으므로 그들이 이집트로 하여금 그 모든 일에서 잘못하게 한 것이 술 취한 자가 자기의 토한 것 가운데서 비틀거리는 것같게 하였으니](19).
10장입니다. 재판관 돌라가 23년간 재판관으로 있다가 죽고 그 다음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20년간 재판관을 했습니다. 6-18절은 이스라엘의 여섯 번째 배교입니다. 그들은 블레셋과 암몬 자손에게 혹독한 시련을당하자 다시 주님을 찾고 부르짖었습니다. 13-14절,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가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로 하여금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시니라.](13). 하나님의 반복적인 은혜 베푸심과 긍휼을 당연시하였다가 하나님의 냉혹한 답변에 그들은 사색이 되었습니다. 마음이 급하면 간과 쓸개를 다 빼줄 것처럼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아뢰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매 무엇이든지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간구하옵나니 이날 우리를 구원하옵소서, 하고 자기들 가운데서 이방 신들을 제거하여 버리고 주를 섬기니 그분의 혼이 이스라엘의 고통으로 인하여 근심하시니라.] 주님은 회개하는 이스라엘이 받는 고통에 대해 근심하셨고, 마음이 무거우셨습니다.
11장은 서원을 잘못한 재판관 입다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입다는 강한 용사였으나 출생이 비천하여 형제들에게 배척을 받았으나 암몬 족속과의 전쟁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전쟁에 나가기에 앞서 서원을 했습니다. 30-31절 [입다가 주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암몬 자손을 틀림없이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으로부터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 나를 영접하는 자는 주의 것이 되리니 내가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30-31). 이는 잘못된 서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개가 나왔다고 해도 그것은 부정한 짐승이기 때문에 번제 헌물로 쓸 수 없습니다. 사람이 나왔다고 해도 입다가 자기가 서원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입다는 경솔히 서원했고, 딸을 죽이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에 주의 율법이 얼마나 왜곡되어 퍼져 있고,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엉망인가를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주의 말씀에서 멀어져 있는 백성들은 말씀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12장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전에 기드온에게 딴지를 걸었듯이 다시 입다에게 딴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기드온과 달리 겸손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2-3절에 입다는 온통 나(I)란 말을 도배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형제들끼리 싸움이 벌어졌고 에브라임 지파 중에 죽은 자만 사만 이천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요르단 강 통로를 선점하여 도망하는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쉽볼렛’을 발음하게 하여 ‘십볼렛’이라고 발음하면 죽였는데, 이는 에브라임 지파가 sh발음을 잘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경상도 사람들이 쌍 시옷 발음을 잘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8-15절에는 입다 이후의 재판관들이 나옵니다. 입산(8), 엘론(11), 압돈(13)이 바로 그들입니다.
13장은 삼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을 일곱 번째 배교로 치닫습니다(1).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사십년 동안 압제를 당했습니다. 삼손의 어머니는 사라, 엘리사벳, 마리아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직접 수태 고지를 해서 태어난 인물입니다. 우리는 천사의 수태고지를 받아 태어났으면 전무후무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태어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데 본문의 내용을 보면 너무나 엉뚱하게 흘러갑니다. 13장에는 주의 천사가 바로 주님이란 사실과 천사가 날개 없는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계시를 확연하게 보여 줍니다. 삼손은 ‘작은 태양’이란 뜻입니다.
14장입니다. [삼손이 딤낫에 내려가...](1). 이는 지리적인 위치만이 아니라 그의 영적 상태까지 내려가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는 블레셋 여자 하나에게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2-3). 그는 아버지에게 물은 것이 아니라 말했습니다(2-3). 그는 자기 아버지를 욕되게 했습니다. 삼손은 평생동안 정욕으로 인해 고생을 합니다. 5-8절은 기가 막힌 사건입니다. 사자를 잡아 죽였는데 얼마 후에 보니 사자의 시체에 벌떼와 꿀이 있었습니다. 그는 꿀을 취하여 먹었는데 이는 죽은 시체에 손을 데지 못하게 되어 있는 나실인의 법을 정면으로 어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부모에게도 드려서 먹게 함으로 부지(不知) 중에 죄를 범하게 만들었습니다. 단지 먹을 것을 위해 죄를 범하는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는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하거나 회개하는 대신 친구들에게 수수께끼를 내며 농담거리로 만들었습니다.
