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시편23-139편
오늘은 시편 123편부터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죄의 종이면서 그걸 모르고 살아갑니다. 모두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육신의 종이면서 육신의 주인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생활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맞습니까? 바울 사도는 자신을 소개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바울은’(롬1:1) 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정말 종된 삶을 살았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오 하늘들에 거하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보소서,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같이 우리 눈이 [주] 우리 하나님을 바라되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까지 기다리나이다.](1,2). 지금 시편 기자는 하늘들에 거하는 주님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당시에 모든 민족들의 신이 땅과만 연관을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니엘, 느헤미야, 에스라와 같이 유대인들의 포로기에 자신들의 땅이 없을 때, ‘하늘들의 주(하나님)’을 유난히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곧 땅위에 보좌를 놓고 이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2:4, 9:11, 11:4, 80:1, 99:1, 113:5, 132:14). 그렇다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며, 왕이신 하나님에게 우리는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가? 우리가 하늘의 주라고 부르는 하나님께 우리는 마땅히 시편 기자처럼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같이” 우리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권위가 사라진 평등 사회에 살다 보니 이런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예전에 종들은 주인의 간단한 손짓만 보고도 즉각적으로 주인이 원하는 모든 행동을 알아서 수행할 정도로 눈치가 빠르고, 주인의 뜻을 헤아렸습니다. 주인의 기침 한 마디에도 얼른 달려가서 물을 갖고 오던지, 아니면 필요를 대령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이런 섬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종이 자발적으로 섬기지 않는다면 돌아올 것은 채찍과 막대기 밖에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시편 32:8,9절에 [내가 너를 훈계하며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가르치고 내 눈으로 너를 지도하리로다. 너희는 지각이 없는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들이 네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면 그들은) 반드시 재갈과 굴레로 입이 붙들려야 하나니]1)(시32:8,9). 자발적인 순종, 인격적인 순복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은 지각이 없는 말이나 노새와 같은 삶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1
시편 136편입니다. 1절 말씀, [오 [주]께 감사하라. 그분은 선하시며 그분의 긍휼이 영원함이로다.](1). 긍휼이란 말이 가장 많이 나오는 시편입니다. 긍휼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말은 무려 26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로 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 건강, 지혜, 능력,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가장 중요한 것들을 구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 제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의 은혜와 긍휼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장 열렬히 구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다름아닌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은혜는 우리를 가르칩니다. 디도서 2:11, 12 [이는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딛2:11-12). 여러분에게 주의 은혜, 말씀의 은혜가 넘친다면 여러분은 지금처럼 살지 않을 것입니다. 좀 더 헌신적이고, 좀 더 구령하고, 좀 더 주님께 자신을 드리고자 애쓸 것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은혜의 자연스런 표출이 바로 헌신과 구령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다스립니다. 로마서 5:21, [이것은 죄가 군림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것같이 은혜도 의를 통해 군림하여(reign)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5:21). 사도 바울이 서신서 맨 마지막에 항상 “은혜”란 말로 끝맺음을 했던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의 마지막이 은혜로 끝을 맺습니다. 시편 기자는 지금 긍휼을 외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같이 주의 긍휼을 간절히 구했고, 긍휼을 찬양하고 감사했습니다. 아곱을 보십시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보여 주신 모든 긍휼과 모든 진리 중 가장 작은 것도 감당할 수 없사오니 이는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르단 /강/을 건넜으나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음이니이다.](창32:10). 모세 역시 그렇습니다. [주께서 구속(救贖)하신 백성을 주의 긍휼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인도하사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셨나이다.](출15:13). 