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구약 개론-욥기

말씀: 욥기 1:1-42:17
요절: 욥기 42:2-6


욥기는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문학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앞부분 조금(1-2장)과 뒷부분 약간(41-42장)을 제외하고는 잘 다루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욥기에 관하여 빅톨 위고(Victor Hugo)는 "욥기는 아마 인간의 사상에 대한 가장 위대한 걸작일 것이다."라고 말했고,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은 "이 책은 지금까지의 저서 중 가장 뛰어난 저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와 대등한 문학 작품이 저술된 바 없다고 생각한다."고 평했으며, 알프레드 테니슨 경(Alfred, Lord Tennyson)은 "고대나 근대의 모든 문학을 막론하고 가장 위대한 시(詩)이다."라고 했습니다. 욥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보고, 궁금해하는 주제인 “왜 의인이 까닭 없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또는 “하나님께서는 왜 의인을 고통 가운데 두는가?”라는 질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문제입니다.

욥기는 42장, 1,070절, 10,102단어(영어 킹제임스 성경 기준)로 되어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욥기는 대환란 때의 유대인들이 마귀에게 핍박받는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책입니다. 욥기의 저자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엘리후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욥32:16). 이는 엘리후가 독백체로 자신을 주인공처럼(문학적으로 1인칭 관찰자 시점의 기술 방법을 사용했음) 기술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서서 더 이상 답변하지 아니하므로) 내가 기다리다가](욥32:16)-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엘리후 자신이 “내가 기다리다가”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만약 제 3자가 욥기를 기술했다면 ‘엘리후가 기다리다가’, 또는 ‘그가 기다리다가’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 전승에 따르면 모세의 저작설이 유력합니다. 이유는 문체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sons of God(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이 창세기와 여기에서만 나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름 El Shaddai, The Almighty란 표현이 욥기에 31회나 등장하는데 이 역시 모세 오경에 주로 등장하는 표현으로서 모세의 저작설을 뒷받침합니다. 많은 학자들이 엘리후의 저작설에 대해서는 거의 외면하고 있는데, 이는 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유대인에게 맡겼다면 유대인이 형성되기 이전의 인물인 엘리후에게 성경 기술의 특권을 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란 추정 때문입니다(엘리후는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었음). 저는 성경 본문에 근거한 추정을 선호하여 엘리후의 저작설을 믿습니다만 논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욥기는 성경 중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며, 욥은 족장 시대의 인물입니다. 욥기는 성경의 어떤 책보다도 풍부한 과학적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욥기를 현대 과학의 보고라고 부르는 이유를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첫째, 욥기 37:9-10, 22에 북쪽 하늘에서 불어오는 찬바람과 청명한 날씨에 대해서 말합니다. 북쪽의 고기압의 영향은 날씨를 맑게 하며, 추위를 동반한다는 기상학적인 정확한 지식이 욥기에 등장합니다. 따라서 욥은 천문학에 대해서도 많이 언급합니다. 욥기 9:8-10에는 별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분께서 홀로 하늘들을 펴시고 바다의 파도를 밟으시며 악투루스 별오리온 별자리플레이아데스 별무리와 남쪽의 방들(전갈 자리)을 만드시고 알아낼 수 없는 큰 일들을 행하시며 참으로 수도 없이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느니라.] 욥기 38:31-32, [네가 플레이아데스 별무리의 감미로운 영향력을 묶거나 오리온 별자리의 띠를 풀 수 있느냐? 네가 마자롯을 제 철에 이끌어낼 수 있느냐? 네가 악투루스 별을 그 아들들과 함께 인도할 수 있느냐?] 이 사실이 발견된 것은 17세기 때이며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진 촬영이 가능했습니다. 욥은 북편 하늘에 빈자리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욥26:7). 이 사실은 최근에야 밝혀진 이론입니다. 지구가 허공에 메달려 있다는 사실 역시 욥기에 나옵니다(욥26:7b).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은 뉴튼의 만유인력이 발견되고 나서야 사람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욥기엔 지구가 자전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38:14). [그것이 변하여(turned) 진흙에 도장을 찍은 것같이 되며 그것들이 옷같이 일어서 있느니라.] 기상학의 원리 또한 욥기에 나옵니다(욥36:26-29, 전1:6-7참조). 달이 빛을 내지 않는다는 사실도 욥기에 나옵니다(욥25:5). 달은 단지 빛을 반사할 뿐입니다. 눈과 우박 속에 보화가 담겨 있다는 사실도 계시되어 있습니다(38:22). 빛이 갈라진다는 사실도 욥기에 나옵니다(38:24). 이는 분광기가 개발되기 4000년 전에 이미 나온 이야기입니다. 전화기의 원리도 나옵니다(38:35). 욥기 39장에는 동물의 생태와 행동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 줍니다.

