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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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개론, 말씀: 시편37-75편

말씀: 시편 37-75편
요절: 시편 37:3-6


시편 37편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찾는가?에 대한 답이 나와 있습니다. 첫째, 초조해 하지 말고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초조함은 인내의 반대입니다. 초조함은 기도의 응답을 가로막습니다. 성경은 오래 참음과 인내의 기도를 가르칩니다. 1-2절, [너는 악을 행하는 자들로 인하여 초조해 하지 말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부러워하지 말라. 이는 그들이 곧 풀같이 베일 것이요, 푸른 채소같이 시들 것임이로다.](1-2). 둘째, 주를 신뢰하라. [[주]를 신뢰하고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땅에 거하고 참으로 /양식을/ 먹으리로다.](3). 셋째, 주를 기뻐하라. [너는 또 [주]를 기뻐하라. 그분께서 네 마음의 소원들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라.](4). 주를 기뻐하는 것은 성도의 힘입니다. [너희는 또한 근심하지 말지니 이는 주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기 때문이니라.](느8:10). 주를 기뻐할 때 우리 안에 주님은 마음의 소원을 주십니다. 주님을 믿고, 순종할 마음만 있다면 주님은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우리 안에 두시고, 그 소원을 계시해 주실 것입니다. [이는 너희 안에서 일하시며 자기가 참으로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빌2:13). 넷째, 네 길을 주님께 맡기라. 주님께서 이루십니다. [네 길을 [주]께 맡기고 또 그분을 신뢰하라. 그분께서 그것을 이루시고](5). 성도들은 주님께 맡기지 않음으로서 사서 고생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차에 태워 주었더니 짐을 계속 진 채 앉아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짐을 내려놓고 평안히 앉으세요’라고 했더니, ‘차 얻어 타는 것도 감사한데 짐까지 내려놓을 수 있나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주님을 믿고 기도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짐을 어깨에서 내려 놓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식을 모르고 여전히 힘든 것입니다. [네 짐을 [주]께 던져서 맡기라. 그분께서 항상 너를 붙드시고 의로운 자의 흔들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55:22). [네 일들을 [주]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생각하는 것들이 굳게 세워지리라.](잠16:3).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이는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기 때문이니라.](벧전5:7). 다섯째, 주안에서 안식하고 끈기있게 주님을 기다리라. [[주] 안에서 안식하고 끈기 있게 그분을 기다리라.](7). 씨를 뿌린 농부처럼 수확철이 될 때까지 끈기있게 기다려야 합니다. 이 시간 동안 초조해하거나, 안달할 필요가 없습니다(7,8). [사람이 [주]의 구원을 소망하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3:26).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이룰 수 있는지 자세하게 밝혀 두셨습니다. 이 방법을 잘 기억해 두시고 늘 생활 가운데 활용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빕니다. 문제는 언제나 우리의 머리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데, 주님께서 뜻을 계시해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데 주님께서 자신의 뜻을 왜 알려 주시겠습니까?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찾는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아는가?’ 질문하지만 그 전에 ‘나는 과연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믿고 순종할 분명한 의사가 있는가? 그런 마음이 준비되어 있는가?’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그분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알아야 하리라.](요7:17). “성경과 종이와 펜을 든 정직한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신속하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자기를 깊이 살피고,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명령들을 순종하고자 일어나십시오. 우리 자신을 다루는 이 투명하고도 직접적인 방법에는 아무 낭만적인 요소도 화려한 요소도 없으나 어쨌든 일을 해 냅니다. 이삭의 종들은 계곡에서 땅을 팔 때 영웅적인 모습을 갖추지 않았으나 우물을 만들었으며, 그것이 그들이 하려던 일이었습니다.”(A.W Tozer).

