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하나님과 만날 준비를 하라.

말씀: 아모스 4:1-12
요절: 아모스 4:12

[그러므로, 오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이와 같이 행하리라. 오 이스라엘아,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할 터인즉 너는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할지니라]


오늘은 뽕나무를 캐던 한 농부였던 아모스의 설교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모스는 ‘짐을 지는 사람’이란 뜻으로 본래 드고아 고원에서 목축을 하며 뽕나무를 재배하던 자로 상당히 부유한 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모스 1:1에 [유다 왕 웃시야 시대,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시대 곧 지진이 있기 이 년 전에 드고아의 가축치는 자들 가운데 거하던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본 말씀이라.](암1:1)라고 그가 살던 시대적, 역사적 배경이 나옵니다. 그의 직업은 목축과 양잠업이었습니다. [이에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대언자가 아니며 대언자의 아들도 아니라. 다만 나는 가축치는 자요, 뽕나무 열매를 모으는 자인데](암7:14). 하나님의 부르심은 외모로 취하심이 없습니다. 목동 다윗을 왕으로 부르신 것이나 가축 치며 뽕나무 열매를 모으는 아모스를 부르신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이요, 은혜입니다. 아모스의 본래 출신은 남왕국 유다였으나 북왕국의 사마리아와 벧엘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는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선교사였습니다. 주님은 여로보암이 벧엘의 제단에서 제사를 드릴 때도 유다에서 벧엘로 가서 전하게 하셨는데(왕상13:1), 이는 주님께서 이곳에 주의 말씀을 증거할 대언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모스의 설교는 주로 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아모스가 전한 [오직 공의를 물같이, 의를 힘찬 물줄기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5:24)란 말씀은 불법과 불의로 넘치던 북왕국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준 하나님의 도전이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외없이 이 말씀을 삶의 철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가 의를 행치 않고 불법을 행한다면 그 자체가 신성 모독입니다. 히브리서 1:9에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히1:9a)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주심은 모든 불법으로부터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사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자신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아모스서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1절입니다. [사마리아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너희는 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궁핍한 자를 짓밟으며 그들의 주인들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1). 아모스의 대언은 상당히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한 것 같으면서도 격합니다. 오늘날 교양있는 목사들의 입에서는 차마 나오지 못할 그런 말투입니다. 아모스는 청중들을 향하여 그들을 동물들이라고 “바산의 암소들아”라고 했는데, 바산이란 지역은 갈릴리 동북부 길르앗에 위치한 가장 비옥한 땅입니다. 바산이란 지명의 뜻이 ‘비옥한’이란 뜻입니다. 바산의 암소들아란 말을 요즘 우리 식 표현으로 하면 “이 배부른 돼지들아”란 말과 같습니다. 이는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도 아주 애용하시는 화법이었습니다(마23:33).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여, 어찌 너희가 지옥의 정죄를 피하겠느냐?](마23:33). 누가 성경을 읽다가 이 부분을 보면서 이 지역에는 뱀들이 많아서 주님이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여’라고 했나 보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개들이 많아서 “개들아, 개자식, 개새끼”등과 같은 욕이 많은데 이는 양식(良識)있고, 지성과 교양을 겸비한 사람들이 입에 담을 말이 아닌 듯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런 말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침례인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마3:7). [그러나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기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이르되, 오 독사들의 세대여, 누가 너희에게 경고하여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3:7). 사도 바울도 그러했습니다(딛1:12). [그들 가운데 한 사람 곧 그들의 대언자도 이르되, 크레테 사람들은 항상 거짓말쟁이요, 악한 짐승이요, 게으른 탐식가라, 하였으니](딛1:12). 베드로도 그랬습니다(벧후2:22). [그러나 참된 잠언(箴言)의 /말씀/과 같이, 개는 자기가 토한 것으로 되돌아가고 씻겨진 돼지는 진창 속에서 뒹군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2:22).