욥기는 과학적인 내용 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줍니다. 욥기에서 묘사된 인생은 첫째, 욥기 7:6입니다. [내 날들은 베짜는 자의 북보다 더 빠르니 소망 없이 지나가는도다.](욥 7:6). 인생은 베틀의 북과 같습니다. 둘째, 7:7입니다. [오 주여/ 내 생명이 바람 같음을 기억하소서. 내 눈이 다시는 좋은 것을 보지 못하리이다.](욥7:7). 인생은 바람과 같습니다. 셋째, 욥기7:1입니다. [땅 위에 사는 사람에게 정해진 기한이 있지 아니하냐? 그의 날들이 또한 품꾼의 날들과 같지 아니하냐?] 인생은 품삯을 기다리는 품꾼의 날들과 같습니다. 넷째, 욥기 7:18절입니다. [어찌하여 아침마다 그를 찾아보시고 순간마다 연단하시나이까?] 인생은 시험과 같습니다(욥 7:18). 다섯째, [(이는 우리가 겨우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며 또 땅 위에 있는 우리의 날들이 그림자이므로 아무 것도 알지 못함이라.](욥 8:9). 인생은 그림자와 같습니다. 여섯째, [이제 내 날들이 파발꾼보다 빨리 지나가며 달아나 버리므로 내가 좋은 일을 볼 수가 없구나.](욥 9:25). 인생은 파발꾼과 같습니다. [그 날들의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들과도 같고](욥 9:26a). 인생은 빠른 배와 같습니다. 여덟째, [...먹이를 향해 치닫는 독수리와도 같구나.](욥9:26b). 인생은 먹이를 향해 치닫는 독수리와 같습니다. 아홉째, [주께서 어찌하여 이리저리 흩날리는 낙엽을 부수시며 마른 지푸라기를 뒤쫓고자 하시나이까?](욥 13:25). 열번째,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참으로 사람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에 있나이까?](욥 14:10). 인생은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과 같습니다. 인생은 썩은 나무나 떨어지는 꽃과 같습니다. 열한번째, [두려움이 내게 엄습하며 그들이 내 혼을 바람같이 뒤쫓으니 내 번영은 구름같이 사라지는구나.](욥 30:15). 인생은 구름과 같습니다.

욥기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욥1,2,38장)과 마귀에 대한 정보가 풍부합니다. 비히못, 리비야단(Job 41:1; Ps 74:14; 104:26; Isa 27:1)과 같은 동물들이 나오며, 사탄의 활동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줍니다. 특히 현 세상 이전의 세상에서 이 땅을 누가 소유했는지 계시해 줍니다. 욥기22:8, [그러나 /권세가/ 강한 자로 말하건대 그는 땅을 소유하였으며(But as for the mighty man, he had the earth;) 존귀한 자는 거기서 살았도다.](욥22:8). 하나님께서 이런 모든 영적 사실들, 일급 정보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욥기에 매우 강조되는 진리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자연 만물, 생태계, 저 하늘의 별과 달, 천둥, 번개, 비, 우박, 광물들을 비롯한 자연 현상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보를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바로 이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시요, 다스리시며, control하시는 주권자란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 주고, 마귀 역시 그렇게 지음 받은 피조물이란 사실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마귀를 이길 수 있는가? 욥기 40:19, [그는 하나님의 길들 중에서 으뜸이니 그를 만든 이가 자신의 칼을 그에게 가까이 댈 수 있느니라.] 성령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마귀를 이길 수 있다는 전술, 전략의 핵심을 주님은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당할 수 없는 사탄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욥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욥기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란 점입니다. 욥기의 주인공은 욥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신약 성도들에게는 크리스천들에게 닥치는 박해와 고난, 시련, 마귀의 참소와 원수들의 중상 모략, 까닭 없는 사건 사고, 질병, 죽음에 대해 너무나 널리 익숙하게 알려져 있지만 구약에서는 이런 계시들이 익숙하지 않는 때였습니다. 박해와 시련, 성도들을 향한 마귀의 책략에 대해 신약 성경은 너무나 자주,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에 마귀는 오늘날 성도들에게 오히려 박해 대신 탐욕과 부(富), 명예와 야심을 줌으로써 성도들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몰지각한 성도들은 성경에 언급된 마귀의 박해와 시험에 대해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라며, 도리어 의심을 할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도들이 당한 갖가지 끔찍한 역사적 사건들(용광로, 사자굴, 채찍, 감옥, 헐벗음,...죽음)에 대해 그런 일이 있었을까? 지금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을 칠 수 있었던 마귀가 저와 여러분을 왜 치지 못하겠습니까? 마귀는 지금도 울부짖는 사자처럼 먹을 자를 삼키러 찾아다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벧전5:8).

욥은 많은 비성경적인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고대 설화나 전승 문학이 아니라 역사적 실존 인물입니다. 에스겔(겔14:14,20)과 야고보 사도(약5:11)가 직접 욥의 이름을 거명하며 그들을 증거했습니다. 욥기는 성경전서 중 가장 오래된 책입니다. 욥기에는 고대의 역사적 사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피라밋(욥 3:14), 평원의 성읍들(욥 15:28), 홍수(욥 22:16). 욥기에는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언급이 없습니다. 율법이나 출애굽, 홍해를 건넘, 가나안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욥이 거처하던 우스 땅은 유프라테스 강쪽으로 흐르는 갈릴리 바다의 북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창 36:28/애 4:21참조). 욥이 겪었던 질병은 오늘날 의학적 병명으로 상피병(象皮病)과 문둥병의 합병증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상피병은 오늘날 세상에 알려진 가장 역겨웁고 고통스러운 질병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욥의 고통은 세 사람의 친구들과 한 사람의 모진 아내와 그리고 한 성급한 젊은이로 인해 더욱 가중됩니다. 사실 이들은 나타나지 말았으면 모든 것이 끝났을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출현으로 인해 욥은 육체적 고통 뿐만 아니라 정신적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욥은 경건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믿음과 이해가 필요했습니다. 욥은 믿음이 있었지만 마귀에 대해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욥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고통을 당할 때 마귀를 욕하거나, 마귀에게 저주를 퍼붓지 않습니다. ‘빌어먹을 마귀놈의 자식!’ 이런 욕은 거의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들어간 욕과 불평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욥과 그의 친구들과 그 이후의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마귀, 인간의 힘의 삼각 관계를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욥이 배워야 할 진리의 교훈이었으며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이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