시편 40편입니다. 1-2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을 다루고 있습니다. 3-5절은 부활의 기쁨을 새 노래로 간증합니다. 6-7절은 신약에서도 자주 인용된 주님의 사역입니다. 사람들의 희생물이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 되었을 때, 주님은 자신의 몸을 의롭고, 거룩하고, 깨끗하며 완전한 희생물로 드림으로써 속죄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참고 [주]를 기다렸더니 그분께서 내게 귀를 기울이사 내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또 그분께서 무서운 구덩이와 진흙 수렁에서 나를 끌어올리시며 내 발을 반석에 두시고 나의 가는 /걸음/을 굳게 세우셨도다. 또 그분께서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드릴 찬양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이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주]를 신뢰하리로다.](1-3). 이것은 기독교와 타종교의 전적인 대비를 보여 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예화를 들어 보면, “여기 어떤 사람이 어둡고 더러운 웅덩이에 빠졌다고 합시다. 그리고 떨어질 때 그의 다리와 팔이 부러졌습니다. 곧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된 그의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웅덩이에서 울려 나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 공자가 그 곁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웅덩이를 내려다 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현명한 충고를 들려 주겠소. 만약 당신이 그 웅덩이에서 나오거든 다시는 그런 곳에 빠지지 않도록 길을 걸을 때 조심하시오.’-이것이 중국을 비롯한 우리 나라의 유교 철학입니다. 얼마 후 다른 사람이 그 곳을 지나가다가 이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행인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여, 고개만 돌리면 피안(彼岸)이요. 삶이나 죽음이나 매 한 가지요. 너무 삶에 집착하지 마시오." 하며 자기 길을 가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 철학입니다. 고통의 감옥에 갇힌 이 사람은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려 보았지만 그의 모든 희망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구원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한 명이 내려와 그의 상처를 쓰다듬고 그의 발끝을 하늘을 향하게 하여 반석에 두시고 마음 가운데 새 노래를 심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시편 40편 5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역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편 40:5, [오 [주] 내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바 놀라운 일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이 많으므로 차례대로 그것들을 들어가며 주께 아뢸 수 없나이다. 내가 그것들을 밝히 드러내어 말하고자 하여도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라면 마땅히 이런 간증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이 바로 주님의 뜻이요, 그분의 선한 계획이며,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시편 92:5절, [오 [주]여, 주께서 행하신 일들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들은 매우 깊으시니이다.], 시편 139:17,18절, [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들이 또한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그것들을 합친 것이 어찌 그리 큰지요! 내가 그것들을 세려할진대 그 수가 모래보다 많나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얘레미야서 29:11절, [이는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알기 때문이라. 그것은 평안을 주려는 생각이요, 재앙을 주려는 생각이 아니니 곧 기대하던 결말을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라. [주]가 말하노라.]

시편 42편입니다. 이 시는 시편 기자가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자문자답(自問自答) 형태의 시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이 구절은 세 번에 걸쳐 동일한 자구로 되어 있습니다. [오 내 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심하느냐?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이는 그분의 얼굴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내가 여전히 그분을 찬양할 것임이로다.](시 42:5/42:11/43:5 참조). 자문자답(自問自答)은 자신의 영혼에 대한 자기 확신을 갖기에 매우 좋은 습관입니다. 때때로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타이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도 하는 것은 영적 건강에 큰 도움이 됩니다. 낙심은 마귀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어주는 바이러스 같은 것입니다. 낙심하면 기도가 막힙니다. 주님은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 18:1,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 주시려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눅18:1).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도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지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4:16)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심는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잘 행하다가 지치지 말지니 이는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면 정하신 때에 거둘 것임이라.](갈6:9). 고난은 후에 영광으로 거둘 것이요, 고난의 가벼움보다 영광의 중(重)한 것이 훨씬 클 것이기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노니 너희를 위하여 당하는 나의 환난들에 대해 낙심하지 말라. 이것은 너희의 영광이니라.](엡3:13). 그래도 내 혼이 낙심된다면 주님을 깊이 생각하시면 됩니다. [/너희는/ 죄인들이 자기를 대적하여 이같이 거역한 것을 견디어 내신 분을 깊이 생각할지니 이것은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히12:3). 우리가 받는 고난이 징계라면 더욱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녀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녀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하시는 권면의 말씀을 너희가 잊었도다. 이르시되, 내 아들아, 너는 {주}의 징계를 멸시하지 말며 그분께 책망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12:5). 낙심하지 않을 때 주님의 칭찬과 상급이 있습니다. [또 네가 참고 인내하며 내 이름을 위하여 수고하고 낙심하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2:3). 여러분은 왜 낙심하십니까? 기도 응답이 되지 않아서입니까? 환난 때문입니까? 주님의 징계와 책망 때문이십니까? 열매가 없어 낙심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에 이미 모든 대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시편 46편입니다. 이 시편은 마지막 대환난 때에 적그리스도를 피하여 페트라(Petra)에 숨었다가 살아 남은, 공포에 질린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이 좋아하는 시편이 될 것입니다(사 26:19, 20/ 계 6:12-14 참조, 특히 유의할 성구는 마 24:15, 16/계 12:14).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고난 중에 즉시 도우시는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움직이든지 산들이 이동하여 바다 한가운데 빠지든지 바다의 물들이 큰 소리를 내며 뛰놀든지 그것들이 넘쳐서 산들이 흔들리든지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1-3). 이 약속의 말씀대로 대환란 때 유대인들은 극도의 위험가운데서도 안전하게 피신하여 살아 남을 것이며, 약속대로 메시야 왕국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이교도들이 격노하며 왕국들이 흔들렸으며 그분께서 자신의 음성을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만군의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너희는/ 와서 [주]께서 행하신 일들을 볼지어다. 그분께서 땅에 황무지를 만드셨도다. 그분께서 땅 끝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그치게 하시나니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병거를 불태우시는도다.](시 46:6-9).

