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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사무엘기(상)
말씀: 삼상 1:1-31장
요절: 삼상 12:23,24; 15:22,23
사무엘기는 본래 한 권으로 되어 있었는데, 내용이 길어서 상하로 후대에 나뉘어졌습니다. 사무엘상은 사사(재판관)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가는 과도기적 과정을 기술하며, 더불어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를 여는 책입니다. 성경은 한 권의 역사적 정치서요, 예언적 정치서로 볼 때 “왕이 누구인가?”는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만군의 주요, 영원한 의의 왕이시오, 평강의 왕이라는 점에서 사무엘기 상하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큽니다. 사무엘기의 핵심 인물은 사무엘, 사울, 다윗입니다. 사무엘기는 왕국이 시작되면서 왕국의 분열로 끝납니다. 사무엘기가 주는 핵심 교훈은 잠언 14:34입니다. [의는 한 민족을 높이거니와 죄는 어느 백성에게나 수치거리가 되느니라.](잠14:34). 사무엘기, 열왕기, 역대기는 이 진리를 반복적으로 보여 줍니다. 영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사사를 보내 주시는 대신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대언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사무엘을 필두로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요엘, 아모스, 요나, 미가등 유명한 대언자들이 줄을 잇습니다. 사무엘은 마지막 재판관인 동시에(삼상 7:15-17), 최초의 대언자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사무엘은 직업적인 공식, 전문 대언자였습니다. 사무엘은 사울과 다윗 두 명의 왕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사무엘상의 전체 개요는 1-7장까지 사무엘의 탄생과 초기 사역, 8-15장은 사울 왕, 16-31장은 다윗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는 한나요, 아버지는 엘가나였습니다(1). 엘가나는 두 아내를 얻었는데, 한나를 무척 사랑했습니다(8). 그는 매우 경건한 사람이요, 실로에 계신 주님께 경배하여 희생물을 드렸습니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했는데, 이는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으셨기 때문입니다(5). 신명기 7:14에 따르면 [네가 모든 백성들보다 더 많이 복을 받아 너희 가운데 남자와 여자와 너희 가축 가운데 수컷과 암컷이 수태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신7:14)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여자들은 아이를 낳지 못한 것을 주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거나, 심한 수치를 느꼈습니다.
주님께서 태를 닫으신 경우는 사라(창17:16-19), 리브가(창25:21-26), 라헬(창29:31, 30:22-24), 삼손의 어머니(삿13:2-5), 엘리사벳(눅1:5-17)등으로 주님의 특별한 섭리와 인도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남들이 다 하는 것을 하지 못함으로 고통을 받고, 수치를 당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의 결과요, 손길이며, 때를 기다리는 믿음이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낳았습니다. 한나는 혼이 괴로운 가운데 심히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10-11). 이렇게 가슴을 치는 기도는 인생을 한 순간에 역전시키는 발판이 됩니다. 한나의 서원 기도는 얼마나 간절했든지 입은 움직여도 말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제사장 엘리는 한나가 낮부터 술에 취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12-13). 그러나 그녀의 이 기도는 하나님이 기억하셨습니다(19). 사무엘은 “주님께 요청했다”란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기도하는 어머니 아래 기도하는 사무엘이 태어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낳자마자 바로 자신의 서원을 이행했습니다(26-28). 그녀는 기도하기 전과 기도로 얻고 난 후에 태도가 바뀌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곧 죽을 것처럼 간절히 기도하다가 막상 일이 풀리고 나면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2장입니다.
1-11절은 한나의 위대한 찬양시입니다. 이는 마리아가 복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불렀던 찬양과 비슷합니다(눅1:46-55). 2:10에서 한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운 예언을 합니다. [{주}의 대적들은 산산조각 나리로다. 그분께서 하늘에서부터 천둥으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주}께서 땅의 끝들을 심판하시고 자신의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삼상2:10). 12-36절까지는 엘리의 두 아들과 어린 사무엘의 대조가 나옵니다. 사무엘은 주님을 섬겼습니다(11,18). 반면 엘리의 아들들은 벨리알의 아들들이더니 주님을 알지 아니하더라(12)고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헌물을 멸시하였고(17), 백성들을 잘못하게 했으며(24), 결국 철저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제사장직의 더럽힘은 배교의 절정이며, 멸망과 심판을 앞당기는 하이라이트입니다. 엘리는 자식들을 통제할 힘이 없었고, 그는 강하게 다스리지 못했습니다(22-25). 문제가 무엇입니까? 29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희생물과 내 헌물을 발로 차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존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모든 헌물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 자신을 살지게 하느냐?](삼상2:29). 자식을 하나님보다 귀중히 여겼던 엘리는 멸문지화를 당한 반면 자식을 하나님께 기꺼이 드렸던 한나의 가족은 명문 가정이 되었습니다. 26절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년 시절과 비슷합니다(눅2:52). 우리는 무엇도 주님보다 귀히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주님은 그것을 우상 숭배라고 말씀합니다.