첫째, 인간은 누구라도 마귀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귀는 지혜로는 다니엘보다 더 뛰어나며, 힘으로는 그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보라,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사람들이 네게 숨길 수 있는 은밀한 일이 없나니](겔28:3).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셔서 다음 일곱 가지를 할 수 있는지 물으셨습니다(욥기 41:1-7). 그러나 욥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마귀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낚시 바늘로 끌어내며, 줄로 그의 혀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욥42:1-2). 아무리 힘센 고래라도 낚시 바늘이 목을 뚫고, 혀를 메이면 어린아이라도 끌어 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센 황소라도 그의 코를 뚫으면 어린아이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그렇게 할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네가 낚시바늘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늘어뜨린 줄로 그의 혀를 끌어낼 수 있겠느냐? 네가 그의 코에 낚시바늘을 걸 수 있겠느냐? 가시로 그의 턱을 꿸 수 있겠느냐?](욥42:1,2). 마귀는 사람들을 알기를 우습게 압니다. 마귀는 욥에게 간구를 하겠습니까? 부드러운 말들을 하겠습니까? 간구와 부드러운 말은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빌 때, 용서와 자비를 구할 때 하는 말입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짓밟아 버리고 살려달라고 간청할 때까지, 입에서는 갖은 아양과 비는 말이 나올 때까지 눌러 버릴 힘이 우리에겐 없지만 하나님은 그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가 네게 많은 간구를 하겠느냐? 그가 네게 부드러운 말들을 하겠느냐?](욥41:3). 전에 어떤 친구가 자신은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신들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제가 “나는 자네가 믿는 신들을 마음대로 갖고 노는 분을 믿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마귀가 무릎을 꿇고 “주는 하나님이시니다.” 간구하며 부드러운 말들을 할 때까지 눌러 버리신 다음 불 못에 던져 버리실 것입니다. 마귀는 분명히 주님을 인정하고 영광을 돌리는 날이 올 것이입니다. [또 모든 혀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11). 여기서 모든 혀의 대미를 장식할 혀가 바로 마귀입니다. 사람은 마귀와 대등하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그의 종노릇을 합니다. [그가 너와 언약을 맺겠느냐? 네가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겠느냐? 네가 그와 놀기를 새와 놀 듯 하겠느냐? 네가 네 여종들을 위하여 그를 묶겠느냐?](욥41:4,5). 그러나 주님은 어떻습니까? 마귀와 언약을 맺을 수도 있고 종으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마치 새의 발에 실을 묶어서 갖고 놀 듯이 하십니다. 새장 속의 새를 아십니까? 아무 때나 잡을 수 있습니다. 잡아서 털을 뽑아 버릴 수도 있고, 묶어서 한 참 동안 날아 다니게 하다가 잡아 당겨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그렇게 다루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욥으로 하여금 고난을 통과하게 하신 이유입니다. 욥은 지금 마치 새장 속의 새처럼, 낚시 바늘의 물고기처럼 마귀의 뜻대로 일방적으로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귀가 욥에게 했듯이 자신이 마귀에게 그렇게 할 수 있음을 직접 말씀해 주시고, 그렇게 행하심으로써 욥의 믿음을 정금같이 빚으시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이전보다 수백배 깊어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입으로 스스로 고백하기를,[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라고 고백할 만큼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렀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욥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십니다. [네 벗들이 그를 가지고 잔치를 벌이겠느냐? 그들이 상인들 사이에서 그를 나누겠느냐? 네가 그의 가죽을 쇠꼬챙이로 가득 채울 수 있겠느냐? 그의 머리를 물고기 작살로 가득 채울 수 있겠느냐?](6-7).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능력 사이에 있는 이 엄청난 차이를 분명하게 안다면 우리는 그 앞에서 겸손히 무릎꿇고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선하며 의롭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뜻대로 하시는 일에 대해 우리에게 다 설명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욥을 통해 이 사실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나 뜻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욥은 친구들과의 변론에서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람들 앞에서는 자기를 방어할 수 있고, 변증할 수 있고, 뭐라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한 가지를 알았습니다. [주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사오며 어떤 생각도 주께 알리지 아니할 수 없음을 내가 아오니](욥42:2). 이는 주의 전능하심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분의 주권에 대한 고백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욥은 지금까지 “내게 이럴 수는 없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이유를 묻고, 답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주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사오며 어떤 생각도 주께 알리지 아니할 수 없음을 내가 아오니](욥42:2). 우리도 모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몇몇 등장 인물들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총감독이십니다. 마귀는 감독을 대적하는 연출자였습니다. 욥은 주연 배우였고, 몇 명이 무대에 등장합니다. 엘리바스는 그의 개인적 경험에 근거한 충고를 합니다(욥 4:8,12-16/ 5:3,27/ 15:17). 엘리바스는 에서의 후손이었습니다(창36:11 참조). 빌닷은 전통에 근거한 충고를 합니다(욥 8:8-10/ 18:5-20). 빌닷은 아브라함과 그두라의 후손입니다(창 25:2 참조). 소발은 순수한 교리에 근거한 충고를 합니다(욥11:6/20:4). 소발은 나아마 사람입니다. 이 세 친구는 하나님은 의인을 복주시고, 악인을 심판하신다는 한 가지 논리로 욥이 위선자요, 벌을 받을만한 악한 자요, 숨겨 놓은 죄가 있을 것이라고 혹독하게 정죄했습니다. 하나님은 후에 이들 세 친구가 욥에게 잘못했음을 지적하시고 용서를 빌도록 했습니다(욥42:7). 엘리후는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후손(창22:21)으로서 그의 젊음에 근거한 충고를 했습니다(욥32:6-10). 그는 연장자들이 한 말을 다 듣고 경청한 후에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의인이라도 징계하실 수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후를 책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욥에 대해 여전히 비판적이었습니다. 이들보다 먼저 욥에게 충고한 사람은 욥의 아내로서 순전한 불신앙에 근거한 충고를 했습니다(욥 2:9). 마귀는 욥의 모든 가족들을 죽였지만 한 명 그의 아내를 죽이지 않았는데, 이유는 욥을 무너뜨리는데 써 먹기 위함이었습니다. 욥기는 친구들의 잘못된 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신약 성도들이 교리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욥을 위선자라고 부르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욥8:12/15:34/20:5/34:30). 하나님은 욥에게서 잘못을 발견하지 못하셨습니다(욥 1:8/2:3). 그렇다면 의인이 왜 고통이 허락되어지는가?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욥기는 누가복음 22:31, 32절과 히브리서 12:7-11절에 대한 확장된 해석이라고 했습니다.

