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오, 주여 주는 주의 일을 회복하시옵소서




말씀: 하박국3:1-19
 요절: 하박국3:2
[오, 주여, 내가 주의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두려웠나이다. 오 주여, 주는 주의 일을 이 고난의 수년 중에 회복하시옵소서. 이 고난의 수년 중에 알리시옵소서. 분노하실 때에라도 긍휼을 기억하시옵소서]

부흥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결코 부흥이 주어질 수 없고, 부흥을 주시기를 요청하지 않는 교회에 부흥이 임할 수 없습니다. 영적 부흥이란 우리의 영을 소생시키는 것이요, 회복케 함으로써 한 분 하나님이 나의 마음 전부를 다 차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민족의 부흥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 교회와 조국의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대언자 하박국은 하나님께 질문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풀리지 않는 여러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1장은 하박국이 주님께 질문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먼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어찌하여 주께서 불법을 보이시며 나로 하여금 학대를 보게 하시나이까?](1:3) 하박국이 한 이 질문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데 어떻게 불법과 학대가 있는가? 이 세상은 왜 이리 불공평하고 모순 덩어리인가? 물어보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 질문이 있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모든 질문은 반드시 응답이 옵니다. 하박국은 계속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1:13,14,17을 보십시오.(다 같이 읽을 것). 하박국은 하나님께 따지듯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하박국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박국은 주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1을 보십시오. [내가 나의 파수 보는 곳에 서며 내 자신을 망대에 세우고 그분께서 내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는지 지켜보며 내가 책망 받을 때에 무슨 말로 대답할는지 지켜보리라, 하였더니](2). 하박국의 자세는 너무나 당당합니다. 여러분 진리에 대한 갈급함과 진리를 찾고 그에 대한 대답을 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께 묻고 그 대답을 기다리십시오. 빌라도와 같이 “진리가 무엇이냐?” 말하지(saith) 말고 진리가 무엇이냐 물으십시오(ask). 주님은 산상 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ask), 그러면 받을 것이요.](마7:7). 구하라는 말은 영어로 ask입니다. 이 말은 요청하라. 물으라와 같은 단어입니다. 물어 보라. 그러면 대답을 얻을 것이란 말도 됩니다. 성경에 그토록 많은 표현 가운데 하나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기를](Jesus answereth and saith)입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들의 많은 질문에 결코 싫어하지 않으시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질문을 대답하시기를 매우 기뻐하십니다. 물으면 대답을 듣습니다. 요청하면 얻습니다.

하박국의 이런 질문들에 대해 주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2절입니다. [주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2). 주님은 대답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아무리 문제가 많고 힘들고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다 해도 그것을 누구에게 물을 수 있고, 그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면 무엇이 문제이며, 걱정이겠습니까? 욥이 엄청난 고통을 겪을 때 그가 울부짖는 고통의 신음 소리는 피부병이나 가족을 잃은 슬픔을 능가하는 고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불러도 대답 없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욥의 고뇌는 슬픔에 잠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고뇌이기도 합니다. 욥은 하나님과의 교제(communication)의 단절을 가장 큰 고통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하시고 주께서 부르소서. 내가 응답하리이다. 아니면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하옵시고 주께서는 내게 응답하옵소서.](욥13:22). 내가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없어서 응답할 수 없고, 내가 부르짖는 소리에 주님이 아무 응답이 없다면 이보다 더 큰 재앙은 없습니다. [보라, 내가 앞으로 나아가나 그분께서 거기에 계시지 아니하고 뒤로 나아가도 그분을 감지하지 못하며 그분께서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그분을 바라볼 수 없고 오른쪽에 숨으시나 내가 그분을 볼 수 없구나.](욥23:8~9). 성도의 영적 고통 중에 이 보다 더 큰 것은 없다고 저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보라, 그분께서 내 곁을 지나가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분께서 계속 나아가셔도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하는도다.](욥9:11). 우리는 죄로 인해, 징계로 인해 이런 영적 암흑을 경험하는 때가 있는데 이 때는 정말 내가 그리스도인인가?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욥은 친구들과 긴긴 시간의 논쟁 속에서도 그는 위로와 힘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대답하셨을 때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이 때에 주께서 회오리바람 속에서 욥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욥38:1). 주님은 우리의 질문, 요구, 간구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묻고 무슨 대답을 들으셨습니까? 여러분은 혹 빌라도처럼 대충 말만해 놓고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주님의 면전에서 나가 버리는 그런 사람은 아니십니까? 여러분은 하박국처럼 주의 대답이 무엇인지 파수 보는 곳, 망대에 서서 그분의 대답을 기다리십니까? 혹시 대답이 오지 않아서 기다림에 지치셨습니까?