시편 50편입니다. 흔히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영혼보다 피의 속죄 제물에 더 관심이 많다고 비판하는 종교 학자들이 있습니다. 아삽은 이 시를 통해 하나님은 제물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에 더 관심을 두시고 계심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있습니다. 헌신하는 마음을 불사르는 것이 하나님께 피흘리는 짐승보다 훨씬 더 값진 것입니다. [나의 성도들을 내게로 모을지니 곧 희생물로 나와 언약을 맺은 자들이라, 하시는도다.](시 50:5). [이는 숲의 짐승과 천 개의 작은 산 위의 가축이 다 내 것이기 때문이며 산의 모든 날짐승도 내가 아는 것이고 들의 들짐승도 내 것이기 때문이로다. 가령 내가 주린다 할지라도 네게 말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세상과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이기 때문이로다. 내가 황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고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0-15).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놋제단(번제단)이 아니고 심중에 있는 마음의 제단입니다. 모세는 약 4세기 전에 이와 같은 값지고 위대한 원리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킨 바 있습니다. [¶ 이제 이스라엘아,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오직 [주]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분의 모든 길 안에서 걷고 그분을 사랑하며 또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섬기고 내가 이 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령하는 [주]의 명령과 그분의 법규를 지키는 것이 아니냐?](신10:12-13).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가진 소유가 아니라 우리의 가진 마음입니다. 시편 56편입니다. 8절입니다. [내가 떠도는 것을 주께서 세시오니 내 눈물들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그 눈물들이 주의 책에 있지 아니하나이까?](시56:8). 성경에서 눈물을 흘렸던 예를 추적해 보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쉬임 없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아담이 타락했을 때 네 이마에서 땀을 흘려야 땅에서 난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후로 사람은 땀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성경에서 처음 울었던 사람은 아브라함의 첩 하갈이었지만 신자 가운데 처음 눈물을 흘린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헤브론의 어느 한 쓸쓸하고 삭막한 막벨라 굴에다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장사지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창23:2). 이 눈물 방울에 요셉을 위한 야곱의 눈물이 더해지고(창 37:35), 미리암을 위한 모세의 눈물이(민 12:13), 아들을 위한 한나의 눈물이(삼상 1:10), 사울을 위한 사무엘의 눈물이(삼상 15:11, 35), 압살롬을 위한 다윗의 눈물(삼하 18:33)이 계속 더해져서 마침내 하나의 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때쯤 이 눈물의 강은 급류가 되어 흐르기 시작했지만 그 눈물의 강은 여전히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을 위하여 울었고(왕하 20:2, 3), 에스더는 민족을 위하여 왕 앞에서 울며 눈물로 간청했습니다(에스더4:16).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위하여(느 1:4) 울었습니다. 대언자 예레미야는 동족을 위해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던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2:11, [내 눈이 눈물로 약해지며 내 애가 타고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내 백성의 딸이 멸망하여 아이들과 젖먹이들이 도시의 거리들에서 기절하기 때문이로다.](애2:11). 신약에서도 이 눈물의 급류는 점점 더 거세어져 갑니다. 한 아버지가 그의 어린 딸을 위하 여(막 5:39), 그리고 두 자매가 죽은 오빠를 위하여 울었다(요 11장). 이제 이 급류는 가장 보배로운 우리 구주의 눈물까지 보태어 걷잡을 수 없는 강물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위하여 우셨고(요 11:35),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다(눅 19:41). 베드로는 자신으로 인해 울었고, 바울은 교회를 위해 울었습니다. 바울 서신은 눈물로 쓴 눈물의 편지들입니다. 고린도후서 2:4, [내가 마음이 몹시 괴롭고 아파서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근심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에게 더욱 넘치게 사랑을 베푸는 것을 너희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함이라.] 눈물로 쓴 글을 읽을 때, 우리의 눈에 역시 눈물이 흘러야 정상입니다. 이 땅에서 눈물이 적으면 적을수록 저 하늘에서 더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할지 모릅니다. 다윗이 말한 눈물의 병은 저 하늘에서 가득 채워지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왜 이 땅에서 주를 위해 넘치도록 수고할 그렇게 많은 기회를 육신을 위해 헛되이 낭비해 버렸는지 후회하는 통한의 눈물입니다. 요한계시록 7:17, [이는 왕좌 한가운데 계시는 어린 양께서 그들을 먹이시며 생명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임이라, 하더라.](계7:17). 지상에서 눈물로써 주를 섬기고, 눈물로써 씨를 뿌려 보지 않았고, 눈물로 기도해 보지 않았고, 눈물로 살아 보지 않았기에 흘리게 될 회한의 눈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눈물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천년 왕국이 끝난 후 다시 한번 우리의 눈에는 눈물이 쏟아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4,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음이라.](계21:4). 죽은 자들이 모두 일어나 심판을 받아, 영원한 불 못으로 던져지는 것을 지켜보는 성도들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질 것입니다. 나의 친지, 나의 친구들, 내가 복음을 전해 능히 구원할 수 있었던 많은 혼들이 지옥을 향해 가면서 나를 바라보는 그 순간에 우리의 눈에서 흐를 눈물이 강을 이룰 것입니다.