주님의 크신 긍휼을 불평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요나였습니다. 실상 요나 자신이 가장 큰 긍휼을 입은 자란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주]께 기도하며 이르되, 오 [주]여, 간구하오니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리라 말씀드리지 아니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먼저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이는 주께서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4:2).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베푸신 주님의 크신 긍휼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 베풀기를 즐겨야 할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헐뜯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의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실상 주의 은혜가 가장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모든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엡2:4-영어를 참조하라). 하나님은 긍휼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분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긍휼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고후1:3). 사실 우리가 사역을 하는 것도 긍휼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주님의 긍휼로 인해 우리는 심판받지 않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39편입니다. 이 시편은 주님의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심에 대해 가장 잘 묘사한 시입니다. [오 [주]여, 주께서 나를 살피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1). 나를 알아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한 분 주님은 나를 아십니다. 나도 나를 잘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이해하시오며 나의 길과 나의 눕는 것을 둘러싸시므로 나의 모든 길을 익히 아시오니 이는, 오 [주]여, 보소서, 내 혀의 말 중에 주께서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니이다.](2-4). 주님은 두려우리만큼 우리를 속속히 알고 계십니다. 7,8절은 무소부재하신 주님의 능력을 말해 줍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리이까? 내가 주의 눈앞을 떠나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오며 지옥에 내 침상을 펼지라도, 보소서, 주께서 거기 계시나이다.](7,8). 이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놀라운 지혜로 말미암아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13-16절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 8-12절은 나를 보호해 주심에 대해서, 17-18절은 나를 생각해 주심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 지금까지 헌신의 시편을 보았습니다. 이제 참회의 시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시편 6, 32, 38, 51, 102, 130, 143편이 바로 참회의 시편입니다. 참회의 시편 일곱 편 중 다섯 편을 다윗이 기록했는데, 그것은 6, 32, 38, 51, 143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대표적인 참회의 시인 32편과 51편을 함께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두 시편은 같은 사건을 두고 주님께 고백하고 회개한 시편으로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간음과 살인죄(삼하11장)를 고백할 때의 심정을 묘사한 것임에 반하여, 32편은 그러한 고백을 하기전, 아직도 무서운 죄의 짐이 그를 무겁게 억누르고 있을 때의 느낌을 묘사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4:7, 8)에서 성경의 중요한 교리중 하나인 "전가"(轉嫁)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 시편의 첫 두 절을 인용했습니다. "전가"란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을 다른 사람에게 더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성경에는 세 가지의 중요한 전가가 있습니다. 첫째, 아담의 죄의 본성이 인류에게 전가하는 것입니다(롬 3:23/5:12) 둘째,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사53:5,6 히2:9, 고후5:14-21, 벧전 2:24). 셋째,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죄인들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빌3:9, 약 2:23, 롬 4:6-24).
32편1,2절을 보십시오. [자기 범죄를 용서받고 자기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영(靈) 안에 간사함이 없고 [주]께서 불법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1,2). 이 두 구절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4:7-8에서 인용한 유명한 구절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을 한 후에 약 1년간을 숨기고 지냈습니다. 잠언 28:13, [자기 죄들을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누구든지 죄들을 시인하고 버리는 자는 긍휼을 얻으리라.](잠28:13). 다윗은 자신의 죄를 숨긴 동안의 받은 고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3,4절, [내가 잠잠할 때에 하루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나이다. 이는 밤낮으로 주의 손이 나를 무겁게 누르므로 내 진액이 여름 가뭄에 /마른 것같이/ 되었음이니이다. 셀라.](3-4). 