2:3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 환상의 정한 때를 위한 것임이라. 그러나 그 끝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말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리라. 비록 이것이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이것이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것이 반드시 오겠음이라.](합2:3). 주님은 때를 따라서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비록 이것이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을 인내라고 합니다. 인내하는 과정에서 겪는 시험과 고통을 “오래 참음”(longsuffering/오랜 고통)이라고 합니다. 기다림이야말로 믿음과 소망을 한 단어로 결합해 놓은 덕목입니다.

산 위로 율법을 받아 오기 위해 하나님을 만나러 간 40일을 기다리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우리가 너희에게 돌아오기까지 여기에서 우리를 기다리라. 보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 하나니 누구든지 할 일이 있으면 그들에게로 나아갈지니라, 하고](출24:14). 하지만 이스라엘은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조급함으로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늦어지매 백성이 이것을 보고 함께 모여 아론에게 가서 이르되, 일어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앞에 갈 신들을 만들라. 이는 이 모세 곧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에 관하여는 그가 어찌 되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니](출32:1).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다 못해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다급하고 초조해 하다가 결국 사무엘을 대신하여 자신이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상 13:8, [그가 사무엘이 정해 준 때를 따라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을 떠나 흩어지므로 사울이 이르되,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이리로 내게로 가져오라, 하여 그가 번제 헌물을 드렸더니 그가 번제 헌물 드리기를 끝마치매 사무엘이 오므로 사울이 나아가 그를 맞으며 문안하니라.](삼상13:9~10). 그는 사무엘을 기다렸지만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대신 번제 헌물을 드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전에 이미 이런 기다림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또한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보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 번제 헌물을 드리고 화평 헌물의 희생물을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일을 보여 줄 때까지 너는 이레 동안 기다리라, 하니라.](삼상10:8). 그 때는 잘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다급하고 위기의 상황에서는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기다림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우리는 일상 생활의 체험에서도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영성이 있는 사람이란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아버지는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리십니다. 기다림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으며, 깊은 믿음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위인들 가운데 기다림이 없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얻는데 25년을 기다렸습니다. 이삭은 20년을 기다려서 쌍둥이를 얻었습니다(창25:26).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20년이 더 걸렸습니다(창31:41). 요셉은 팔려 간지 수십 년이 지나서야 총리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자처한 후 40년이 더 지난 후에야 진정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결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은 기름부음 받은 후 금방 왕이 된 것이 아니라 기약 없는 세월을 기다린 후에야 헤브론에서 왕위 등극을 하고 통일 왕국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이런 시를 한 편 배웠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란 김영랑 시인의 시인데,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 분은 분명 기다림을 아는 사람이구나란 생각이 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 안에서 안식하고 끈기 있게 그분을 기다리라. 자기 길에서 형통한 자나 사악한 꾀를 이루는 자로 인하여 초조해 하지 말지어다.](시37:7). [내 혼아, 너는 오직 하나님만 기다리라. 이는 내가 기대하는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로다.](시62:5).