1장입니다. 욥은 재물이 부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격에서도 부자였습니다. 가족도 부자였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부요했고, 자신의 부(富)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할 줄 아는 진정한 부자였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비천하게 되든 풍부하게 되든 관계없이 주님을 위해 살 수 있어야 합니다(빌4:12)1). 욥은 부자일 때 하나님 앞에 처신하는 법을 이미 배웠고, 가난할 때 하나님 앞에서 사는 법 역시 배웠음을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욥은 결코 어리석은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욥이 가진 이런 부(富)는 마귀의 시험과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어느날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탄이 하나님을 뵈려고 왔습니다(1:6). 하나님은 사탄을 한판 메치기를 할 생각이셨습니다. 밀림의 보아뱀이 아이를 삼키려 했을 때 아이는 입을 쫙 벌린 뱀을 향해 직각으로 막대기를 세웠습니다. 아무리 힘이 세어도 아래 턱과 위턱을 딱 고정시켜 버리니 작은 쥐 한 마리도 삼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주님은 욥을 통해 마귀의 벌어진 입에 막대기 하나를 고정시켜 놓을 계획을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첫째,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욥에게 시련을 통한 더 큰 영적인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먼저 마귀에게 미끼를 던졌습니다. 7,8 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에서 오느냐? 하시니 사탄이 [주]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에서 여기저기 다니고 또 그 안에서 위아래로 거닐다가 왔나이다, 하매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깊이 살펴보았느냐? 그와 같이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가 땅에 없느니라, 하시니](7,8). 주님은 참된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그 예화 1번으로 욥을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이 먼저 마귀에게 물으셨습니다(7). 그리고 사탄 앞에서 욥을 칭찬하셨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자신이 너무 영적이고, 너무 경건하여 마귀가 하나님 앞에 가서 욥을 시험하듯이 나를 시험하자고 제안할까봐 두려워하시는 분이 없기 바랍니다. 마귀는 하나님이 주제를 끄집어내기 전까지 욥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마귀를 건드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골탕먹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작전에 넘어갔습니다. 마귀는 즉각 하나님의 칭찬에 반론을 폈습니다. 9,10 [이에 사탄이 [주]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를 사방에서 울타리로 두르지 아니하셨나이까? 주께서 그의 손이 하는 일에 복을 주시니 땅에서 그의 재산이 불어났나이다.](9,10).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장과 마귀의 주장 중 누가 옳은지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마귀는 언제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는 에덴의 동산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던지고, 불신을 퍼부었습니다(창3). 사탄은 즉시 욥에 대해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욥의 숨은 동기는 불순할 것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장담했습니다(9-10).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요, 대적자요, 고소자입니다2). 사탄의 제안을 보십시오. 11절,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내미사 그의 모든 소유를 치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주의 얼굴 앞에서 주를 저주하리이다, 하매](11). 이제 일은 터졌습니다. 욥의 행동에 따라 마귀가 하나님 앞에서 웃을지 하나님이 마귀 앞에서 웃을지 결정 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귀의 제안대로 그의 모든 소유를 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의 소유에는 재산 뿐만 아니라 아들, 딸들의 생명까지 포함되었습니다. 그의 시련은 첫째, 스바 사람들의 습격으로 그의 소들과 나귀들이 도적맞고 그의 일꾼들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14-15). 둘째, 그의 양들과 목자들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마귀는 하늘에서 불을 내렸습니다. 그는 후에 다시 한번 불을 내릴 것입니다(16). 욥의 종은 이 불이 하나님이 내린 불인지 마귀가 내린 불인지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엘리야 시절에 불을 내리셨습니다. 마귀는 욥의 가산을 칠 때, 그리고 계시록 13:13에서 불을 내립니다. [그가 큰 이적들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의 눈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 위로 내려오게 하고](계13:13). 우리는 표적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갈대아 사람들의 습격으로 낙타들을 도적맞고 종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17). 넷째, 그의 아들들과 딸들이 광야로부터 온 큰바람으로 멸망당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토네이도와 비슷한 모래 바람이었을 것입니다. 이럴 때 누구라도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일이 닥치는가?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늘이 저주스럽고, 한 순간에 믿음이 풍비박산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욥의 반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또한 벌거벗은 채 그리로 돌아가리라. 주신 이도 [주]시요, 가져가신 이도 [주]시니 [주]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어다, 하고 이 모든 일에서 욥이 범죄하지도 아니하고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아니하였더라.](21,22). 이제 하나님과 사탄의 1라운드는 끝이 났습니다. 마귀는 분명히 하나님에게 졌습니다. 마귀는 주님 앞에서 욥이 주의 얼굴 앞에서 저주를 할 것이라고 했지만 저주는 고사하고, 주님을 찬양하며,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영적 전쟁의 1 라운드는 1장에서 끝났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사탄의 치명적 약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측 능력(예언의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귀는 보통 사람의 운명의 앞날을 예측하고 정확히 맞출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욥과 같은 믿음의 사람은 결코 점괘가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 이는 마귀가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분은 마귀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요일4:4). 더 중요한 것은 지금 하늘에는 우리를 향해 대적하고, 참소하는 마귀의 참소를 거뜬히 변호해 주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2장입니다. 마귀는 꼴좋게 한방 얻어맞았습니다. 권투로 비유하자면 눈탱이가 밤탱이 된 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나갔지만 건진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유구무언이었습니다. 어느날 다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은 한 방 더 주먹을 날리시기로 했는지 태연스럽게 다시 욥에 대해 먼저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다시 욥을 칭찬하셨습니다. 3절,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깊이 살펴보았느냐? 그와 같이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가 땅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움직여 그를 치게 하고 까닭 없이 그를 멸하게 하려 하였으되 그가 여전히 자기의 순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도다, 하시니](3). 순전함이란 외부의 어떤 환경에서도 그 원형이 파괴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수와 패배를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직까지도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철저히 파멸될 때까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것입니다. [사탄이 [주]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참으로 사람이 자기의 모든 소유로 자기 생명을 바꾸리이다.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내미사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주의 얼굴 앞에서 주를 저주하리이다, 하매](4-5). 마귀는 비장의 카드를 빼들었습니다.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이것이야말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인간 백정이나 고문관보다 더 한 마귀가 직접 욥을 고문하고 있습니다. 욥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에 심한 종기가 났습니다. 거기다 그의 부인이 거들었습니다. [이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아직도 당신의 순전함을 지키느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 하되](9). 마귀는 양동작전을 구사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고통을 한편으로는 부인을 이용했습니다. 일곱 아들과 세 딸이 죽고, 모든 가축들과 재산이 날아가고, 욥의 몸은 극심한 종기로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유일하게 멀쩡한 사람은 바로 욥의 아내였습니다. 마귀가 없앨 수 있는 허락을 받았음에도 살려두었다는 것은 자신에게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욥의 아내의 말은 구약의 율법대로라면 돌로 쳐서 죽여 마땅한 죄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욥이 그녀에게 이르기를, 당신이 어리석은 여자들같이 말하니 도대체 무슨 까닭이냐?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좋은 것을 받을진대 나쁜 것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서 욥이 자기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10). 마귀는 다시 한번 ‘욥의 입술이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하는 일’에 대해 처절한 패배를 당했습니다. 욥은 아담처럼, 삼손처럼, 솔로몬처럼 아내의 잘못된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내를 책망하고, 믿음의 선한 고백을 했습니다. 마귀는 이제 욥의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패배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있게 말했고, 직접 나섰던 두 번의 일에서 두 번다 완패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습니다. 마귀는 “이렇게 하시면 욥이 하나님을 저주할 것입니다”고 해서 두 번이나 그렇게 했지만 두 번 다 욥은 마귀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주님을 찬양하고,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했습니다. 만약 욥의 세 친구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여기서 욥기는 끝났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과 함께 애곡하고 위로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3장입니다. 욥은 5번이나 어찌하여(why- 11,12,20,23)라고 물었습니다. 누구나 예상치 못한 일이 자기에게닥칠 때 why, why, why를 연발하게 됩니다. 욥은 사탄이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위대한 사람들이 주님께 죽기를 간청했던 예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욥 외에도 모세 역시 주님께 죽음을 구했습니다(민11:10-15). 엘리야 역시 죽음을 구했습니다(왕상 19). 요나도 주님께 죽기를 구했습니다(욘4,5154:3). 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자신들의 기도대로, 소원대로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의 어려움에서 건져내셔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4-37장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위로하러 왔으나 사실은 설교만 하며 눌러 앉아 있었습니다. 어쨌든 욥의 세 "친구"들은 오랫동안 고통당하고 있는 이 족장에게 모두 여덟 번의 장황한 멧세지 (각기 세번씩의 연설과 한편의 시로)를 전달했습니다. 엘리바스가 이 중에서 세 번(욥 4-5, 15, 22장)을, 그리고 빌닷도 세 번(욥 8,18,25장)을, 소발은 한 번 적은 두 번(욥11, 20장)을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이 지루한 삼중주가 끝나자마자 엘리후라고 하는 젊은 "설교자"가 다시 설교를 시작하는데, 그는 여섯 장(욥 32-37장)에 걸쳐 지루한 설교를 늘어놓았습니다. 아마 역사상 그렇게 많은 설교자가 그토록 적은 참석자에게, 더구나 회중이 좋아하지도 않는 설교를 한 사경회를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먼저 엘리바스가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동료 친구들을 배석자로 두고 한명의 회중 욥을 앞에 두고 4,5,15,22장에 걸쳐 네 번의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철저히 자기 경험에 의지한 충고요, 설교였습니다. 엘리바스는 그의 개인적 경험에 근거한 충고를 합니다(욥 4:8,12-16/ 5:3,27/ 15:17). 그는 세상을 살면서 본 것, 들은 것과 자신의 영적 경험을 들고 나왔습니다. 경험은 유익한 자산이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경험은 성경적 진리를 앞설 수 없습니다. 결론은 욥의 고통이 욥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4:7,8 [원하건대 생각하여 보라. 도대체 죄 없이 멸망한 자가 누구냐? 의로운 자가 끊어지는 곳이 어디 있느냐? 내가 보았거니와 불법을 심고 악을 뿌리는 자들은 바로 그것을 거두나니](7,8). 엘리바스는 아마 전도서 9:2의 진리를 몰랐던 것 같습니다. [모든 일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임하나니 곧 의로운 자와 사악한 자, 선한 자와 정결한 자와 부정한 자, 희생물을 드리는 자와 희생물을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동일한 일이 임하여 선한 자가 어떠함같이 죄인도 그러하며 맹세하는 자도 맹세하기를 두려워하는 자와 같으니라. 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 가운데 악한 것이 이것이니 곧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일이 임하는 것이라. ...](전9:2-3). 우리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교통 사고나, 화재 사고, 강도, 질병 등으로 죽을 때 이게 마음 속에 엘리바스와 같은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을 강하게 몰아 부쳤습니다. 욥기 15:6, [너를 정죄하는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참으로 네 입술이 너를 대적하여 증거하느니라.] 그는 마치 욥이 죄를 저지르는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한 것처럼 몰아부치는데 마치 재판정에서 범인을 몰아부치는 검사의 모습을 연상시키니다. 그는 욥이 범한 죄를 첫째, [이는 네가 까닭 없이 네 형제로부터 담보물을 잡고 헐벗은 자의 옷을 벗기며](욥22:6)- 이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둘째, [피곤한 자에게 마실 물을 주지 아니하고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음이라.](욥22:7)- 이 말 역시 사실이 아닙니다. 셋째, [네가 과부들을 빈손으로 내보내고 아버지 없는 자들의 팔을 꺾었도다.](9).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욥은 인과응보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욥의 인격을 씹었습니다.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을 말하겠으며 어찌 동풍으로 자기 배를 채우겠느냐?](욥15:2). 이 말은 욥이 허풍장이요, 헛소리만 하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했습니다(욥 22:21-28) [네가 만일 전능자께로 돌아가면 세움을 입겠고 또 너 /스스로/ 네 장막에서 불법을 치우리라.](욥 22:23). 한 마디 한 마디 말은 촌철살인이요, 진리의 말씀이지만 그것이 정확히 적용되지 않을 때 얼마나 무서운 말이 되는지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양날 선 검입니다. 이 말씀을 정확하게 알고, 정확하게 적용하지 못하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죽일 수 있음을 봅니다.