우리는 여기서 많은 질병들이 죄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병이 다 죄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지만 성도들에게 고백하지 않는 죄는 영혼과 몸에 병을 가져다줍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리라 마음 먹었습니다. 나단이 죄를 지적했을 때, 그는 즉시 죄를 회개하고 잘못을 시인했습니다. 다윗은 구약의 율법 아래 살면서도 율법대로 정죄를 받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범죄들을 [주]께 고백하리이다, 하고 주께 내 죄를 시인하며 내 불법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의 불법을 용서하셨나이다. 셀라.](5). 이는 마치 신약 성도들의 회개 방식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율법에서 간음과 살인은 속죄 제물이 없습니다. 무조건 사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주님께 고백하였고, 숨기지 않았을 때, 주님은 불법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는 다윗이 받은 긍휼이 확실한 긍휼 때문입니다. 이사야 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 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바 확실한 긍휼이니라.](사55:3). 구약의 다른 어떤 죄인들도 다윗과 같은 긍휼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 긍휼은 후에 우리에게 주실 긍휼과 동일합니다. 사도행전 13:34, [또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사 이제 다시 썩음으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게 하실 것에 관하여는 이같이 이르시되, 내가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긍휼을 너희에게 베풀리라, 하셨느니라.](행13:34). 우리는 오늘날 누구라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 앞에 고백하면 주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또 우리는 우리 죄를 다윗처럼 스스로 판단하여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주님으로부터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1:31-32,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판단하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으면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함께 정죄를 받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1,32). 물론 우리가 눈물을 흘렸거나 기도했다는 우리의 행위가 죄의 용서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피를 흘리셨고, 죄의 값을 치루셨기 때문에 그 기반 위에 자백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백과 회개가 없는 신앙 생활은 마귀의 올무에 메인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다윗의 탄식은 찬양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수 있을 때에 주께 기도할지니 참으로 큰 물들의 홍수 속에서도 물들이 그에게 닥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시오니 고난에서 나를 보존하시고 구원의 노래들로 나를 에워싸시리이다. 셀라.](6-7). 여기서 ‘주를 만날 수 있을 때에’란 말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입니다. 바로 지금이 주를 만날 수 있을 때입니다. 다윗은 죄를 회개하는 순간을 주님을 만날 수 있을 때라고 말합니다. 특히 기도의 순간은 주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 너희는 만날 만한 때에 [주]를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부르라.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이는 그분께서 넘치도록 용서하실 것임이라.](사55:6-7).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은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과거의 죄는 용서받았고, 현재는 기쁨이 넘치고, 미래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회개할 때 죄인은 의인이 되고, 사악한 자가 주를 신뢰하는 자가 됩니다.
시편 51편입니다. 다윗은 모든 범죄한 성도들이 자기의 죄를 자유롭게 고백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위대한 고백의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고백과 회개의 눈물을 받으시지만 우리의 변명은 받지 않으십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누구 탓으로 돌리지 않았습니다. 4절에서 그는 "내가 주께만 오직 주께만 범죄하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실제적인 의미에서 이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다윗은 그 자신, 우리아, 밧세바, 그리고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지은 그의 죄가 너무나 심각하고 엄청난 것이었기에 다른 죄는 그것에 가려지고 만 것입니다. 사람이 행하는 모든 죄는 일차적으로 주님께 범죄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죄를 짓는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입니다. 5절을 통해 우리는 모태 죄인은 있어도 모태 신앙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들은 다 성악설(性惡說)이 성경적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사람을 선하게 지으셨습니다. 전도서 7:29, [보라, 내가 발견한 것은 오직 이것뿐이니 곧 하나님은 사람을 곧바르게 만드셨으되 사람들이 많은 창안물(創案物)1)을 낸 것이로다.](전7:29). 욥기 15:14에, [사람이 무엇이기에 깨끗하겠느냐?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가 무엇이기에 의롭겠느냐?](욥15:14)라고 말합니다. 범죄한 아담 안에서는 누구도 깨끗함을 입을 수 없습니다. 욥이 잘 말했습니다. [누가 정결한 것을 부정한 것 가운데서 가져올 수 있나이까? 아무도 없나이다.](욥14:4).