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19:10-27
요절: 출애굽기 19:10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가 말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9). 그들은
복음서에 나오는 군중들처럼 천둥 소리처럼 들은 것이
아니라 깨끗한 하나님의 음성을 그대로 알아들었습니다.
사울을 수행하던 사람들 역시 하늘에서 나는 소리는
들었지만 사울에게 말하는 그 음성은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내산에 온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모두 알아듣게
말씀하셨습니다. 변화산에서 제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 들었습니다. 우리는 휴거의 순간에 마지막 나팔 소리,
천사들의 호령 소리를 듣게 될 것이며,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 듣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주님은 셋째 날에 시내
산 위로 내려 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삼일 동안 백성들이
할 일, 주의 사항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거룩히 구별하라.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라. 또
그들로 하여금 옷을 빨게 하고](10). 거룩히 구별하라(Sanctify)란
말은 출애굽기 13:21에 처음 쓰이고 오늘이 두 번째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용도를 위해 따로
구분하라는 뜻입니다. 거룩이란 특별한 목적과 용도를 위해
따로 떼어놓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았던 우리
조상들은 집집마다 조상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들은 제사
용품(제사 그릇이나 향로 등)을 따로 구분해서 보관했습니다.
제기를 아이들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사용하는 예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히 구별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구별해야 합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의 용도를 다른데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용도에 맞게 사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삼일 뒤 자신들이 도착한
시내 산 정상에 주님이 임재한다는 사실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남은 이틀 동안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집에 사흘 뒤에 사장님이 오신다,
대통령이 오신다는 통보를 받았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어떤 성도는 목사님이 심방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집안 대청소를 하고, 커튼을 갈고, 실내 장식까지 새로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삼일 뒤 ****에서 좀 만나자”고 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모스 4:12에, [그러므로, 오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이와 같이 행하리라. 오 이스라엘아,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할 것인즉 너는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할지니라.](암4:12)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처음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을 때, 그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마찬가지로 곧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란 소식에 오늘날 성도들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친히 이틀 동안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를 맞이해야 할 백성들은 무대를 꾸미고, 양과 소를 잡고,
분주하게 행사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먼저
자신들이 거룩히 구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중히
여기시는 것은 언제나 사람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드렸을 때 그들의 제물이 무엇인가 보다 먼저
가인과 아벨을 보셨습니다. 아벨을 받으신 후에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의
행위나 업적이나 외모를 보시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구별되었는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는가? 이것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이것이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7절에,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거룩히 구별되는
것이라. /그런즉/ 너희는 음행을 멀리하고 저마다 거룩히
구별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그릇을 소유할 줄 알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과 같이 욕정으로 하지 말고 아무도
어떤 일에서든지 도(度)를 넘어 자기 형제를 속여 빼앗지
말라. 그 까닭은 또한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경고하고
증언한 것같이 {주}께서 이런 모든 자들에게 복수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라.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정함에
이르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요, 거룩함에 이르도록
부르셨음이니](살전4:3-7).
오늘날 교회를 강타하는
강력한 마귀의 불화살은 음행, 음란 문화입니다. 인터넷,
신문, T.V, 영화, 잡지 등을 통해 무제한적으로 음란 저질
문화가 안방에까지 침투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몸과 혼과
영은 급격히 더러워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1:16),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주] 너희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이니라.](레19:2).
이제 잠시 후면 주님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과 내일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라.](1). 여러분은 바로 오늘, 지금 자신을 거룩히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따를지니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할 일을 자신의
옷을 빨라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광야를 여행하면서 먼지와
땀에 젖은 옷을 빨게 하셨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3개월만의
첫 빨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옷은 성도들의 의를
나타냅니다. [또 그녀에게 깨끗하고 희고 고운 아마포 /옷/을
차려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는 이 고운 아마포가
성도들의 의(義)이기 때문이라, 하더니](계19:8).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옷을 빨 수 있습니까? 말씀의 물로
씻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야 합니다. 이
둘은 더러워진 영혼의 장막, 영혼의 옷을 깨끗하게 하는
유일한 세척제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로 옷 입고(롬13:14 갈3:27),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었도다.](엡4:24),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골3:10)란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교리적으로 볼 때 이 옷은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의 속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입은 속 사람의 옷이 몸을 통해 드러나는 행실입니다.
옷은 그 사람의 행동을 제약하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합니다.