다음은 빌닷의 설교입니다(욥 8, 18, 25장). 빌닷은 전통에 근거한 충고를 합니다(욥 8:8-10/ 18:5-20). [원하건대 너는 이전 시대 /사람들에게/ 물으며 스스로 예비하여 그들의 조상들이 탐구한 바에 주의를 기울이라. (이는 우리가 겨우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며 또 땅 위에 있는 우리의 날들이 그림자이므로 아무것도 알지 못함이라.) 그들이 네게 가르치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의 마음에서 나온 말들을 말하지 아니하겠느냐?](욥8:8-10). 전통은 정말 무서운 무기입니다. 빌닷이야말로 진정한 보수주의자이며, 예전의 것들, 고전의 지혜를 현실에 적용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두 가지 종류의 전통에 대해 말씀합니다. 첫째, 사람의 전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화시킵니다.[너희의 전해 내려온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가 되게 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기 때문이니라, 하시더라](막7:13).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조심하라. 이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을 따르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니](골2:8). 둘째, 성경적 전통입니다. 이것은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서신으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들을 붙들라.](살후2:15). [이제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가 너희에게 명령하노니 너희는 질서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들에게서 떠나라.](살후3:6). 빌닷은 욥이 자신의 죄 때문에 이 모든 고통을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보라,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악을 행하는 자들을 돕지도 아니하시고](욥 8:20). 이 말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금 당장, 현실에만 한정적으로 적용함으로써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빌닷은 욥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촉구했습니다. [네가 만일 늦기 전에 하나님을 찾고 전능자께 간구하며 또 네가 순수하고 곧바르면 이제 그분께서 반드시 너를 위해 깨어나사 네 의가 거하는 처소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비록 네 시작은 작을지라도 네 나중은 심히 크게 되리라.](욥 8:5-7). 이런 말을 들을 때 욥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친구들의 말이 틀린 말이 없다할지라도 욥을 동정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정죄하고 판단하고, 범죄를 입으로 실토시켜 고백하게 만들겠다는 자세에 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빌닷의 말이 틀린 것은 없을지라도 욥에게 적용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다음은 소발의 설교입니다(욥11,20장). 이들은 욥의 친구답게 말 못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모두 신앙과 자기 철학이 분명했습니다. 소발은 순수한 교리에 근거한 충고를 합니다(욥11:6/20:4). 그는 근본주의자요, 정통 교리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소발 역시 욥을 정죄하였습니다. 욥기 11:4-6, [이는 네가 말하기를, 내 가르침은 순수하고 나는 주의 눈에 깨끗하다, 하였음이로다. 그러나 원하건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자신의 입술을 여사 너를 치시며 지혜의 은밀한 것들을 네게 보여 주시되 그것들이 지금 있는 것의 두 배나 됨을 보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그런즉 /너는/ 하나님께서 너로부터 네 불법에 상응하는 것보다 적게 취하시는 줄 알지니라.](욥 11:4-6). 소발의 논리는 매우 간결합니다. 인과응보, 죄가 있는 곳에 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욥이 당하는 것은 욥이 지은 불법에 비하면 적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 죽은 정통주의자입니다.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그분께서/ 사람을 땅에 두신 이래로 사악한 자의 승리는 잠시뿐이요, 위선자의 기쁨은 잠깐뿐이니라.](욥 20:4, 5). 소발은 성도를 대적하는 마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의인들이 받는 고통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에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예입니다. 욥의 고통은 곧 그의 불법과 범죄의 확실한 증거라는 그의 논리는 철옹성이었습니다. 소발은 욥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촉구했습니다. [만일 네가 마음을 예비하고 그분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 때에 네 손에 불법이 있거든 그것을 멀리 버려서 사악함이 네 장막들 안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그리하면 네가 흠 없이 네 얼굴을 들 것임이라. 참으로 네가 굳건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욥 11:13-15).