3장입니다.
사무엘의 소년 시절, 엘리의 말년에는 주의 말씀의 희귀했습니다(1). 이는 말세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모스 대언자는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그 땅에 기근을 보내리라. 그것은 빵으로 인한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며 오직 {주}의 말씀들을 듣는 것에 대한 기갈이니라. 그들이 바다에서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떠돌아다니며 {주}의 말씀을 구하려고 이리저리 달음질하여도 그것을 얻지 못하리니](암8:11,12)라고 대언했습니다. 사무엘은 엘리 앞에서 주를 섬겼지만 그는 아직 주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는 주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계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7). 이는 주의 말씀이 없이는 주님을 알 수 없다는 성경적 진리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하나님은 세 차례나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그때마다 그것이 엘리의 음성인 줄 알고 달려갔습니다. 세 번째 엘리 제사장이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는 줄 알았습니다(8).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엘리도 한 때는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경험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왜 아무 하나님의 음성도 듣지 못하게 된 것입니까? 그는 어느덧 하나님과의 친교가 멀어지고, 죄로 얼룩진 무거운 삶을 살다 심판이란 형벌로 끝맺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엄숙한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사무엘은 밤에 자신이 섬기는 엘리와 그의 집안이 받을 심판에 대해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11-14절은 엘리의 집이 받을 심판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엘리는 회개하는 대신 주님의 심판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인지 포기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늙은 종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때, 자신이 세운 종이 어린 청년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족 내에 있는 죄의 능력을 과소 평가하지 말고, 가족 내에 있는 기도의 일꾼에 대한 능력을 새롭게 조명 받아야 할 것입니다.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께서 다시 실로에서 나타나셨으니 {주}께서 실로에서 {주}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더라.](삼상3:21). 주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지만 이후로는 본격적인 대언자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히브리서 1:1,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히1:1).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주님을 만났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사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피상적이고 종교적인 틀에 머물러 있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4장입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 간에 전쟁이 일어났고, 이스라엘이 대패해 들에서 사천명이 죽었습니다(1-2). 백성들은 이 전쟁을 이기기 위해 주의 언약궤를 가지고 와서 전쟁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주의 언약궤의 힘으로 적을 물리치려는 종교적 염원이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대신 성물(聖物)을 의지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란 죽은 종교행위요, 불신입니다. 이들의 이런 행위는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들고 여리고 성을 돌았던 일을 기억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처음에 겁을 먹었던 블레셋 군대는 더 힘을 내어 싸웠고 보병 삼만 명이 죽고(10),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주의 말씀대로 죽었습니다(11). 98세의 눈먼 엘리는 이 소식을 듣고는 의자에서 쓰러져 목이 부러져 죽었고, 며느리는 아들을 낳았으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21-22)고 외쳤습니다. 시편 78:60,61절은 [실로의 성막 곧 친히 사람들 가운데 두신 장막을 버리시고 자신의 능력을 포로로 넘겨주시며 자신의 영광을 원수의 손에 넘겨주시고](시78:60,61)라며 이 사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5-6장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재앙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사랑하던 다곤 신은 머리와 두 손바닥이 끊어졌습니다(4). 사람들은 종기를 앓아서 죽거나 파멸이 임했습니다(6,9). 쥐들은 농토를 파괴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주님께 범법 헌물을 드렸는데 금 종기 다섯 개와 금 쥐 다섯 마리를 만들었습니다(6:4,11,18). 금 종기 다섯 개를 만든 이유는 주의 언약궤가 머물러서 임한 재앙의 도시가 다섯 곳이었기 때문입니다(17). 금 쥐 다섯 개를 만든 이유는 언약궤가 통과한 그들의 성읍이 다섯 개였기 때문입니다(18).
7장입니다.