양복입고 운동을 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승복을 입고
설교단에 설 수는 없습니다. 학생들은 교복을 입은 채
술집이나 나이트 클럽을 가지는 않습니다. 어디선가 옷을
갈아입고 갑니다. 군복, 경찰복, 각 회사마다 지급하는
유니폼은 옷을 통해 그들의 행동을 제약하고, 필요한 행동을
드러내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멀쩡한
청년도 향토 예비군의 복장만 하면 개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복장을 통해 일시적인 신분의 변화를 이루었고,
행동의 변화를 유발했기 때문입니다. 옷(복장)은 그에 맞는
행동을 요구하고 제약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옷을
벗으라’고 요구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가 더러운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새 사람을 입고서 옛
행실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는 군복을
입은 군인이 민간인 행세하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입은 옷이 무엇인지
잊고 지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셋째
날을 예비하게 하라. 이는 셋째 날에 [주]가 온 백성의
눈앞에서 시내 산 위로 내려올 것임이니](11). 주님은 셋째
날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시내 산 위로 내려 올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초림과 공중 휴거와 같은 은밀한 오심이
아니라 공개적이고, 눈에 보이는 지상 재림입니다. 성경에서
‘셋째 날’은 매우 의미깊은 말입니다. 주님은 셋째 날에
부활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님을 만난 후 셋째 날에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것을 멀리서 보았습니다(창22:4).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의 아들들이 할례를
받은 후 셋째 날 그들이 아파할 때 가서 다 죽여 버렸습니다(창34:25).
레위기의 제사 규례에는 셋째 날에 희생물의 고기를 모두
태우게 했습니다(레7:17-18, 19:6-7). 민수기에는 부정한 자들이
다시 깨끗해지기 위해서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셋째 날에 자기를 정결하게
하지 못하면 일곱째 날은 소용이 없어집니다(민19:12,19).
히스기야는 죽음의 병에서 일어나기 위해 기도했을 때 셋째
날에 일어나 주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왕하20:5). 에스더는
셋째 날에 왕을 만났습니다(에5:1). 호세아 6:2을 보십시오. [이틀
후면 그분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셋째 날에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리니 우리가 그분의 눈앞에서 살리로다.](호6:2).
이스라엘은 셋째 날에 회복됩니다. 우리는 셋째 날이 부활의
날이며, 다시 세움을 받는 날이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날은 곧 주님이 이 땅에 오시는
날입니다. 우리는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다는 주의
말씀대로 이제 셋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압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제 30년 정도
남았습니다. 주님은 “셋째 날을 예비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충분히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습니까?
12-13절을 보십시오. [너는
백성을 위하여 그 사방에 경계를 정해 주고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산에 오르거나 산의 경계에
접근하지 말지니 누구든지 산에 닿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그에게 손을 대지 말고 오직 그런 자는
반드시 돌로 치거나 /화살로/ 관통시켜 /죽일지니/ 짐승이나
사람을 막론하고 살지 못하리라. 나팔을 오랫동안 불거든
그들이 산에 이를지니라, 하라.](12-13). 이곳은 모세에게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3:5)고 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길은 오직 하나 어린
양의 피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시내 산에
함부로 올라 갈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는
결코 가까이 할 수 없는 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과 달리 무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 없습니다. 구약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처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시내 산에 온 출애굽의
백성들은 이집트 땅에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흘린 것
외에는 전혀 속죄의 피를 흘린 적이 없습니다. 죄가
해결되지 않고서 주님을 만나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두려움입니다. [(이는 그들이 주께서 명령하신 것 곧 짐승
하나라도 그 산에 닿기만 하면 돌로 맞거나 화살로 꿰뚫림을
당하리라 하신 것을 견디지 못하였음이라. 그 광경이 이같이
무서웠으므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히12:20-21). 그들은 모두 두려워 떨었고
만약을 대비해서 시내산 주위에 경계를 정해 두고 가까이
가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갔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이 산에서 하나님은
성막의 모형을 보여 주셨는데,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는
지성소 역시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둘째 /성막/에는
대제사장이 홀로 해마다 한 번씩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잘못으로 인하여 /주께/ 드리는 피 없이는 들어가지
아니하였나니](히9:7). 속죄 양을 잡고, 희생제를 드렸지만
그것으로 죄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히10:4). 만약 생각없이 누가 지성소로
들어갔다가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섭고
떨리는 일입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겠다고 결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종교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드리고, 자신의 흘린 피로
단번에 모든 믿는 성도들의 죄를 영원히 제거하심으로
우리는 시내 산의 언저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정상에 올라 갈 수 있습니다. 이 땅의 시내 산이 아니라 저
하늘의 시온 산으로 곧 바로 들어갑니다. [너희가 이른
곳은 만질 수 있는 산도 아니요, 불이 붙는 산도 아니요,
깜깜함과 어둠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씀하시는 음성도
아니라. ...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시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과 무수한 천사들의
무리와](히12:18,19a, 22). 두렵고 떨림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갑니다. 예수의 피로 인해 그곳은
우리에게 심판의 보좌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멀리서 하나님의 임재를 지켜 보아야 했던
이스라엘과 우리는 천양지차입니다. 죽을까봐 근처에도
얼씬하게 하지 못했던 시내 산과 달리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가라는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율법은 아무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되 /주께서/ 더
나은 소망을 가져오심은 /완전하게/ 하였기 때문이니 우리가
이 소망을 힘입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느니라.](히7:9).