마지막으로 엘리후가 등장하여 긴긴 설교를 했습니다(욥 32-37장). 그는 세 사람 중에 가장 연소한 자였습니다(욥 32:4-7). 그러나 일단 말을 입밖으로 내자 일사천리로 설교가 쏟아져 나왔는데, 욥을 바로 잡고, 욥이 애타게 찾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란 암시를 주었습니다. [보라, 내가 그대의 소원대로 하나님을 대신하노니 나도 진흙에서 빚어진 자로다.](욥 33:6). 엘리후는 네 사람 모두에게 성을 냈는데 욥에게는 그의 독선 때문에, 그리고 세 친구들에게는 "그들이 능히 대답을 찾지도 못한 채 욥을 정죄"(욥 32:3)했기 때문에 성을 내었습니다. 그는 욥이 무식하게 말하는 것(욥 34:35-37/36:16)과 거짓되이 의롭다고 말하는 것(욥 35:2)을 비난했습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하심을 생각하라고 권고했습니다(욥 37:14-24). 살과 뼈가 타들어가는 아픔 속에서 맞은 친구들의 독설에 욥은 자신을 방어하고, 지키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욥은 아홉 번에 걸쳐 자신을 비난하는 친구들에게 항변했습니다. 첫째: 욥3장, 둘째: 욥6-7장, 셋째: 욥9-10장, 넷째: 욥12-14장, 다섯째: 욥16-17장, 여섯 째: 욥19장, 일곱째: 욥21장, 여덟째: 욥23,24장, 아홉째: 욥26-31장입니다.