우리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세계 선교 사명을 주시고, 위대한 대업을 주셨지만 가장 중요한 명령은 “기다리라”였습니다. [또 사도들과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명령하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너희가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 하셨으니 곧 이르시되,](행1:4).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기다림이었습니다. 기다리라... 기다림은 사람을 세워줍니다. 누가복음 2장에는 이런 놀라운 기다림의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보라,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篤實)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님께서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님의 계시를 받았더라.](눅2:25~26). 시므온은 늙어서 죽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그의 기다림은 평생이었습니다. 아래에는 안나라는 고령의 할머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 아셀 지파에 속한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여대언자가 있으니 나이가 매우 많더라. 그녀가 출가하여 칠 년을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된 지 팔십사 년쯤 되니라. 그녀가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기더라. 마침 이때에 그녀가 나아와 마찬가지로 {주}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에서 구속(救贖)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이에 대하여 말하니라.](눅2:36~38). 기다리는 사람은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어떤 형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이 곧 오신다고 했는데 벌써 2000년이 지나도 아직도 오시지 않았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박국 2:3을 읽어보라.

테리 미어즈 자매가 쓴 시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는가? 잘 볼 수 있습니다.

“주여 저의 교만을 없애 주소서- 주님의 대답은 No. 교만은 내가 없애는 것이 아니라 네가 포기하는 것이다. 주여 저의 자녀의 불구를 고쳐 주옵소서- 주님의 대답은 No. 그 아이의 영은 온전하다. 몸은 일시적인 것이란다. 주여 제게 인내를 허락하소서- 주님의 대답은 No. 인내는 환난의 부산물이란다. 그것은 주는 것이 아니라 환란을 통해 얻는 것이다.

주여 제게 행복을 주소서- 주님의 대답은 No. 나는 네게 복을 주었노라. 행복은 네게 달려 있느니라. 주여 저의 고통을 없애 주소서- 주님의 대답은 No. 그것은 너로 열매맺게 하기 위해 잘라내는 것이란다. 나는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물었다네. 비로소 주님은 그렇다. “나는 너에게 독생자를 주었고, 너는 천국에서 나를 만날 것이다.” 주여 제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만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도우소서. 주님의 대답은 “아,... 드디어! 이제 네가 바로 구하는구나!”

하박국은 주님의 대답을 기다릴 뿐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결정을 미리 내려놓고 주님께 묻습니다. 이미 자신이 결정을 내려놓았으니 주님께서는 Yes, No로만 답하시라는 것입니다. 웬만하면 Yes 해 주십시오. 그런 식입니다. 마치 실세 전무가 고용 사장에게 형식적으로 결제 맞는 식으로 구합니다.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요, 죄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결정을 무조건 따라주고 도와 줘야 하는 신하도, 종도, 참모도 아닙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시요, 결정권자이십니다.