우리는 영광의 소망, 복된 소망, 의의 소망되신 예수를
힘입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갑니다. 예수의 피로 인해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정결한 물로 씻겨졌으니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히10:22).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이 크신 은혜를 한번 묵상해 보십시오.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감사와 찬양이 절로 흘러
나오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하나님을 먼발치에서 구경하듯 맴도는 성도들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를 믿는 성도는 결코 출애굽의 성도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의 성도들과
비교를 불허합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은 성도들과 그
모형으로 믿었던 성도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가까이
오시리라. 죄인들아, 너희 손을 정결하게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순결하게 하라.](약4:8). 이제 우리는
좀 더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가운데 거하기 위해 기도하고,
그분과 더욱 밀착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완전하게 말소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피는 믿는 자들에게 참된 자유와
양심의 담대함을 주며, 거리낌없이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해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복음과 세상의
경계인으로 살지 말고, 주변을 맴돌지 말고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주님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백성에게 이르러 백성을 거룩히 구별하니
그들이 자기 옷을 빨더라.](14). 백성들은 모세의 말대로
자신들을 거룩히 구별하고 자기 옷을 빨았습니다. 영광의
주를 보는 일은 얼마나 복된 일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거룩히 구별됩니까? 진리로 구별됩니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세상과 교회를 구분하는 것은 교회
건물이나 십자가나 종탑이 아닙니다.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거룩히 구별하는 것은 바로 진리,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른 것으로 구별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거룩히 구별됩니다.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함이요,
또 그들로 하여금 죄들의 용서를 받고 내 안에 있는
믿음으로 거룩히 구별된 사람들 가운데서 상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더이다.](행26:18). 우리는 무엇으로
구별됩니까? 믿음으로 거룩히 구별됩니다. 사람들은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똑같다. 형식적인 차이는 있지만
종국에는 별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기독교와의 확연히 구분되는 한 가지는
바로 믿음입니다. 성령으로 거룩히 구별됩니다. [이것은
곧 나로 하여금 이방인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하게 하사 이방인들을 바치는
일이 성령님을 통해 거룩히 구별되어 /주께서/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15:16). 세상의 종교 활동과
교회의 사역은 성령님을 통해 구별됩니다. 같은 선행, 같은
구제, 같은 봉사라도 세상과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 확연히
구별됩니다.
오늘날 참으로 통탄할
일은 세상과 교회, 세상 사람들과 성도들간에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멸망 직전의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구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스스로 구별되는 경계를 없애 버렸습니다.
오늘날 성도들 역시 스스로 세상 사람들과의 구별되는
경계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교인들은 성경을 품에
안고 다녔습니다. 누가 봐도 구분이 갔습니다. 식사를 할
때면 진지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눈에 확 띄었습니다.
언어나 행실에서도 뭔가 표시가 났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변질된 세대들은 성경은 숨겨서 다니거나 맨 손으로 옵니다.
식사 기도는 얼마나 빨리 짧게 하는지 맞은 편에 앉은
사람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입니다. 말투는 어떻습니까?
유행어, 비속어, 욕설, 험담 등을 남발하여 세상 사람들과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성령으로,
진리로 자신을 구별한다면 언어와 행실은 절로 구별될
것입니다.
15절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셋째 날을 예비하고 너희 아내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 하니라.](15). 모세는 백성들에게 이틀 동안
부부 관계를 갖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구절은 오늘날 이단
종파들에서 부부 관계를 금하는 금욕주의 교리로 자주
악용되는 구절입니다. 특히 통일교에서는 결혼한 부부를 몇
개월씩 떨어 뜨려 놓고 금욕을 강요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서로를 속여 권리를 빼앗지 말라. 다만
너희가 금식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동의를 구해 얼마
동안은 그리하되 다시 서로 합하라. 이것은 너희가 참지
못하므로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7:5).
모세는 이틀동안 백성들이 금식과 기도에 전념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 가운데 남자의 몸에서 나온
씨에 관한 규례가 있습니다. 레위기 15:16-18, [어떤
남자에게서든지 교접(交顚)의 씨가 나가면 그는 온 몸을
물로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교접의 씨가 묻은
옷이나 가죽은 물에 빨 것이며 그것이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또 남자와 함께 눕는 여자에게 교접의 씨가 묻거든 그 두
사람이 다 물로 목욕할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레15:16-18).