언약궤는 실로가 아니라 아비나답의 집에 20년간이나 머물러 있었습니다(1,2). 이 때 사무엘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이스라엘 온 집의 회개 운동과 기도 운동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3). 그는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주님께 돌아오도록 했으며, 백성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주님만 섬겼습니다(4). 이것을 영적 각성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미스바에 함께 모여 물을 붓고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6). 주님은 회개하는 영혼들을 구원하시며, 풍성한 은혜와 긍휼을 베푸십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이들을 치러 왔습니다. 원수가 목전에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사무엘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무너지고 부패한 성직제도, 주님께 드리는 예배를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9). 예배의 회복, 무너진 단을 쌓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일입니다. 회개하고, 번제를 드리고, 기도할 때 주님은 원수들을 물리쳐 주시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십니다(12).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란 영광스런 사실을 확증하며 살아가고 싶다면 우리는 모두 미스바의 회개와 금식, 번제와 기도를 그런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원수를 물리치고, 그들의 공격을 막는 것은 군사력을 키우거나 삼손과 같이 괴력의 장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께 기도하는 것이요, 주님께 올바른 번제를 드리는 것이요, 죄를 회개하는 것이란 사실을 마음 속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8장입니다.
사무엘이 늙어 자기 아들들을 재판관에 세웠지만 아들들은 아버지 같지 않았습니다(3). 그러자 백성들은 왕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주님이 왕이시며,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5절,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었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길들로 걷지 아니하니 모든 민족들과 같이 이제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재판하게 하소서, 하니라.](삼상8:5). 이스라엘은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과 다른 독특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같아지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왕을 세우고자 하는 진짜 이유는 신정 국가에서 왕정 국가로의 전환을 꾀하고자 했던 것입니다(7). [...그들이 너를 버리지 아니하고 나를 버려서 내가 자기들을 통치하지 못하게 하려 하였느니라.](삼상8:7). 이는 주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왕을 세워 인간들의 다스림을 받겠다는 것으로 큰 죄입니다. 10-20절은 왕이 세워졌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게 될 짐과 부담들, 의무 등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왕을 위해 세금을 내어야 하고, 노역을 해야 하고, 군대로 모집되어야 하며, 왕의 소유로 토지를 빼앗길 것이며, 백성들의 자식들을 왕실의 종으로 부려먹을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없었던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점은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을 것이란 점입니다(18). 주님께서 친히 뽑아 세우신 사사(재판관)들의 기도는 즉각적으로 응답하셨고, 그들과는 늘 함께 하셨지만 왕과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18). 이것은 두렵고도 떨리는 일입니다. 백성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이 사무엘의 목소리에 순종하기를 거부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에게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리니] (삼상8:19). 하나님은 백성들의 이런 불신과 불순종, 완악한 요구에 응답하셨습니다(22). 주님은 때로 선하시고, 받아들이시고, 온전한 뜻 외에 이렇게 허락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한 응답은 되어도 손해입니다.
9장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미남인데다 키가 어떤 사람보다도 어깨 위만큼 큰 사람이었습니다(2). 한 마디로 사람들이 찾던 왕의 재목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의 모든 소망이 사울과 그의 집에 있다고 말함으로 그가 바로 초대 왕이 될 것임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21). 나귀를 찾아 나섰던 사울은 하나님의 사람을 만남으로 새로운 인생을 찾았습니다.
10장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았습니다(1). 사무엘은 사울을 확신시켜 주기 위해 앞으로 있을 세 가지 일을 말해 주었습니다(2,3,5). 그리고 사울에게 성령이 임하는 특별한 체험이 있었습니다(10). 구약 시대에는 신약의 성도들처럼 성령이 믿는 모든 자들에게 다 임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들에게 한시적으로 주님의 사역을 위해서 임했습니다. 반면 신약 성도들은 믿는 순간부터 영원히, 예외 없이 임하시며 내주하십니다.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성령이 임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이 필요합니다. 사울은 백성들 앞에서 왕으로 뽑혔습니다(21,24). 왕이 될 때 사울의 겸손은 곳곳에 보입니다(21,27). 사울은 거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외모, 부유한 집안, 영적 능력(10:10), 겸손한 마음,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의 기도와 인도, 백성들로부터의 인기, 좋은 친구들(10:26)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현대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바로 이런 사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의 사울이 되기보다 신약의 바울이 되기를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신약 시대의 사울(바울)과 잠깐 비교해 보겠습니다.