3:1절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시기오놋에 맞춘 대언자 하박국의 기도라](3:1). 하나님과의 묻고 답하기를 통해 모든 것을 해결 받은 하박국은 아름다운 기도를 합니다. 3:19절 마지막 부분에 따르면 [이 노래는 내 현악기들에 맞추어 악장에게 준 것이니라.]고 합니다. 하박국이 음악에 상당한 재능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시기오놋이란 것은 아직까지 정확히 어떤 악기인지, 아니면 음악의 한 부류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음악에 맞추어 기도하는 것이 요즘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지만 구약에서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시편이나 솔로몬의 노래는 모두 음악에 맞추어 노래한 것들입니다. 이제 하박국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오 주여, 내가 주의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두려웠나이다. 오 주여, 주는 주의 일을 수년 중에 회복하시옵소서. 이 수년 중에 알리시옵소서. 분노하실 때에라도 긍휼을 기억하시옵소서.](3:2). 2:1에서 하박국은 “내가...지켜보며...지켜보리라.”하며 당당했습니다. 하지만 주의 말씀을 듣고 나서 하박국은 두려웠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2장에서 (2:9,12,15,19) 네 번이나 “화 있을진저”라고 저주와 심판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심판의 말씀 앞에는 마귀들도 두려워 떱니다(약2:19). 이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주의 말씀을 듣고 “두려웠나이다”란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이사야 66:2과 66:5을 보십시오. [주가 말하노라.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었으므로 이 모든 것이 존재하느니라. 오직 가난하고 영으로 통회하며 내 말에 떠는 자는 내가 보살피느니라.](사66:2), [주의 말씀에 떠는 자들아, 너희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지어다.](사66:5). 모세도 두려워 떨었습니다(행7:32). 주를 뵙고 주의 음성을 들은 바울도 두려워 떨었습니다. [사울이 떨며 심히 놀라 이르되,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행9:6) 그 이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할 때에도 심히 두려워 떨었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 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완수하라(work out your salvation)](빌2:12) 여기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완수하라 할 때 완수하라는 work out이란 단어인데 이는 아래 2:13절 말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는 너희 안에서 일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니](It is God which worketh in you). 불신자였던 벨릭스도 주의 말씀에 떨었습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앞으로 있을 심판에 대하여 설명하니 벨릭스가 떨며 대답하되, 이번에는 그만가라. 적당한 때에 너를 부르리라, 하고](행24:25). 말씀에 대해 두렵고 떨림이 없는 사람은 말씀을 제대로 들은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박국 대언자는 주의 말씀에 얼마나 떨었는지 모릅니다. 3:16을 보십시오. [내가 들을 때에 내 배가 떨었으며,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썩게하는 것이 내 뼈 속으로 들어오매 내 몸이 내 속에서 떨었나니...]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일 많이 떨어 본 적이 언제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일로 떨어 보았습니까? 저는 심판 때에 누구, 누구, 누구가 나 때문에 예수님 못 믿고 지옥 갔다는 말을 들을까봐 제일 많이 떨립니다. 그 생각만 하면 아찔합니다. 백 보좌 심판석의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이유를 댈 때 나의 이름이 혹시 나올까봐 두렵고 떨립니다. 숨겨 놓은 죄들이 세상에 다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에 대해 두려워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기도하십시오. 이제는 그런 자신의 문제 말고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떨림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살 떨리는 일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전혀 두려움과 떨림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때입니다. 지옥에서 고통받을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친구, 친척들의 운명에 대해서 두려움과 떨림이 없다면 그는 지옥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거짓된 것이란 뜻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불타는 지옥에서 나의 이름을 부르며 이를 갈며 원망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귀는 이미 먹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저 콘크리트 바닥 보다 더 딱딱한 것입니다. 죽어 가는 영혼에 대한 불쌍한 연민과 눈물이 없다면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에 불과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말씀 앞에 떨림이 없고 깨달음이 없다면 저희들의 삶은 열매맺는 성도의 삶이 아니라 짐승의 삶입니다. [내가 이같이 어리석고 무지하므로 주 앞에 짐승 같사오나](시73:22). 솔로몬은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내 마음 속으로 사람들의 아들들의 상태에 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드러내시리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짐승임을 보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전3:18). 우리는 사람들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짐승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까?

<예화>- 피터 럭크만의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예전에 자유주의자며 근대주의자인 설교자가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왔습니다. 그의 아내가 커피를 내어놓으며 남편의 초췌하고 핼쑥한 얼굴을 보았습니다. ‘여보, 어디 편찮으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남편은 ‘간밤에 아주 끔찍한 꿈을 하나 꾸었소. 내가 죽어서 구름위로 끌려 올라가는 꿈이었소. 거기에서 누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는데, 그의 손에는 큰 구멍 같은 것을 가진 것 같았소. 그 사람은 구름 위에 서서 나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목사 양반, 당신 부인과 당신 자녀들의 혼은 어디에 있소?’ 나는 ‘혼이라고요, 무슨 혼 말씀입니까?’ 했더니, 다시 나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목사 양반, 당신의 우체부와 TV 수리공, 신문 배달하는 소년의 혼은 어디에 있소?’ ‘저는 지금 당신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혼이라뇨? 나는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때 나는 구멍을 통해 구름 밑으로 수 백만 마일 아래에 있는 불못같은 것을 보았소. 그 불못 속에 당신과 아이들과 T.V 수리공, 채소 가게 점원, 우체부, 신문 배달하는 소년을 보았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나를 저주하는 것이었소. 그 때 그의 아내가 말하기를, ‘여보, 아마 당신이 어제 저녁에 너무 늦게 식사를 해서 속이 안 좋았나 봅니다.’ 그는 스푼으로 커피를 저은 후 마시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어 버렸습니다.”