모세는 이런 이유로 이틀 동안 부부 관계를 갖지 못하게
했던 것이지, 부부간의 성생활(性生活) 자체를 부정하거나
죄악시 한 것이 아닙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셋째
날 아침에 천둥과 번개와 짙은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영에 있는 온 백성이 다 떨더라.](16).
주님은 말씀하신대로 셋째 날 아침에 시내 산에 오셨습니다.
이 모습은 주님의 지상 재림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천둥,
번개, 짙은 구름, 나팔 소리는 다 재림의 문맥에 사용되는
어휘들입니다. 왜 아침에 옵니까? 주님은 의의 태양이시기
때문입니다(말4:1-3). [이는, 보라, 화덕같이 불태우는 날이
임하기 때문이니 참으로 교만한 자와 악하게 행하는 자가 다
지푸라기가 되리라. 그 날이 임하여 그들을 불태우고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그러나
내 이름을 두려워하는 너희에게는 의(義)의 해가 떠올라
자기 날개들에서 병 고치는 능력을 내리니 너희가 나아가서
외양간의 송아지같이 자랄 것이요, 또 너희가 사악한 자들을
밟으리니 이는 내가 이 일을 행하는 날에 그들이 너희
발바닥 밑에서 재가 될 것임이니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말4:1-3).
셋째 날은 죄인들에게는 불타는 심판의 날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의의 태양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이 날을
일컬어 성경은 ‘주의 날’이라고 말합니다. 해는 아침에
솟아 오릅니다(시19:4-5). 우리는 낮의 자녀로서(살전5:1-6),
주님이 언제 오실지 그 날과 그 시각은 알 수 없어도 때와
계절은 알 수 있습니다(솔2:11-12). 주님은 아침에 오십니다.
이제 밤은 깊었고 새벽입니다. 역사상 어느 때보다 재림의
아침은 가까이 왔습니다. 캄캄한 밤이 오랫동안 지속되어도
날이 밝기 시작하는 것은 어느 한 순간입니다. 우리는 이제
깨어 있어야 합니다.
17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만나려고 백성을 데리고 진영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기슭에 섰더라.](17). 드디어 역사적인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 백성들은 모세를 따라 산기슭에 섰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이 순간이야 말로 가장 극적이고 놀라운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구를 만나기 위해 서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인생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친구를 만나고, 배우자를 만나고, 스승을 만납니다. 그리운
만남, 소중한 만남, 의미있는 만남이 있지만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꼭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어떤 만남은 상처만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만남은 영원한 복과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18-19절입니다. [시내
산이 온통 연기로 자욱하니 이는 [주]께서 불 가운데서 그
위로 내려오셨음이더라. 그 연기가 화로의 연기같이 위로
올라가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오랫동안 나며
점점 더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께서 그에게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18-19). 하나님의 이런 임재의
모습은 초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 모습은 재림 때의 모습과 같습니다. 역사적
사건은 예언적 사건을 내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에 대한 인상은 ‘무섭고도 떨리는 두려운 하나님’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동원된 주님의 임재와 관련된 어휘는 모두
심판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연기, 불, 화로, 진동(지진), 나팔
소리는 심판의 도구들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사건을 [그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들도 하나님의 눈앞에서 떨어졌으며
심지어 시내/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눈앞에서
요동하였나이다.](시68:8)라고 기술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섭고 떨리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더욱 중보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모세를 불러 다시
한번 주의와 경고 사항을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시내
산 곧 그 산꼭대기에 내려오시고 산꼭대기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에게 명하라. 그들이 자세히 보려고 돌파하여
[주]께로 오다가 그 중에 많은 사람이 죽을까 염려하노라. 또
[주]께 가까이 오는 제사장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거룩히
구별하게 하라. [주]가 그들을 향해 돌격할까 염려하노라,
하시니 모세가 [주]께 아뢰되, 주께서 우리에게 명하여
말씀하시기를, 산 주변에 경계를 정하고 산을 거룩히
구별하라, 하셨사온즉 백성이 시내 산에 오르지 못하리이다,
하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으로 하여금 돌파하여 [주]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향해 돌격할까
염려하노라, 하시니라. 이에 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서
그들에게 말하니라.](20-25). 백성들 가운데 이 광경을
자세히 보기 위해 산으로 올라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해
놓은 경계를 넘어설 때는 죽습니다. 제사장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를 거룩히 구별하지 않을 때는
주님이 그들을 향해 돌격하십니다. 그래서 산 주변에 경계를
정하고 시내산을 거룩히 구별했고, 백성들은 산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내려와서 다시 아론과 함께 올라갔는데,
아론은 최초의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아론은 모세와 함께
십계명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광야 교회는 하나님을
멀리서 직접 보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죄 사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뿐만 아니라 함께 거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을 향해 돌격하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우리가 받을 형벌, 우리가 받을 저주, 우리가 받은 모든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다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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