둘 다 베냐민 지파입니다. 처음 사울은 키가 크고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나 신약의 사울은 인기가 없었습니다(고후10:10). 사울은 하나님의 친구로 겸손함으로 시작했으나 주의 원수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28:6). 반면 신약의 사울은 주의 원수였으나 주님의 가장 신실한 종으로 생을 마감합니다(딤후4:18). 사울의 삶은 불순종과 인본주의로 특징져지는 반면 신약의 사울은 순종과 신본주의로 구별됩니다. 신약의 사울은 유대인 이름인 사울에서 그리스의 이름인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울에서 바울로의 삶이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11장입니다.
사울의 위대한 첫 승리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임했고, 백성들을 하나로 모아 암몬 족속들을 대파하였습니다(11). 이로써 그의 왕권은 백성들에게 견고하게 섰습니다. 이 때 사무엘은 승리에 되취되어 들떠 있는 백성들에게 올바른 영적 방향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14-15절, [그때에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거기서 왕국을 새롭게 하자, 하니 온 백성이 길갈로 가니라. 거기서 그들이 길갈에서 {주}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거기서 {주} 앞에 화평 헌물의 희생물을 희생시켜 드리며 거기서 사울과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크게 기뻐하니라.](삼상11:14,15). 이들의 승리는 사울이나 사무엘이 준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란 사실을 백성들은 영원히 기억해야 합니다. 영적 방향을 정확히 잡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방향이 틀리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잘못된 선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임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른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때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구나 생각하고 잘못 판단합니다.
12장입니다.
사무엘의 공식적인 고별 설교입니다. 사무엘은 평생을 정직하게 깨끗하게 살았습니다(2-5). 그는 하나님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양심에 거릴 것이 없었습니다(4-5). 영적 능력은 바로 이런 삶이 뒷받침되어야만 지속될 수 있습니다. 경건의 능력은 하나님과 사람들 목전에서 정직하게 행함으로써 유지됩니다. 이는 오늘날 사역자들에게 삶에 대한 큰 교훈을 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호아래 출애굽에서 여호수아의 정복전쟁, 사사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르렀음을 기억시켰습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왕이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시키는 것은 왕이 아닌 하나님만이 구원자란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의 죄는 무엇입니까?
첫째, 왕을 구한 죄입니다. 이는 주 하나님께서 왕이시기 때문입니다(12).
둘째, 백성들이 원하고 백성들이 택한 왕을 세웠습니다(13). 이에 대해 주님은 경고하셨습니다(17-18).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세우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신들이 살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세금과 군역이란 짐을 지고서라도 뜻을 관철한 것입니다. 죄를 지혜인줄로 아는 사람들이 있고, 부득이 했다고 변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죄를 가지고 현장에서 터득한 지혜라고 우깁니다. 전에 어떤 킹 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는 목사님은 “나는 개역 성경을 하나님이라고 믿으면 그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믿는다”라는 황당한 소리를 하기에 바로잡아 주려고 권면했더니 “저는 이것을 현장에서 부딪히며 터득한 지혜”라는 얼토당토 않는 변명을 해 댔습니다. 사람은 지혜라고 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현장에서 터득한 타협, 세속화, 자기 지혜”, 한 마디로 “현장에서 터득한 불신과 죄”라고 단언하십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지 못하다 보니 처음부터 진리를 말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점차적으로 돌려서 말하고, 상대에게 호감을 갖게 하려다 보니 생기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믿느냐?를 강조하다 결국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놓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엇(what)은 어떻게(how)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23-24절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암송하고 기억해야 할 중요한 말씀입니다. [또한 나로 말하건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쉼으로 내가 결단코 {주}께 죄를 짓지 아니하고 선하고 바른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터인즉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얼마나 큰일들을 행하셨는지 깊이 생각하여 오직 그분을 두려워하며 너희 마음을 다해 진리 안에서 그분을 섬기라.](삼상12:23,24). 이는 사도들이 [우리는 오직 계속해서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하리라, 하니라.](행6:4)는 결단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입니다.
13장입니다.