하박국 대언자는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 주여, 주는 주의 일을 수년 중에 회복하시옵소서. 수년 중에 알리시옵소서. 분노하실 때에라도 긍휼을 기억하시옵소서.](2b) -in the midst of years.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해 북왕국은 이미 망해 버렸고 남왕국 유다마저 느부갓네살에 의해 완전히 망할 것을 들었을 때 하박국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인 솔로몬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기 때문에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집인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예루살렘을 망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역대기하 7:16에서 주님은 [이는 내가 이 집을 택하고 거룩히 구별하여 내 이름을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려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영구히 거기에 있으리라](대하7:16) 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은근히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아까워서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지 않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면 뿌리째 뽑아 버리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만일 너희가 돌이켜서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법규와 내 명령을 버리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고 그들을 경배하면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친히 그들을 뿌리째 뽑아내며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집도 내 눈앞에서 던져 버리고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속담거리와 웃음거리가 되게 하리니](대하7:20-21).

징계와 심판은 기록된 말씀에 따라 엄중히 집행됩니다. 여기서는 발버둥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범죄에 대해서 겸손히 주의 징계를 받아 들여야 합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님의 징계를 견딜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박국과 같이 수년 중에 회복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 주님을 알고 회복되어야 합니다. 징계는 바로 잡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징계는 누구에게나 임하는 것입니다. 징계의 때에 슬퍼하거나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징계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입니다. 하박국과 같이 “분노하실 때에라도 긍휼을 기억하시옵소서” 간구해야 합니다. 욥은 그의 고통 가운데서도 한 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통이 고통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릇 온전해 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분께서 아시나니 그분께서 나를 단련하신 뒤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바울 사도도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 세상 사람들에게 환난과 고통은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을지라도 저희들에겐 엄청난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시편에서 이르기를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길을 잃었사오나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하오니 이로써 내가 주의 법규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범죄함을 통해 주께 징계를 받음으로써 자신들이 해야 할 바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저희들은 한 목소리로 주님께서 저희들 안에 주의 일을 회복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이 오실 때까지 모든 일을 이루실 줄을 확신합니다(빌1:6).

①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완전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갈4:19)

②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에서(엡4:13)

③ 복음 전도의 일꾼으로 삼아 주시도록(골4:3)