욥의 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나는 의로운 사람이다. 그러므로 죄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이 아니다(욥 27:6/31:1-30).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가 사는 동안에 내 마음이 나를 꾸짖지 아니하리라.](욥 27:6).

2) 과거에 나는 많은 선행을 했다(욥 29:12-17/30:25).

3) 그 좋았던 시절에 나는 건강과 부(富)를 즐기고 존경을 받았다(욥 29:1-11, 20-25).

4) 그러나 지금 나는 부당하게 하나님의 벌을 받고 있다(욥9:16,17,30-33/13:26,27/10:2,7,8/19:6-11/30:20, 21).

5) 소위 나의 세 친구들은 형편없는 위로자들이다(욥 12:2/13:4/16:2/19:3).

6) 만약 그들이 나와 같은 입장에 있다면 나는 그들을 도왔을 것이며 부당하게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만일 너희 혼이 내 혼의 입장에 있다면 나도 말들을 무더기같이 쌓아 올려 너희를 치고 너희를 향하여 내 머리를 흔들 수도 있었을 것이로되 그래도 내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고 내 입술을 움직여 너희 고통을 덜어 주었으리라.](욥 16:4,5).

7) 나의 이웃, 동료들, 그리고 종들까지도 나를 버리고 돌아섰다(욥 19:13-22/30:1,9,10).

8) 내가 이 모든 일에 대답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욥 28:12-28).

9) 나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욥 23:8, 9).

10) 나의 육신은 구더기로 옷 입었다(욥 7:5/30:17, 18, 30).

11)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욥 3:3-11,16/10:18).

12) 죽어버렸으면 좋겠다(욥 6:8, 9/7:15, 16).

13) 나는 희망이 없다(욥 10:20-22).

14)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겠다(욥 13:15/16:19/23:10).

드디어 주께서 회오리 바람 가운데 주님이 등장하셨습니다. 회오리 바람은 주로 재림을 나타내는 문구입니다. 욥기는 실제로 대환란 때에 마귀에게 시험받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예표합니다. 대환란의 기간이 42개월이듯이 욥기는 42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38:1-3을 보십시오. [그때에 [주]께서 회오리바람 속에서 욥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이 자가 누구냐? 이제 너는 남자답게 허리를 동이고 내가 네게 물을 터이니 대답할지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대답해야 할 때가 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실을 회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첫번째 질문들(욥38,39장)은 창조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쏟아지는 하나님의 질문에 욥은 단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한 자이오니 주께 무엇을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이니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오나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참으로 두 번 /말하였사오나/ 더 이상 말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더라.](욥 40:4,5). 하나님은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마귀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욥 40:6-41:34). 이에 대해 욥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때에 욥이 [주]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사오며 어떤 생각도 주께 알리지 아니할 수 없음을 내가 아오니 지식도 없이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그런즉 내가 깨닫지도 못한 것을 말하였으며 내게는 너무 놀라운 일들 곧 내가 알지 못한 일들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주께 간청하오니 들으소서. 내가 말하겠나이다.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내게 밝히 알리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더라.](욥 42:1-6). 주님은 주권자란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주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사오며](욥42:1) 주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생생하게 인식하고,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것은 욥의 고통이 가져다 준 가장 큰 축복입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란 사실을 절감하였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더라.]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된 모습, 실체를 발견하고 자신에 대해 몸서리칠 깊은 혐오감을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의 빛, 말씀의 조명이 없다면 사람은 누구도 자신의 죄인됨, 자신의 본 모습을 정확히 바라 볼 수 없습니다.