시편 63편입니다. 이 시편에서 우리는 다윗이 하루에 여러 번 기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절 말씀,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그리하오리니](시 63:6). 다윗은 고요한 밤중에 그의 목자를 찾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낮에 일을 하는 성도들에게 새벽과 밤은 주님을 묵상하기에 그지없이 좋은 시간입니다. 밤중에 하나님을 찾으며 조용히 묵상하며 기도한 다윗의 예를 몇 구절 살펴보겠습니다.

· [... 잠자리에 누워 너희 마음과 이야기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시4:4).

· [...주께서 밤에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살피셨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작정하고 내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시 17:3).

·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시 22:2).

· [그러할지라도 [주]께서 낮에는 자신의 인자하심을 명령하시며 밤에는 그분의 노래가 내게 있으므로 내가 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시 42:8).

· [밤에 /부른/ 나의 노래를 기억하고 내 마음과 이야기하며 내 영이 부지런히 살펴 /이르기를/,](시 77:6).

· [아침에는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고 밤마다 주의 신실하심을 알림이 /좋사오니/](시 92:2).

· [오 [주]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시 119:55).

· [성도들은 영광 중에 기뻐하며 자기 침상에서 큰 소리로 노래할지어다.](시 149:5).

시편 66편입니다. [내가 마음 속으로 불법을 중히 여기면 {주}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이 구절은 기도의 절대 원리이며, 성경 전반에 걸쳐 언급되어 있고 성도나 죄인에게 다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고백한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내지만, 우리의 변명은 절대로 덮어주지 않습니다(잠 15:29/28:9/사1:15/59:1,2/요9:31/약4:3 참조).