흔히 성도들이 오해하는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은 늘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절대 욕을 해서는 안 되고 부드러운 말과 멋진 말을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로마서 16:18을 보십시오. [이는 이 같은 자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 배만 섬기며 좋은 말과 빼어난 말솜씨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속이기 때문이니라.](롬16:18). 좋은 말, 빼어난 말솜씨로 사람을 속입니다. 투박하고, 거칠며, 직설적인 말로는 결코 사람을 속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합니다. 성경의 대화법은 직선적이고, 거칠고, 투박합니다. 특히 죄에 대한 책망은 결코 돌려서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이유 없이 사람들을 욕하거나, 험담을 해서는 안됩니다. 거친 말투와 감정적 흥분, 성숙되지 못한 인격, 모난 성질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책망은 분명해야 합니다. 아모스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궁핍한 자를 짓밟으면서 거기에 동조하며 술을 가져다 마시는 자들을 향해 분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짓밟는 자들을 향해 아모스는 격렬하게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보라, 날들이 너희에게 이르리니 그가 갈고리로 너희를 끌고 가며 낚시 바늘로 너희 후손들을 끌고 가리라.](2). 이 말씀은 죄에 대한 징벌, 심판을 예언한 것인데, 50년 후에 정확하게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앗시리아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다가 그들의 아랫입술과 코를 갈고리로 꿰었습니다(마5:18). 주님의 말씀은 단 한 자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죄인들에게 심판을 증거하는 대언자가 부드럽고, 점잖고, 예의 바르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3절입니다. [너희가 무너진 곳을 통하여 나아가되 모든 암소가 각각 자기 앞의 무너진 곳을 통하여 나아갈 것이요, 너희가 그들을 궁궐 속으로 던지리라. [주]가 말하노라.](3). 문과 길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곳을 통하여 나아갑니다. 이는 도망가는 것, 남의 눈을 피해가는 것을 말합니다. 앗시리아의 침략과 약탈로 인해 무너진 곳을 통해 빠져 나갑니다. 모든 암소란 자신들이 지닌 부와 재물의 축적을 말하는데, 이들을 숨겨 둘 장소를 찾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숨길 곳이 별로 없습니다. 숨겨 두어도 자신들이 포로로 사로 잡혀 가 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궁궐 속으로 던져도 궁궐이 불 타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불의와 불법으로 모은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달고 날아 가 버립니다.

4-5절입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고 길갈에서 범죄를 크게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물을, 삼 년 뒤에 너희 십일조를 가져오고 감사의 희생물을 누룩과 함께 드리며 자원하는 헌물을 /드리도록/ 공포하고 널리 알릴지니 이는, 오 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이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4-5). 이는 하나님을 냉소하는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주님께 희생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멋대로 희생물을 드렸습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예배 장소를 임의로 변경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일년에 세 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벧엘과 단에다 제단을 만들어 두고, 금송아지를 섬겼습니다(왕상12:30). 둘째, 그들은 제사장직을 더럽혔습니다. 레위 지파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는데, 이들은 천한 자들을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왕상12:31). [그가 또 산당들을 둘 집을 짓고 레위의 아들들이 아닌 자들 곧 백성 중에서 가장 천한 자들을 제사장으로 삼고](왕상12:31). 북 왕국에는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신학교만 졸업하면 누구나 목사가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여로보암이 이 일이 있은 뒤에도 자기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금 백성 중에서 가장 천한 자들을 산당들의 제사장들로 삼되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그를 거룩히 구분하여 산당들의 제사장들 가운데 하나로 삼았으므로](왕상13:33). 셋째, 예배의 형식과 내용을 자기들 마음대로 정했습니다. 아침마다 희생물을 가져오고, 삼 년 뒤에 십일조를 가져오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누룩과 함께 드리는 희생물이 문제입니다. 이들은 내기만 하면 되지 형식이 무엇이 중요하냐?는 식입니다. 실용주의, 합리성에 물든 현대인들의 가치관은 결과만 중시하고, 과정과 형식을 무시하는 경향이 매우 높습니다. 형식은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정해 주신 절차, 형식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의 시간, 예배의 형식은 실용, 합리주의적 사고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본질과 정신이 중요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건전한 말씀의 틀을 결코 배제할 수 없습니다. 가장 흔히 범해지는 잘못은 포도주로 포도즙을 대신하고, 떡으로 빵을 대신하는 등의 행위입니다. 귀찮다고 누룩이 들어있는 빵을 주의 만찬에 사용하는 행위 등은 사마리아의 정신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 점에서 매우 자유로운 사고 방식을 가졌던지라 마음대로 예배를 보았습니다.