3-15절 말씀은 주의 지상 재림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성경은 주님의 재림에 행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20:17,21:22에 보면 “왕의 대로”(king's highway)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주님은 성도들과 함께 먼저 시내 산으로 와서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의 경로를 거쳐 올리브 산으로 오실 것입니다. 이사야 11:16에서는 "큰 길", 이사야 40:3에서는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을 위해 큰길을 곧게 만들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출발하여 파란(Paran) 산과 세일(합3:3), 에돔(보스라-사63:1-3), 셀라, 시혼을 지나, 헤스본과 길갈과 여리코를 거쳐 예루살렘 동문으로 입성하실 것입니다. 재림의 여정은 에돔을 지나 북쪽으로 향하다가 모압과 암몬인들의 땅에 이르러서는 동쪽으로 돌아 사해 북쪽으로 올라가 요단을 건너는 것입니다(민21,시78). 그리고 주님께서는 2000년 전에 자신이 침례를 받으신 요단 강을 지나서 길갈을 가로질러 아라비아를 지나 올리브 산에 서실 것이다. 이때 올리브 산은 두 동강으로 나뉘어 지게 될 것입니다(슥14:4). 그리고 예루살렘 동편 문을 통과해 들어가서 다윗의 보좌를 차지하실 것입니다.[그가 이르되, 주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오시며 바란 산에서부터 빛을 내시고 수만 성도와 함께 오셨으니 그분의 오른손에서 그들을 위하여 불같은 율법이 나왔도다](신명기 33:2). 성경에는 재림에 대해 암시해 주는 중요한 단어들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불타는 숯’, ‘주의 활’, ‘병거’, ‘해와 달’, ‘흑암’, ‘회오리바람’, ‘셀라’, ‘주의 말들’...과 같은 표현은 다 재림과 연관되어 쓰이는 어휘들입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께서 주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되 주의 기름 부은 받은 자로 구원하시려고 나아가사 그 사악한 자의 집에서 그 기초를 목까지 드러내심으로 그 머리를 상하게 하셨나이다. 셀라.](13). “주의 백성”이란 표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쓰이는 표현이 아닙니다. 신약에는 두 번 나오는데 모두 이스라엘과 연관되어 쓰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적그리스도의 머리는 이 때에 부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주석가들이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머리를 부수셨다고 주석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16:20에서 바울 사도는 분명히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밑에서 상하게 하시리라](미래형임)고 선언합니다. 마귀의 머리가 부수어 지는 일은 온 그리스도인들의 꿈이요, 숙원입니다. 지금도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니며 택함 받은 자들조차 미혹하기 위해 설치는 마귀의 머리는 결국 부수어 지고 맙니다. 계시록 13:4에 [사람들이 그 짐승에게 권능을 준 용에게 경배하고 또 그 짐승에게도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그와 더불어 전쟁을 하리요? 하더라.]- 성경은 간단히 답합니다. 하나님은 전쟁의 사람입니다. [주는 전사(man of war)시요, 주가 그분의 이름이시로다](출15:3). 여러분은 스스로 마귀와 싸울 수 없습니다. 마귀는 다니엘보다 지혜롭고 속이는 자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주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할 수 있습니다. 주님으로 하여금 싸우시도록 저희들이 자리를 내어 드리면 됩니다. 승리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7-18절 말씀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꽃을 피우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올리브 나무에 수고의 열매가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서 양떼가 끊어지며 외양간에 소 떼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주를 기뻐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로다.](17-18). 이 말씀은 패배자들에게 주는 위로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참고 인내하라고 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물론 위로의 말씀이 되겠지만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하박국의 깊은 신뢰가 새겨져 있습니다. 17절을 유념해서 보면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세 그루의 나무가 나옵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올리브 나무입니다.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의 영적 특권을 상징하고 올리브나무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특권을 상징하고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특권을 상징합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친히 저주하셨습니다. 포도나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숲의 나무들 가운데 있는 포도나무를 불에 내어 주어 땔감이 되게 한 것같이 내가 예루살렘 거주민들도 그리하리라.](겔15:6) 올리브 나무에 대해서는 바울 사도가 [또한 그 가지들 중에 얼마가 꺾이고..](롬11:17). 결국 하박국이 본 조국 이스라엘의 운명은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돈을 벌어도 다 빼앗겼으며, 온 세상을 유리 방황하며 죽어 갔습니다. 여러분,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 조국의 운명을 이렇게 미리 볼 수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앞으로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우리 집안이 멸절을 한다거나 온 세상을 유리방황하며 갖은 수모를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게 되었다면 여러분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의 자식들이 이집트에서 400년 간 종살이를 할 것을 알았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자기 민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하다 엄청난 징계와 심판을 받을 것을 미리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하박국은 하나님께 자신의 민족에 대해서 물었다가 엄청난 심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 하박국은 [나는 여전히 주를 기뻐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로다.] 했습니다. 그것도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로 찬양을 하며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신앙이요,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박국은 자기 민족의 운명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런 주님의 재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영적 부흥이란 현실을 넘어서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요, 그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3-15절에 이르는 주님의 찬란한 재림의 영광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3절부터 차분히 한번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이 데만에서 오시며 거룩하신 이께서 바란 산에서 오셨도다(과거형). 셀라. 그분의 영광이 하늘들을 덮으며 그분의 찬양이 땅에 가득하도다.”(3) 그분의 광채는 빛과 같고....(4)....(15까지 차분히 읽어보십시오.). 이 영광을 본 사람이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고 고난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여러분과 저는 하박국보다 훨씬 더 좋은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 육신의 장막을 벗으면 주님의 몸과 같이 썩지 않는 영광스런 몸을 입고 영원무궁토록 그분과 함께 통치하는 특권을 누릴 것이란 주님의 변할 수 없는 약속을 성령의 인(印)침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저 하늘에 주님이 직접 지으신 mansion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 들리지 않는 것들을 뚫고 나아가 그 실체를 현재보고 듣듯이 누리는 것입니다.