시편 69편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러할지라도 나로 말하건대, 오 [주]여, /주께서/ 받아 주시는 때에 /내가/ 나의 기도를 주께 드리오니, 오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의 진리 안에서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 말을 들으소서.](13). 주께서 받아 주시는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오늘, 바로 지금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점은 언제나 오늘이라는 현재 시제입니다. 죄인이 오늘 그의 상한 심정을 그리스도께 맡기기를 바라십니다. [(이는 그분께서 이르시되, 받을 만한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하셨음이니, 보라, 지금이 받아 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주께서 받아 주시는 때를 찾기 위해 길일(吉日)을 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예전의 어떤 때를 회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로 지금이 주께서 받아 주시는 때입니다. 주님은 성도가 그의 몸을 오늘 그리스도께 바치기를 원하십니다(롬 6:19/12:1-3/히 3:7, 13, 15). 헌신 역시 구원과 마찬가지로 지금이 바로 가장 적기입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관례(慣例)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함과 불법에게 종으로 내어 주어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어 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6:19). 앞으로 몇 년 후에, 직장에서 은퇴한 후에 주님을 위해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며, 그 때 전적으로 헌신하겠다고 결심하지 말고 지금 바로 오늘 주님께 자신의 몸을 드리는 헌신의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서두르는 명백한 이유는 잠언 27:1절, 야고보서 4:13-15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는 내일을 자랑하지 말라. 이는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잠27:1). [자, 이제 너희가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한 해 동안 머물며 사고 팔고 하여 이득을 얻으리라, 하나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수증기니라. 이런 까닭에 너희가 마땅히 말하기를, {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요,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4:13-15).

시편 71편입니다. 이 시편은 "노인의 시"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신자에게 주어진 가장 크고도 "특별한 축복" 중의 하나는 노년기에 그리스도를 닮는 영광스러운 목표에 더욱 가깝게 가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겉 사람은 썩어가지만 속 사람은 그만큼 더 주님을 닮아 가는 것이 바로 성도의 특권입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젊음과 두뇌와 체력 그리고 외모가 절대적 요소인 분야, 곧 늙어서 이 모든 것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잔혹하고도 무자비하게 배척당하는 스포츠계나 다른 직업에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존경받을 수 있고, 더 성숙하고,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도들의 일상입니다. 5절, 9절, 17절, 18을 차례대로 한 줄로 쭉 읽어보십시오. [이는 주께서 나의 소망이시기 때문이니이다. 오 {주} [하나님]이여, 주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니이다.](5). [/내가/ 늙을 때에 나를 내던지지 마시오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버리지 마소서.](9). [오 하나님이여, 나의 어린 시절부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지금까지 내가 주의 놀라운 일들을 밝히 드러내었나이다. 이제 또한 내가 늙어 백발이 되었사오니, 오 하나님이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내가 주의 능력을 이 세대에 보이고 주의 권능을 앞으로 올 모든 사람에게 보이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 71:17,18).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때도 믿음을 지닌 노인들, 믿음의 장로들이 살아 있을 때 왕조는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의 선배들이 없을 때 급격한 배교로 치달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백발의 노인을 버리시는 주인이 아니십니다. 이사야 46:4에 이르기를,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이며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업으리라. 내가 만들었은즉 내가 안을 것이요, 내가 너희를 업고 건져 내리라.](사46:4).