사울은 블레셋과 전쟁을 위해 길갈에 있었습니다. 아들 요나단이 블레셋 수비대를 쳤으나 백성들은 위험에 빠졌고 벌벌 떨었습니다(6,7). 전황은 크게 불리해지고, 탈영병이 속출했습니다(8). 사울은 다급한 나머지 사무엘을 기다리다 못하고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자신이 직접 드렸습니다(9). 이는 민수기 16:1-3,32-40에 오직 레위 지파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다는 기본적인 율법을 범해 버렸습니다. 그의 죄는 살인과 간음과 같은 육신의 죄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제사장직을 더럽히는 것은 영적인 범죄입니다. 그는 잘못을 알고도 변명을 했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11-12). [...그런 까닭에 내가 스스로 어쩔 수 없이 번제 헌물을 드렸나이다, 하니](삼상13:12). “그런 까닭에 어쩔 수 없이...하였나이다.”란 것은 회개가 아닌 변명의 표준 진술문과 같습니다. 헌물을 드리는 사소한 문제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사울에게서 주님은 더 큰 주의 율법을 지킬 것을 기대할 수 없으셨습니다. 이 일로 사울의 왕권은 이미 끝났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너무 가혹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번제 헌물과 제사장직에 대한 하나님과의 엄청난 관점의 차이에 기인합니다. 만약 왕이 임의로 번제 헌물을 드린다면, 백성들 역시 위급할 때는 자기 마음대로 헌물을 드릴 것입니다. 주의 법은 무너지고, 주의 말씀은 엉망이 되고, 상황 상황마다 자기가 기준이 되고, 자신이 율법이 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백성들이 사울의 본을 따라 자기들이 희생 헌물을 드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사울의 죄는 다윗의 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심각하고도 큰 죄입니다. 이는 오늘날 신자들이 형식과 절차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성경도 없이, 찬양과 기도도 없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도 없이 주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과 동일한 죄입니다.
14장입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과 달리 믿음이 있었습니다(6). 그는 용기도 있었습니다. 단 둘이서 적진에 들어가 적을 치기 시작했는데, 하나님께서 큰 지진을 보내셨고(15), 그들은 자중지란에 빠져 대승했습니다(15-23). 믿음에는 보상이 있습니다. 믿음이 모든 것을 이깁니다. 이는 영적 문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24-45은 사울의 어리석은 명령으로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말합니다. 사울은 전쟁이 어려워지자 금식을 선포했는데, 덕분에 백성들은 힘이 없어 쇠약해졌습니다(28,31). 요나단은 아버지의 명령을 모르고 꿀을 먹었는데 아버지의 명령이 매우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30). 사울의 명령으로 주린 백성들은 노략물을 피채 먹게 만들었습니다(32). 통치자의 어리석음은 백성들을 압제하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사울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적들을 물리쳤고 주님은 승리를 주셨습니다(46-48).
15장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이 아말렉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명했습니다(3).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아말렉 족속의 왕 아각을 산 채로 사로잡으며 칼날로 그 온 백성을 진멸하니라. 그러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또 양과 소와 살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과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그것들을 진멸하려 하지 아니하며 다만 나쁘고 가치 없는 것만 다 진멸하니라.](삼상15:8,9). 이는 불순종이며, 반역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무엇입니까?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주}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내가 {주}의 명령을 수행하였나이다, 하매](삼상15:13). 사울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죄에는 어떤 지혜도 없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요, 악을 떠나는 것이 명철입니다(욥28:28). 사울은 죄로 말미암아 지혜도 명철도 없습니다. 사무엘의 책망에 그는 다시 변명을 시작했습니다(21). 죄는 항상 선한 목적과 의도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돈을 벌면 헌금한다고 하고, 사업에 성공하면 주의 사역에 좀 더 헌신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정욕과 욕심을 주의 사역과 주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죄악 된 습관은 어디에나 널리 퍼져 있으며, 이런 죄의 속임수는 교회 내에, 심지어 목회자들 사이에도 깊이 퍼져 있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사무엘이 이르되, {주}께서 {주}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만큼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크게 기뻐하시나이까? 보소서, 순종이 희생 헌물보다 낫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거역하는 것은 마술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불법과 우상 숭배와 같나이다. 왕이 {주}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그분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더라.](삼상15:22,23). 결국 사무엘이 지적한 사울의 죄는 “왕이 주의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이는 다윗이 범한 살인과 간음, 거짓말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지만 역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음성에 순종했다고 다시 한 번 변명했습니다(24). 백성들의 선택을 받은 왕이 백성들을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주님을 두려워합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위하여 애곡하며 기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35). 우리가 사울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은 “육신에서는 어떤 선한 것도 나올 수 없으며, 육신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롬8:8). 그것이 아무리 좋아 보이고, 아무리 선한 의도와 목적으로 행해진다 행도 육신은 십자가를 통해 처리해야 할 것이지 주님께 드릴 것이 아닙니다. 육신적인 것으로 영적인 것을 대체하려는 것이 바로 종교로 복음을 대신하려는 인본주의요, 사울의 범죄입니다.