[너는 삼 년이 끝날 때마다 그 해 소출의 십일조를 다 내어서 네 성문 안에 저축하여](신14:28). 십일조는 매 해마다 내는 것이 있고, [너는 해마다 밭에서 나는 네 씨의 소출에서 반드시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신14:22)- 삼년이 끝날 때마다 내는 것이 있습니다. 삼 년이 끝날 때마다 내는 것은 마치 군량미를 저축하듯이 성문 안에 저축하여 레위 지파와 성문 안에 거하는 소득이 없는 생활 보호 대상자, 극빈층(나그네, 고아, 과부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하는 구제 헌금과도 같은 것입니다. [너는 삼 년이 끝날 때마다 그 해 소출의 십일조를 다 내어서 네 성문 안에 저축하여 너와 함께 /나누는/ 몫이나 상속이 없는 레위 사람과 네 성문 안에 거하는 나그네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로 하여금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주] 네 하나님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서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8~29).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출의 십일조 드리기를 다 마친 뒤에 너는 그것을 레위 사람과 나그네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문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26:12). 이 부분에 대해서 지식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아모스 4:4이 삼년 뒤가 아니라 사흘 후가 아닐까하면서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많은 현대 역본들은 아예 “사흘 후에”라고 고쳐 버렸습니다. 성경의 오류를 고치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잘못을 고치려고 덤비는 사람이나 매 한 가지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것을 좋아하느니라](5).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좋아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말씀대로 하는 것보다 마음대로 하는 것을 좋아했고, 죄를 짓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 점은 남왕국 예루살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땅에서 놀랍고도 무서운 일이 이루어지고 있도다. 대언자들은 거짓되이 대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방법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하니 그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5:30-31)

이 시대에는 주님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현대인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사랑합니까? “쾌락, 돈, 자기”를 사랑합니다. 이는 사마리안들이나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훨씬 더한 것입니다.

①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쾌락을 사랑합니다. [타고난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멸시하며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딤후3:3~4).

② 모든 악의 뿌리인 돈을 사랑합니다. [이는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기 때문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잘못하고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딤전6:10).

③ 자기를 사랑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3:2).

④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킵니다. [이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선생들을 쌓아 두고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들을 따를 것임이라.](딤후4:3-4)

그래서 주님이 이 도시를 향해 취한 조치가 있습니다. 주님은 멸망에 앞서 징계를 보내셨습니다.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6절부터 계속 반복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런데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주]가 말하노라.](6,8,9,10,11). 회개하기를 기다렸으나 그들은 회개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주님이 보낸 경고는 첫째, 기근입니다. [내가 또한 너희의 모든 도시에서 너희 이를 깨끗하게 하며 너희 모든 처소에서 빵이 부족하게 하였느니라. 그런데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주]가 말하노라.](6).

둘째, 가뭄입니다. [또한 추수하기까지 아직 세 달이 남았을지라도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게 하여 어떤 도시에는 내리게 하고 다른 도시에는 내리지 아니하게 하였으므로 어떤 부분에는 비가 내리고 비가 내리지 아니한 부분은 마르매 두 세 도시가 떠돌아다니다가 한 도시에 이르러 물을 마시려 하였으되 만족하지 못하였느니라. 그런데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주]가 말하노라.](7-8).

셋째, 주님은 서리와 곰팡이 모충으로 치셨습니다. [내가 마름병과 곰팡이로 너희를 쳤으며 너희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올리브나무가 불어날 때에 송충이가 그것들을 삼키게 하였느니라. 그런데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주]가 말하노라.](9).

넷째, 주님은 군대를 보내셨습니다. 전쟁과 동반되는 것은 항상 전염병입니다. [내가 이집트에서 행한 대로 너희 가운데 역병을 보내었고 칼로 너희의 젊은이들을 죽였으며 너희의 말들을 빼앗아 갔고 너희 진영의 고약한 냄새로 하여금 너희 코를 찌르게 하였느니라. 그런데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주]가 말하노라.](10).

11절에서 도시가 파괴되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얼마를 무너뜨리기를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린 것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타는 데서 빼낸 나무 조각같이 되었느니라. 그런데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주]가 말하노라.](11).

하지만 그들은 주께로 돌아오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마지막 한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영적 부흥의 첫 번째 요건은 주님의 경고를 듣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기근, 가뭄, 서리와 곰팡이, 군대, 전쟁, 도시의 파괴는 모두 주님이 그들을 돌이키기 위해 내리신 징계의 손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께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탕자의 위대한 점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갔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믿음과 더불어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돌이킴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음으로 영적 부흥의 첩경입니다. 어느 시대나 영적 각성과 대 부흥은 회개의 물결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멸망은 회개의 기회를 차 버림으로써 찾아 왔습니다.