욥은 다섯 가지의 불같은 시험을 당하고 친구들과 고통스런 논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열 가지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보시는 것처럼 그 자신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보고,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고난이 주는 가장 큰 유익입니다. 욥은 비판적인 세 친구가 보는 앞에서 그의 정당함을 하나님으로부터 입증 받았습니다. 욥은 세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는 기쁨을 발견했습니다. 욥은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욥은 형제와 자매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욥은 이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받았습니다. 욥은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다시 돌려 받았습니다. 주님을 저주하라던 부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욥은 4대손을 보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욥은 140년의 수명을 더 향유했습니다. 이는 보통 사람이 누리는 수명의 두 배이상입니다(시 90:10 참조). 욥이 받은 고통의 세월은 채 한달이 못되었지만 그로 인해 그가 누린 행복의 시간은 140년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욥을 인내의 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흔히 욥이 얼마동안 피부병을 앓고 있었을까? 궁금해하며 일년, 이년, 삼년이란 추측을 해 봅니다. 그러나 실상 욥이 몸에 종기를 앓고 있었던 시기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한 달이 넘지 않습니다. 4-37장의 대화는 몇 주야의 토론이 아니라 하룻 동안에 있었던 공방입니다. 욥의 인내는 첫째, 극심한 시험의 순간에 하나님을 저주하라는 시험을 잘 참고, 이겨내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버리고 싶을 때, 시험이 닥쳐 올 때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인내의 결실은 상상을 초월하는 복이 뒤따릅니다. 둘째, 욥은 친구들에게는 전혀 인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집요한 친구들의 공격에 한치의 밀림도 없이 방어하였으며, 역으로 그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은 쓰디쓴 인고요, 인내였습니다. 셋째, 욥의 인내는 하나님을 찾고, 기다리는 인내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리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욥이 고통을 받게 된 몇 가지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탄을 침묵케 하기 위하여(욥 1:9-11/2:4, 5). 둘째, 욥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하여(욥 42:5) 셋째, 욥으로 하여금 자신을 보게 하기 위하여(욥 40:4/42:6) 넷째, 욥의 친구들로 하여금 남을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욥 42:7) 다섯째, 욥으로 하여금 그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심한 욕을 하기보다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기 위하여(욥 42:10). 여섯째, 하나님께 속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결국 행복으로 끝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욥 42:10)입니다.

욥기에 나오는 신약 성경에 인용된 유명한 구절들을 몇 가지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1) [지혜로운 자들로 하여금 자기 간계에 빠지게 하시고 거역하는 자들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욥 5:13). 고린도전서 3장 19절에 바울이 인용했습니다.

2) [보라, 하나님께서 바로잡아 주시는 자는 행복한 자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욥 5:17). 히브리서 12장 5, 6절에서 인용되었다.

3) [우리 사이에는 우리 둘 위에 손을 얹을 중재인도 없기 때문이로다.](욥 9:33). 판결자라는 말은 중보자를 말한다. 물론 신약성경에서 이 말은 중보자를 말한다. 물론 신약성경에서 이 말은 중보자로 바뀌었다(딤전2:5)

4).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꽃과 같이 자라나서 꺾이고 또한 그림자처럼 사라지며 계속해서 머물지 아니하거늘](욥 14:1,2).

5)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모욕을 하며 내 뺨을 때리고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경건치 아니한 자에게 넘겨주시고 사악한 자의 손에 던지셨구나.](욥 16:10, 11). 이 모든 말들은 시편 22편 13절과 35편 21절에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고통을 일컫는 말로 반복되고 있다.

6) [또한, 보라, 이제 내 증인은 하늘에 계시고 내 증거는 높은 데 있도다.](욥 16:19).

7)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분께서 아시나니 그분께서 나를 단련하신 뒤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8) [그분께서는 북쪽을 빈 곳에 펴시며 땅을 허공에 매다시고](욥 26:7).

9) [오 어디에서 그분을 만날지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할진대 그분의 자리에라도 나아가리라.](욥 23:3). 이 문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해결되었다. 요한복음 1장 18, 45절을 참조하라.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아뢰고자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기를 원하노라.](욥13:3)

10) [그런즉 사람이 하나님과 견주어 의롭다 할 수 있겠느냐? 또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가 어찌 깨끗할 수 있겠느냐?](욥 25:4). 이 문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해결되었다. 로마서 4장 24,25절과 5장 1절을 참조하라.

11)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리이까? 나를 위하여 정하신 시간의 모든 날을 내가 기다리되 변화가 내게 이를 때까지 기다리겠나이다.] 이 문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해결되었다.(욥 14:14).

12) [이는 내가 알기에 내 구속자(救贖者)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이니 마지막 날에 그분께서 땅 위에 서시리라. 내 살갗의 벌레들이 이 몸을 멸한 뒤에도 내가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5, 26). 욥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

1) 내가 비천하게 되는 것도 알고 풍부하게 되는 것도 알아 어디에서나 모든 일에서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 당하는 것을 다 배웠노라.(빌4:12)

2)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할 때에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요8:44).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구원과 힘과 우리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그리스도의 권능이 임하였으니 이는 우리 형제들을 고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밤낮으로 고소하던 자가 내쫓기었음이라.](계12:10).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Archived(완료) > 구약 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2)  (0) 2005.06.25
시편(1)  (0) 2005.06.24
에스더  (0) 2005.06.22
느헤미야  (0) 2005.06.21
에스라  (0) 2005.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