18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나는 여전히 주를 기뻐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로다.](18). 바울 사도는 신약 성경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는데 그 첫 번째가 “항상 기뻐하라”입니다. 그냥 “기뻐하라”는 명령은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칭찬을 들어도 기쁘고, 좋아하는 것 갖게 되어도 기쁘고 결혼해도 기쁘고, 자녀를 낳아도 기쁩니다. 항상 기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하박국이 바로 그 비결을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뻐하는 대상을 “주님”으로 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행한 어떤 일, 사람간의 관계가 아닌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그 비결입니다.

성경에서는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몇 가지를 말해 줍니다.

첫째 주를 기뻐하라. 주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알아 가면서 여러분의 기쁨은 그만큼 커질 것입니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주의 말씀인 율법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때 에스라가 율법을 읽어 주고 깨닫게 해 주었더니 백성들이 모두 기뻐했습니다. 성경을 깨닫는 기쁨을 누리십시오.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둘째, 주의 구원을 기뻐하라. 현재 자신이 구원받은 기쁨이 사라진지 오래인 사람은 이 시간 다시 한번 구원의 은혜를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기쁨이 없는 사람은 다른 어떤 기쁨도 누릴 수 없습니다.

셋째, 주의 날들을 기뻐하라. 이는 우리의 소망입니다. 주님이 오실 날을 고대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흐뭇하고 기쁜 일입니다. 순식간에 공중으로 끌려 올라가 영광스런 몸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서만 보고 듣던 모든 것들의 실제를 보고들을 때의 감동! 그것은 온 몸과 마음에 몸서리 쳐 오는 전율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천군 천사들이 나팔을 불고 믿음의 영웅들과 스랍들, 천사들을 눈으로 보며,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날 때의 순간을 잠시라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겐 아직도 가장 좋은 것을 받지 않았습니다.

넷째, 주의 행하신 일들을 기뻐하라. 출애굽기 18:9을 보면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나옵니다. [이드로가 주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에서 구해 내시려고 베푼 모든 선하심으로 인하여 기뻐하며](출18:9). 바울은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을 인하여 기뻐했습니다. 요한은 사랑하는 형제들이 믿음 안에서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기뻐하고 있습니까? 이 땅의 일시적인 것을 보고 듣는 기쁨에 취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주님을 기뻐하는 마음의 변화를 이루십시오.

하박국의 노래는 계속됩니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니 그분께서 나의 발을 암사슴의 (뒷)발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는 시편 기자인 다윗의 고백과 일치합니다. [나의 힘이 되시는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리이다.](시18:1) 느헤미야도 [주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니라](느8:10) 선언하였습니다. 걱정과 근심, 자신과 세상의 염려로 가득한 사람들은 어떤 영적인 힘도 가질 수 없습니다. 죄의 권능,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 생의 자랑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힘이 하나도 없는 사람에게 걷자고 하면 아주 싫어합니다. ‘달리자’고 하면 아마 살인납니다. 힘이 없는 사람은 그냥 앉았다가 눕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의 힘이 되셔서 나의 발을 암사슴의 발같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암 사슴의 발은 날렵하고 우아합니다. 진흙을 밟지 않습니다. 나의 발에 힘을 주셔서 낮은 곳에 있더라도 높은 곳으로 세차게 달려올라 갈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나의 높은 곳으로"란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저마다 신앙의 이상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일은 하지 않고 이런 저런 일은 하고 싶습니다. 나의 높은 곳이란 바로 나의 영, 혼이 온전히 부흥된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이 나의 힘이 되셔서 나의 발이 산을 넘고 강을 넘고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며, 시장을 누비며 걸어 다닐 화평의 발이 되게 하시고 뱀과 전갈을 밟아 이기는 발, 높은 곳으로 뛰쳐 올라가 거기서 다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환경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나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나는 여전히 주를 기뻐하고 나의 힘되신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때로는 시험이 오고, 나의 죄와 허물로 징계와 고난이 오고, 내가 태풍의 소용돌이 속에 머물러 있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주를 사랑하리라 결단하십시오. 이 마음이 부흥된 마음입니다.

3:18,19절 말씀을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