수많은 경고와 징계를 통해서도 이스라엘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와같이 네게 행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오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이와 같이 행하리라. 오 이스라엘아,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할 것인즉 /너는/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할지니라.](12).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할지니라”(12). 이 때가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경고하기 위해 많은 대언자를 보내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직접 만나시고자 하십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종들을 거부하고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부하고 피할 수는 없습니다.

만남의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이 만남은 구원을 위한 만남이 아니라 심판을 위한 만남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남을 준비하라는 것은 돌이키지 않는 백성들에 대한 엄중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대결입니다(13). [이는, 보라, 산들을 짓고 바람을 창조하며 자신의 생각이 어떠한지 사람에게 밝히 알리고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곳을 밟는 분 곧 그분의 이름이, [주] 만군의 하나님, 이기 때문이니라.](13). 범죄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심판입니다.

이 만남은 가장 중요한 만남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날 것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이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직장에 회사원은 사장님과의 만남이 있다고 하면 긴장합니다. 상을 받기 위한 장소라면 기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안절부절못합니다. 사장들은 국세청 직원과의 만남을 두려워합니다. 모범 납세자라면 상관없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색이 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런 만남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배할지니라”는 말씀은 만남의 즉각성과 위급성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더라도 만나야 합니다. 연기할 수도 없고, 취소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수십 년 후에 주님을 만날지 내일 아침일지 오늘 저녁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A. 죽음(히9:27, 왕하20:1).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태어난 날을 알지만 죽을 날은 모릅니다. 여러분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히스기야는 죽을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주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대언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 이르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집을 정리하라. 이는 네가 죽고 살지 못할 것임이라, 하셨나이다, 하니라.](왕하20:1). 만약 누가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면 여러분은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내가 /이/ 둘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이니 내가 원하는 바는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 그것이 훨씬 더 좋으나](빌1:23). 그는 죽음을 사모했습니다. 죽음 후에 있을 주님과의 만남이 완벽히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노니 우리가 확신에 차서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 그는 한 점 후회없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준비가 되었고”라고 합니다. 바울은 죽을 준비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내가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음이라.](딤후4:6).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은 제대로 된 삶을 산 사람이 아닙니다.

B. 휴거(그리스도인들). 주님이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 날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눈 깜짝할 순간에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만 두고 공중으로 들림 받아야 합니다. 그 날에는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무릇 영적 부흥이란 주님을 만날 준비로 영혼이 깨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언제라도 주님을 뵐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부흥했다는 것, 성도들의 부흥이란 자신을 위해 살던 사람이, 세상에서 정신없이 살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겠다는 의식으로 가득 차고, 그런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적 부흥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있으면서도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사람들, 재림에 대한 소망과 믿음을 가진 성도는 결코 자신의 삶을 파괴하거나 가정을 돌보지 않거나 광신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성경적인 재림 신앙은 성도들의 실제 생활에서 많은 유익을 끼칩니다.

첫째, 삶이 경건합니다. 재림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모든 부분 하나 하나까지 주님 앞에서 회계 보고해야 하고 그에 따른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더러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는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저 복된 소망 즉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음이라.](딛2:11-13).

둘째, 삶에 절제가 있습니다(빌4:5). 재림 신앙을 가진 사람은 절대 무절제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일 주님이 오신다 해도 오늘 집의 화단을 가꾸고, 떨어진 창문을 고칠 것이며, 학생들은 밀린 숙제를 해야 합니다. 절제란 하나님의 영에 의해 통제받는 삶을 말합니다.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 아닙니다. 절제는 술, 담배를 끊는 것만이 아닙니다. 내 속 마음과 생각과 애정과 열정이 성령께 복종함으로써 얻어지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성도들의 영적 지식은 믿음 위에 쌓아져야 하며, 절제를 통해 제어되어야 합니다. 200마일을 달릴 수 있는 자동차가 있습니다. 그 차가 200 마일의 속력을 내려면 아우토반과 같은 길이 있어야 합니다. local 도로에서 그 속도를 내면 거리는 혼란해지고, 교통은 마비되고, 여기 저기서 사고가 터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40-50마일로 달릴 수 있도록 control하는 브레이크가 있어야 합니다. 브레이크 없는 200 마일의 차를 보는 것보다야 brake 있는 100마일의 차가 안전하며, 차로서의 기능이 좋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덕 위에 세워지지 않는 성경 지식은 많은 형제들을 다치게 하고, 교회를 혼란으로 몰아 갑니다. 절제는 브레이크와 같습니다. 지식에는 반드시 성능 좋은 절제란 브레이크를 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성경, 진리의 지식, 재림에 대한 이 모든 것들은 절제를 통해 빛나게 됩니다. [너희의 절제를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셋째, 삶이 순결합니다(요일3:2-3). 재림 신앙을 가진 사람은 늘 말씀의 물로 자신을 씻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이 악한 현 세상에서 더럽고 추한 모든 것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에 우리는 매일 매일 말씀 앞으로 다가가 씻음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매일 씻는 사람은 약간 더러워도 그것에 매우 신경이 쓰이고 아주 예민해 집니다. 반면 바쁘다고 씻는 것을 하루 거르고, 귀찮다고 거르고 이런 저런 핑계로 자꾸 거르다보면 점점 더 무감각해 집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계신 그대로 볼 것임이라.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분께서 순결하신 것같이 자기를 순결하게 하느니라.](요일3:2-3).