16장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사울을 위해 애곡하지 말고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한명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 인생이나 영적으로 볼 때도 백전노장이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무엘이지만 그는 외모를 취했습니다. [그들이 오매 그가 엘리압을 보고 이르기를, {주}의 기름 부음 받을 자가 참으로 그분 앞에 있도다, 하였으나](삼상16:6). 이것이 사람의 약점입니다.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삼상16:7). 다윗은 주님의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았고, 주의 영이 임했습니다. 그는 목자였으며, 하프를 잘 탔고, 강하고 용맹하며, 전사며 일에 분별력이 있고, 단정했습니다. 거기다 주께서 그와 함께 하심이 사람들에게서도 인정받을 정도로 간증이 있었습니다(17-19). 반면 사울은 출발선상에서부터 점점 쇠락하여 이제는 주의 영이 떠나고 악한 영이 임하여, 심신의 고통을 받았습니다(14,23). 주의 말씀을 버린 사람들에게는 악령이 임하는 법입니다.
17장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유명한 전투입니다. 골리앗은 거인이었는데 그 키가 10피트 정도였고, 150 Kg가 넘는 거구였습니다. 그는 블레셋의 champion이었습니다. 골리앗을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골리앗을 이기는 비결을 아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다윗입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에 있다는 분명한 소속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26). 그는 목자로서 주님의 도움으로 사자나 곰을 물리친 경험이 있습니다(35,37). 다윗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의 손으로부터 건져냄을 받았기에 골리앗으로부터도 능히 건져 내 주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37). 그는 주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45). 전쟁은 주께 속한 것이란 진리를 알았고 믿었습니다(47). 반면 곁에 있는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형제들은 다윗을 무시하고 화를 냈습니다(28). 사울 왕은 자신의 갑옷과 투구와 쇠 그물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38). 그러나 이것은 몸에 맞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군사의 힘을 빼거나 무용한 도움을 줍니다.
이 장에서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매우 잘 예표합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 왕에 등극하기 전에 골리앗(사탄)을 이겼듯이, 주님은 기름부음을 받고 왕으로 등극하시기 전에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다윗이 형제들에게 배척을 받았듯이 주님 역시 형제들에게 배척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아버지로부터 전쟁터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역시 아버지로부터 세상으로 보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후에 싸워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전쟁을 승리한 후에 싸워 승리합니다.
18장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연인보다 아름다운 형제애가 시작됩니다(1-4). 다윗은 백성들과 다윗의 신하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5). 칭찬과 인정은 사람을 단련하는 도구입니다. [도가니로 은을, 용광로로 금을 시험하듯 칭찬으로 사람을 시험하느니라.](잠27:21). 7절은 그 중에 압권입니다. [여인들이 놀며 서로 화답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이요, 다윗은 수만이로다, 하니라.](삼상18:7). 이 말은 사울을 질투의 화신으로 만들었고, 다윗은 생명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사울은 다윗을 정적으로 여겼습니다. 다윗은 매사에 지혜롭게 행동했습니다(5,14,15,30). 사울은 딸 메랍을 다윗에게 주는 대신 다른 사람에게 주었고, 미갈을 이용해서 블레셋 사람에게 죽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 자신도 알게 되었으며, 더욱더 두려워했습니다(29).