15장입니다. 15장은 삼손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물이 없어 목이 말라 죽을 뻔했습니다(18).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주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에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니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져야 하리이까? 하니라](13). 하나님은 삼손의 강한 힘에도 불구하고 그의 육신이 얼마나 연약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물을 주심으로 구원해 주셨지만 이는 동시에 경고였습니다. 삼손은 평생에 두 번 주님께 기도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지금 이 장면과 죽기 직전입니다(16:28).
16장입니다. 원수들은 삼손의 힘의 비결을 알아내어 부술 생각을 하였습니다. 들릴라를 통해 세 번이나 삼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는 나실인으로서 머리에 삭도를 대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17). 그는 이 사실을 알려 줌으로 힘을 잃었고, 빛을 잃었습니다. 그는 자유를 잃었습니다. 이는 모두 죄의 결과입니다. 죄는 눈멀게 하고(blinding), 영혼과 몸을 결박하며(binding), 죄를 위해 맷돌을 돌리는(grinding) 일을 하게 합니다. 삼손은 힘으로 남을 정복할 수 있었지만 자신을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인들의 밀밭을 불로 태울 수 있었지만 자신의 가슴속에 붙는 정욕의 불길을 끌 수 없었습니다. 사자를 죽일 수 있었지만 자신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지는 못했습니다. 자신의 몸을 묶는 결박을 쉽게 끊을 수 있었지만 자신의 영혼을 결박하는 죄의 사슬을 끊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죽이고 파괴하는 일은 할 수 있었지만 백성들을 세워주고, 오래도록 승리할 수 있는 기틀을 세우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아무에게도 훈련과 지도를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기도하는 것에도 민족을 위해서나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해달라는 기도’(16:28)를 했습니다. 사무엘상 7:9-14을 보십시오. 사무엘은 한번의 기도로 삼손이 20년동안 싸운 블레셋 사람보다 더 많은 수를 죽였습니다.
17장입니다. 미가는 은 이백개로 새긴 형상과 부어 만든 형상을 만들었습니다(4). 그리고, 자기 아들들 중에 하나를 취해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레위 사람 한 명을 고용하여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13절, [미가가 이르되, 레위 사람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주께서 내게 선을 베푸실줄 아노라.](13). 이는 사람이 만든 종교체계로 배교의 출발을 보여 줍니다. 주님이 정한 제사장직을 더럽힘으로 배교는 시작됩니다. 이는 오늘날 먹고살기 위해 목회를 하는 것이나 교회를 하는 것이나 매 한 가지입니다. 자신이 임의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복을 구하는 미가의 모습이 바로 현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18장입니다. 미가의 집에 있던 새긴 형상과 에봇과 드라빔은 이제 한 개인과 가정의 것이 아니라 단지파의 것이 되었고, 미가의 제사장이던 레위 청년은 단 지파 전체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무법천지요, 배교가 완연한 시대였습니다(17:6, 18:1, 19:1, 21:25).
19장은 베냐민 지파 내에 있는 문란한 성풍속이 소돔과 방불함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악행을 그대로 따라 행했습니다(22-24). 20장은 이 일로 11개 지파와 베냐민 지파와의 벌어진 내전입니다. 이 때 베냐민의 전사들은 거의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이든 택하신 백성이든 죄에 대해 그 뿌린대로 거두시게 하시며, 심판하십니다. 21장은 베냐민의 지파를 다시 살려 열두 지파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하여 취한 조치들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는 이스라엘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것을 행하였더라.](25).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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