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시 ‘성선설’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면 그 사람은 죄와 무관하며, 죄를 지을 수도 없는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우리의 속 사람은 죄와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7절에서 다윗은 우슬초로 정결케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때 다윗의 마음은 약 5세기 전 이스라엘 민족의 첫 유월절 밤으로 거슬러 올라갔던 것 같습니다. 분명히 그는 출애굽기를 통해 이에 대한 기록을 여러 번 읽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12:21-23, [¶ 이에 모세가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에 따라 어린양을 택하여 그 유월절 어린양을 죽이고 우슬초 한 묶음을 가져다가 대야에 담은 피에 적셔서 대야에 있는 피와 함께 문의 인방(引枋)과 양 옆 기둥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지니 이는 [주]께서 두루 지나가시며 이집트 사람들을 치실 때에 문의 인방과 양 옆 기둥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어가시고 파멸시키는 자로 하여금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출12:21-23). 하나님은 다윗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후에 다윗의 위대한 후손(예수 그리스도)이 세계 도처에 있는 모든 믿는 자를 위하여 이러한 사역을 행하실 것을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또 다윗과 같은 범죄를 행한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와 회복의 길이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육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배워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용서하시며, 돌이키실 수 있는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역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하게 하신 후에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b). 다윗은 자신의 죄가 눈보다 더 희게 되기를 소원했고, 주님은 그대로 해 주셨습니다. 다윗이 죽은지 300년 후 이사야를 통해, [[주]께서 이르시되, 이제 오라. 우리가 함께 변론(辯論)하자. 너희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어지리라/.](사 1:18)고 말씀하실 때 바로 다윗의 기도를 그대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11절에서 다윗은 오늘날의 성도들이 요구할 필요도 없고 또 요구해서도 안 되는 기도를 합니다. 인간이 지은 죄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을 잃어버릴까 스스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약에서 성령은 특별히 사역을 위임받은 대언자, 제사장, 왕위에만 부어졌습니다. 성령은 떠날 수 있었습니다. 사울에게 임한 성령은 떠났습니다. 삼손에게 임한 성령은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윗은 성령이 떠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신약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요14:16). 성령은 우리 안에 영원히 내주하십니다. 이 점에서 우리의 몸은 성전입니다. 12-13절은 현재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될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온 교인들은 이러한 기도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게 조금 책망할 것이 있나니 이는 네가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음이라.](계 2:4). 첫 사랑이 회복될 때 13절이 자연스럽게 따라 옵니다. [그리하시면 내가 범죄자들에게 주의 길들을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로 회심하리이다.](13). 은혜를 회복한 결과, 첫사랑의 회복은 구령과 복음전파로 드러납니다. 죄를 자복하는 이 시편은 많은 값진 진리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진리는 16, 17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즉, 간음죄와 살인 죄에 대한 희생 제물은 구약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죄를 지은 자는 다만 끌려나와 돌로 죽임을 당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레 20:10). 다윗은 레위기에서 말하는 제사를 드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맡긴 것입니다.
◆ 저주의 시편을 살펴 보겠습니다. 시편 35, 55, 58, 59, 69, 83, 109, 137, 140편이 저주의 시편으로 분류됩니다. 저주의 시편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내려지기를 비는 기도의 시입니다. 이 시편에 나타난 저주의 사실들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하나님께서 적들을 싸워 주시기를(시 35:1).
(2)하나님께서 적들과 혼란에 빠뜨리시기를(시 35:4).
(3)하나님께서 적들을 바람 앞에 겨와 같이 흩으시기를(시 35:5).
(4)하나님께서 사자(使者)로 하여금 적들을 추격케 하여 몰아내어 주실 것을(시 35:5).
(5)하나님께서 적들의 길을 어둡게 하고 미끄럽게 하시기를(시 35:6).
(6)사망이 저들을 사로잡기를(시 55:15).
(7)사망이 저들을 음부에 끌고내려가기를(시 55:15).
(8)저들의 이를 꺾으시기를(시 58:6).
(9)저들의 방어가 허물어지게 하시기를(시 58:7). (10)저들로부터 모든 자비를 거두시기를(시 59:5).
(11)진노하심으로 저들을 소멸하시기를(시 59:13).
(12)저들에게 덫을 놓으시기를(시 69:22).
(13)저들의 눈을 어둡게 하시기를(시 69:23).
(14)저들의 허리가 떨리게 하시기를(시 69:23).
(15)저들의 거처가 황폐하여지게 하시기를(시 69:25).
(16)저들을 생명책에서 도말하시기를(시 69:28).
(17)저들을 땅의 거름과 같이 되게 하시기를(시 83:10).
(18)저들을 핍박하시기를(시 83:14).
(19)저들을 사단에게 넘겨주기를(시 109:6).
(20)저들의 년수를 단축시키시기를(시 109:8).
(21)저들의 자녀가 거지가 되게 하시기를(시 109:10).
(22)뜨거운 숯불이 저들에게 떨어지게 하시기를(시 140:10).
(23)깊은 웅덩이로 저들을 던지시기를(시 140:10).