19장입니다. 이제 사울은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요나단이 사울에게 죽이지못하게 충고를 했는데, 사울은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다윗은 계속 사울 앞에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 요나단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악령에 잡힌 사울의 말은 맹세라 할지라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11-17절은 아내 미갈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졌습니다. 미갈은 침대에 형상 하나를 이용해서 자기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18-24절은 사무엘을 찾아간 다윗입니다. 사무엘은 다윗을 위해 기도해 줄 수있고 조언해 줄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보낸 모든 사람들을 속임수나 거짓말이나 힘으로가 아니라 주의 영으로 이겼습니다(20,21,23). 사울이 주의 영으로 충만하여 이틀이나 대언을 하는 사이에 다윗은 도망갔습니다. 사무엘이 사용한 영적 무기는 원수들을 제압하는 가장 강한 무기입니다. 우리의 싸움 역시 혈과 육이 아니라 이런 영적 전쟁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0장입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서로 은밀히 약속을 하여 다윗이 도망을 갈 것인지 다시 왕궁으로 돌아 올 것인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에게 두 번이나 거짓말을 했고, 죽임을 당할 뻔했습니다. 영적인 일은 이런 거짓말과 은밀한 작전, 비밀 회담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차라리 이 둘은 합심해서 기도하는 것이 나았을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애가 어떠해야 하는지 전형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형제들이 모여 자기들의 힘과 지혜와 모략으로 살 길을 준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이 부분에서 다윗은 전혀 믿음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21장입니다. 다윗은 놉 땅으로 도망가 성전에 갔습니다. 그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2). 그는 거기서 배가 고파서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빵을 먹었고, 골리앗의 칼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에돔 족속 도엑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다 속일 수는 없습니다. 결국 다윗은 놉땅의 제사장들을 모두 죽게 만들었습니다(22:17-19). 그는 다시 도망했는데 가드 왕 아기스에게 도망하여 또 거짓말을 했습니다(10-15). 일은 점점 악화되어 갑니다. 하나님의 지혜대신 자기 머리로 살려고 하니 별별 미친 짓을 다해야 했습니다(13). 주님을 기다리고 인내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의지하고, 머리를 굴리는 일이 가져다 준 비극은 끝이 날 줄 몰랐습니다.
22장입니다. 다윗은 이제 사회 불만 계층, 고난 중에 있는 자, 빚진 사백 명이 모여 들어 대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모압 왕에게 부탁하여 이들을 이주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갓이 다윗에게 유다 땅으로 가도록 갔습니다. 사울은 놉 땅의 무고한 제사장들을 불러 85명이나 죽였고(18), 그 땅을 모두 진멸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버린 사울 왕은 이제 주님의 제사장들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타락의 끝은 살인과 거짓말 같은 마귀의 성품을 몸으로 옮기는 일입니다.
23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생명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본격적으로 주님의 뜻을 구하기 시작했고 묻기 시작했습니다(2,11,12). 1-13절은 그일라에서 사울의 손을 피했습니다. 14-18절은 광야에서 사울의 손길을 피했습니다. 19-29절은 십(Ziphities)에서 사울의 손길을 피했습니다. 쫓고 쫓기는 도망자의 생활에서 다윗은 인내와 믿음, 연단을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기도하지 않고 움직였던 다윗이 이제 서서히 주님께 묻고, 답을 얻어 갑니다. 이는 오랜 연단의 결과였습니다. 성도들 역시 언제나 주님께 묻고 답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24장입니다. 사울은 삼천 명을 데리고 다윗을 찾아 나섰습니다. 사울이 지쳐 어느 동굴에 들어갔는데, 거기는 마치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숨어 있던 동굴이었습니다(3).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이는 대신 옷자락만 베었습니다(5). 그는 하나님이 기름부음 받은 종을 사랑하는 마음과 존중하는 마음, 두려움이 있었습니다(6). 이 일은 골리앗을 무너뜨린 것보다 더욱 위대한 사건입니다. 자신의 원수를 갚을 기회에서 주님께 맡기는 일은 성읍을 차지하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는 사울 왕이요, 자기를 찾아 죽이기 위해 찾아 온 왕에게 한 다윗의 태도야말로 우리 신약 성도들에게 무엇이 진정한 승리인가를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저는 참으로 회개할 일이 많습니다. 목자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에 너무나 빨랐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제사장 제도나 기름부음 받은 성직자 제도가 없다는 핑계로 주님이 교회에서 세우신 직분들, 역할들을 너무나 업신여긴 일이 많았던 것을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9-15절은 다윗이 왕의 오해를 풀고, 자신이 무죄를 증명하는 내용입니다. 16-22은 사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가는 장면입니다. 원수에게 베푼 사랑은 일시적이지만 그의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아름다운 장면은 계속됩니다.