시편 73편입니다. 아삽은 여기서 오랫동안 수없이 신자들을 괴롭혀 온 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그것은 왜 악한 자가 흥하고 의로운 자가 고통을 당하느냐는 질문입니다. 1-16절까지는 모순에 찬 현실, 악인의 형통함과 의인이 받는 고통 가운데 고뇌하는 아삽의 진솔한 모습입니다. 나사로는 몰인정하고 분별없는 한 백만장자의 문전에서 누더기 옷을 걸치고 굶주린 상태에서 헌데를 앓으며 앉아 이러한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사무엘도 오만한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기름부은 다윗을 바라보며 이러한 생각으로 고통 당하였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모순에 찬 고뇌를 어떻게 해결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7). 아삽은 이 문제를 하나님이 임재하신 성소로 들고 나왔습니다. 그는 주님께 이 문제를 물었고, 주님으로부터 답을 얻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들이 가야할 종말에 대한 조명을 받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권선징악이 없어 보이고, 악인에 대한 심판과 징계가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석에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만의 삶이 전부인 줄 안다면 그것은 크게 오산(誤算)하고 있는 것입니다. 24-25절은 정말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주께서 주의 권고로 나를 인도하시고 나중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외에 내가 사모할 자가 아무도 없나이다.](24-25). 이 고백은 모든 성도들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시편 75편입니다. [이는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나 남쪽에서 나오지 아니하며 오직 하나님께서 재판장이 되시기 때문이니 그분께서 이 사람을 낮추시고 저 사람을 높이시느니라.](시75:6,7). 이 구절은 하나님이 계신 처소가 어디인지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동, 서, 남이 아니면 북쪽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처소를 언급할 때는 언제나 북쪽을 언급합니다. 이 구절의 실제적 예는 역사상 바벨론의 군주 느부갓넷살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높여 제국의 왕이 되게 하셨지만 그를 낮추어 소처럼 들에서 풀을 먹게도 하셨습니다(단4:29-37). 그의 아들 벨사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개 목동을 왕으로 삼으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제국의 왕을 소처럼 풀을 뜯게 만드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주]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2:7). 겸손은 은혜를 더 많이 받는 길입니다(약4:6)1). 겸손은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낮추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할 일입니다.

·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주}의 눈앞에서 너희 자신을 낮추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신자들 가운데 이 말에 아멘! 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외로 이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을 경시하고 흘려듣는 것이 모두 하나님 앞에 교만한 증거입니다.

· 여러분의 목자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아,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 자신을 낮추어 장로에게 순복하고 참으로 다 서로 복종하며 겸손으로 옷 입으라. 이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니라.](벧전5:5). 오늘날 교회는 목자의 권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교회들이 있는 반면 거기에 반발하여 목자의 권위를 아주 우습게 여기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만인 제사장의 교리는 성경적 교리입니다. 그러나 그 교리가 목자를 우습게 여겨도 된다는 license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장로에게 어떻게 순복하는가? 목자를 신적 권위로 높여 주거나, 구약의 제사장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가 아니라 성도들이 ‘스스로 자신을 낮춤으로써’ 순복하는 것입니다. 장로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얻지 못하고, 주님이 대적하시는 화(禍)를 당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의 목사, 집사, 교사, 선교사, 부흥사 뿐만 아니라 주를 위해 수고하는 사역자들보다 자신을 낮추어 복종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러한 사람들과 또 우리와 함께 도우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너희 자신을 낮추어 복종하라.](고전16:16). 이 말은 평등과 인권, 개인주의를 지상의 절대적 가치와 존엄으로 교육받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너무나 가혹하고, 순종하기 어렵고, 견디기 힘든 ‘건전한 교리’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역자들을 높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낮추어 주십시오.

· 여러분의 동료보다 자신을 더 낮게 여겨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다툼이나 헛된 영광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고](빌2:3). “동료보다 낮게, 동료를 더 낫게” 발음은 같지만 지읒과 시옷의 차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느냐? 하나님이 대적하시는가?를 갈라 주는 중요한 잣대입니다.

· 아내들은 남편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오늘날 여성 운동가들이 들으면 열받을 소리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아내들아, 너희 자신을 낮추어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것이 {주} 안에서 합당하니라.](골3:18). 여성의 인권은 남녀 평등을 외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잘난게 없어도 괜찮습니다. 무릇 남편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하지만 마음 속에서 그런 것이 우러나오지 않으면 자신을 낮추어서 복종하십시오. 이것이 주 안에서 합당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아내들아, 너희 자신을 낮추어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 가정에서 이것이 깨어지면 성경 공부는 아무리 해도 여러분에게 유익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입니다. 자매들이 교회 와서 주야로 진을 치며 교회에 봉사하는 것보다 더욱 유익한 일은 집에서 자신을 낮추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자기 비하나 굴종이 아닙니다. 자기를 낮추는 일은 바로 자신을 높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 더 많은 은혜를 얻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을 낮추어 복종하십시오. 성도는 서로가 서로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알면서 서로 복종하라는 계명은 무시함으로써 어리석은 성도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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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나 그분께서 더 많은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하시느니라.(약4:6)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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