-월밍턴의 구약 개론 중에서-
우리는 이 성경 구절들을 마태복음 5:44절에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앙심을 품고 너희를 대하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이 가르침은 산상수훈 뿐만 아니라 신약 교회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바울을 비롯한 서신서들에 이를 뒷받침하는 구절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20, [그러므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실 것을 줄지니 이는 그리함으로 네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을 것임이라.], 디모데후서 4:16, [내가 처음 답변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아무도 없었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것을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아니하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노라.] 이렇게 하는 것은 복을 상속받는 비결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설을 욕설로 갚지 말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축복하라. 이런 일을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줄 아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복을 상속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 그렇다면 저주의 시편과 너무 다르지 않는가?이상하게 생각이 들 것입니다.
저주의 시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시편 기자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한 것임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죄를 책망하시고, 죄인에 대해 정죄하시는 음성을 시편 기자가 대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율법의 직무가 바로 정죄요 심판이란 점에서 더욱더 확실합니다. 성경은 죄와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저주와 심판을 선포했습니다(레26, 신27, 28, 사 5:24,25, 28:13...). 저주의 시편 중 많은 시편은 전쟁을 앞두고 원수들을 심판해 달라는 시편입니다. 이스라엘이 치른 전쟁 중 많은 전쟁은 이교도들의 죄악을 심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저주의 시편 가운데 많은 시편은 예언적인 것입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무리들에게 임할 저주와 심판을 미리 기록한 것입니다. -Dr. Roy L. Aldrich의 "Notes for Lectures on the Psalms"에서 발췌했음.
시편 35편을 보십시오. 이 시편은 9편의 저주의 시 중에서 첫번째입니다(시35:1-8 참조).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다윗이 그를 잔혹하게 대했던 흉포한 적들을 위해서 처음에는 열심히 기도했다는 점입니다(시35:12-16). 여기에는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41:9, 55:12-14, 109:6-8절이 가룟 유다에 관한 예언입니다. 몇몇 저주의 기도를 살펴 보겠습니다.
· 시편 55:9 · 시편 58:6-9, · 시편 59:11-15, ·시편69:22-28, · 시편83:9-17, ·시편109:6-20, ·시편 137편입니다. 이 시편에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함락될 때 배신한 바 있는 에돔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여 주실 것을 기도했습니다(시137:7).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여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시137:8,9). 이 저주의 기도에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힘으로 보복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한 것이 아니란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이스라엘은 한번도 바빌론이나 에돔을 직접 보복하거나 원수갚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철저히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 교회의 성도들과 동일한 것입니다. 로마서 12:19,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된바, 원수갚는 일이 내게 속하였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느니라.](롬12:19). 바울 사도는 구약을 인용해서 이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저주의 시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에 저 하늘에서 이런 기도를 하는 무리들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히 원수를 갚아 주시도록 소원하고 있습니다.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오 거룩하고 진실하신 {주}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에 대한 원수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계6:10). 원수 갚는 하나님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원수갚는 일과 보복하는 일은 내게 속한 것이라. 그들의 발이 정한 때에 미끄러지리니 이는 그들의 재앙의 날이 가깝기 때문이라. 그들에게 닥칠 일들이 속히 일어나리니](신32:3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주의 시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을 얼마나 감사해야 할지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아직도 복음을 믿지않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살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복음의 원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빌3:18).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을 들고 원수된 것을 무너뜨리는 화해의 직분을 맡았습니다. 십자가의 피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는 피입니다. 성령은 하나되게 하는 띠입니다. 에베소서 2:13-16, [이제는 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는 그분께서 우리의 화평이시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둘을 하나로 만드사 우리 사이의 중간 벽을 허무시고 원수 되게 하는 것 곧 규례들에 수록된 명령들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없애셨으니 이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 화평을 이루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그 원수 되게 하는 것을 멸하사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3-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이 화해의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을 모두 은혜 아래로 옮기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원수가 없을 수 없고, 대적이 없을 수 없고, 반대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의 은혜를 입어야 할 대상입니다. 원수 갚는 일은 오직 주님께 맡겨 버리십시오. [오 [주] 하나님이여, 원수갚는 일이 주께 속하였나이다. 오 하나님이여, 원수갚는 일이 주께 속하였사오니 /친히/ 자신을 나타내소서.](시94:1). 형제들과 교리 문제로 다투고 싸울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은 혼을 이겨 올 때입니다. 지금은 영적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메시야 예언시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 오역이 되어 있어서 바로 잡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