넷째, 삶 가운데 인내가 있습니다(약5:7-9). 재림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일에 오래 참습니다. 마음이 조급한 것은 결코 성령의 역사가 아니며 건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농부처럼 때를 기다리며, 주님의 역사를 기다립니다. 기도를 한 후에 응답을 기다리는 것도 성도의 인내입니다. 주님은 금방 주실 수 있는 것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심으로 성도들을 연단하십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약속은 벌써 2,0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내로써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유난히 성격이 급합니다. 오래 참지 못합니다. 오래 참는 사람은 ‘느려 터졌다’, ‘답답해 미치겠다’, ‘게으르다’고 몰아 부치거나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인내가 없이 이룰 수 있는 주님의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하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받을 때까지 오랫동안 인내하느니라. 너희도 인내하고 마음을 굳건히 하라. {주}의 오심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불평하지 말지니 그리하여야 정죄를 받지 아니하리라. 보라,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시느니라.](약5:7-9).

다섯째, 성도들 간에 참된 위로가 있습니다(살전4:18, 5:10,11). 재림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마음 가운데 늘 위로가 있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은 우리의 기쁨이요, 힘입니다. 오늘날 소위 종말론을 외치는 설교자들, 교파들을 보십시오. 사람들을 겁주거나 위협하고,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끊임없이 긴장감을 심어주어서 재물을 바치게 하고, 금욕 생활을 강요하고, 가정을 파괴합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기뻐하지 않을 장소에서 죄를 짓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언제라도 주님을 맞을 생각을 하는 사람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다른 형제들을 무시하거나 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곧 오신다는 믿음은 이 세상에 우리 마음을 두지 않도록 만드는 동시에 저 하늘에 소망을 가지게 하며, 주님 오실 때 신실한 종으로 발견되려는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8).

III. 이 만남을 회피할 수 있는가? 이 만남을 회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A.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백 보좌 심판석에서 만납니다(계20:11-15).

B.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만납니다(고후5:10).

IV. 만남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A. 준비해야 합니다.

1. 학교에서는 시험을 준비합니다. 졸업을 준비합니다. 취직을 준비합니다.

2. 마지막 시험을 준비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인생의 마지막 시험이 항상 다가오고 있습니다. 시험 날짜를 모르는 시험입니다. 늘 준비해야 합니다.

3. 중요한 행사를 준비합니다. 또 불의의 사고를 준비합니다.(보험)

4. 군사를 준비합니다. 이는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눅14:31).

5. 결혼을 준비합니다. 결혼하면 출산을 준비합니다.

6. 노후를 준비합니다. (연금, 저축)

B. 영원을 위해서 여러분이 준비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는 사소한 것까지 다 준비하지만 영적으로는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늘에 갈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C.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1. 구원받지 않았다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a. 교회 출석한다고 여러분이 다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b.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준비가 갖추어 진 것도 아닙니다.

2. 구원받았다면?

a. 어둠의 일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옛 사람을 벗으셔야 됩니다.-[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

b. 성령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엡5:21-24).

c. 영원에 투자하십시오. 하늘에 보화를 쌓아 두십시오. [오직 너희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 먹지도 녹이 슬지도 않으며 도둑이 들지도 훔치지도 못하나니](마6:20). 이 땅에서 여러분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아끼는 것들이 하나님을 만날 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일 수 있습니다.

d. 다른 사람들의 혼을 이겨 와서 “기쁨의 면류관”을 얻으십시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환희의 왕관이 무엇이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 있을 너희가 아니냐?](살전2:19)

결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영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떠나지 마십시오. 우리는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부흥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부흥을 위해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를 예비해야 합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