25장입니다. 사무엘이 죽었습니다(1). 온 이스라엘은 평생을 기도와 말씀으로 자신들을 먹인 그의 죽음에 애곡하였습니다(1). 갈멜의 후손 가운데 나발이 아주 부자였는데 3,000마리의 양과 1,000마리의 염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야비하고 이해심이 없으나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이해심도 많고 용모가 아름다웠습니다(3). 그는 다윗의 병사들로 인해 양떼들과 염소들을 지켜준 호의를 모욕했습니다. 이 때 아비가일이 지혜롭게 행하여 다윗의 분노를 멈추었습니다. 그는 종들에게 벨리알의 아들(17)이란 평을 들었습니다. 아내에게 벨리알의 사람 나발(25)이란 말을 듣습니다. 나발이란 뜻은 바보란 뜻입니다. 그녀의 은혜롭고도 설득력 있는 말로 인해 다윗은 보복의 피를 멈추었습니다. 주님은 나발을 치시고,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자신에게만 부유하고 주님께 아무 것도 아닌 어리석은 부자의 전형이 바로 나발입니다.
26장입니다. 사울은 다시 다윗을 죽이려 군대를 동원했지만 오히려 자신이 죽을 뻔했습니다. 다윗은 두 번째 죽일 기회를 맞았으나 죽이지 않았습니다(9). 24절은 다윗의 기도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보호해 주시고 건져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기도와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믿음의 기도를 드렸으나 현실의 벽 앞에서 하염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다음 장을 보십시오.
27장입니다. 다윗은 믿음이 흔들렸고 사울을 두려워하여 도망을 쳤습니다(1). 그는 사울을 피해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가 1년 4개월을 머물렀습니다(7). 이는 정치적 망명이지만, 불신의 결과입니다. 그 기간 중에 다윗은 그술 족속과 게셀 족속과 아말렉 족속을 쳤습니다(8). 그런 후에는 블레셋 왕에게는 거짓말을 했습니다(10). 그는 철저히 본색을 감추고 살면서 때를 기다렸습니다.
28장입니다. 블레셋이 다시 쳐들어오자 사울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주님은 사울에게 일체의 응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6). 그는 결국 엔돌에 있는 부리는 영을 지닌 사람을 찾아가 사무엘을 불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는 물론 율법에서 금하는 내용입니다(레20:6). 부리는 영을 지닌 사람이 사무엘을 불러 올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특별히 역사 하셔서 사무엘의 모습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여인은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는데 이는 평소에 자신의 마술이나 속임수가 아니라 실제로 사무엘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뒤에 사무엘이 하는 예언 역시 정확합니다. 평소 같으면 자신이 대신 죽은 자의 목소리를 내거나 접신을 통해서 일을 할 수 있었겠지만 이번 일은 실제로 사무엘이 등장했고, 주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과 그가 들은 마지막 말씀은 심판이었습니다.
29-30장입니다. 다윗의 불신으로 인한 망명 생활은 자기 민족을 쳐야 하는 전쟁에 내몰리는 위기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셔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시글락으로 왔는데 시글락은 이미 아말렉에게 완전히 점령되었고, 백성들은다 포로가 되었으며, 도시는 불탔습니다. 뒤늦게 블레셋에서 온 다윗을 향해 백성들은 그에게 돌로 치려했습니다(30:6). 그러나 그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스스로 용기를 내었습니다(30:6b). 한 때 자기 백성과 싸울 뻔했으나 이제 원수를 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큰 승리를 주셨고, 잃었던 것을 되찾게 해 주셨습니다.
31장입니다. 사울은 블레셋 사람과 싸우다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는 회개하지 못한 채, 그대로 죽음을 맞았고, 결국 자살을 했습니다. 그는 많은 죄를 지었지만 마지막에 영매를 찾아 간 것은 배교의 말기가 마술과 영매, 접신술과 같은 것임을 보여 줍니다. 장차 앞으로 배교한 교인들은 분명히 이런 것들로 주님의 뜻을 찾겠다는 사람들로 붐비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말씀의 전파와 복음 사역보다 예언의 영을 지녔다는 여자들이나 예언의 은사를 자랑하는 몇몇 마귀 들린 접신가들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일 것이며, 성도들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사울은 살든지 죽든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 살아서나 죽어서나 적들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자살한 사람입니다. 아히토벨(삼하17:23), 시므리(왕상16:18), 유다 이스가리욧(마27:5).
사울은 주께 기름부음 받아 좋은 출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내하지 못함, 불완전한 순종, 변명과 같은 작은 문제들로부터 타락하기 시작하여 악화일로를 치달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편에 서지 못할 때 하나님의 사람과는 원수가 되었고, 죽이는 살인자의 길을 갔습니다. 변명은 회개가 아닙니다. 순종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는 육신의 지혜와 힘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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